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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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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원고는 필자가 쓴 ‘갱신된 교회의 모델’(데살로니가전서 강해)에서 일부 발췌하고 가필한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20).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살전 2:17).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할 때까지 짧으면 삼 주 길면 삼사 개월 정도 밖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그들에 대해 가졌던 관심은 강렬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떠났다’는 말은 원문으로 ‘고아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도 사용되고 혹은 부모를 잃은 자식에게도 사용됩니다. 여기서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부모 같은 바울이 떠났기 때문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 편에서 보면, 그는 자녀를 잃은 부모의 입장이면서 동시에 자신도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났을 때 고아가 된 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같은 참담한 심정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간절히 보고 싶어했습니다. 과부가 과부 사정을 안다는 말처럼 고아가 고아 사정을 압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바울이 자기들과 같은 고아의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에 대한 원망이 혹 있었을지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방인들을 그처럼 애타는 마음으로 보고 싶게 했을까요? 두말할 나위 없이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형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제 바울과 함께 동일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믿음의 형제들 보다 더 가까운 인간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믿음의 가족들과의 인간 관계는 우리들에게 심대한 의미를 갖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보기를 열망한 까닭은 잠시 깊이 사귀었던 인간적인 애착이나 직업적인 만남의 필요성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믿음의 형제들과 가까운 접촉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극히 정상적인 이유 이외에도 다른 중요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상급의 동기입니다.

 

1. 상급 동기는 나쁜 것일까요?

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교인들은 대체로 다음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보입니다.

▶ 상은 추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 상에는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전자는 상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상이기 때문에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고, 후자는 상은 상업적인 거래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기가 나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상이 무엇이냐는 것에 대한 해석 차이와 거룩한 삶에 대한 동기의 순수성에 대한 이해 차이에서 발생합니다. 분명한 것은 성경에서 상 혹은 유업의 주제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줄줄이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상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다음 상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를 안 후에 그에 따라 살 수 있어야 합니다.

 

◐ 상은 구원이 아닙니다.

상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예비하신 구원”(벧전 1:5)이라고 보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입니다. 환언하면 상은 천국과 동의어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다 이루어졌고, 준비가 되었으며, 또한 현재 체험할 수도 있다.  그리고 또한 영광스런 미래를 가지고 있다. 이 구원은 ‘말세에’(벧전 1:5)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드러날 것이다. 우리들의 구원이 우리들의 유업이다(Our salvation is our inheritance). 즉, 주님과 함께 영원히 있게 될 충만한 영광이다. ” (BST 시리즈. Edmund Clowney).

 

그러나 상과 구원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구별되어야 합니다.

 

▶ 상을 받는 방법과 구원을 받는 방법이 다릅니다. 상은 믿음으로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구주로 신뢰하는 믿음으로 받습니다. 상은 믿음이 아닌 행위와 관계된 것입니다. 즉, 상은 신자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꾸준한 믿음과 인내와 사랑으로 지상에서 행한 일에 대한 보상입니다. 구원은 신자가 행한 선행에 대한 상이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선물입니다(엡 2: 8). 반면 상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일에 대한 유업입니다(골 3:24).

 

▶ 상은 “하늘에 간직”(벧전 1:4; 엡 5:5)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약 상이 곧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천국이 천국에 간직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개념적으로 모순입니다. 그런데 상이 왜 천국에 간직되었다고 했을까요? 천국에는 좀이나 도둑이 없기 때문입니다(마 6:20). 천국은 본질상 천상적이기 때문에 지상에서처럼 부패나 잃어버리는 일이 없습니다. 상이 하늘에 간직되었다는 말은 상이 안전하게 보관되어 받을 사람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 6:19-20)고 하셨습니다.

