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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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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일조와 헌금 시리즈(2) 교회 헌금의 문제점(A)

 교회는 영적인 장소입니다. 교회는 구속 받은 성도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인간의 영혼과 관련된 영적인 문제들을 다루며 복음의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곳입니다. 교회에 대한 우리들의 인상이 이런 것이라면 교회와 돈은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돈이 물질적인 영역에 속한다고 볼 때 교회가 돈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본연의 자세가 아닌 듯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가급적 돈에 대해서 회피적이어야 하고 성도들도 되도록 돈 이야기는 교회에 와서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이 다루는 재물에 관한 교훈은 가르쳐야 합니다. 문제는 너무도 잘못 가르쳤기 때문에 불협화음과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돈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교회’하면 ‘복음’이라는 개념이 떠오르기보다는 오히려 ‘돈’이라는 개념이 먼저 나타나지 않습니까? 교회에 가면 복음을 듣는다는 기대감보다는 헌금을 해야 한다는 쪽으로 부담감이 앞서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가 돈과 결착되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비근한 일례로서 교회 헌금의 가짓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구약 시대의 제사 종류보다 더 많습니다.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런 질문을 던져 보면 어떨는지요?

 우리나라 교회가 처음 시작된 이래로 교회 내에서 가장 많이 발전시킨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또 가장 성공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신학도 아니고, 설교도 아니고, 성도의 교제도 아닙니다. 그것은 헌금 종류와 교회의 수익입니다.

 교회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확실한 기업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망하는 확률보다 성공하는 사례가 훨씬 더 높다고 합니다. 교회에는 세금도 내지 않는 순수익이  현찰로 들어옵니다. 교회는 매우 탄탄한 기업이며 급성장을 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들을 갖춘 곳입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물론 기업체가 아닙니다. 이런 표현은 모두 세상 사람들이 쓰는 말들입니다.

 우리나라 교회가 어떻게 재력을 확보했든지 간에 돈이 많은 곳으로 알려진 것은 이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듯합니다. 물론 아직도 농촌 교회나 미자립교회들이 많아서 항상 쪼들리며 운영난을 겪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헌금자들의 측면에서 보면 큰 교회에 다니든지 작은 교회에 다니든지 상당량의 헌금을 교회에 바칩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교회가 지닌 자산과 각종 헌금 수익은 막대한 분량입니다. 자체 건물이나 부대 시설을 가진 교회들의 자산과 일 년 예산을 합친다면 엄청난 수치가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나라 교회의 금력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재력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럼 이런 사실이 무슨 문제가 되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물질적인 복을 받아 번성하는 것이라고 보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다음의 경우라면 문제가 됩니다.

  1. 헌금에 대한 가르침이 잘못되었을 때
  2. 헌금 독려 방법이 나쁠 때
  3. 헌금자가 그릇된 생각으로 헌금할 때
  4. 헌금이 잘못 사용될 때

 ◐ 헌금에 대한 가르침이 잘 못 되었을 때

 헌금에 대한 가르침은 대체로 판에 박힌 말들입니다. 한마디로 많이 내라는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니까 인색하게 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헌금을 더욱 강조할 때에는 빚을 내어서라도 헌금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라고 촉구합니다. 이런 실례들은 성도들의 귀에 익은 말들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이야기도 전혀 생소한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건축 헌금을 시작하였습니다. 직분을 맡은 자들은 얼마 이상 내야 한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나머지 교인들에게는 작정을 시키고 자기가 낼 수 있는 금액을 적어서 내게 하였습니다. 그 후 목사님은 헌금 명단을 손에 쥐고서 일일이 교인들에게 독촉 전화를 하였습니다. 한 성도에게 왜 빨리 건축 헌금을 내지 않느냐고 채근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성도는 현재 적금을 드는 중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건축 헌금을 먼저 내고 나서 나중에 적금을 붓는 돈으로 은행 빚을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목사님이 강단에서 큰 소리로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신 하나님은 변변한 집도 없이 사시는데 성도들은 편안한 집에서 살고 있다고 지적하면 집 가진 자들은 집을 잡혀서 건축 헌금을 내야 했습니다.

