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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와 하나님의 예정

마가복음 3: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막 3:19).

 

열두 제자 가운데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두 사람 있습니다. 한 사람은 “야고보의 아들 유다”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가룟 유다입니다(눅 6:16). 신약에서 또 한 사람 유명한 유다가 있는데 그는 예수님의 동생이고 유다서를 쓴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판 유다는 가룟 유다라고 했는데 가룟(Kerioth, 수 15:25-그리욧)은 유대의 지명입니다. 열두 제자 중에서 유다만 북부 갈릴리 출신이 아니고 남부 유대 사람이었습니다.

열두 제자들 가운데 예수를 팔 유다가 들어 있다는 사실은 사뭇 놀라운 일입니다. 왜 예수님은 유다를 사도의 한 사람으로 선택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유다의 실체에 대해서 모르셨을까요?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택하시기 전날에 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눅 6:12-13). 그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인도를 잘못 받으신 것일까요?

유다는 예수님이 선택한 사도의 한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을 배반하고 자살로 끝났습니다. 그의 구원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유다는 왜 예수님을 팔아넘겼을까요? 그는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예수님을 따랐을까요? 가룟 유다의 사건이 주는 교훈은 어떤 것일까요? 

 

가룟 유다는 성경에서 예언된 인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다락방에 모였던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행 1:16).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행 1:20).

 

    ☞ “그들의 거처가 황폐하게 하시며 그들의 장막에 사는 자가 없게 하소서” (시 69:25)

다윗은 본 절에서 악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자로서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행 1:18-19).

유다의 끔찍한 죽음은 다윗의 간구가 가장 드라마틱하게 성취되었음을 입증합니다(행 1:18; 마 27:5).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유다의 죽음과 그로 인한 사도직의 결손을 시편 69편 25절과 109편 8절 말씀인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의 성취로 보았습니다(행 1:20).

 

베드로가 인용한 시편 69편과 109편을 읽어보면 이것이 구체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라고는 쉽게 알 수 없습니다. 일차적인 문맥이 다윗에게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저자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시편들의 내용은 다윗의 상황과 개인적인 체험의 영역을 훨씬 넘어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이스라엘의 선왕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받은 고난과 박해는 새로운 다윗인 예수님이 받으실 고난 속에서 정확하게 재적용되고 온전하게 성취되었다고 보았습니다.

 

☞ 시편 69:4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

다윗은 사울 왕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당하였습니다. 그는 왕이 될 때까지 사울 왕의 증오심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며 늘 쫓겨 다녔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에도 그를 배척하고 죽이려고 하였습니다(요 7:19; 8:37, 40; 막 3:6).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다윗을 까닭 없이 미워했는데 이 말씀은 더 큰 다윗이신 예수님에게서 온전하게 이루어졌다고 하셨습니다(요 15:25).  즉, 다윗이 받은 이유 없는 증오는 예수님의 삶에서 더 강렬하게 드러날 유대인들의 증오심을 내다본 예언적 진술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말씀을 자신의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시편 69편 4절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해석이 참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시편 69:9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에서 제자들은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요 2:17)고 했습니다. 다윗은 주의 전을 사모한 의로운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이신 부패한 성전에 대한 격렬한 열정은 다윗이 주의 전을 사모한 열심을 훨씬 더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열심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보이실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열정의 불꽃을 낮은 레벨에서 진술한 것이었습니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시편 69편 9절의 후반 절을 인용하면서 이것이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응했다고 했습니다(롬 15:3). 중요한 것은 제자들이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 본 시편의 여러 부분을 예수님에 대한 궁극적인 계시로 이해한 것입니다.

 

☞ 시편 69:21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이 표현은 원래의 문맥에서는 다윗이 받는 멸시와 학대에 대한 상징적 진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문자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눅 23:34; 요 19:28-30).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이것을 성경 말씀에 대한 성취로 보신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요 19:28).

