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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을 때 때때로 잘 이해할 수 없는 매우 궁금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쉬운 말씀도 많지만 더러 어려운 말씀들도 있습니다. 복음서를 읽으면, 특히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고 하는 경우가 나옵니다.

 

☞ 축귀 후에 귀신들에게 함구령을 내렸습니다(막 1:34)

☞ 더러운 귀신들이 예수님을 보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막 3:11)라고 부르짖어도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셨습니다.

☞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딸을 치유하신 다음에도 그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거듭 경계하셨습니다(막 5:42-43).

☞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을 고치신 후에도 사람들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히 명하셨습니다(막 7:36).

☞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후에도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명하셨습니다(막 8:29-30).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과 신분이 널리 알려질수록 더 좋은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숨겨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 방법으로 이 문제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자신을 메시아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언급한 대목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나중에 복음서의 저자가 집어넣은 것이라고 하면 됩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자신의 신분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라고 내세운 적이 없었을까요?

 

이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기점으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생전에도 메시아였을 텐데 본인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는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숨기려고 했다는 대목들을 만들어 넣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그의 생전에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제시한 장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 이후에 갖게 된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메시아 신앙과 예수님의 생애에서 드러난 역사적 사실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차이를 완화하기 위해서 신분 숨김 장치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즉, 살아 계셨을 때도 메시아였지만 비밀로 부쳤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메시아로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독일 신학자 브레데가 ‘메시아의 비밀’(messianic secret)이라는 책에서 주장하여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마가가 자신이 고안한 아이디어를 마가복음에 집어넣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역사적 사실을 구별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이 이론의 허점은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브레데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브레데의 ‘메시아의 비밀’(messianic secret) 주장이 1901년에 나왔는데 그 이후로 예수님의 함구령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완전히 끝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브레데의 이론을 그대로 수용하는 학자는 지금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 함구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신 후에 어떤 경우는 함구령을 내리셨고 또 어떤 경우는 함구령과 반대되는 지시를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무런 금지 사항을 언급하시지 않은 때도 있었습니다. 자연 기적의 경우에도 함구령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조건부 함구령을 내리신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각 케이스의 상황과 문맥을 고려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함구령과 반대되는 지시]

☞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무덤 사이에 거처하던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친 후에 예수님은 그에게 입을 다물라고 하시지 않고 오히려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막 5:19).

 

[함구령도 없고 별다른 지시도 없는 경우]

☞ 베드로의 장모를 열병에서 치유하셨을 때 특별한 지시가 없었습니다(막 1:30-31).

☞ 지붕을 뜯고 달아 내렸던 중풍병자의 치유에서도 함구령을 내리지 않았습니다(막 2:1-12).  

☞ 회당에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신 때에도(막 3:1-6) 아무 지시가 없었습니다.

☞ 수로보니게 여자의 귀신 들린 딸을 치유하신 경우에서도 함구령을 내리시지 않았습니다(막 7:24-30).

 

[자연 기적의 경우]

☞ 풍랑으로 요동치는 갈릴리  바다를 잠잠케 하셨을 때에도 제자들에게 그들의 믿음 없는 것을 꾸짖으셨을 뿐, 함구령은 내리시지 않았습니다(막 4:35-41).

☞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 때에도 함구령은 내리지 않았습니다(막 6:32-44; 8:1-10). 

☞ 갈릴리 호수 위를 걸어오셨을 때도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을 뿐, 입을 다물라는 명령은 내리시지 않았습니다(막 6:45-52).

 

[조건부 함구령을 내린 경우]

☞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낫게 해 주시고 나서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셨습니다(막 1:42-44). 그러나 단서를 달았습니다. 먼저 제사장에게 가서 다 나았다는 건강검진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 변화 산 사건 때에도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조건을 붙였습니다(막 9: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막 9:9).

 

예수님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대놓고 드러내시기도 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으셨을 때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막 14:61)라는 질문에 “내가 그니라”(막 14:62)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예수님이 노골적으로 자신이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고 하셨습니다(요 4:25-26).

 

그런데 예수님이 함구령을 내린 경우를 보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입을 다물었다 해도 사람들이 자연히 다 알게 되는 일이었습니다(막 6:32-34, 53-56). 사실 예수님이 알리지 말라고 하실수록 더욱 널리 소문이 퍼졌습니다(막 1:45; 7:36). 예수님이 피해 다녔어도 금방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막7:24).

