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토픽 모음집

본문시작


본 게시판에 등록되는 신규 게시물의 알림을 받기 원하시는 분은 아래에 이메일 주소를 적고 "이메일 구독신청" 버튼을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히 3:11).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히 3:18).

 

  하나님께서 세상 창조를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안식은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들의 안식으로 마무리됩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계 14:13).

 

  출애굽 했던 첫 세대는 절대다수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11절)고 맹세하셨습니다. 그런데  ‘내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리처드 박스터(Richard Baxter)와 같은 청교도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안식은 곧 천국이라고 봅니다(G. Osborne). 혹은  새 시대의 종말론적 축복(F.F. Bruce, W. Lane)이나 복음의 약속을 확신하는 성도의 삶(Lincoln), 천년왕국(G. H. Lang, Joseph Dillow),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Andrew Murray), 그리스도가 주는 심령의 안식, 새 하늘과 새 땅(P. E. Hughes) 등등입니다.

  하나님의 안식(3:11; 4:10)이 장소인지 상태인지 혹은 현재적인지 미래적인지에 대한 신학자들의 논의는 계속 중입니다. 안식의 정의도 갖가지라서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안식을 히브리서의 주제인 유업의 관점에서 보면 장소나 상태 혹은 현재와 미래의 요소가 다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에서 사용된 안식의 종류

 

  첫째, 가장 잘 알려진 안식의 의미는 첫 구원을 받은 자가 누리는 안식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예수님의 구원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에게 자유를 줍니다. 이 자유는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입니다(요 8:32, 34~36).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면 자력 구원을 위한 무거운 멍에와 죄의 짐을 내려놓고 안식할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가르침과 뜻을 따를 때 오는 안식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9).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계속 배우며 그분의 말씀과 뜻을 따라 살 때 신자는 날마다 심령의 안식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사탄의 영역에서 구출되어 주님의 나라로 영입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면 예수님이 지워주시는 멍에를 메야 합니다. 이것은 속박이 아니고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새 생명의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안식을 익히며 누리기 위한 것입니다. 이 안식은 우리 편에서 근면과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힘써 들어가야 합니다(히 4:10~11; 6:11~12). 히브리서에서 다루는 안식은 주로 이 측면의 안식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재림 때 받는 영원한 안식입니다.

 

  괴로움을 받는 여러분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아주십니다. 이 일은 주 예수께서 자기의 권능 있는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에 싸여 나타나셔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처벌하실 때에 일어날 것입니다. (살후 1:7~8, 새번역)

 

   예수님의 재림은 악인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의 때이지만 신자들은 자신들의 삶에 따라 상과 칭찬을  받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때입니다. 바울은 이 최종 단계에서 주님을 위해서 받은 온갖 손실과 고난이 갚아질 것이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본문이 말하는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사후 천국이나 첫 구원이 아닙니다.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히 3:11)고 맹세하신 말씀은 유업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못 받는다는 뜻이었습니다(창 12:1; 28:13; 신 3:28). 그들이 못 들어가는 것은 첫 구원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출애굽의 구원을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 첫 세대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맹세하신 것은 그들이 받을 수 있었던 약속된 유업의 땅이었습니다(신 8:1).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유업을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유업을 누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안식에 들어가는 것’(entering into rest, 3~4장)과 ‘약속을 상속받는 것’(inheriting the promises, 6장)을 동의어로 사용했습니다. 사실상, 이 사상은 신명기에 나오는 가나안 땅의 분할 배정에 관한 모세의 지침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 같이 너희의 형제에게도 안식을 주시리니 그들도 요단 저쪽에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땅을 받아 기업을 삼기에 이르거든 너희는 각기 내가 준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고 (신 3:20).

 

  ‘땅을 상속받는 것’(inheriting the land)과 ‘안식에 들어가는 것’(entering rest)과 ‘약속을 상속받는 것’(inheriting the promises), 혹은 약속을 받거나 얻는 것(obtaining, receiving the promises)은 내용상 동일한 표현들로서 약속이 자신의 삶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참조. 히 6:12, 15; 9:15; 10:36; 11:13, 17). 반면, ‘약속을 가진 것’은 약속이 남아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4:1, 9). 즉, 하나님의 유업 약속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고 그 약속을 획득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에 꾸준하여 모든 장애를 극복했을 때, 그들은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유업으로 상속받았습니다. 그래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약속된 유업을 ‘하나님의 길’(3:10)을 따라 부지런한 믿음과 인내로 추구하여 상속받는 상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사후 천국이나 첫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천국과 첫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안식은 단순한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 시련을 참으며 순종과 헌신과 사랑의 삶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눈에 의롭게 보이는 것은 주 예수에 대한 한순간의 믿음으로 되지만,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한평생의 꾸준한 믿음과 인내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살전 4:1; 고전 15:58).

