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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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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에게 사십 년 동안 광야에 방황하게 하셨으므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한 그 세대가 마침내는 다 끊어졌느니라” (민 32:13).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민 14:28-33).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민 14:31-32).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 3:17-19).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고전 10:5).

출애굽한 첫 광야 세대는 가나안 정탐들의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들은 갈렙과 여호수아의 간곡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진입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불평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하다 모두 죽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신자에게 무서운 경고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광야 세대에 대한 편견이 있는 듯합니다.

그 이유의 하나는 광야 세대가 받은 형벌을 ‘끊어졌다’, ‘엎드러졌다’ 혹은 ‘멸망 받았다’, ‘소멸되었다’ 등으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구원받지 못했다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특히 광야에서 엎드러졌다는 말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운명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여러 번 시험하고 불신하며 원망하였습니다(시 78:40-41; 106:14; 민 14:27).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노염을 사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히 3:16-17). 이 모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광야 세대가 시체가 되어 엎드러진다는 표현은 본문의 뜻을 지나치게 강화했다고 봅니다. 직역성경은 민수기 14:32절을 “너희 시체들은 이 광야에서 쓰러질 것이다”라고 옮겼고, 영역에서도 같은 의미로 Your dead bodies shall fall in this wilderness(ESV) 또는 Your bodies will fall in this desert(NIV)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같은 스토리에서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민 14:35)라고 하였습니다. 엎드러진다는 표현은 광야에서 죽는다는 의미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출애굽 세대가 광야에서 죽었다고 해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의미라고 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많은 강해자들이 출애굽 세대가 받은 형벌을 구원을 못 받은 것으로 보는 것일까요?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이 유업의 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유업이 곧 천국이나 구원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못 들어간 세대는 불순종으로 구원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불순종하면 구원을 잃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이런 해석은 옳지 않습니다.

첫째, 본 스토리는 불순종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이 어떤 것인지를 알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민 14:14).

본 스토리의 문맥은 구원이 아니고, 불신과 불순종에 대한 죄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알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 사건을 구원에 적용하는 것은 본문의 의도를 벗어났다고 봅니다.

둘째, 히브리서에서 언급된 광야 세대에 대한 진술을 구원 상실에 대한 말씀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 3:17-19).

여기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말을 구원받지 못했다는 뜻으로 보면, 출애굽 세대의 구원 여부를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광야 세대가 불신으로 못 들어간 곳은 천국이 아니고 가나안입니다. 가나안은 천국이 아닌, 유업의 땅입니다. 광야 세대는 자기들이 차지했어야 할 유업을 받지 못했기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안식’은 믿음과 인내로 유업을 차지하고 이를 즐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광야 세대는 가나안 땅의 젖과 꿀을 소유하지 못하였기에 그들이 누려야 할 안식을 놓친 셈이었습니다. 여기서도 민수기 14장의 본문에서처럼, 구원 여부가 아닌, 불순종으로 유업을 받지 못하는 세대에 대한 형벌과 경고가 문맥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어린 양의 피를 믿음으로써 받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런데 광야 세대가 불순종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했다고 본다면, 적어도 두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 광야 세대는 받은 구원의 진정성을 행위로 입증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구원은 가짜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구원을 받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둘째, 광야 세대는 구원을 받았지만, 광야의 불순종으로 구원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주장은 복음주의 강단에서 자주 듣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행위가 따르지 않으면 구원은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 받은 구원은 영원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구원하는 믿음은 반드시 행위를 낳는다는 주장입니다. 물론 모든 신자가 항상 온전한 행위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지속적이고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은 구원받지 않은 증거라고 봅니다. 이것은 매우 모호한 말입니다.

어느 만큼 지속적이고 습관적인 죄를 지어야 구원받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까요? 아무도 정확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기준 자체를 정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두 가지 습관적으로 짓는 죄는 어떤 신자에게도 해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횟수나 분량은 누구도 정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행위는 신자라면 다 있어야 하지만 「믿음 +행위=구원」을 불가피하고 기계적인 구원 등식으로 만들면 무리가 생깁니다.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 삶을 사는 신자들을 모두 구원받지 않았다는 증거로 내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견해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게 합니다. 자신의 삶이 구원을 확보할 만한 수준인지 아닌지는 죽어보아야 알 수 있을 것이기에 전전긍긍해야 합니다. 이것은 구원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받은 구원을 확신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것이 성경의 구원론입니다. 자신이 구원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항상 의심하거나 불안해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율법주의의 행위 구원으로 쏠리게 합니다.

