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왈드 챔버스(Oswald Chambers 2)
(1874-1917)
헌신과 영적 침체
챔버스는 더눈 신학교에서 학생 겸 강사로서 머물 때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맞이하였다. 그것은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바치는 헌신이었다. 그러나 그의 헌신은 곧 무서운 영적 침체를 거쳐야 했다. 더눈 신학교는 비록 소규모의 사역자 양성소였지만 이 학교의 설립 정신과 맥그리거 학장의 덕망 때문에 상당히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특별 강사로 방문했었다. 그중에는 에딘버러의 세인트 조지 교회 목사로서 뛰어난 강해를 했던 알렉산더 화이트(Alexander Whyte)와 세계적 명성을 누렸던 에프 비 메이어(F.B. Meyer) 목사가 있었다. 챔버스는 이러한 유능한 인물들의 메시지에서 많은 감화를 받았는데 그의 헌신에 결정적인 계기를 부여했던 사람은 에프 비 메이어 목사였다. 그러나 챔버스의 헌신은 자신에 대한 절망감 때문에 4년간의 생지옥을 체험하게 되는 사건으로 이어졌다.
챔버스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1899년 5월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후에 그는 외부 초청을 많이 받았고 사람들은 그를 ‘성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깊은 어둠의 골짜기를 헤매고 있었다. 챔버스는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종말을 선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근 8년간 교제했던 크리시와의 관계를 끊었다. 챔버스는 휴가 때에 런던에 사는 크리시를 자주 방문했었고 서신으로 항상 왕래했었다. 그들의 사이는 너무도 가까워서 사람들은 그들이 비밀 약혼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정도였다. 챔버스는 장기간 사귀었던 여자 친구마저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는 데 방해가 된다고 여겼으므로 아픔을 참고 절연하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구설수에 오르고 말았다. 챔버스는 훤칠한 키에 지성적인 용모를 가진 자였다. 그는 인기 있는 독신 강사였고 주께 헌신한 영적 지도자였다. 그러다 보니 그를 흠모하는 여성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질이 나쁜 어느 여교우의 중상에 걸려 추문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문제의 여교우는 챔버스가 자기를 먼저 유혹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사 끝에 사실무근임이 드러났다. 그래도 사람들은 챔버스를 멀리하기 시작하였고 그의 평판에 악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은 챔버스 자신의 내적 의식이었다. 그는 스캔들의 여 교우와 성적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지만 자신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음을 인식하고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그는 위선과 이중인격을 혐오하였다. 그런데 자기 속에 그런 혐오의 요소들이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 앞에 아연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살아야 한다고 외쳤지만 자신 속에는 더러운 찌꺼기들이 깔려 있었다. 그는 하나님만이 칭송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면서도 은연중 자신이 사람들의 찬양을 즐기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더눈의 시민들은 그를 완벽한 성도로 간주했지만 챔버스 자신은 자기 속에 온갖 쓴 뿌리와 정복할 수 없는 자긍심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가 존경하는 훌륭한 영적 지도자들에게 이런 내적 갈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어떤 면에서 위로가 된다. 그 까닭은 우리 모두에게 죄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고 또한 그러한 갈등들이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으로 해소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오스왈드 챔버스가 겪었던 죄로 인한 영적 침체와 회복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간증은 우리에게 유익한 참고가 된다.
챔버스는 우리에게 자기 생애, 특히 더눈에 있을 동안 가졌던 체험들에 대해서 간증해 주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더눈에서 그의 마음속의 흑사병을 보여 주셨다. 그는 이 기간을 ‘지상에서의 4년간의 지옥’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매주 여러 차례 설교하였다. 불신자들은 구원도 받고 신자들은 듣고 크게 감동하였다. 그럼에도 그의 영혼에는 큰 어둠과 갈등이 있었다. 그는 자신 속에 무서운 죄의 성향이 있음을 알고 신음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그에 대한 갖가지 중상모략이 있었다. 그는 오해를 받았고 등 돌림을 당하였으며 악평을 들었다. 그는 맥그리거 학장과 그의 아내로부터 흔들리지 않는 신뢰와 동정에 찬 뜨거운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도무지 지탱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러한 고통 속에서 4년간 헤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굴복시키고 성령 세례를 체험하였다. 그는 이것을 ‘지상에서의 천국 세월’이었다고 표현하였다.
‘성령 세례는 당신에게 시간이나 영원을 생각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놀랍고 영광스러운 현재이다. 내가 나의 바뀐 성향에 대해서 이처럼 많이 말하는 것은 별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키셨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을 때 나는 거기 있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늘 거기에 있어 왔다.’
다음은 오스왈드 챔버스가 1906년 5월에 엑스터 홀(Exter Hall)에서 가졌던 집회에서 한 간증이다.