 

  ‘안식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유업과 관련해서 다윗이 시편 95:11절에서 사용했는데 히브리서에서 여러 번 인용되었습니다(히 3:11, 18; 4:1, 3, 5,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시 95:11).

  광야 첫 세대는 가나안 진입을 끝까지 반대하다가 마침내 ‘진노의 맹세’를 받고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나 자비의 맹세를 받으면 안식에 들어갑니다.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줄기찬  믿음과 포기하지 않고 오래 참는 결과로 신자가 세상에서 받는 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의 맹세를 성령으로 확신하는 영적 체험입니다. 이 확신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확보했다는 만족과 기쁨을 줍니다.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약속된 안식의 내용을 보면 됩니다. 이것은 곧 자비의 언약들에서 약속된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 언약에서는 큰 이름과 복의 통로가 되는 것과 땅과 자손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다윗 언약에서도 이름이 높여지는 것과 땅의 확보와 하나님의 동행과 보호 및 자손과 영원한 왕국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새 언약에서는 성령의 부음과 하나님을 친밀하게 마음으로 알고 섬기는 믿음 공동체의 형성과 죄의 용서가 포함됩니다. 이 모든 은혜는 우리도 줄기찬 믿음과 인내로  추구하고 영적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즉, 아브라함이 복의 통로가 된 것처럼 우리도 복음 전파와 사랑의 삶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이름이 크게 되었다면 우리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삶을 통해 성도의 이름을 높일 수 있습니다. 다윗을 많은 위험에서 구출하신 하나님의 동행과 능력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다윗처럼 주님을 깊은 헌신과 믿음으로 의지하며 살면 주님의 동행과 도우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새 언약에는 하나님을 아는 새롭고 높은 차원의 영적 복이 약속되었습니다. 날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면 성령의 충만과 용서를 체험하게 됩니다(행 2:38).

  우리는 이러한 맹세의 축복들을 받기 위해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첫 구원은 유업의 상으로 이어질 때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엡 3:20)를 더욱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맹세를 체험하고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구원 이후에 신자들이 누릴 수 있는 최선의 복입니다.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면 어떤 결과가 옵니까?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신 6:10~11).

 

  이러한 복은 광야 첫 세대가 누릴 수 있었던 약속된 유업이었지만 불순종과 불신으로 얻지 못한 채 광야에서 방황하였습니다. 이들이 잃은 것은 물질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가까운 교제와 적군과 질병으로부터의 보호와 믿음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집’(3:6)이 되는 기쁨과 기회도 잃었습니다. 광야 첫 세대는 사십 년간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보고서도(3:9) 계속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진노의 맹세를 받고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들을 받아 누리지 못하는 것은 그 약속들의 풍성함을 생각한다면 너무도 큰 손실입니다.  믿음으로 받은 첫 구원은 잃지 않습니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복에는 참여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모세 당시의 불신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의 풍성한 열매들을 직접 들어가서 따먹는 축복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서 자라는 탐스러운 포도송이와 무화과를 먹어보는 단맛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넘치는 수확을 보장하는 가나안 옥토에서 농사를 짓고 추수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을 기쁨으로 올리는 복을 박탈당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추구하지 않고 불신과 불순종의 삶을 택하면 가나안의 유업을 전혀 누릴 수 없습니다. 출애굽 때의 부푼 꿈이 시들고, 홍해 바다를 건널 때의 감격이 사라집니다. 승리의 무드는 패배와 좌절의 늪에 빠지고 내일의 소망은 오늘의 침체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립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포인트는 이런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음성을 듣고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라는 권면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구원을 잃었다는 말일까요?

 

  광야 첫 세대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광야에 엎드러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이들이 구원을 못 받았다는 말일까요? 히브리서에서 광야 세대를 예시하고 그들의 실패를 지적한 것은 그들의 구원 여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받을 수 있었던 가나안 유업을 놓쳤다는 교훈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불순종과 배역을 들어 한 때 구원을 받았지만 상실했거나 혹은 아예 처음부터 구원받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드러낸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끝까지 견디는 것은 구원을 획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내는 참 구원이 출범되었음을 증시한다.”(G. Guthrie, Hebrews, 136).

  끝까지 확신을 붙잡지 못하는 것은 구원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구원받은 적이 없음을 지적한다. (David Allen. NAC comm. Hebrews, 269).

  계속해서 믿음을 갖지 않는 자들은 처음부터 마음에 참 믿음이 없었다는 증거이다. (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793).

