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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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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왈드 챔버스(Oswald Chambers 3)

(1874-1917)

 

기도 연맹

챔버스의 명성은 점차 영국 전역으로 번지기 시작하였다. 챔버스는 더눈 신학교의 전임 강사였지만 여러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그런데 그를 강사로 초빙하여 전국 순회를 돌게 한 ‘기도 연맹’이라는 단체가 있었다. 이 단체는 리더 해리스(Reader Harris)라는 사람이 세웠다. 그는 런던의 변호사였는데 법조계에서 평판이 높아 국왕의 법률 자문 위원으로 봉사하였다. 그는 1884년 무디의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영국의 부흥을 위해 기도 연맹을 창립하였다.

그런데 이 기도 연맹의 한 집회에서 챔버스는 매우 흥미 있는 인물을 만났다. 그 사람은 쥬지  나까다라는 일본인 전도사였다. 나까다는 자신의 영적 고갈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 미국의 무디 성경학교(Moody Bible Institute)로 가던 중 영국에 잠시 들러 기도 연맹 집회에 강사로 참석하였다. 챔버스와 나까다는 금방 친해져서 기도 연맹의 집회를 마치고 잉글랜드의 케직 사경회(Keswick Convention)에 참석하여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들은 당시의 일급 강해자들인 에프 비 메이어(F.B. Meyer), 스튜워트 홀던(Stewart Holden), 그리프스 토마스(Griffith Thomas)의 메시지에 흠뻑 젖은 후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나까다는 미국 체류가 끝난 1907년 챔버스를 대동하고 일본으로 가서 1개월간 Y.M.C.A 주최로 전도 집회를 열었다. 챔버스는 나까다의 매력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하였다.

이 작은 일본인은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데 선수였다. 그는 내 마음을 빼앗고 그다음 내 부모님의 집을 방문하여 내 부친과 형제들의 마음을 빼앗아 그들이

 나를 일본으로 기꺼이 다녀오게 하였다.”

 

챔버스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빈번한 초청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9년 반 동안 맥그리거 학장과 동역했던 더눈 신학교를 사임하고 전문 순회 강사의 길로 들어섰다. 챔버스는 맥그리거 학장으로부터 자신이 영적으로 매우 곤고한 지경에 빠졌을 때 받았던 도움을 생각하고 자기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고 미국과 일본으로 떠났다.

챔버스는 해외 집회를 무사히 잘 마치고 귀국한 이후에 더욱 바빠졌다. 그는 주로 기도 연맹의 강사로서 전국을 돌며 집회를 열었다. 그는 잉글랜드의 남쪽 플리머스에서 스코틀랜드의 동부 아버딘까지 기차로 여행하였고 하루에 2, 3회 모임을 가졌으며 4주 동안 8곳에서 20회 이상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는 심신이 지쳐 있었으나 곧장 미국에서의 또 다른 장기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야 했다. 그가 처음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는 나까다 일본 전도사가 동행했었다. 그러나 이번의 동행자는 나까다 전도사보다 훨씬 긴 세월을 챔버스와 동행하게 될 것이었다.

 

선상에서의 로맨스

오스왈드 챔버스는 미국으로 향하는 대서양 여객선을 타기 전에 아멜리아 홉스 부인으로부터 한 통의 서신을 받았다. 내용인즉 그녀의 막내딸 게트루두(Gertrude)가 같은 배에 승선하니 잘 보살펴 달라는 부탁이었다. 당시에는 과년한 처녀가 혼자서 대서양 여행을 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홉스 부인과 그녀의 딸은 챔버스의 동생인 아서(Arthur)가 목회하는 교회의 교인들이었다. 챔버스는 약 2년 전 그들의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었다. 그때 게트루드는 22세였고 챔버스는 32세였다. 이들은 2년 후 공교롭게도 미국으로 가는 여객선 위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의 만남은 목사와 성도의 관계가 아닌 청춘의 이성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재회였다.

