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토픽 모음집

본문시작


본 게시판에 등록되는 신규 게시물의 알림을 받기 원하시는 분은 아래에 이메일 주소를 적고 "이메일 구독신청" 버튼을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9:9).

 

본문은 예수님이 내린 함구령의 마지막 케이스입니다. 그런데 기간에 대한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까지 변화산에서 본 것을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었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본 구절은 지금까지 마가복음에서 우리가 궁금히 여겼던 함구령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하는 핵심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변화산에 있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막 9:7).

그런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다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서로 궁금해했습니다(막 9:10).

  

베드로는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과 모세와 엘리야 선지자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그 의미를 알지도 못한 채 얼떨결에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더 머물자고 제안했습니다(9:6). 그 후 제자들은 예수님이 곧 십자가 수난을 당하실 것이라는 경고를 받고도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투었습니다(9:33~34). 예수님의 소명에 대한 이러한 제자들의 빈약한 이해와 미성숙한 수준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만약 그들이 변화산 체험을 뜻도 모르고 흥분한 상태에서 전했다면 하나님의 계시의 의미를 완전히 뒤엎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메시아가 와서 세울 하나님 나라가 세속 정권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세속적 메시아관 때문에 예수님은 많은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변화산 계시로 흥분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예수님에 대한 모든 사실들을 제한 없이 전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변화산 사건을 나중에 기록으로 남기기까지 했습니다(벧후 1:16~18).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인간의 영적 어둠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실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지만 단순히 예수님의 신분 타이틀을 맞춘 것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알아보려면 입술만의 고백 이상이 필요합니다. 세 명의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놀라운 신적 변용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언하시는 하나님의 음성까지 들었지만 그들에게 온 변화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몽매하였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기적의 능력과 대중의 인기로 혁명을 일으키고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때가 임박했다고 착각하였습니다. 영적으로 깨이지 않으면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서도 못 알아본다는 것이 본 사건의 한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알아볼까요?

 

예수님의 비유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평이한 말씀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청중이 예수님의 기적에 의한 치유와 빵만 먹고 배부르기 위해 몰려오니까(막 1:32; 요 6:26) 새로운 방법으로 자신을 알리기 위해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비유는 ‘가려짐’과 ‘드러냄’의 두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비유의 말씀은 예수님의 정체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인데 그냥 들으면 이해도 되지 않고 아무 유익도 없습니다. 비유는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고 들으면 계속해서 미스터리로 남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신뢰하면서 그 의미를 알려고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점점 더 드러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거듭 촉구하셨습니다. 비유를 이해하는 것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이해하는 것은 같은 원리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막 4:24~25).

 

비유는 닫힘과 열림의 두 얼굴을 가진 독특한 교육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정체와 사역에 대한 사람들의 긍정적 반응을 촉구하고 동시에 부정적 반응에 대해 경고합니다.

비유에 대한 사람들의 자세와 반응에 따라 그 의미가 더 드러나기도 하고 더 가려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비밀도 사람들의 자세에 따라 혼란을 가져오기도 하고(요 7:12, 15, 27, 31, 35~36) 더 밝혀지기도 합니다(막 4:10~12, 34).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비밀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영구적인 것이 아니고 잠정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로서 알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불리한 인간적인 상황과 하나님의 숨겨진 계획 때문에 처음부터 ‘내가 메시아다’라고 선포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에 대한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기대를 회피하기 위해 종종 자신을 감추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에게까지 함구령을 내리셨는데 그들마저도 예수님의 정체를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은 일면으로는 무리를 돌보는 일을 하시면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려고 애쓰셨습니다.

◐ 또 다른 일면으로는 그를 죽이려고 모의하는 이스라엘 지도자들과의 마찰을 가급적 피해야 했고(막 3:6; 11:18; 12:12), 자신이 세상의 인기와 영광을 구하는 거짓 선지자나 세속적 기적사로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습니다(막 13:21; 행 5:16~37).

 

예수님의 사역은 ‘숨김과 드러냄’의 구도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예수님의 정체는 밝히 드러날 것이었습니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막 4:22).