 

  이런 해석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천국에 들어가거나 구원받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생깁니다. 끝까지 견디라는 말은 구원의 여부나 믿음의 진정성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 유업의 상을 받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권면입니다. 가나안은 출애굽 한 백성이 첫 구원을 체험하고 다음 단계에서 구원받은 목적인 유업의 축복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가나안은 꾸준한 믿음과 신뢰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자들이 받아 누리는 축복의 영역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가 당부하며 경고하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이 준비하신 풍성한 복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므로 힘써 들어가지 않으면 무서운 징계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 3:16~19).

 

  출애굽 첫 세대는 가나안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출애굽 구원을 상실한 것이 아니고 출애굽의 목적지인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유월절 양의 피를 믿고 받은 첫 구원은 상실되지 않지만, 약속된 가나안 유업은 꾸준한 믿음이 없을 때 상실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출애굽 첫 세대가 히브리서에서 믿음의 영웅들로 진술된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습니다”(히 11:29). 그들은 모두 어린 양의 피를 자신들의 집에 바르고 죽음으로부터 보호되어 구속받은 백성으로 애굽을 나왔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도 구속받은 백성의 신분으로 머물렀습니다. 반항과 불순종이 있었지만 한 사람도 애굽으로 되돌아가는 역(逆)구속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과 순종에 꾸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광야의 삶을 불평하면서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길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시련과 역경 속에서 가나안의 유업을 열망하며 인내하기보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구원이 상실됐거나 혹은 처음부터 참 믿음이 없었던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일방적인 대입입니다. 따져보면 모세도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아론과 미리암과 칠십 인 장로들이 모두 가나안 입성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럼 그들이 모두 구원을 못 받았다는 말일까요?

 

  ☞ 모세는 변화산에서 엘리야 선지자와 함께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하였습니다(눅 9:30~31).

  ☞ 일반 백성도 광야에서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고 마음이 미혹되었지만(3:10), 가나안 유업에 대한 약속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증거의 하나는 그들이 출애굽 때 가지고 나왔던 요셉의 유골을 광야 사십 년 동안 계속 운반한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가나안 복지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부정했다면 들어가지도 못할 곳에 요셉을 묻으려고 그의 유골을 메고 다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요셉의 유골을 그의 유언에 따라 애굽에서 가지고 나와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세대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그 결과 세겜에 요셉의 유해가 묻혀 요셉의 유언이 성취되었습니다(창 50:24; 수 24:32).

 

  그런데 그들은 가나안 근방까지 다가가서 정탐들의 보고를 들었을 때 입성을 거부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까지 하였습니다. 정탐들은 가나안에는 거인들이 사는데 자기들은 메뚜기 같이 보였다고 했습니다(민 13: 33). 그러니 가나안의 거인들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반면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신뢰하면 반드시 이긴다고 했지만, 백성이 오히려 그들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민 14:8-10). 두 종류의 메뚜기들이 있습니다. 불신 메뚜기들이 있고 믿음 메뚜기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신 메뚜기들의 불평과 신세타령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전염병으로 모두 죽이시겠다고 하셨지만, 모세의 중보로 용서하셨습니다. 그들은 다시 광야로 들어갔습니다(민 14:25). 그래도 그들은 용서받은 백성으로 광야에 머물렀습니다 (민 14:1~4, 12, 19~20)

  출애굽 첫 세대는 한 면으로는 믿음의 영웅들이지만, 다른 면으로는 믿음이 꾸준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3장 11절을 11장 29절과 함께 보고 그들에 대한 균형 잡힌 평가를 해야 합니다.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히 3:11).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히 11:29).

 

  그들은 양의 피로써 구원을 받았지만, 다음 단계에서 실족하였습니다. 그들은 배교한 것이 아니고 가나안의 유업을 차지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첫 번째 상황에서 믿음의 모범이었지만, 두 번째 상황에서는 불신의 모델이 되었습니다(유 1:5). 바로 이 점이 히브리서의 주안점입니다.