챔버스는 영국에서 뉴욕까지 10일씩 걸리는 발딕 호의 대서양 여행 동안 독서와 기도 시간을 가지면서 좀 쉴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의 마음과 시간을 빼앗는 유별난 체험을 갖게 되었다. 게트루드는 당시 24세였는데 그녀의 여행 목적은 뉴욕에 사는 친구로부터 그곳에서 비서 일이 많다는 소식을 들었으므로 일자리를 구하러 가는 중이었다. 챔버스는 게트루드를 만나 비디(Biddy)라는 애칭을 지어 주고 선상에서 산책을 하거나 식당으로 함께 다니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들은 매일 만날 때마다 서로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하였다. 비디는 챔버스의 지성과 밝은 유머와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께 대한 그의 깊은 사랑에 마음이 끌렸다. 챔버스는 비디의 결단력과 사람들에 대한 선의의 관심과 그리고 동물과 자연에 대한 그녀의 사랑에 호감을 느꼈다. 자연히 그들의 만남은 선상의 로맨스로 진전되었고 만날수록 서로 취미나 관심거리에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챔버스는 비디로부터 그녀가 자란 환경에 대해서도 듣게 되었다. 비디는 어릴 때 기관지가 나빠 겨울이 되면 2개월씩 결석을 해야 했다. 영국의 겨울 날씨는 음산하고 암울하여 기관지 환자에게는 고통스러운 기후이다. 비디는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집에서 어머니를 도우며 살아야 했다. 게다가 15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녀는 정규 교육을 제대로 마칠 수 없었지만 꿈이 많고 의지가 강한 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장차 영국 총리의 비서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다. 준비를 위해 비디는 속기와 타자를 독학으로 집에서 익혔다. 그녀의 모친과 언니가 책을 읽으면 비디가 속기로 받아 적는 연습을 하였고 그 내용까지 파악하려고 애썼다. 그 결과 비디의 속기는 1분당 250자로서 사람의 빠른 말의 속도보다 더 빨랐다. 비디는 나중에 영국 무기 제조장의 한 고급 장교의 비서로 취직했다가 경력을 쌓은 후 런던의 법률 단체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더 큰 꿈을 안고 미국으로 가는 선상에서 평소에 훌륭한 영적 지도자로 흠모했던 챔버스의 여행 동반자가 되었다.

챔버스와 비디는 10일간의 해상 로맨스를 가슴에 안고 헤어졌다. 그러나 그들의 헤어짐은 영원할 수 없었다. 34세의 노총각인 챔버스의 마음은 이미 신부감을 만났다는 기쁨에 뛰고 있었고 비디 역시 뉴욕에서의 고용보다 더 큰 챔버스와의 결혼의 꿈에 가슴이 설레며 하선했기 때문이다.

 

서투른 연서(戀書)

오스왈드 챔버스는 비디와 헤어진 후 그녀에게 사랑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연서에는 소질이 없었다. 그가 비디에게 보낸 대부분의 편지들은 적어도 현재 보존된 것들에 의하면 애인에게 보내는 편지라기보다는 하나의 짧은 메시지나 교훈집과 같은 인상을 준다. 아마도 그의 편지들을 편집해 낸다면 그 자체로서도 또 한 권의 헌신용 책자가 될 것이다. 몇 편의 실례를 든다면 이런 내용이다.

주님과 그분의 사역에 대한 나의 갈증이 예전보다 훨씬 더 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들이 얼마나 적은지요. 그리고 주께 대한 나의 가장 열렬한 사랑도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요. 나는 그분을 향해 불타오르는 자들을 거의 알지 못합니다.”

 

나는 죄와 불신앙으로 곤경에 빠진 수많은 영혼들의 비참한 삶을 볼 때마다 슬픔에 잠깁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당신을 생각하면 기분이 전환됩니다.”

챔버스는 자신의 생각을 확연하게 명시하고 독특한 표현으로 깊은 뜻을 전달하는 보기 드문 문장가였다. 그러나 사랑의 편지를 쓰거나 이성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알리는 데에는 수줍고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분명 그는 이 분야만은 마스터를 못한 듯하다. 그는 모친에게 비디에 대한 이야기를 편지로 썼다. 그는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횡설수설하였다. 결국 자신이 사랑에 빠졌는데 감정이 이상스럽고 표현을 못 하겠다는 것이었다.