예수님은 자신을 숨기기도 하시고 드러내시기도 하였습니다. 자신을 숨기셔도, 보려고 힘쓰는 자들에게는 더 보여 주시고 자신을 드러내셔도 못 보는 자들의 눈은 더 감기게 하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무리 들어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의 마음에 와닿지도 않고 삶에 변화도 주지 않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곰곰이 생각해 보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정체를 둘러싼 여러 의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예수님의 신분을 알려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연인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을 바르게 알아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눈을 열게 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인간의 영적 어둠은 너무 깊어서 인간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자비하신 하나님이 은혜로 임하셔서 영적으로 굳게 감긴 눈을 열어 주셔야 예수님의 참된 신분을 인식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계시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영감의 순간에 예수님의 신분을 찰나적으로 인식하였지만 수박 겉핥기였습니다. 그도 벳새다의 맹인처럼 하나님의 두 번째 터치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9:9)는 함구령에 가려진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곧 하나님의 두 번째 터치가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신분을 알았지만, 아직 온전한 지식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라고 공적으로 온 세상에 알리기에는 영적으로 너무 무지하고 미숙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한다”(막 4:11)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라는 말은 묵시적인 개념입니다. 이 ‘비밀’(헬. 무스테리온=Mystery)은 결정적인 시점에 이를 때에 비밀처럼 감추어졌던 진리를 하나님이 드러내신다는 의미입니다(롬 11:25; 고전 15:51; 골 1:26).

예를 들면, 예수님이 비밀이고 복음이 비밀이고 하나님 나라가 비밀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어 하나님의 계시로 그 비밀이 알려지면 더 이상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 예수의 신분과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는 자들에게는 여전히 비밀로 닫혀 있습니다(고전 1:23).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러 번 그들의 믿음의 결핍을 지적하셨습니다(막 4:40; 7:18).

 

그런데 어떤 면에서 예수님은 부활 때까지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성취되고, 부활로써 하나님의 아들 되심이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제자들이 예수님의 신분을 어느 정도 알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시냐는 것을 넘어서 예수님이 구원자로서 행하시는 구속 사역의 심대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는 온전히 깨달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가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기 전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제자들에게 메시아관에 대한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는 사건이 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메시아 신분과 구원 사역의 의미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사건이 발생한 후에 뒤를 돌아보고 비로소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메시아의 비밀입니다. 그럼 제자들이 나중에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아주 깊고 많은 것들을 깨달았겠지만 몇 가지만 열거해 봅니다.

 

▶ 그들은 메시아가 십자가 죽음을 통해 죄를 대속하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사망을 정복하고  승리의 메시아가 되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 그들은 부활하신 메시아를 직접 만나본 후에 비로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적 근원을 가지신 분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 그들은 메시아가 세상 질서에 속한 왕국을 세우시는 분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대속주로 믿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들로 형성된 영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분이었습니다.   

▶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예수님에게 주셨다는 것과(마 28:18~20) 부활 이후로 하나님 우편에서 예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린다는 사실을 알고(막 16:19) 고난의 메시아가 능력과 영광의 메시아가 되심을 확신하였습니다. 

▶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예수님의 참 신분을 깨닫게 되고 약속된 성령을 받아 예수님을 위한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행 1:8; 2:1~4).

 

 

메시아의 숙명

 

어떤 신학자는 메시아는 단순히 주어진 타이틀이 아니고 성취시켜야 하는 숙명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9:9)고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메시아직을 어떤 것으로 생각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자신의 메시아직이 인자의 죽음과 부활에 직결된 숙명으로 보셨습니다.

숙명’이라고 하면 ‘정해진 운명’이란 뜻입니다.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오해할 수 있지만 불가피하게 일어날 어떤 이벤트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숙명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이지만 그 목적지에 닿는 것은 예수님이 달성하셔야 하는 소명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아직이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성취되어야 하는 불가피하고 필수적인 사건으로 보시고 자원하여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소명을 숙명으로 보셨다는 증거는 여러 군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나서 , 사흘 후에 살아나야 한다”( 막 8:3, 표준새번역)

“the Son of Man must suffer many things” (Mk. 8:13, ESV, NIV)

 

☞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눅 13:32~33).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코스를 마치는 일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필요 불가결한 사건으로 보셨습니다. 그 까닭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려면 십자가 대속이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그를 믿는 자들이 새 생명으로 하나님과의 영생을 누리기 위해 반드시 발생해야 할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실제로 일어날 때까지는 아무도 예수님의 메시아직의 참뜻을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이 속히 일어나기를 학수고대하시면서 기다리셨습니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눅 12:50).