 

  두 번째 단계의 믿음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14절).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처음에 가졌던 구원의 확신과 복음의 소망(골 1:23)을 두 번째 단계에서도 놓치지 말고 꾸준한 믿음으로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의 믿음은 하나님의 유업의  약속을 향해 계속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속적인 믿음과 부단한 신뢰를 요구합니다. 구원은 확보되었습니다. 한 번 받은 구원은 잃지 않습니다. 광야 세대는 애굽으로 되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속받은 목표에 이르지 못하고 실패함으로써 가나안의 상속을 받고 안식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래서 어떤 결과가 왔습니까? 그들은 광야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고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신에 빠진 자기 백성의 영적 진보를 막고 거친 광야에 그대로 두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힘써 소유하도록 의도하신 유업은 옵션이 아닙니다. 이를 거부하거나 등한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뜻에 등을 돌리고 구원의 은혜가 확장되는 길을 막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 첫 세대에게 진노하시고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출애굽은 놀랍고 기이한 하나님의 구원 활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안식은 하나님의 구원이 바라본 풍성한 열매와 광 대한 영역의 복을 체험하는 잔치석과 같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14절)가 되는 것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롬 8:17).

  예수님과 함께 교제하며 유업의 복을 나누는 영광된 자리에 참석하는 일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광야의 고난을 참으면서 간절히 추구해야 할 거룩한 소명입니다.

  그런데 반복해서 하나님의 길을 거부하고 따르지 않는 자들은 광야에 갇혀서 아무런 전진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들은 가나안을 유업으로 받는 세대로 쓰임을 받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집’이 되어 복음을 위해 무엇을 성취하는 귀한 역할을 상실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을 마치 불붙은 집에서 모든 것을 태우고 자신의 몸만 겨우 빠져나온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고전 3:15).

 

  구원받은 성도들도 출애굽의 첫 세대처럼 일종의 근무 태만으로 해직되거나 조기 은퇴를 당할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을 꾸준히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출발은 좋았으나 이스라엘의 왕권직에서 물러서야 했습니다(삼상 13:5~14; 15:11, 23). 사울은 왕권을 잃고 왕으로서 쓰임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사무엘은 사울이 전사할 것을 예고하며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삼상 28:19)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출발은 좋을 수 있습니다. 처음 신자가 되었을 때는 주님에 대한 믿음과 열심이 넘치고 소망으로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다음 단계에서 복음의 소망을 즐거워하는 꾸준한 믿음이 지속되지 않으면 구원은 상실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이 주기를 원하시는 가나안 유업은 상실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유혹으로 마음이 둔해지고 굳어져서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12절). 바울은 이런 가능성을 두려워하여 자기 몸을 쳐서 복종케 한다고 하였습니다(고전 9:27).

 

  광야의 불순종은 재난의 심판을 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 양의 피를 믿고 여호와의 백성으로 애굽을 나왔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실제적인 도전에 부딪혔을 때 뒤로 물러났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구원을 잃었거나 처음부터 가짜 신자라는 뜻은 아닙니다. 주 예수를 믿고 거듭난 신자라도 불일치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적지 않은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고백과 맞지 않는 불순종의 삶을 산다고 해도 크게 빗나간 말은 아닐지 모릅니다. 광야 세대의 불신을 상기해 보십시오. 그들은 바로 군대의 추격을 받고 홍해 바다 앞까지 왔을 때 크게 두려워하여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출 14:10~12). 그들은 식수와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모세를 맹렬히 비난하였습니다(출 15:22~24; 17:1~3; 16:2~3). 그들은 내일 양식을 염려하여 안식일에도 만나를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였습니다(출 16:26~27). 이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가시적인 하나님을 원하며 금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경배하었습니다(출 32:1, 7~8; 민 25:1~2). 이들은 모압 여자들과 음행했으며(민 25:1) 어려움이 오면 견디지 못하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의 입장에 놓였다면 더 나았을까요? 지리적으로 동일한 광야는 아닐지라도 우리도 나름대로 인생의 여러 광야를 거쳐 갑니다. 뒤돌아보면 우리도 그들처럼 원망하고 낙심하며 두려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광야에서 자주 넘어지고 마음이 굳어진 상태로 살 때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광야 세대를 특별히 목이 곧은 백성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도 완고한 마음으로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반역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시 78:40).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입성을 거부했을 때 하나님의 진노의 맹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여러 번의 용서가 있은 다음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십니다.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시옵소서 (민 14:19).

  모세는 하나님이 출애굽 한 때부터 백성을 줄곧 용서하신 것을 언급하며 다시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때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민 14:20)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용서를 받았을지라도 가나안의 유업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잘못을 고백하며 가나안 진격을 시도했지만, 완전히 실패했습니다(민 14:40-45). 회개해도 너무 늦은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의 맹세를 하시면 돌이키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야 불일치와 불신실한 신앙생활을 바꿀 있을까요?]

  첫째, 출애굽 구원의 목적을 상기하는 것입니다. 구원에는 바라보는 목적지가 있습니다. 출애굽 백성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기 위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어린 양의 피로써 바로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었지만, 그 자체로서 즉시 구원의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하시며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고 친히 동행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끝까지 신실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출 33:14)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안식의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구속받은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유업을 받고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신 3:20).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유업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유업은 끈기 있는 믿음과 인내로 시험을 거친 후에 받는 후한 상급이며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는 특권입니다.