 건축 헌금 목표액이 달성되자 제직 임명이 있었습니다. 그때 새로운 장로들의 임명도 있었는데 여기에는 주로 고소득층의 성도들이 포함되었고, 초창기부터 적은 수입으로 가난하게 살면서 교회를 신실히 섬겼던 어떤 성도는 추천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장로로 임명된 자들은 건축 헌금을 많이 한 분들이었습니다. 장로 후보 명단에서 빠진 성도의 아내는 너무도 섭섭하다면서 눈물을 흘리며 저에게 전화로 하소연하였습니다.

 교회 건축을 둘러싼 이와 유사한 이야기들은 너무도 많아서 언급해도 별 의미가 없을 정도입니다. 한 뉴스에 의하면 교회 헌금을 위해 자신의 신장 하나를 떼에서 판 대금을 건축 헌금으로 내놓았다고 해서 온 성도들을 모아 놓고 모두 본받아야 할 헌신이라면서 간증을 시킨 교회도 있었다니까 다른 실례들을 열거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헌금을 하는 것은 성도의 특권이며 기쁨입니다. 그러나 헌금에 대한 가르침이 ‘내면 복 받는다’는 식이라면 문제입니다. 그리고 주께 대한 믿음의 정도나 봉사의 분량을 헌금 한 가지에 주로 유착시킨다면 크게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돈은 얼마든지 악한 꾀로 벌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이 어떻게 벌어들여야 하는 돈인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가르침도 없이 무조건 많이 가져오면 좋아하고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생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말라기에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경고하셨습니다(말1:14).

 ◐ 현금독려 방법이 나쁠 때

 교회에 헌금이 필요하다는 것은 교인들이라면 모두 인정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무리한 예산을 짜 놓고 살림을 늘리고 프로그램을 확대하면 성도들에게 커다란 부담이 됩니다. 더구나 교회 사업 계획들은 명분이야 어찌 됐건 목회자의 야망인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대체로 교회의 예산 목표액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보다는 무거운 마음으로 순종할 수밖에 없다고 체념합니다.

 그런데 헌금 목표액은 믿음의 여부에 대한 도전과 함께 독려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헌금 목표액이 현실적으로 무리하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목표액을 하나님이 채워 주실 것으로 믿느냐 않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어떤 동기와 목적과 절차로 세웠건 일단 목표액으로 내건 액수는 하나님이 하락하셨다고 보는 듯합니다. 그다음 단계는 목표액을 채우는 것인데 이것은 믿음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세워 주신 목표를 채우는 노력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세운  예산이나 사업 계획이라면 성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해야 합니다. 그렇다 할 지라도 헌금 독려 방법이 그릇된 경우라면 예산 목표액이 달성되었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목표액의 달성보다도 목표의 진행 과정을 더욱 눈여겨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의의 열매입니다(빌 1:11). 의의 열매는 동기와 방법과 목적에 두루 부합되는 성취라야 합니다(빌 1:9,10). 건전한 내용과 방법이 결여된 목표 자체의 달성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릇된 방법으로 성취한 ‘하나님의 뜻’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이제 몇 가지 그릇된 헌금 독려 방법을 예시해 봅니다. 다음은 얼마 전에 어떤 목사님과 필자 사이에 주고받은 대화입니다.

 “목사님, 성전 건축하셨습니까?”

 “아니오. 성도들의 형편이 아직 그럴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빨리 하셔야지요. 짜면 다 나와요!”

 “짜내기” 중의 하나가 간증 수법입니다. 대체로 가난한 사람이 큰 액수의 헌금을 한 경우를 내세웁니다. 그런 헌금자들은 거의 다 정말 어려운 형편에서 한푼 두푼 허리를 졸라매면서 모은 피땀에 젖은 돈을 헌납한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간증을 들으면 큰 감동을 받습니다. 이런 간증을 교회에서 듣게 하는 것 자체가 결코 나쁜 것은 아닙니다. 바울 사도도 고린도 교회가 일 년 전부터 예루살렘에 보낼 구제 헌금을 준비해 왔다고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자랑하였습니다. 그 결과 마게도냐에 있는 많은 교인이 감동을 받았습니다(고후 9:2). 그럼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선 헌금 액수입니다. 간증용으로 사용되는 가난한 자의 헌금은 언제나 큰 액수입니다. 과부의 두 렙돈이기보다는 과부의 거액이 칭찬을 받습니다. 결국 가난한 과부의 거액 헌금에 비추어 다른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헌금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액수 위주의 간증은 헌금자의 자발적인 헌금액 결정에 인위적이고 심리적인 압력의 요소가 됩니다.