그런데 요점은 광야 세대가 불순종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여전히 언약 백성으로 간주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가나안 진입을 반대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전염병으로 다 죽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용서를 받았다면 구원을 상실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만약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다면 용서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시옵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민 14:19-20).

그런데 이 두 가지 입장은 원칙적으로 광야 세대에 대한 성경 본문의 문맥이 아니므로 적실성이 없습니다. 광야 세대에 대한 심판을 구원의 여부나, 구원 상실의 예시와 근거로 삼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봅니다. 광야 세대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배회하다가 가나안에 못 들어가고 죽은 것은 유업을 잃은 것이므로 구원과 상관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엎드러지고 멸망당하고 죽었다는 표현들은 믿음과 순종과 인내로 받아야 했을 유업을 쟁취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상을 잃은 것입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가나안 복지에 닿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복지는 천국의 그림이 아니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들어가서 누리는 구원 이후의 축복들입니다. 출애굽의 광야 세대는 가나안의 유업을 상실한 것이지, 구원을 잃은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순종의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어떻게 받습니까? 누구나 알고 믿듯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믿음으로써 받습니다. 이것은 일회적이고 영원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십자가 대속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대속의 십자가는 항상 믿는 것이지만, 첫 구원을 받는 것은 일회로 끝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양의 피가 적용됐을 때 그들은 애굽을 영원히 나왔습니다. 그들은 양의 피를 바르고 또 바르지 않았습니다. 한 번 바르고 그것으로써 보호를 받아 노예살이와 사망의 영역에서 단번에 벗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고 선포하십니다. 칭의의 선언은 단회적인 것이고 확정적이므로 취소되거나 재심을 거치지 않습니다.

그럼 광야 세대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들이 구원받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상징하는 유월절 양의 피를 바르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들은 애굽을 떠나기 전에 가정마다 유월절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에 바르고 집안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앞으로 성취될 에수님의 십자가 피 아래 피신하여 애굽에 내렸던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으로부터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언제 애굽을 떠날 수 있었습니까? 유월절 양의 피가 흘러지기 전까지는 애굽에 노예로 붙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유월절 양의 피가 각 가정의 집에 발라졌을 때 그들은 해방되어 출애굽 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바로의 노예로 묶여서 종살이하다가 풀려난 것입니다. 그다음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애굽을 떠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탄의 영토에서 사탄의 지배를 받다가 구출되어 하나님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는 영역으로 옮겼습니다. 그렇다면, 출애굽 세대는 양의 피로써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들은 양의 피를 믿고 구원받은 믿음 공동체입니다.

둘째, 출애굽 세대는 애굽을 나온 후 홍해를 지났습니다. 바울은 광야 세대가 홍해를 지난 것을 세례로 보았습니다. 세례는 누가 받습니까? 믿는 신자가 받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고전 10:1-2).

광야 백성이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은 것은 신약 교인이 예수께 속하여 세례를 받은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광야 세대가 그에게 헌신했듯이, 신약 교인은 예수께 헌신 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광야 세대는 모세를 따라 홍해로 들어갔고, 신약 교인은 예수를 따라 물속으로 들어갑니다(롬 6:3, 5). 말을 돌리면, 모세를 따랐던 출애굽 세대는 유월절 양의 피를 믿은 자들로서 홍해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출애굽 세대는 모두 신자들로 구성된 믿음 공동체였습니다. 그들 중에서 한 사람도 홍해를 지나지 않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출애굽 세대는 광야에서 모두 성막 건설에 직접 간접으로 헌신하였습니다. 성막은 이동식 소형 천막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여 상세하고 정확하게 모세가 본 모형에 따라 지어야 했습니다. 성막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와 속죄소가 있었습니다. 아론의 제사장 제도가 있어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광야 세대는 출애굽 때 유월절 양의 피가 속죄를 위한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속죄의 피와 하나님의 용서가 체험되는 성막 제도의 효력에 의존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광야 생활은 성막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지 못한 백성에게 성막을 짓게 하시고 성막 예배가 진행되게 하셨을 리 만무합니다. 광야 세대에게 성막이 믿음 공동체의 구심점이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구원받은 언약 백성이었다는 반증입니다.