 

▶ 구원은 일단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신분적으로는 더 이상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이 주는 축복의 지상적인 체험은 꾸준한 믿음 생활을 통해서만 유지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가나안 땅의 소산을 즐길 수 없었던 것과 같습니다. 상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누구나 받는 것도 아니고 한 번 받았다고 해서 상이 주는 유익을 기계적으로 항상 소유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속적인 믿음으로 쉬임없이 달려가야만 상이 주는 축복들을 놓치지 않고 현재적인 체험으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 상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상을 하나님으로 보는 입장의 주장은 상(유업)이 천국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이 유업은 ‘하늘에 간직된 소망’이다(벧전 1:4). 그리고 이것은 다름 아닌 주 예수님 자신이다.” (Peter T. O’Brien, New Bible Commentary, IVP)

 

▶ 그러나 본 절에서 신자의 상이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구원이 행위에 대한 보상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상이 하늘에 간직되었다는 말에서 상을 하나님으로 바꾸면 하나님이 하늘에 간직되었다는 어불성설이 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하늘이 있는 것이지 하늘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늘보다 크신 분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을 보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늘이 하나님을 간직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자존하시며 썩지 않고 영원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하늘에 간직하고 보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자기 백성에게 유업으로 주신다는 말씀으로 간주될 수 있는 구절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오해가 일어납니다(참조. 창 15:1; 민 18:20; 시 16:5; 73:26). 그래서 다소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간단히 몇 군데만 살펴 보겠습니다.

 

☞ 창세기 15:1

아브람아 두려워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궁극적인 최대 최선의 상은 곧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다음 절을 보면 아브람이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라고 묻습니다(창 15:2).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상급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는 하나님 자신이 그가 받을 상급이 아니고, 그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상속자를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만일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그의 상급이라고 이해했다면 이런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질문을 받고 그에게 상속자를 주신다고 하신 약속도 무의미했을 것입니다(창 15:3-4).

 

☞ 민수기 18:20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 아론의 후손과 레위 자손에게는 기업의 땅이 할당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직접 받는 다른 종류의 유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민 18:5-7). 아론과 레위 후손에게 기업이 없다고 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전적으로 성전 사역을 하기 위해서 구별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농사를 지어서 생계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기업의 땅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의 소득 원천은 땅이 아니고 백성들의 십일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너희의 보수”(민 18:31) 라고 하셨고 혹은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는다”(민 18:21)고 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민 18:20)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자신이 상이나 유업 자체라기 보다는 유업을 마련해 주시고 상을 주시며 갚으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창 15:1)이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레위인들이 가나안 땅 대신에 백성들로부터 십일조를 받고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특권을 부여받은 것은(민18:5-7) 다른 지파들이 가나안 땅을 분배 받는 것보다 훨씬 더 확실하고 직접적인 축복이었습니다. 다른 지파들은 땅의 분배를 받고 이를 획득했을지라도 율법을 어기고 우상 숭배를 하면 유업을 빼앗길 수 있었습니다(신 28:58, 63). 예를 들어 그들은 우상 숭배로 바벨론에 잡혀 감으로써 가나안 땅의 유업을 박탈당하였다가 회개했을 때 다시 되찾았습니다. 이에 비해서 레위 지파의 유업은 훨씬 더 안정적이었고 그들의 성전 봉사도 지속적이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는 그들의 성전 봉사도 중단되었지만 레위 지파가 받은 성전 사역의 특권 자체는 취소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율법의 순종에 따라 받거나 빼앗길 수 있는 땅의 유업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직접 수여되는 영구적인 유업에 대한 하나의 화살표입니다. 그래서 레위 지파에게는 하나님이 그들의 유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신 10:9).

 

환언하면 레위 지파가 하나님을 유업으로 상속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하나님을 상속받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유업의 원천이시며 수여자시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의 신성이나 주권이나 혹은 절대적인 능력을 유산을 받듯이 소유할 수 없습니다. 물론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의미에서 그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가 되고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세상을 돌보는 일을 온전히 감당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신성이나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능력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 자신에 대한 소유권이 없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권리로 하나님을 청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유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이러한 의미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럼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우리들의 분깃(유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유업의 근원이시며 공급자시라는 점에서 우리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시사합니다. 예를 들어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 16:1-2).

