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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스 윌킨슨(Bruce Wilkinson)은 최근에 인기를 모은 그의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청원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하는 것과 내가 그의 능력으로 날마다 경험하는 것을 전폭적으로 변화시켰다. 사실상, 이 진리를 적용하는 수천 명의 신자들이 정규적으로 기적들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

 

  그럼 야베스는 과연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요? 야베스의 기도는 역대상에 나옵니다. 역대상은 남부 유다의 다윗 왕가의 역사를 리뷰 하기 위해 아담에서 시작하여 다윗까지의 족보를 열거합니다. 역대상의 첫 아홉 장은 모두 족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족보 중에서 가장 길고 거의 무용한 듯이 보이는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유다 지파의 족장들이 소개되는데 그 중에 야베스라는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에 대한 기록은 단 두 절인데 일종의 프로파일입니다.

 

  족보에서 짤막하게 프로파일을 넣는 것은 고대 족보 작성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나오는 족보에서는 가인의 자손으로 라멕을 소개하면서 그가 두 아내를 가졌고 한 소년을 죽였다는 내용의 시가 적혀 있습니다(창4:19-24). 노아의 아들들의 족보에서도 니므롯이 니느웨를 비롯하여 여러 도시를 건설했다고 말합니다(창 10:8-12). 그런데 족보에 나오는 사람마다 다 프로파일이 적힌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베스의 경우처럼 간략하나마 프로파일이 들어 있는 사람에 대해서 주목하게 됩니다. 야베스는 라멕이나 리므롯처럼 어떤 행위로 유명한 것이 아니고 그의 짧은 기도로 유명합니다. 그는 이런 기도를 올렸습니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대상 4:10).

 

  그럼 이 기도를 사람들이 좋아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내용을 보면 다른 기도들에 비해서 순전히 자기 중심적인 기도 같은데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대상 4:10)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한 마디로 자기가 원하는 복을 달라고 청해서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더구나 야베스가 원한 것은 자신의 지역을 넓혀 달라고 한 것이라서 더 잘 되게 해달라는 기도가 결코 나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본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평소에 복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기복 신앙이라고 할까 봐 밖으로 드러내기를 꺼릴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이런 기도가 성경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마음이 놓이고 용기가 날 것입니다.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는 인기가 있는지 모릅니다.

 

  야베스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이름과 뜻을 먼저 생각하라거나 혹은 자기 중심의 기도를 버리라는 요구가 없습니다. 또한 응답을 해주시면 그 대가로 기도자가 하나님께 어떤 일을 해드리겠다는 서원이나 약속도 없습니다. 그저 내 지역이 넓혀져서 형통하고 근심 걱정이 다 사라지게 해달라는 기도뿐입니다. 그러니 우리 귀에 매우 좋게 들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기도가 이렇게 간단하고 쉬운 것이라면 기도에 대한 부담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내가 평소에 올리고 싶은 기도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데 야베스의 기도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고 하니까 격려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야베스의 기도를 오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 세 가지 측면을 놓고 살펴보도록 합니다.

 

  첫째, 야베스는 땅을 더 넓혀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둘째, 야베스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셋째, 야베스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기를 기도했습니다

 

  1. 야베스는 땅을 더 넓혀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야베스는 지경을 넓혀 달라고 기도했는데 이것은 자기 땅을 더 달라는 청원처럼 들립니다. 땅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의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야베스가 재산을 늘리고 싶어서 땅을 더 달라고 기도했다면 문제가 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각 지파에 따라 기업의 땅으로 할당된 영역이 있었습니다(민 26:52-56). 그런데 이 땅은 원칙적으로 팔 수 없었습니다. 땅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당받은 땅은 대대로 자기 가족에게 전수되어야 했으며 가난으로 부득이 하여 땅을 팔았을 경우에도 50년이 되면 돌려받을 수 있었습니다(레 25:10).