 

어머님, 제 편지가 너무 서두가 없고 갑작스러운 점을 용서하십시오. 저는 이런 종류의 글을 도무지 잘 쓸 수 없습니다. 저는 비디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려고 하는데 어머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비디는 얼마 후 미국에서 귀국하여 챔버스의 가족을 만났고 런던에 있는 성 바울 사원에서 약혼식을 가졌다. 이 대사원은 챔버스와 비디가 다 같이 좋아하는 곳이었다. 성 바울 사원에는 홀만 헌트(Holman Hunt)의 유명한 ‘세상의 빛’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성화 앞에서 챔버스는 약혼반지를 비디에게 끼워 주었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계시록 3:20절의 말씀이 새겨져 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챔버스와 비디가 이 말씀이 적힌 그림 앞에서 약혼식을 가졌던 까닭은 매우 뜻깊은 것이었다. 그들은 주님께 먼저 자기들의 마음을 열어 바치고 주님의 일에 우선권을 두며, 그다음 서로의 마음을 열어 사랑하겠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챔버스는 비디에게 여러 번 주께 대한 자신의 헌신을 다짐했었다.

나는 당신에게 줄 집이나 돈이 없소. 내게 있는 것은 이 크고 사나운 세상으로 나가서 제자를 심으라는 주님의 명령뿐이오. 나는 주님의 크나큰 부르심에 엄숙히 깨어 있소!”

 

챔버스는 또한 자신이 비디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분명히 말하였다.

나는 주님께 충성을 다할 것이오. 당신은 다른 모든 일을 제쳐놓고 내가 주께 충성하도록 나를 도와주리라고 믿소.”

챔버스와 비디는 다음 해 챔버스의 동생인 아서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비디는 챔버스가 기대한 대로 일평생 주께 대한 전적 헌신의 삶을 살았고 서로 마음을 열고 깊이 사랑하였다. 챔버스는 1915년 이집트 사역을 위해 집을 떠나면서 아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다.

당신이 내게 시집을 왔을 때 내게는 주님 이외에는 아무런 장래의 보장이 없었소. 그때 당신은 나만 가졌소. 그래도 당신은 나를 깊이 사랑하였소. 그 사랑은 내게 방패며 기쁨이며 힘 있는 성벽이었소.”

 

성경 훈련 대학

오스왈드 챔버스는 학생들과 함께 기숙하면서 말씀을 가르치고 실천적인 삶을 나눌 수 있는 성경 학교의 설립을 갈망해 왔었다. 그의 이러한 취지에 동조한 여러 성도들은 힘을 모아 1910년 12월에 장소를 구입하고 흑판에서부터 부엌 용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구와 장비를 정성껏 준비하였다. 그래서 다음 해 1월부터 ‘성경 훈련 대학’(B.T.C)이라는 이름을 걸고 신학교가 시작되었다. 장소는 런던의 크레팜 콤먼 노스 사이드45번지였다. 이 건물은 지하실이 있는 7층 빌딩이었고 실내 장식이 호화로웠다. 챔버스는 덕분에 아내와 함께 무료로 매우 훌륭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이 건물은 25명의 기숙생을 수용할 수 있었고 식당은 50명 이상이 한 번에 식사를 할 수 있을 만큼 널찍하였다. 학비는 학생들이 일부를 부담하고 나머지는 ‘기도 연맹’에서 자원하는 후원자들에 의해 충당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등록하는 학생들이 극소수였다. 첫 학생이 첫해에 들어왔지만 하룻밤을 지낸 후 귀가한다는 짧은 노트를 남겨 놓고 떠나 버렸다. 챔버스는 두 번째 등록한 한 명의 여학생을 놓고 강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점차 학생 수가 늘어나서 1년 후에는 25명이 다 채워졌다. 챔버스는 학장으로서 대부분의 과목을 가르쳤고 초청 강사들이 와서 특강을 하였다. 그리고 B.T.C 신학교 내에 성경 통신 강좌가 개설되어 1년에 6백 여 명이 통신으로 챔버스의 지도를 받았다. B.T.C신학교는 학생들 이외에도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항상 문을 열어 두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42)라는 예수님의 교훈은 챔버스 자신의 모토였다. 그래서 한 학생은 B.T.C 신학교를 이렇게 평하였다.