예수님은 다윗의 시에서 언급된 부분들이 자신이 당하시는 구속 사역의 한 정점에서 그대로 성취되어야 할 것으로 보셨습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한결같이 시편 69편 21절의 진술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예시한 것으로 적용하였습니다(마 27:34; 막 15:23; 눅 23:36; 요 19:29).

 

유다의 배신이 예언되었다면 유다에게 책임이 있을까요?

 

다시 사도행전 1장 16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하여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행 1:16).

 

여기서 마땅하다는 말은 마땅히 이루어질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표준새번역에서 “마땅히 이루어져야 했습니다”라고 했는데 이것이 더 의미가 살아나는 번역입니다(The scripture had to be fulfilled. NIV, ESV).

그렇다면 유다는 성경에서 자신에 대해서 마땅히 일어날 일로 예정된 일을 행했으니까 책임을 지울 수 없지 않을까요? 유다에게는 이것은 옵션이 없는 숙명의 길이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미리 작정하시고 그대로 일어나도록 하신 일이니까 유다가 희생물이 된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책임 문제는 인간의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와 인간의 책임을 나란히 병행시키고 있습니다.

 

☞ “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가 통과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넘기시려고 그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셨고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신 2:30).

 

헤스본 왕은 이스라엘 백성이 조용히 그의 땅을 통과만 하고 양식은 돈을 주고 사겠다고 했으나 듣지 않고 이스라엘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런데 시혼 왕의 이러한 완강한 마음은 자신이 먹은 것이지만 그 뒤에는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땅을 이스라엘에 유업으로 넘기시려고 작정하신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시혼 왕은 자신의 악하고 완고한 행위로 멸망하였습니다.

예정된 일이라고 해서 인간에게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논리로 보면 모순입니다. 그런데 유다에게 옵션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순전히 타의에 의해서 숙명적인 삶의 희생물이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인간도 장난감 인형이나 로봇처럼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도록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을 지나치게 논리적으로 따지거나 숙명론적으로 접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엘리 선지자의 아들들에 대한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삼상 2:12).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삼상2:17).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 (삼상2:25).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다는 것은 그들의 악행과 상관없는 작정이 아닙니다. 그들의 악행과 직결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인위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미리 뜻하신 것이라면 그것은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고유한 원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 원칙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를 순종하지 않는 불효자들이었고 제사용 고기를 마음대로 빼앗아갔습니다. 그들이 선한 자들로 살았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시려고 악한 자들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악을 행하는 자들로서 마땅히 심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한도가 지나쳐서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의 책임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책임을 져야 할 일을 행했다면 하나님 편에서 어떤 작정을 하셨다고 해서 항의할 수 없습니다.

▶ 자의에 의한 인간의 악행 뒤에는 하나님의 숨겨진 작정이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와 하나님의 숨겨진 작정 사이의 관계는 우리가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작정을 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스스로 죄를 짓습니다.  인간은 피동적인 외부 조작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에 편향된 존재입니다. 그래도 죄는 기본적으로 자기가 원해서 짓습니다. 불가피하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더라도 인간의 죄는 기계적이거나 숙명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타락한 죄인들이지만 죄를 짓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의지나 그 의지의 실행 능력이 완전히 박탈된 순전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운명적이고 기계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다가 모두 심판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어떤 기계적인 조작이나 자유 의지의 박탈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지나 자유를 박탈하고 인간을 기계적으로 움직여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일이 일어나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작정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인간이 원치도 않고 행하지 않는데도 일이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의 행위 뒤에서 인간의 책임 영역을 방해하거나 간섭하거나 조작하지 않고서 비밀히 진행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계시되지 않은 영역입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책임은 독립적인 관계가 아니고 대응적인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에 대응해서 자기 뜻을 이루어 가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어떤 일을 일으키신다 하여도 그것은 역시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위, 곧 인간의 판단과 의지와 계획을 인위적으로 간섭하지 않고서 일으키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과 모든 상황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권적인 계획대로 세상을 이끌어 나가십니다. 그러나 억지로 인간의 책임 문제를 제외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이 일방적으로 일어나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제 유다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유다는 성경에서 예고된 마땅히 이루어져야만 하는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행한 악행에 대한 책임을 면책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유다를 사용하여 십자가의 구속이 달성되게 하시지 않았느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유다는 하나님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사용하셨기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의도적인 죄악 된 행위 때문에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의 악행은 강요에 의한 것도 아니었고, 자신의 의지를 박탈당한 상태에서 피동적으로 저질렀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의지적인 행위와 책임이 하나님의 주권과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반면, 하나님은 자기 뜻이 성취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의 자의적인 결정과 행위를 사용하신다는 것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사용하셔서 하나님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여전히 자의로 자신의 계획에 따라 죄를 지었기 때문에 무서운 심판을 받았습니다.