 

  이러한 이스라엘의 토지 원칙에 비추어 볼 때 야베스가 지경을 넓혀 달라고 청한 것은 부자가 되려고 땅을 더 배정받기를 원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상 땅의 배정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했을 때 이미 다 끝난 일이었습니다

 

  2. 야베스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야베스가 하나님께 간청한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정확하게 그 내용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기 유익을 위해서 무엇을 간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는 자기 가족들 중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다고 했습니다(대상 4:9). 당시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자들은 결코 존경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야베스가 자신의 지역을 넓혀 달라고 기도한 것은 율법의 규정을 무시하고 재산을 더 늘려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응답하셨다고 했으니까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어떤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지경이 넓혀지는 문제는 야베스가 겪는 환난과 근심에서 벗어나는 일과 관계된 일로 보입니다. 야베스의 영역 확대 청원은 그가 가진 고통스런 상황에서 탈피하는 것과 함께 어우러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족보에 기록된 프로파일은 보통 있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니고 특기 사항입니다. 이것은 야베스의 일생에서도 이런 큰 구원은 단 한 번만 있었던 일이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니까 야베스는 어떤 극심한 고통에서 하나님의 크신 도우심으로 구출되었을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야베스의 족보에 들어갈 만큼 커다란 구원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야베스가 받은 기도 응답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놀라운 뉴스였을 것입니다.

 

  야베스는 분명 하나님의 큰 구원을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 본문에서 강조되는 것은 지경을 넓혀 달라는 청원 자체가 아니고 심한 고통과 역경에 빠진 야베스를 하나님께서 구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지경을 넓혀 달라는 기도만 드리면 소원이 다 성취되고 날마다 응답의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보다는 자기 일이 잘 된다는 쪽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놓고 하나님께 지경을 넓혀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 다 된다는 식으로  적용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승리주의입니다. 비록 자기 중심적인 청원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서 청하는 것일지라도 야베스가 받은 것과 같은 기도 응답이 줄줄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개척 교회의 목회자가 지경을 넓혀 달라고 기도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교인들이 갑자기 모여들고 금방 부흥이 되는 것일까요? 암 말기의 환자가 생명이 곧 끊어지려고 하는데 자신의 건강의 영역을 넓혀 달라고 날마다 간구하면 회복이 될까요? 빚더미에 앉아 파산 선고를 한 사람이 비즈니스의 영역을 넓혀 달라고 간구하면 기적이 일어나서 곧 부자가 되는 것일까요? 불경기로 경제가 어려운 때에 직장의 영역을 넓혀 달라고 기도하면 신자들은 다 취직이 된다는 말일까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시고 능력이 크시므로 불가능한 일로 보이던 문제가 해결되게도 하시고 간절히 기도한 일이 뜻밖에 응답되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야베스의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모두 동일한 기적의 응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소아시아에서 큰 환난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살 소망까지 끊어졌고 사형 선고를 받은 줄로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구출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놓고 큰 교훈을 배웠는데 그것은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후에도 하나님이 자기를 구해 주실 것을 바란다고 했습니다(고후 1:8-10). 사실인즉 바울은 여러 번의 위험과 역경에서 하나님의 구출을 받았습니다. 그는 야베스의 기도를 올리고 응답을 받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도들이 다 그와 같은 응답을 받지 않았습니다. 사도 요한의 형제였던 야고보는 10년 정도의 사역밖에 못하고 헤롯 왕에게 잡혀 일찍 순교를 당하였습니다(행 12:2). 세례 요한과 스데반은 그보다 먼저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의 형제였던 요한은 오래 살면서 여러 지역으로 다니며 사역하였습니다. 베드로도 옥에 갇혔지만 기적으로 옥문이 열려서 구출되었고 장기 사역을 하였습니다(행 12:3-19). 사도들이라면 모두 복음 사역의 영역이 넓혀지도록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은 복음 전파를 위해서 목숨을 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야베스의 기도 응답을 받아 항상 일이 잘 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응답을 받은 한 예에 불과합니다. 성경에는 기도자의 소원대로 응답을 받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도였지만 육체의 가시가 없어지지 않았고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난의 잔이 지나가기를 기도하셨지만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처음에는 간절한 소원 기도를 올렸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자신들의 소원을 내려 놓았습니다.