이 신학교는 어려운 자들의 낙원이다. 이곳은 깨어지고 멍들고 불운하고 정처 없고 지친 자들에게 언제나 문을 열어 준다.”

 

B.T.C 는 개교 1주년을 맞아 캠블 모건(Campbell Morgan)의 기념 축사를 들었다. 당시 최고의 강해 설교자로 존경받던 캠블 모건 목사가 별로 알려지지 않은 한 작은 군소 신학교를 방문하여 축사를 해주었다는 사실은 B.T.C의 사역이 객관적인 호평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B.T.C 는 1911년에 열어 1915년까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며 착실히 성장해 갔다. 챔버스도 옛날에 비하면 매우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그의 아내는 케서린을 낳았고 챔버스는 바쁜 중에도 전국 순회 집회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챔버스의 사역에 커다란 변화가 왔다.

 

전쟁과 이집트 사역

영국 정부는 19세부터 40세까지의 남자를 징병 대상으로 삼았다. 챔버스는 몇 달만 지나면 41세가 될 것이므로 조금만 지체하면 징용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신학교와 병역 의무를 놓고 양단간 갈등하였다. 그는 이렇게 일기에 적었다.

주님, 저는 당신이 저를 B.T.C 신학교에서 사역하게 하신 것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시국 때문인지 제가 이곳에 있는 것이 현재 하나님의 뜻인지 의아스럽습니다. 제가 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그르치지 않도록 저를 진정 시켜 주시고 힘을 내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은 챔버스가 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셨다. 1915년 B.T.C에서는 ‘선교의 밤’을 가졌다. 강사는 씨.티. 스터드(C.T. Studd) 선교사였다. 그는 캠브리지 대학의 크리켓 선수였는데 그 당시 스포츠맨으로의 그의 인기는 영연방 전역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또한 부친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고 이를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후 선교사가 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화젯거리였다. 스터드 선교사는 중국과 인도 사역을 했는데 모국을 잠시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챔버스 목사의 초청으로 B.T.C에 오게 되었다. 이 ‘선교의 밤’ 집회가 끝난 후에 챔버스는 아내와 의논한 후 이집트로 가기로 자원하였다. 그는 디모데후서 4:6절과 누가복음 10:1, 19절의 말씀으로 자신의 해외 사역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고 Y.M.C.A가 관리하는 이집트 사막 캠프의 채플린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자신의 운명을 내다보기라도  한 듯이 디모데후서 4장 6절로 해외 선교의 인도를 받았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성경 훈련 대학은 챔버스 학장의 부득이한 사임으로 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4년간 B.T.C는 많은 사역자를 배출하였다. 1911년에서 1915년까지 오스왈드 챔버스의 강의나 메시지를 직접 들은 자들은 방문자들과 파트 타임 학생들을 포함해서 3천 명이 넘었다. 그의 손으로 일일이 채점을 받았던 성경 통신 강좌 등록자들도 2천 여 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기숙사에 살면서 공부했던 신학생 중에는 약 50퍼센트가 해외 선교사나 국내 사역자로 봉사하였다. 이 같은 훌륭한 열매는 두말한 나위없이 오스왈드 챔버스의 피땀의 결정(結晶)이었다.

챔버스의 헌신은 데이빗 맥카스랜드(David MaCasland)가 쓴 ‘Abandoned to God’(하나님께 내맡겨진 사람)라는 챔버스 전기 제목에서 잘 표현되었다. 그는 오로지 하나님께 자신을 내맡기고 모든 일에 심혈을 쏟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아무 일에도 염려하지 않았고 주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의 삶을 항상 기뻐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언제나 선하시다고 믿었다. 그리고 날마다 성경 말씀을 새롭게 받는 희열과 노력 속에서 살았다. 그는 ‘매일의 빛’(Daily Light)이라는 소책자를 날마다 읽었는데 이 책은 순전히 성경 구절들만 모아서 365일로 편집한 헌신용 책자였다. 본인도 한동안 사용했었는데 지금도 영국 성도들이 애용하는 말씀 묵상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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