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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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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왈드 챔버스(Oswald Chambers 4)

(1874-1917)

 

돌아오지 않는 여행

영국에서 이집트로 가는 여객선은 전쟁 중이라 대만원이었다. 챔버스는 새벽 묵상을 위해 구명선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래도 그는 즐거워하였다. 그런데 그가 말씀을 읽고 기도했던 구명선은 다시 귀국할 것이었지만 속에 있었던 챔버스 목사는 되돌아오지 못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이집트로 향하던 위에서 시간마다 하나님의 화평과 은혜를 누렸다고 술회하였다. 이것은 주님의 품으로 향하는 그의 마지막 여행에 대한 무의식적인 간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마지막 승선 일자는 돌아오지 못할 여행에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채워져 있다.

나는 여행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배는 나의 벧엘이며 나의 생명선이다. 나는 쉬면서 즐거워한다. 나는 주께서 이집트의 육지에서 펼치실 놀라운 사역들을 보기 위해 가고 있다. 모르는 것이 매력이다. 그냥 주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고 주께서 당신의 목적들을 이루어 가실 것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멋있는 일인지 모른다.”

챔버스가 도착한 사역지는 제이툰(Zeitoun)이라는 곳이었다. 카이로에서 떨어진 사막인데 영국, 호주, 뉴질랜드의 군인들을 수용하는 대형 캠프장이었다. 이곳은 군인들을 전쟁터에 투입하기 전에 대기 시켜 두는 장소였다. 절반 이상이 일단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군인들의 사기가 높지 못하였고 심리적인 염려와 영적인 필요가 많은 곳이었다. 챔버스는 이러한 군인들을 위해 Y.M.C.A 막사를 세우고 저녁마다 성경을 가르쳤다. 군인들은 막사에서 편지도 쓰고 차도 마시면서 있었다. 챔버스는 때때로 병사들을 데리고 음악회나 영화 구경을 하러 갔었고 카이로 근처의 병원들에 다니면서 전도도 하고 부상병들을 위로하였다. 전쟁은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끔찍한 만행이지만 전도의 측면에서 보면 매우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챔버스는 제이툰에서의 사역만 해도 없이 바빴지만 이스메일리아(Ismailia)라는 다른 병영으로 가서 3개월간 전도하였다. 이곳은 수에즈 운하 근처였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인지라 많은 군인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이툰보다 환경은 열악하였다. 온도는 평균 섭씨 30도의 불볕이었고 사막의 무더운 바람이 끝없이 모래를 날렸다. 그리고 운송 수단으로 쓰였던 말들의 분뇨 때문에 낮에는 파리 떼가 우글거렸고 밤에는 모기떼가 극성을 부려 말라리아 환자가 속출하였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챔버스는 사력을 다해 봉사하였다. 그는 제이툰으로 돌아온 후에도 새로 배치된 군인들에게 말씀을 강해하였다. 날마다 전우들의 전사 소식을 들으며 고통과 불안에 젖어 있던 병사들은 챔버스의 복음 강해를 열심히 듣고 회심하는 일이 많았다. 그들이 다시 격전지로 옮겨 때마다 챔버스는 그들의 이름을 기도 수첩에 적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는 주일날에는 3, 4회의 메시지를 전하였고 평일에도 뜨거운 모랫길을 2마일씩 걸어 부상병들을 심방했으며 저녁에는 카이로에 가서 집회를 열었다.

 

사막의 로맨스

챔버스의 이집트 사역은 본국에 있는 많은 교우들에게 커다란 격려가 되었다. 결과 챔버스의 부인인 비디(Biddy) 캐서린이 먼저 제이툰으로 왔고, 이어서 다른 명의 부녀자들도 자원하여 제이툰 캠프에서 봉사하였다. 비디는 여유가 생기면 비스킷과 케이크를 만들고 차를 준비하여 고국을 떠난 외롭고 힘든 병사들을 대접하였다. 그녀는 런던의 B.T.C. 신학교에서처럼 챔버스의 강의나 설교에 거의 모두 참석하여 속기로 기록하였다. 그녀는 나중에 잡지용 원고들은 다시 타자하여 본국으로 우송하였다. 캐서린은 어렸고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비디가 이런저런 캠프 일을 도우면서 밤늦게 원고를 정리한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챔버스는 하루 이틀 집을 비울 때마다 베개 밑에 감사 편지를 비디에게 남겼다.

나는 당신이 본국에 사는 다른 여자들처럼 조용하고 아늑한 문화적 혜택을 버리고 그대로 손에서 입으로 날마다 근근이 연명하는 곳으로 오게 것을 알고 있소. 이것은 하나님과 나에 대한 당신의 크나큰 사랑이오. 나는 경건히 고개를 숙여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시기를 비오.”