  성경에 나온다고 해서 마음에 드는 한 두 마디의 기도를 뽑아내어 모든 기도의 원칙으로 삼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그런 식의 적용은 편견과 불균형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많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야베스에게는 옳은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야베스의 기도문 자체가 다른 신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응답을 보장받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기도의 원칙을 제시한다기 보다는 아무도 구할 수 없는 큰 곤경에 빠진 사람을 하나님이 극적으로 구해 주셨다는 교훈을 담은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내는 것이지 야베스의 기도문을 기계적인 축복 기도의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항간에 나돌고 있는 야베스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에서 시정되어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표준으로 삼아야 할 기도가 있다면 항상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할 주기도문입니다. 주님은 이 기도에서 제자들이 드려야 할 기도의 기본 원칙과 내용과 목적을 소상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중심으로 올리는 기도입니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청원까지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그분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일과 관계된 것입니다.

  우리들의 기도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의 첫 마디는 ‘땅에 있는 나 자신’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됩니다. 하늘 아버지와 그분의 이름이 기도자의 최대 관심이어야 한다는 것을 주기도문은 가르칩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기도문은 모든 기도의 정형이며 모델입니다. 그러므로 야베스의 기도도 주기도문의 원칙과 우선 순위에 따라 해석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3. 야베스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기를 기도했습니다.

 

  ‘주의 손’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때에 드러나는 초월적인 능력을 상징합니다(사 59:1). 성경에서 주의 손이 함께 한 경우는 모두 하나님의 구원과 관계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와 요단 강을 마른 땅처럼 건넌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목적이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백성들에게 알게 하고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수 4:24). 사도행전에서는 안디옥에서의 전도 활동으로 많은 결신자가 생긴 것을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행 11:21) 하신 까닭이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시편 89편에 나오는 주의 손에 대한 약속입니다.

 

  “내 손이 그와 함께 하여 견고하게 하고 내 팔이 그를 힘이 있게 하리로다”(시 89:21).

 

  이제 본 시의 내용을 잠시 살피기로 합니다.

 

  ▶ 하나님이 그의 손으로 다윗과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즉, 다윗을 강하게 하여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왕이 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시 89:22, 23, 27).

 

  ▶ 다윗이 하나님을 그의 아버지 하나님과 구주로 부를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시 89:26).

 

  ▶ 다윗과 그의 후손의 보좌를 영원히 세우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시 89:29, 36)

 

  이 약속들은 다윗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예수님과 함께 하여 순종의 삶을 사셨고, 자기 백성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으며, 부활로 사탄의 능력을 깨뜨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머지 않아 주님은 왕 중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완성시키기 위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용례들에서 ‘주의 손’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소원 성취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구속 활동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베스가 주의 손이 자기를 도와서 환난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은 개인적인 고통의 문제를 넘어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연결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야베스가 자기 가족들 중에서 가장 존경을 받았다고 지적된 것은 그가 평소에 자아 중심적인 축복 사상에 젖어서 산 사람이 아니고, 항상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고 자신의 문제를 생각한 사람이었음을 시사합니다. 그가 만약 순전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자기 영역의 확장에만 급급한 사람이었다면 결코 존경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나의 영역”을 넓혀 달라고 기도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보다 큰 구원의 목적과 일치되는 것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곧 주기도문의 정신입니다. 주기도문에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요청도 나오고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는 간구도 나옵니다. 악으로부터의 보호와 용서를 비는 청원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첫 번째 청원인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다른 모든 청원에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야베스의 기도 요청도 이러한 가르침의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바울도 “너희가 먹고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가르쳤습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 야베스의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께 아무런 영광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주의 손’이 함께 하기를 원해서 올리는 기도라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십자가로 세우신 주님의 나라가 신속히 완성되며, 온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일과  연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해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시는 복의 근원이십니다. 그러나 자신의 야망 달성을 위해 하나님을 끝없이 조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요술이 아닙니다. 날마다 이 기도를 반복한다고 사업이 잘 되거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야베스의 기도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성경에 나오는 다른 기도들 보다 더 힘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의 계획과 선한 뜻에 달린 것입니다. 때로는 기도의 응답이 늦추어질 수도 있고 혹은 이 세상에서 받지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들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에 초점을 맞춘 것이어야 합니다. 개인의 복지를 위한 것일 때에도 우리 자신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목적과 동기가 주기도문의 기도 정신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자기 확장을 위해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이 들어 주셔서 성공하여 걱정 없이 잘 살았다는 간증이 아니고, 환난 중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크게 드러났는지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계속해서 복을 달라고 구하면 영역이 넓어지고, 영역이 확대되면 자원과 능력도 커지며, 위기에 봉착했을 때에도 주의 손이 돕기를 믿음으로 구하면 만사형통한다는 식의 승리주의는 일방적인 해석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하나님을 위해 바르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영역을 확장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위해서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되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의 한계를 알고 자신이 허락받은 영역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누구나 야베스의 확장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처럼 능력 있는 사람도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 131:1).