 또한 선의의 헌금을 한 가난한 성도가 많은 액수의 헌금을 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 선행이 온 교회에 공적으로 발표됨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은밀하게 행해진 오른손의 선행이 왼손에  알려지게 됩니다(마 6:3). 그것도 타의에 의해서 자신이 나팔을 부는 격이므로 선의의 피해자가 되고 교회 전체가 위선에 빠집니다(마 6:2). 심지어 큰 액수를 무명으로 한 헌금자의 이름을 어떻게 해서든 알아내어 간증자로 강단에 세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의 헌금 준비를 언급했을 때 어느 개인의 거액 헌금을 예로 들어 자랑하거나 직접 본인을 세워 간증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성전 연보궤 앞에서 어느 빈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을 때 그 과부의 거액을 언급하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한 고드란트 밖에 낼 수 없었던 그녀의 참다운 헌신을 지적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그 과부가 얼마나 어렵게 살면서 희생적으로 큰 헌금을 했는지를 제자들 앞에서 간증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막 12:41-44). 그렇다면 액수 위주의 간증을 시키는 것은 예수님도 바울도 하지 않은  비성경적인 헌금 독려 방법입니다.

 또 하나의 실례를 들어 봅시다.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교회당 건물을 비롯하여 선교 회관, 교육관, 기도원 등의 각종 건축이 많습니다. 그런데 빠른 기일 내에 건축 헌금을 채우려면 건축물의 일부를 할당시키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강대상이 가장 잘나가는 인기 종목입니다. 강대상과 함께 잘 팔리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이것도 지원자가 많습니다. 이런 식으로 할당이 되면 건축이 빠르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이상 헌금한 신자들에게는 건축물에 헌금자의 명단을 명판으로 박아 붙여 준다고 하면 지원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한다고 합니다. 장안의 어느 대형 교회에서는 일정 액수 이상의 헌금을 하는 자들의 명단을 마이크로 칩에 넣어 교회당 주춧돌 아래 영구 보존시키겠다고 광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유치한 공로 심리를 이용한 수법입니다. 하기야 우리나라에서만 그런 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캘리포니아의 수정교회에 가면 큰 헌금자들의 이름을 보도 위에 새겨놓았습니다. 그중에 어떤 한국 장성의 이름도 새겨져 있었던 것으 로 기억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의식이 깬 분들은 금방 식상하고 피가 뜨거운 분들은 크게 흥분합니다. 반면, 교회 비판은 무조건 덕이 못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식상하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언짢아합니다. 하지만 교회 일에 관한 한, 우리는 개인의 감정이나 주관이 아닌,  성경 말씀의 가르침에 비추어 웃고 울어야 합니다. 그럼 이러한 헌금 갹출 방법에 대해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한마디로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것들은 돈으로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마술사 시몬의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마리아에서 시몬은 빌립에게 세례까지 받았습니다(행 8:12,13). 그런데 그는 열심이 뜨거운 사람이었습니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행 8:13).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나중에 사마리아에 도착하였을 때 마술사 시몬의 정체가 폭로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마술사 시몬을 향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행 8:23). 세례까지 받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드러나는 큰 능력과 표적들을 보며 감격해 한 시몬에게 왜 이런 선언을 했을까요? 그 까닭은 마술사 시몬이 신령한 것을 돈으로 사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행 8:18-21).

 교회 건축물 자체가 신령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강대상이나 십자가가 유독 신성하다거나 더 의미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물론 문제이긴 합니다. 그러나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의 잘못된 가치관을 이용하여 서로 경쟁을 시키고 건축 사업의 분위기를 인위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강대상이나 십자가가 더 인기가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강대상이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곳이며,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대속을 기억하게 하는 시각물이라는 점에서 더 귀한 품목들이라면 오히려 그 의미에 맞게 장만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강대상과 십자가는 진리와 자기 부정을 대변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품목들이 사치품이나 경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자랑이나 위안으로 삼게 하는 것은 육에 속한 공명심의 자극이며 신령한 사역의 상업화입니다.