넷째, 출애굽 세대가 비록 불순종의 삶을 살았지만, 믿음 공동체로서 끝까지 하나님을 믿었다는 또 다른 증거는 그들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왔던 요셉의 해골을 광야 40년 동안 운반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가나안 진입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한 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까지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중에 회개했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민 14:19-20, 40). 그들은 불순종했지만, 요셉의 유골을 광야에 내버리지 않고 끝까지 메고 다니다가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유업을 믿지 못했다면, 40년 동안 요셉의 유골을 메고 다니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유업에 대한 소망이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는 방증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요셉의 유골을 가나안에 묻히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꾸준한 믿음을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이 요셉의 유골을 애굽에서 사백 년의 종살이가 지난 후에 가지고 나와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매고 다닌 것은 적지 않은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그럼 이제 히브리서의 저자가 출애굽 세대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살피겠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히 11:29).

우리는 이 말씀이 어디에 기록되었는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구약 시대의 믿음의 선열들에 대한 증언입니다. 아벨로부터 시작된 믿음의 영웅들에 대한 목록이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그리고 모세까지 이른 후에 곧이어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다고 했습니다. 출애굽 세대를 이스라엘의 믿음의 선열들의 대열에 세운 것은 그들의 믿음이 후대의 모범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출애굽 세대는 유월절 대속의 피를 믿었던 신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홍해까지 갈 수 있었습니까? 애굽을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애굽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까? 모세가 출애굽 직전에 행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히 11:28)에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양의 피를 자기 집 문에 바른 것은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믿음으로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넜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들이 모두 믿음의 영웅들이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불순종 때문에 구원을 잃은 자들로 볼 수 없습니다.

 광야에서 죽은 것은 구원이 아닌 유업의 상실입니다.

구약 시대는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는 속죄양의 피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신약 시대는 속죄양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고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의 원리는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의 속죄양 피를 믿고 애굽에서 해방된 후 가나안 복지로 향하였습니다. 출애굽이 구원의 그림이라면, 가나안은 유업의 그림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는 것과 유업을 받는 것을 구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고 단번에 받습니다. 그러나 유업은 꾸준한 믿음에 의해서 점진적으로 받습니다. 출애굽을 한 광야 세대는 유월절 양의 피로써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가나안에 있는 유업의 상을 받을 만큼 꾸준하지 못하였습니다. 유업은 구원 이후에 받는 상입니다. 그러나 이 상은 첫 구원에서처럼 일회적이고 단순한 믿음으로 거저 받는 것이 아니라, 부름의 상을 향하여 꾸준한 믿음으로 달려가야 받습니다(빌 3:14).

출애굽 세대가 광야에서 일생을 마감하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구원을 못 받은 것이 아니고 유업의 상을 잃은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대항하고 순종하지 않다가 무서운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하다가 시체로 끝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의 운명에 대한 표현들은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즉, 광야 세대는 출애굽 때는 구원을 받았지만, 광야의 불순종으로 구원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더 극단적으로 보면 그들은 처음부터 구원받지 않은 상태에서 유월절 의식에 형식적으로 참여했으므로 그들의 진상이 나중에 불신으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그들이 가나안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나님이 맹세하셨다는 것과 그들이 광야에서 엎드러질 것이라는 멸망의 선포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로, 끊어졌다’, ‘엎드러졌다’ 혹은 ‘멸망 받았다’, ‘소멸되었다’ 등의 표현은  죽는다는 의미의 그림 언어들입니다. 바울은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전 10:5)고 하였는데 여기서도 ‘멸망’은 구원의 상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원문은 '흩었다'(scatter)는 의미입니다. NIV 영역은 scattered라고 직역하였습니다(Their bodies were scattered over the desert.). 우리는 ‘멸망’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금방 구원과 연결해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런 단어들을 훨씬 더 약한 의미로 사용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광야 세대를 ‘흩으셨다’는 것은 광야에서 그들의 시체가 여기저기에 묻혔다는 의미를 그림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들이 구원 상실을 시사하지 않는다는 증거의 하나는 가나안 정탐들의 보고를 듣고 가나안 진입을 반대하던 백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즉,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 14:12)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멸한다’는 말은 유업을 박탈한다는 의미입니다. Young’s Literal Translation(YLT 영문 직역성경)은 가나안 땅의 유업을 빼앗는다는 의미로 disposes라고 옮겼습니다. English Standard Version(ESV)도 유업을 못 받는다는 의미에서 disinherit라고 정확하게 번역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냥 ‘멸한다’고 하면 본뜻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광야 세대가 잃은 것은 구원이 아니고 가나안의 유업을 잃은 것입니다.