“나는 청소년 때에 거듭났다. 그때 이후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항상 즐거워했었다. 그렇지만 내가 자신을 온전히 주님의 사역에 맡긴 것은 여러 해가 지나서였다. 나는 더눈 신학교에서 철학을 강의했었다. 나는 성령께서 주시는 그 모든 것을 다 받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서 성령 세례를 위해, 그 뜻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단순하고 확실하게 간구하였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그날부터 4년간 나는 지옥과 같은 영적 암흑 속에서 흑사병을 치렀다. 이 기간에 내가 정신 병원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교우들의 사랑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내가 이러한 영적 질환을 앓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나를 사용하여 방황하는 영혼들을 주께로 회심케 하였다. 하지만 나 자신은 주님과 의식이 있는 교통이 없었다. 성경은 가장 지루하고 흥미 없는 책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죄악 된 본성이 지닌 부패와 사악성은 자신에 대한 염증을 일으켰다. 나는 자신이 알고 있던 기독교가 전부라면 그것은 하나의 기만이라고까지 생각하였다. 그때 어느 날 갑자기 누가복음 11:13의 말씀이 나를 사로잡았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그런데 나의 문제는 나 자신의 내적 부패와 그릇된 숨은 동기들을 가진 자로서 어떻게 감히 성령의 선물을 청구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을 요청하고 내가 그렇게 했음을 증언해야겠다는 마음도 일어났다. 그러면서도 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만약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가장 잘 아는 자들에게 내가 얼마나 부패한 마음을 가진 자인지를 드러내실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절망감과 황폐감이 엄습하였다. 마침내 나는 더 이상 현재의 상태로 계속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의 평판과 나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어떻게 달라지건 나의 곤고한 입장에서 벗어나기만을 원하였다.
어느 날 더눈에서 잘 알려진 한 여성 강사가 작은 규모의 집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그녀는 메시지를 전하지 않고 기도와 찬양 인도를 하였다. 우리는 ‘나를 다시 만지소서’라는 찬송을 불렀다. 나는 어떤 특별한 느낌을 갖지 않았지만 내 때가 왔음을 감지하였다. 나는 우뚝 일어섰다. 나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대로 수락하고 이를 자신에게 증명하려는 결의로 일어섰다. 그 자체만 해도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나의 결의를 알리고 좌석에 다시 앉은 다음이 더 난감하였다. 나를 잘 아는 여성 강사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참 좋은 모범을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챔버스 씨는 여러분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다시 일어섰다.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고 나 자신을 위해서 일어섰습니다. 내가 믿는 기독교가 거짓이든지 아니면 내가 아직도 기독교 진리의 핵심을 못 잡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나는 그 즉시 누가복음 11:13에 근거해서 성령의 선물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요청하였다. 나는 그때 천사들을 보지 못했고, 몸이 뜨거워지지도 않았으며, 무슨 능력도,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유별난 느낌도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옛날처럼 여전히 공허할 뿐이었다.
그 후 나는 집회 인도를 하게 되었는데 40명의 결신자를 얻었다.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했을까? 아니다. 나는 너무도 두려워서 다른 사역자들에게 일을 맡기고 곧장 맥그리거 학장에게로 달려갔다. 자초지종을 다 보고했더니 학장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성령의 선물을 청하면 능력을 받을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소? 당신이 인도한 집회의 열매는 바로 위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 무엇이오.’
내 속에는 커다란 깨달음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4년간이 지상 지옥이었다면, 그 이후 현재까지의 5년간은 지상 천국이었다. 하나님께 영광을! 내 심령의 고통의 심연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져서 흘러넘친다. 사랑이 시작이며 중간이며 끝이다. 그분이 내게 들어오신 이후부터 내 눈에는 오직 예수님만이 항상 보인다(눅 9:36). 당신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알게 될 때 죄의 능력과 억압이 사라지고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언할 수 없는 자유가 들어온다. 그리고 하나님의 왕자와 왕녀가 되어야 할 자들이 세상에 휘감겨 있는 것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를 받을지라도 그들의 구원을 원한다고 한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첨언해야 할 사항이 있다. 우리는 주의 백성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가서 헌신하는 것을 어떤 결정적인 한 사건에 전적으로 묶어서 소개하거나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어떤 특별 집회나 기도회에서 받았던 은혜를 강조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점진적이고 포괄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은 보이거나 느끼지 못하는 영역에서 꾸준히 역사하고 있다가 어떤 계기와 맞물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오스왈드 챔버스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고 충만한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될 때까지 하나님이 그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셨다고 의식된 사건은 적어도 세 번이나 있었다.
한 번은 영적 침체에 시달리며 밤늦게 챔버스가 자기 방에 앉았는데 애견인 트위드가 창문으로 들어와서 그의 무릎 사이에 앉아 머리를 치켜들고 그를 몇 분간 따뜻한 눈길로 조용히 쳐다보다가 다시 나갔다. 또 어느 날 밤이었다. 주인집의 어린 꼬마 소년이 겉옷을 입고 맨발로 그에게 와서 ‘챔버스 아저씨, 저는 아저씨를 사랑해요.’라고 말해 주었다. 또 한 번은 집회를 인도 중이었는데 한 정박아 소녀가 단상에 올라와서 말린 꽃 한 뭉치를 놓고 내려갔다. 그 꽃다발에는 ‘사랑을 보내 드려요. 바보 메기로부터’라는 작은 카드가 달려 있었다.