예를 들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렸는데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살아난 아이를 아무도 못 보게 가두어두지 않는 한, 어떻게 이런 일이 감추어지겠습니까? 그럼 효과도 없는 일인데 왜 예수님이 함구령을 내리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구령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에만 만족할 것이 아니고 어떤 핵심적인 의미가 저변에 깔려 있는지를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예수님이 함구령을 내린 것은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해되어 일찍 체포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런 상황도 있었겠지만 모든 함구령을 다 정치적 동기로 일괄해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럼 이제 나병환자에게 내린 함구령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함구령의 신학적 의의]

기적 치유의 함구령은 상황적 이유가 있어도 예수님의 신분 감추기와는 상관이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나병환자의 경우 엄히 경고하셨지만, 전적 함구령이 아니었습니다. 이슈는 예수님이 정치적 선동가나 혁명가로서 폭동을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로마나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그를 체포할 것을 방지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함구령은 예수님의 신분 감추기가 아니고 언제 누구에게 먼저 증언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즉, 제사장에게 가서 모세법에 따라 제물을 바치고 건강검진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문제가 된 것은 이 나병환자가 치유를 받고 너무도 기뻐서 우선순위를 무시하고 마구 자신의 치유를 전파한 것이었습니다(막 1:45).

 

우리는 이 사건에서 불순종이 예수님의 사역에 큰 장애를 가져온다는 교훈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예수님은 동네에 자유롭게 들어가실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45절 후반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순종의 결과는 매우 심각해 보입니다.  예수님의 발목을 붙잡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겹 더 들어가 보면 본 사건이 지적하는 다른 한 중요한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기적은 너무도 강력한 임팩트를 주기 때문에 잠자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막혔던 봇물이 터져 나오듯이 억제할 수 없는 폭발적인 선포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이 일을 많이 전파”했다고 했을 때의 ‘전파’는 ‘선포한다’(헬. keryssein)는 뜻이고 ‘널리 퍼뜨렸다’라는 것은 ‘말씀을’ (헬. logon) 퍼뜨렸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복음 전파의 뉘앙스가 짙습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으로 박해를 두려워하여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다가 예수님의 부활 기적을 알게 된 후에 문을 박차고 나가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외친 것을 연상케 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파열적인 에너지를 방출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동네에 들어갈 수 없어 한적한 곳에 머무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온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자신을 감추려고 해도 그럴수록 사람들에게 더 알려지고 더 많은 사람이 몰려왔습니다.

 

 

나병환자의 함구령이 지닌 교훈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기적은 일반인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을까요? 한 마디로 굉장한 기적사가 나타났다고 놀라워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사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엄청난 기적들을 행하고 어디론가 숨어버리는 사람이 있을까요? 기적으로 인기를 끌면 더 자기를 내세우는 것이 일반 기적사들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자기를 숨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인기를 사용하여 명성을 날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함구령은 그런 세속적 기적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가장 핵심적으로 표현한 구절은 10장 45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이것이 예수님이 나병환자에게 준 함구령의 한 중요한 의도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 과시를 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대 선전하며 사람들을 모아 자기 뜻을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김의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큰일을 행하시면서도 영광이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항상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기적 사역에서 이 같은 자세로 임하셨습니다. 

 

세상은 성공주의로 물들어 있습니다. 성공주의는 결과에 집중합니다. 결과가 좋지 않으면 점수가 나오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 성공했다고 할 때 무엇을 보고 성공했다고 합니까? 결과를 봅니다. 돈을 많이 벌었거나 높은 지위를 차지했거나 어떤 프로젝트의 성과가 좋아서 인정을 받으면 성공했다고 하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교회에도 이런 결과 위주의 성공주의가 만연합니다. 어떤 목사를 보고 목회 성공했다고 말합니까? 교회당이 커야 합니다. 교인수가 많아야 하고 인기가 있어야 합니다. 재정도 넘칠 정도가 되면 목회 성공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이런 성과 중심은 하나님 나라의 평가 기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기 위해 함구령을 내렸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무슨 결과가 왔습니까? 나병환자가 온 사방으로 다니면서 선전부장 노릇을 하여 예수님의 활동 범위가 크게 제한을 받았습니다. 그럼 이런 효과 없는 일을 왜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예수님이 함구령을 아무리 엄하게 내려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이 더 몰려왔습니다. 예수님이 결과에 치중하셨다면 함구령을 포기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결과보다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믿는 것을 결과와 상관없이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측할 수 있는 결과가 뻔해도 그대로 진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신실한 삶은 좋은 결과만 기대하고 살지 않습니다. 결과는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맺는말

 

본문이 주는 교훈은 사람이 만드는 결과가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자에게 복을 내리시고 하나님이 만드시는 결과가 나타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믿고 사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효과가 없고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났을지라도 예수님은 자신을 숨기는 겸비한 자세를 포기하지 않고 사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끌어 내신 결과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이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셨어도 사람들이 더 몰려들어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 치유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결국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진행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앞에 고개를 숙이고 그분이 만들어내실 진정한 성공을 기대하며 겸허한 자세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서 우리는 사람들의 뜻을 피하기 위해 때로는 둘러가야 합니다. 효과도 없고 결과도 나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일에 차질이 생기고 손해도 봅니다. 사람들의 인정도 받지 못하고 세상의 눈으로 보면 실패한 삶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둘러가는 듯한 길이 질러가는 길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공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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