 

  하나님을 위한 일에도 욕심을 부릴 수 있습니다. 신령한 사역일수록 교만과 야심과 욕심의 우상이 어른거립니다. 우리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능력만 주시면 다 할 수 있다는 말은 극단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개인에게도 모든 일을 다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지 않습니다. 오직 죄가 없는 예수님 한 분에게만 모든 것을 다 감당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우리들이 긍정적인 희망을 품고 그의 기도를 모방하면 승승장구한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들은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신뢰해야 하고 긍정적인 자세로 주님의 일에 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는 절제입니다. 절제가 없으면 균형을 잃고 극단이 되기 쉽습니다. 또한 마음이 교만하기 시작하면 모든 일을 다 감당할 수 있을 듯이 착각합니다.

  우리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며 야베스의 기도를 올려야 하지만 야베스의 기도가 자기 성공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식의 기도들은 비록 겉으로는 응답을 받은 듯이 보일지 몰라도 우리들의 족보에 특기 사항으로 기재될 프로파일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어떤 목적과 의도로 야베스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자기 지경을 넓혀 달라고 기도한다면 어떤 종목을 놓고 기도하시겠습니까? 개인이 받은 소명에 따라서 주님을 더 많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위한 것일 수도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돈을 더 벌어야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손이 닿아야 하는 부분은 외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자신의 부족한 성품의 영역도 있고, 성경 이해의 영역도 있으며, 선행과 사랑의 영역도 있습니다.

 

  당신은 내적인 변화를 위해 야베스의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까?  야베스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근심에서 벗어나기를 원했습니다. 당신은 어떤 종류의 근심을 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근심거리에서 벗어나는 일이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에 어떻게 연결되고 있습니까? 자신의 내적 변화가 더디고 영적 성숙이 잘 되지 않아서 근심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것에서 구출되기 위해 자신의 영성의 지경을 넓혀 달라고도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돈이 많아서 잘 살게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나 돈은 큰 책임을 얹어 줍니다. 돈의 청지기 직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당신은 여러 큰 일을 맡고 싶습니까? 그러나 크게 되고 이름이 나는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는 자도 많지 않습니다. 그런 일을 소원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자신의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와 뜻에 따라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경을 넓혀 달라는 기도는 내 꿈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열망이어야 합니다.

 

  ◐ 하나님은 나의 영적 무기력이나 비전의 결핍에 대해 피곤해 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감당하지도 못할 것을 바라면서 올리는 그칠 줄 모르는 강청에도 피곤해 하십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시려는 영역에 관심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그 이상을 넘어가려는 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 하나님의 방법과 때를 무시하는 것도 그릇된 일입니다.

 

  ◐ 무절제하고 비현실적인 비전도 죄가 됩니다.

 

  ◐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무엇이든지 거머쥐려는 태도는 자기 영광을 위한 미성숙한 이기심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푯대를 향해 달리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빌 3:14). 바울의 푯대는 자신이 세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세운 것이었습니다. 그의 푯대는 자기 영역의 확대가 아니고 십자가의 고난으로 구원의 능력을 드러내시는 주님의 영역이 자신의 삶 속에서 넓혀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주의 손이 함께 하셔서 우리들의 지경이 넓혀지고 주님의 이름에 영광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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