챔버스는 비디와 결혼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서로 약속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돈이 없어서 주의 일을 감당치 못하겠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챔버스는 물론 주님의 사역을 위해서는 헌금이나 헌물의 필요성을 알렸지만 자신의 경제적 필요를 위해서는 전혀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의 Y.M.C.A. 사역도 자원봉사였으므로 월급이 없었다. 그래도 그는 가끔이나마 용돈이 생기면 고생하는 아내를 데리고 카이로의 식당에 가서 외식하였다. 그는 때로는 비디에게 모자를 주기도 하였고, 한잔이나마 시원한 호텔 라운지에서 마시며 아내와 담소할 만큼 자상하게 애정을 표현할 알았다. 그는 또한 바쁘고 피곤한 아내를 돕기 위해 캐서린의 머리도 감기고 파마도 시켜 주었다. 아주 영적인 사람은 오직 성령과 기도와 사역만 알지 가정일에는 관심도 취미도 없다는 말을 챔버스 목사에게는 맞지 않았다. 그는 아내와 딸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제로 시간을 내어 도와주면서 사랑하였다. 그는 일에 파묻혀 아내와의 낭만을 잊은 자도 아니었다.

 

사막의 밤하늘은 언제나 유난히 총총한 별빛으로 수놓아져 있다. 챔버스는 케서린이 잠들면 비디를 데리고 주변의 사막길을 함께 걸었다. 그들은 서로의 가슴을 열고 현란한 밤하늘 아래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하였다. 그럴 적마다 사람의 마음은 새롭게 한마음이 되었고 서로 붙잡고 있는 손들을 통해 남편과 아내로서의 짙고 따스한 애정이 교차하였다. 무덥고 고달픈 사막의 전쟁 캠프에서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봉사하는 이들에게 잠시나마 부부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할 있게 것은 하나님의 각별한 은혜였다. 챔버스와 비디에게는 부부의 사랑을 문화적인 수단이나 물질적인 선물로 표현할 있는 환경도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날마다 밟고 사는 뜨거운 모래밭 길이 조용한 로맨스의 길이 되게 하셨고 없이 바라볼 있는 하늘의 별들을 아름다운 빛으로 밝히셨다.

 

갑작스러운 죽음

챔버스는 1917 9 24 제이툰의 저녁 강해를 위해 전도서를 시리즈로 시작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급성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받았으나 회복되지 못하고 같은 11 15 소천하였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다음은 챔버스 목사가 주님의 존전으로 불려가기 1개월 전에 기록한 일기이다.

저녁 예배 후에 내게는 보석 같은 체험이 있었다. 병사가 양심의 무거운 짐을 안고 나를 만나러 왔다. 이야기를 나눈 후에 우리는 청명한 달빛 밑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는 일용할 양식에 대한 누가복음 11:3절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요한일서 5:14-15절의 약속을 붙잡고 간구하였다. 그리고 그는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주님의 말씀을 받았다( 14:27).

영혼이 우리 주님의 나라에 이처럼 말씀을 통해 들어가는 경이를 말로써 표현할 없다. 죄인들이 복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놀라운 신비는 아무리 목격하여도 익숙해질 없다. 이러한 체험은 너무도 커다란 기쁨이다.”

이것이 오스왈드 챔버스의 사역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면서 충만한 기쁨을 누렸던 자였다. 그는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깨닫고 자기를 주께 던지는 기적의 삶을 보며 더없이 만족해하였다. 이집트의 병영 캠프는 메마른 사역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으 챔버스의 영혼에서 주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의 강물이 흘러넘치게 하시고 그의 사역을 열납하셨다. 그리고 그의 메시지를 통해 영원한 생명수의 원천에 가슴이 이어진 자들은 다른 메마른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달해 주었다. 이런 뜻에서 이사야 35장에 실린 메시아 시대의 예언은 이집트의 사막에서 실제로 사역했던 챔버스 목사의 헌신적인 봉사를 통해 복음의 능력이 실감 나게 다시 증명됐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때에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것이며….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영원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 35:6-10).

 

오스왈드 챔버스의 시신은 군인 장으로 카이로의 국군묘지에 안장되었다. 군인들이 자진하여 장례 행렬을 따랐고 제이툰에서의 챔버스 목사 기념 예배에는 1 천여 명이 넘는 조객들이 각기 챔버스 목사와 그의 사역에 대한 소중한 추억들을 안고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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