여기서 예수님이 받으실 세례는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달려갈 결정적 코스에 가까웠을 때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굳힐 수 없는 의연한 결의를 보고 놀람과 두려움에 싸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막 10:32).

이사야 선지자는 이때의 예수님의 모습을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하였다”(사 50:7)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를 통해 제자들이 가졌던 통속적인 메시아관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집고 인자의 메시아되심의 참뜻을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의 문맥에서 재정의하신 셈입니다.

변화산에서 제자들이 본 것은 예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보면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알렸다고 했습니다(눅 9:31). 그럼에도 제자들은 세 번에 걸친 수난 예고에도 불구하고 고난의 메시아 대신 영광의 메시아에 마음이 묶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잘못된 메시아관에 전격적인 변화가 오려면 십자가에 매달린 메시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의 고난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발생한 후에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통해 부활 영광에 이른다는 사실은 이벤트가 발생하기 전에는 불가사의였습니다. 예수님의 아이덴티티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벤트를 돌이켜보고 알게 되도록 짜인 하나님의 구원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영광의 메시아만 생각하는 제자들에 의해서 오전되고 오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의 죽음과 부활 이전에는 입을 닫고 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맺는말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야 메시아의 비밀 모티프(secrecy motif)에 대한 모든 의문들을 풀게 되었습니다.

◐ 예수님은 인성으로 감추어진 하나님이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메시아직을 십자가 수난과 부활의 목표에 반드시 당도해야 하는 숙명이라고 믿고 끝까지 순종하여 하나님의 작정된 계획을 이루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9)고 선포하신 이유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 제자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은 무한히 연약해 보였지만 사실은 죄와 사탄을 이기는 승리의 메시아이심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직은 약함과 능력이 함께 연결되어 쌍 줄처럼 이어져 나가는 역설적 전개를 통해 부활 영광에 이르렀음을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 제자들은 “나를 따르라”는 첫 부름의 진정한 의미를 자신들의 삶에서 드러내었습니다.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막 14:31)라고 입을 모아 약속했던 제자들의 헌신은 과연 순교의 피로 지켜졌습니다(막 14:31).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 이후에 비로소 참 제자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그들의 능력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들은 마침내 베드로의 말처럼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눅 22:33)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모든 사건이 발생한 이후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잘못이 무엇이었는지도 압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회복되고 어떻게 주님을 섬겼는지도 압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고난의 숙명을 받아들이고 오직 하나님의 작정 된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전적으로 헌신하신 주님께 영원한 감사와 찬양을 올려야 하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4 하나님의 안식은 무엇인가? (히 3:18) 이중수목사 2022.11.09 1372
13 예수님의 왕권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히 1:3) 이중수목사 2022.11.06 516
12 예수님은 선택받은 자들만을 위해서 돌아가셨는가? (히 2:9) 이중수목사 2022.11.06 1174
11 거룩한 삶의 원리 (베드로전서 1:22-25)  이중수목사 2021.10.18 820
10 금식 기도는 무엇인가? 마가복음 2:18 이중수목사 2021.08.31 3192
9 교회 부패는 어떻게 막아야 하는가? (갈라디아서 5:24-25) 이중수목사 2021.06.26 947
» 예수님의 함구령 (3) - 왜 예수님은 자신을 숨기셨을까요? 마지막 함구령 (마가복음 9:9) 이중수목사 2021.02.06 811
7 예수님의 함구령 (2) - 왜 예수님은 자신을 숨기셨을까요? (마가복음 3:7-12) 이중수목사 2021.02.06 1947
6 예수님의 함구령 (1) - 왜 예수님은 자신을 숨기셨을까요? (마가복음1:40-45) 이중수목사 2021.02.06 4555
5 육체란 무엇인가? (갈 5:17) 이중수목사 2021.01.02 1516
4  ‘육’(肉)’은 무엇인가? (골 3:5-11) 이중수목사 2021.01.02 525
3 가룟 유다와 하나님의 예정 (마가복음 3:19) file 이중수목사 2020.12.19 2548
2 크리스천들에게 ‘죄악 된 본성’(sinful nature)이 있을까요? file 이중수목사 2020.11.24 784
1 엘리사의 죽음 이중수목사 2020.08.09 423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