  안식의 땅으로 들어가면 주님으로부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 25:21)라는 칭찬을 받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충성한 종들은 모두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고 더 많은 섬김의 기회를 받습니다(마 25:21, 23).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르기 위해 수고와 고통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면 주께서 기뻐하시며 우리를 안식의 식탁으로 초대하십니다.

 

  둘째, 예수님의 제사장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본 항목의 서두에서 예수님의 대제사장되심을 지적하였습니다(2:17; 3:1).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으로 오셔서 자신의 광야에서 온갖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고통받는 우리를 동정하시고 능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3:1)는 저자의 권면은 모든 성도의 표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광과 존귀의 자리로 인도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도록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분입니다(2:10). 예수님은 창조의 대행자며 상속자이십니다. 그는 구속주며 왕이십니다. 그는 모세보다 높으신 분이며 천사들의 수종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는 마지막 말씀입니다(히 1장).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고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가게 하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우리의 고통을 아뢰고 우리 죄를 고백하며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광야의 여러 실패를 토로하며 동정에 찬 대제사장에게 호소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이해하지 못하고 돕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주님은 대제사장으로서 날마다 우리의 아픔을 느끼시며 하늘 아버지 앞에서 기도하십니다.

  출애굽 세대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도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준비된 하나님의 안식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유업의 상을 잃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출애굽 세대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을 불순종하여 유업을 잃었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불순종하는 신약 성도들은 훨씬 더 위험합니다.

 

  유업의 문 앞에는 가나안의 거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나는 메뚜기야 그들 눈에도 그렇게 보일 거야. 절대로 그들을 이길 수 없어.」

  우리는 이런 비신앙적인 메뚜기 멘탈리티를 버려야 합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하겠습니다.

  「나는 메뚜기야. 맞아. 그렇지만 우리의 여호수아 대장이신 예수님과 함께 가면 가나안의 거인들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믿음의 메뚜기가 될 수 있어.」

  하나님께서는 불신의 메뚜기 신드롬에 빠진 자녀들은 광야에 남겨두십니다. 그러나 약속의 유업을 상속받기 위해 굽히지 않는 믿음과 인내로 주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자녀들은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 갈렙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가나안 정복을 확신하며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민 14:9)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갈렙을 칭찬하시고 그의 가나안 정착을 보증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민 14:24).

  이것은 갈렙이 가나안 유업을 받을 것이 확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때가 갈렙이 안식에 들어가는 시점이었습니다.

  우리의 생애에서 가장 복되고 행복한 날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유업의 상으로 받는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안식의 문으로 들어갑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가 맹세하노니 네게 큰 복을 주리라’고 말씀하시는 때입니다(창 22:16-17). 우리 모두 광야에서 방황하지 말고 유업의 땅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하나님의 안식은 무엇인가? (히 3:18) 이중수목사 2022.11.09 1349
13 예수님의 왕권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히 1:3) 이중수목사 2022.11.06 507
12 예수님은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해서 돌아가셨는가? (히 2:9) 이중수목사 2022.11.06 1143
11 거룩한 삶의 원리 (베드로전서 1:22-25)  이중수목사 2021.10.18 817
10 금식 기도는 무엇인가? 마가복음 2:18 이중수목사 2021.08.31 3107
9 교회 부패는 어떻게 막아야 하는가? (갈라디아서 5:24-25) 이중수목사 2021.06.26 942
8 예수님의 함구령 (3) - 왜 예수님은 자신을 숨기셨을까요? 마지막 함구령 (마가복음 9:9) 이중수목사 2021.02.06 809
7 예수님의 함구령 (2) - 왜 예수님은 자신을 숨기셨을까요? (마가복음 3:7-12) 이중수목사 2021.02.06 1932
6 예수님의 함구령 (1) - 왜 예수님은 자신을 숨기셨을까요? (마가복음1:40-45) 이중수목사 2021.02.06 4529
5 육체란 무엇인가? (갈 5:17) 이중수목사 2021.01.02 1500
4  ‘육’(肉)’은 무엇인가? (골 3:5-11) 이중수목사 2021.01.02 516
3 가룟 유다와 하나님의 예정 (마가복음 3:19) file 이중수목사 2020.12.19 2522
2 크리스천들에게 ‘죄악 된 본성’(sinful nature)이 있을까요? file 이중수목사 2020.11.24 771
1 엘리사의 죽음 이중수목사 2020.08.09 422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