 

☞ 마가복음 14: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성경은 예수가 대속의 죽음을 치를 것을 예고하였다. 그런데도 유다는 자신의 악행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이벤트를 일으키는 것과 인간이 그러한 이벤트에 대한 책임을 동시적으로 갖는 것에 대한 실례의 하나이다” (ESV notes, Mk. 14:21)

 

성경의 사건 속에서 같은 절에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작정이 나란히 병치된 경우도 있습니다.

☞ 사도행전 2:23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예수님이 십자가 죽임을 당한 것은 하나님의 작정이었고 미리 아신 일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은 메시아가 고난을 반드시 겪어야 한다고 하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행 17:2-3; 26:22-23; 눅 24:25-26, 45-46; 벧전 1:11). 그런데 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된 것은 악인들의 자발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 창세기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요셉의 형제들은 그를 애굽의 상인에게 팔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이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목적에 쓰이도록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유다도 자신의 의지로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다의 배신을 어떻게 사용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성취되게 하는 데 쓰였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유다의 배신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작정과 섭리에 의해서 그와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게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킴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요 6:70).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으나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를 반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핏값을 성전고에 둘 수 없었기 때문에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로 삼았습니다(마 27:3-8). 마태복음은 이것이 예언의 성취라고 증언합니다(참조. 렘 19:1-3; 슥 11:11-13).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마 27:9-10).

 

유다는 자신의 의지와 계획과 행동으로 예수를 자원해서 팔았습니다. 유다는 이러한 자신의 의도적인 행위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에 따라 십자가로 넘겨지셨지만, 유다의 배신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의 뜻이 이루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행 2:23). 그런데도 유다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인자는 이미 작정 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시니 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눅 22:22-23; 마 26:24 ).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3-15)

여기서도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주고 빌라도가 결의한 예수의 석방을 거부하며 그를 못 박게 한 유대인들에게 책임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예수님을 속죄양으로 삼으시고 십자가 고난을 받도록 계획하신 하나님의 작정이 있었습니다(행 3: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행 3:18).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는 방법입니다. 이런 뜻에서 유다의 배신은 성경을 응하게 하는 하나님의 작정 된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선택한 사도의 배신은 예수님이 구약에서 줄곧 예언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더욱 힘있게 밀어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 (눅 22:22).

예수님이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가실 길을 가신 분이라는 사실이 유다 사건으로 반증 된 셈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사실은 유다 사건에서 더 힘 있는 설득력을 발휘합니다.

 

맺는말

 

우리는 인간의 책임과 그 뒤에 가려진 하나님의 작정 된 뜻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리게 하신 사건에서 유다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결정적으로 성취되는 것을 보고 놀라워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탄과 악인들의 악행까지라도 역이용하여 작정하신 구원을 성취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고 갈 때는 어둠이 승리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최대의 승리를 거둔다고 생각한 순간은 오히려 최대의 패배를 당하는 때였습니다. 우리는 어둠의 세력이 이기는 듯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섭리로 개입하셔서 언제나 승리자의 영광을 거두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작정 된 뜻을 알리는 성경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그런데 그 뜻은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에 의해서 절묘하게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을 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그릇된 행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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