챔버스는 이러한 사건들이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전달하는 부드러운 천상의 손길이라고 여기고 큰 위로를 받았다. 이런 일들이 깊은 어둠에 잠긴 영혼을 격려하고 깨어나게 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됐다는 것은 자못 놀라운 일이다. 실로 챔버스의 어둡고 긴 칠흑의 밤은 정복자 그리스도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십자가의 상처 난 손이 두드리는 부드러운 손길에 의해 사라졌다고도 할 수 있다. 챔버스의 부인은 이렇게 술회하였다.
‘흑과 백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챔버스의 인생 화판에 햇볕과 그림자를 도두 내리고 있었다. 그때로 말하면 오스왈들 챔버스의 생애의 창세기였다.’
기나긴 영혼의 어둠에서 풀려나온 챔버스는 27세였다. 그의 탁월한 사역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투신하고 성령의 내주를 충만히 의식하면서 제일 먼저 바뀐 것은 그의 설교 스타일이었다. 그의 초창기 설교는 엄격하고 강직하며 하나님에 대한 공포심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훨씬 부드럽고 호의적이며 동정적인 메시지였다. 그러나 그 내용에는 전혀 타협이 없었고 감정에 호소하지도 않았다. 메시지가 끝난 뒤에 올리는 그의 기도는 청중들을 하나님의 존전으로 이끌어가는 듯하였으며 그의 메시지는 한 번 들으면 평생 잊히지 않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챔버스에게 영향을 끼쳤던 인물들
아무도 혼자서는 대성하지 못한다. 인간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피차 빚진 자로서 산다고 말할 수 있다. 오스왈드 챔버스도 혼자서 모든 진리를 다 깨우치고 자신의 힘으로 영적 거장의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많은 책을 읽었고 또 많은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에게 영적 영향을 준 자들은 유명 인사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맥그리거 학장이나 기도 연맹(The League of Prayer) 설립자인 리더 해리스(Reader Harris)와 같은 인물들을 챔버스는 크게 존경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영적 체험을 심화시키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느끼게 해주었던 사람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보통 신자들이었다. 이제 몇 사람의 실례를 예시하기로 한다.
리빙스톤 여사
챔버스는 더눈에 살 때 리빙스톤 여사와 자주 만났다.
“그녀는 아프리카 선교사였던 데이빗 리빙스톤(David Livingston)의 사촌과 결혼한 분이다. 지난 주에 나는 리빙스톤 여사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하늘 왕국에서 대환영을 받을 것이다. 나는 더눈에서 그녀를 만났던 마지막 밤을 기억한다. 그녀는 백발의 노파였다. 나를 고통스러울 정도로 껴안으며 말하였다. ‘젊은이! 나는 자네를 다시 못 볼 거야. 우리들이 자네 없이 어떻게 살지?’ 나는 더눈에 살 때 그녀의 남편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집은 언덕 위에 있었다. 새벽 새들의 지저귐 이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한 큰 집에서 리빙스톤 부인이 커다란 슬픔에
빠져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기도는 담대한 것이었다. 나는 내 방에서 그녀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하나님 앞에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존 카메론
이 사람은 독신으로서 스코틀랜드의 북쪽에서 양을 치는 목자였다. 챔버스는 1백 마일이 넘는 거리를 여행하며 이 산속의 목자를 만나곤 했었다. 존 카메론은 자신의 수입을 거의 다 주님의 일에 바치며 개인 전도와 기도에 전념하였다.
“나는 그에게서 큰 걸음을 배웠다. 나는 왕족의 피가 흐르는 영혼들과 함께 하나님의 산맥들을 거니는 것을 배웠다. 존 카메론을 아는 자는 거의 없었다. 나는 그의 죽음의 병상에 있었던 때를 기억한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높은 벤 네비스 산 중턱에 살았는데 말을 할 수 없어 자기 팔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의 팔에 입 맞추었다. 깊은 눈이 쌓인 밤이었다. 그는 우람한 산 바위처럼 건장한 고산 지대의 노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은 너무도 깊고 부드러웠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잘 알았던가! 그리고 얼마나 많이 그 높은 산들 위에서 내게 기도를 가르쳤던가! 한밤중에, 새벽 여명에, 혹은 밝은 대낮에 나는 그 연로한 기도의 용사 곁에서 함께 무릎을 꿇었다. 이런 숨겨진 인물들을 내게 알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지극한 선행이었다.”
도널드 매킨토시
챔버스는 스코틀랜드의 야산들을 거닐기를 좋아하였다. 매킨토시는 시골 사람이었는데 챔버스와 자주 등산한 친구였다.
“나는 여러 번 그와 주일날 14마일의 야산들을 거닐며 담소하였다. 이분의 생각은 컸고 그의 입에서는 큰 말들이 나왔다. 나는 하나님의 단련을 받아 은혜와 지혜가 넘치는 그의 모습을 자주 추억한다. 그분과의 교제에 대해 나는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