불일치의 삶을 사는 신자는 구원받지 못했다는 증거일까요?

광야 세대에 대한 가장 나쁜 인상 중의 하나는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모세의 하산이 지체되자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 신을 만들고 가나안 길을 안내받으려고 하였습니다(출 32:1-6). 이들은 얼마 전만 해도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믿음의 모델이었던 그들이 이제 우상을 만들자고 하였습니다. 아론은 그들의 요구를 쉽게 받아들였습니다(출 32:2-4). 그들은 애굽의 신들에게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우상이란 하나님을 대변하는 일종의 형상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송아지 형상을 만든 후에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 32:4)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몇 주 전만 해도 시내 산 앞에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출 19:8)라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저버리고 모세의 하산 지체를 견디지 못하여 우상을 만드는 어리석은 망동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동물의 형상으로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상은 하나님을 바르게 드러내지 못합니다. 아론은 송아지 우상 앞에 제단을 세우고 다음 날을 여호와의 절기로 지키자고 선포했습니다(출 32:5). 그들은 우상 앞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올리며 경배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백성이 더 거룩해졌습니까? 그들은 방탕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 여호와의 절기를 인도하였습니까? 아론이었습니다. 그는 곧 대제사장이 될 사람이었습니다!

아론은 유월절 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신 여호와를 경배한다면서 스스로 속였습니다. 그럼 이들의 믿음은 가짜였을까요? 분명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포함해서 많은 백성이 송아지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우상 숭배자들이 되었으니 어찌 이들의 믿음이 참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출애굽 때 유월절 양의 피 아래 피한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홍해를 건넌 사실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유업의 소망을 지니고 요셉의 유골을 광야에서 신실하게 운반한 것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들이 믿음의 영웅이었다고 진술합니다.

송아지 사건은 하나님의 참 백성이 신앙고백에 일치되지 않는 모순된 삶을 살 수 있음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쉽사리 현재의 실수나 어리석은 일들 때문에 과거의 믿음이 진짜가 아니었다고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출애굽 세대가 믿음으로 홍해를 지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위기가 왔을 때 흔들렸습니다.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항상 굳건한 성도는 없습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요나 선지자도 다 포기하고 죽기를 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광야 백성이나 이스라엘 지도자들보다 믿음이 더 깊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종종 불일치의 삶을 살고 어이없게 넘어지는 연약함을 보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신약 성도들이 광야 세대와 같은 실수를 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3)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광야 세대에 대한 성경의 진술은 그들이 구원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를 가려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애굽 땅을 떠났을 때 이미 첫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다음 단계에서 그들은 크게 실족하였고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상실이 아니고 유업의 상실입니다. 우리는 광야 세대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통해서 유업에 관한 여러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구원을 받았으면 유업의 상을 위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한걸음으로 꾸준히 나아가야 합니다. 가나안의 유업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축복들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상을 내리시지 않습니다. 출애굽의 목적지는 광야가 아니고 가나안입니다. 출애굽이 바라보았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비전은 광야에 머물수록 멀어지고 흐려집니다. 우리가 유업의 땅에 닿지 못하는 큰 원인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꾸준하지 않은 것입니다. 구원을 못 받아서가 아니라, 받은 구원이 실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불일치의 삶은 가나안의 유업을 잃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용서를 믿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모든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반복해서 재기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늦은 회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출애굽 세대가 광야에서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경배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자기 백성을 포기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시내 산 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리셨습니다(출 32:7-10). 모세가 방자한 백성을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셨다는 증거입니다(민 32:11-13).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위해 중보자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중보자는 예수님이십니다. 광야 백성은 모세의 중보 덕분에 송아지 우상 경배의 죄에서 용서받고 살아남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큰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막고 사는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용서받고 재출발의 기회를 얻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로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항상 기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회개하면 무한정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 18:21-22).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오래 참으시면서 우리 죄를 너그럽게 용서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인자한 성품입니다(시 103:8-13; 145:8; 출 34:6). 그런데도 하나님의 백성은 너무도 자주 하나님을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에 용서를 거듭하시며 경고하십니다. 광야 세대는 하나님을 줄곧 거역하고 반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백성이 가나안 진입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을 때 모세에게 이렇게 한탄하시며 진노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민 14:11).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민 14:27).