 헌금을 회유하는 또 다른 방법은 기도입니다. 소위 신령하다는 사람이 치병을 위한 안수 기도를 해준다거나 잘되도록 복을 빌어 준다면서 헌금을 얼마만큼 하라고 직접 간접으로 권유하는 때도 많습니다. 기도는 영적입니다. 기도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기도의 대가로 헌금을 기대하거나 요구한다면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다른 사람의 기도를 받으려고 찾아가는 자들은 어렵고 힘든 처지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일은 선한 사역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연약성을 노리고 헌금을 요구하는 것은 악한 사역입니다. 신령한 일을 놓고 “더러운 이익”(벧전 5:2)을  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술사 시몬에 대해서 성경이 지적한 말씀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행 8:20-22).

 교회의 자금 조달책의 하나로 자주 이용되는 것 중에서 장로나 집사의 직책 수여나 부흥회(수양회)가 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제직 임명이나 수양회가 본래의 순수한 필요성에서 행해지기보다는 그 같은 행사의 결과로 얻어지는 헌금 수확에 초점이 더 잡힌 경우라면 제사보다 잿밥에 관심이 쏠린 격입니다. 요즘(2020년) 신종코로나 감염병으로 대면 집회를 자제해 달라는 방역 당국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어떤 기도원에서는 수백 명을 모아놓고 집회를 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감염 위험을 상기시키며 모임의 부당성을 언급하자 기도원 대표가 하늘 말이 ‘앞으로 사람들이 더 많이 와서 지금이 큰돈 버는 때인데 그만둘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내부 고발자가 언론에 노출해서 알게 된 사건입니다.  

 헌금을 우려 내는 또 하나의 수법 중에 ‘자릿값’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일부 교회에서 성도들이 앉은 자리에 값을 매겨 놓고 가족 수에 따라 헌금을 내게 합니다. 적어도 자기가 앉는 자리 값은 내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만약 건축 헌금의 예산 속에 자리 비용이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자리 헌금을 별도로 하는 것이라면 말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더라도 자릿값을 못 내는 사람은 어디에 앉아야 합니까? 땅바닥에 앉아야 할까요? 아니면 아예 입장이 거부되어야 할까요? 만일 자릿값을 낸 성도가 교회를 옮기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 자리 하나를 떼어서 나가야 할까요? 건축 헌금을 하고 또 자릿값까지 내면 이중으로 내는 셈입니다 세속 국가도 이중과세는 하지 않습니다.

 한때 유럽이 계급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을 때 ‘자릿값’ 이라는 것이 교회의 관습처럼 시행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오래된 교회에 가 보면 강대상과 가까운 앞자리나 아늑한 공간에 대토지가나 귀족들이 앉았던 특수석들이 눈에 뜨입니다. 스코틀랜드의 경우에는 자릿값에 해당하는 헌금을 못하는 가난한 성도들은 위층 발코니에 앉게 했습니다. 그러나 좌석이 없는 공간이었으므로 주일마다 자기 의자를 집에서 가져와야 하는 불편을 겪으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가 ‘있는 자’와 ‘없는 자’를 이런 식으로 구별한 것은 현실적인 불가피성이 아니고 유산 계급과 무산 계급의 사회적 가치관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교회는 유산 계급이 지배하고 운영하는 부르주아의 한 기관이었기에 평등과 나눔의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되는 사상입니다. 야고보가 무엇이라고 말하였습니까?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약 2:2-4).

 이 말씀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는 뜻으로 주신 것입니다(약 2:1). 야고보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9).

 교회 ‘자릿값’ 제도는 중세기적인 폐습입니다. 그것은 자릿값을 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교회당 자리에 앉을 때마다 불필요한 죄의식이나 불편한 마음을 심어 줍니다. 그리고 자릿값을 낸 자들에게는 자신이 교회에 앉은 것을 무슨 권리나 되는 듯이 당연시할 것입니다. 또한 자릿값을  낸 자와 내지 못한 자가 같은 자리에 앉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비록 선량한 교인들의 경우에 그렇게까지 생각지 않을지 몰라도 ‘자릿값’까지 매겨서 지어야 할 교회당이라면 차라리 모두 맨땅에 앉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아마 지금은 이런 방식을 사용하는 교회들은 많지 않을 줄 압니다. 아무튼, 교회는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구별을 드러나게 하는 행위를 삼가야 하며 상업주의적인 경영방식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교회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행 2:44)하는 곳이며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살전 5:14)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엡 6:9)을 섬기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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