시편 저자도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시 78:40)라고 탄식하였습니다. 광야 세대는 가나안 진입을 거부했다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다가 죽을 것이라고 하니까 뉘우치고 죄를 자복하였습니다(민 14:40). 그리고 마음을 바꾸어 가나안을 정복하겠다고 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셨으니까 그들이 전쟁에 이겨야 할 텐데 참패하였습니다(민 14:41-45). 왜 그랬을까요? 회개가 너무 늦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 세대는 용서를 받았습니다(민 14:20).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큰 죄도 십자가의 피를 믿고 회개하면 용서받습니다. 그러나 회개가 너무 늦으면 재기의 기회를 받지 못합니다. 광야 세대는 오랜 불순종 끝에 회개하고 용서받았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유업의 상은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받은 용서는 구원을 확보했지만, 가나안 진입 금지에 대한 하나님의 맹세는 그들이 받을 수 있었던 상을 막았습니다.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넘긴 에서도 눈물로 회개하며 장자의 축복을 원하였습니다(창27:38). 그러나 이삭이 죽음의 침상에서 준 맹세 때문에 에서는 유업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히 12:17). 너무 늦었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용서를 가져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노하여 맹세"(히 3:11)하시면 회개해도 상실된 유업의 기회를 다시 가질 수 없습니다. 

광야 세대의 구원은 유월절 양의 피를 믿음으로써 확보되었습니다. 그들은 원망과 불평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광야에서 즉시 전멸되거나 애굽으로 송환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구속받은 목표에 이르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상속을 받고 안식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 세대가 영적 진보와 유업 쟁취의 길을 막았을 때, 그들을 광야에 가두어 두시고 가나안의 유업을 박탈하셨습니다. 유월절 양의 피로써 구원받은 믿음의 영웅들이었던 출애굽 세대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우리에게 주는 엄숙한 경고입니다.

출애굽 세대는 갈렙과 여호수아만 제외하고 20세 이상의 장년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따져 보면 모세도, 아론도, 미리암도 이스라엘의 70인 장로들도 유업의 땅에 발을 딛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누가 감히 그들을 보고 구원받지 못했다거나 믿음이 가짜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알듯이, 모세는 변화산에서 엘리야 선지자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눅 9:31; 마 17:3) 알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 양의 피를 믿고 이를 자신들에게 적용했을 때 출애굽 해방을 체험하였습니다. 출애굽의 구출은 영구적인 해방이었습니다. 출애굽 세대는 한 명도 애굽으로 되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애굽에 돌아가서 죽은 자도 물론 없었습니다. 한 번 속박의 땅에서 나왔으면 영원히 나온 것입니다. 광야 세대는 불순종의 삶을 살았지만, 잘못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들이 용서받은 것은 출애굽의 구원이 취소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유업을 박탈당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죽은 것은 구원의 상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대다수는 하나님을 순종하며 인내로써 유업의 땅을 향해 전진하지 않은 벌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유업의 상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잃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양의 피로써 출애굽을 한 자들로서 홍해를 믿음으로 건넜습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요셉의 유골을 메고 다녔고, 속죄소가 있는 성막을 운반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요셉의 유골을 묻을 유업의 땅에 대한 소망이 없었다면, 구태여 그의 유골을 40년 동안 메고 다니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속죄소를 믿지 않았다면, 성막을 무엇 때문에 귀찮게 세우고 접으면서 운반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의 역설이 있습니다. 요셉의 유골은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유골을 메고 다녔던 출애굽 세대는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유골의 임자였던 요셉은 유업의 약속을 꾸준히 믿었고, 그의 유골을 맡았던 출애굽 세대는 꾸준한 믿음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요셉의 유골을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것은 커다란 믿음의 행위였지만, 요셉처럼 줄기찬 믿음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광야 세대의 스토리는 다수의 하나님 백성이 크게 넘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꾸준한 믿음과 불굴의 인내로 온전한 상을 받도록 우리 모두 힘써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요2서 8절).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 6:11-12).

(이중수 지음, 여호수아 강해 하권 부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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