 

다윗은 유업의 상을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모든 유업의 원천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 자신을 원하였습니다. 풀어서 말하면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궁극적인 안전과 행복의 출처로 신뢰하였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만을 최상의 기쁨과 보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하나님 자신을 소유물처럼 상속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항상 사모하였고, 하나님 자신과의 밀착된 교제를 통해 그분의 사랑과 능력과 보호를 즐겼습니다.  이러한 영적 차원의 축복들은 다윗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체험할 수 있었던 유업의 일부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자신의 유업으로 삼는 삶의 영적 체험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유업의 체험들은 사후의 영원 세계에서는 훨씬 더 높고 깊은 레벨에서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진정한 의미를 이 땅에서는 온전히 측량할 수 없습니다. 계시록에는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계 22:12)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리게 될 충만한 극치의 복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분깃이 되고 유업이 되실 것이라는 말씀의 깊은 뜻을 체험적으로 충만하게 아는 일은 모든 영광이 드러날 미래의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 상(기업/유업)은 봉사에 대한 보수였기에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는 것이라는 개념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들이 다른 성도의 봉사나 헌금을 받고서 ‘주님, 그들의 빈 자리를 채워 주십시오’ 라고 기도한다든지 혹은 ‘주께서 그분의 선행을 여러 배로 갚아 주시기를 원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성도들의 봉사를 갚아 주시는 분이라는 구약적 배경을 안고 있습니다. 우리는 상을 바라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상을 자녀들에게 주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께서 주려고 원하시는 것이라면 그것을 기대하고 받으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것에 관심이 없거나 이를 밀어내면서 자기 사상대로 주를 섬기려고 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자기 자녀들에게 상을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들이 구원을 받은 것만 해도 감지덕지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자기 자녀들에게 넘치는 은혜를 붓기를 원하는 부모의 마음이 있습니다. 상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이 주님을 더 잘 섬길 수 있도록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하기 위한 일종의 동기 부여입니다. 결국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주의 자녀들이 구원을 받고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려 주는 많은 상을 받아 누림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무한히 즐거워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기쁨에 참여하기를 원했습니다

 

2. 바울의 상급 추구

우리는 바울이 상 자체에 마음이 쏠렸다거나 이기적이고 상리적인 계산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보고 싶어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바울에게 상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믿음의 달음질이 끝나는 때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심사를 받을 것을 알았고 그 때 자신에게 상이 내릴 것을 기대하였습니다(딤후 4:7-8). 이런 의미에서 그는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빌 3:14) 달렸습니다. 그는 골로새 교인들에게도 성도의 삶을 언급하면서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4)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자세는 상 자체를 원해서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신령한 축복의 통로를 통해 하나님의 후하심과 은혜로우심을 한껏 누리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3. 바울의 보람과 소망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자신의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들이 주님의 재림 때에 주님 앞에 나타날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복음으로 구속된 자들이기에 주님의 영광과 기쁨이었습니다. 이들은 동시에 주께서 바울을 칭찬하시고 상주시는 근거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의 영광이며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살전 2:19)은 천국 자체가 아니고 “하늘에 쌓아 둔 소망”(골 1:5)입니다. 우리들이 지상에서 주를 위해 행하는 모든 선행은 하늘에서 우리들의 소망과 기쁨과 자랑으로 쌓입니다.

 

한편, 우리는 정확하게 주님의 재림 때에 성도들이 받을 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린 삶에 대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인정과 칭찬을 포함할 것입니다(마 25:21, 23; 눅 19:17). 예를 들어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의로 길로 돌아오게 하며 그들을 예수 안에서 지켜 준 자들은 주님의 칭찬을 받고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단 12:3). 혹은 상은 지상에서 주님을 신실하게 섬긴 데 대한 하늘 나라에서의 더 많은 봉사의 기회일 수도 있고(마  25:28-29; 눅 12:42-44),  면류관을 받거나 새 이름을 받는 것과 같은 영예로운 어떤 일일 수도 있습니다(딤후 4:8; 계 2:17). 상은 지상에서도 부분적으로 맛볼 수 있지만(갈 6:8) 대부분은 영적인 것이며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받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상이 무엇이라는 것을 더 이상 구체적으로 열거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각 신자가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를 받을 것이며, 주님을 위해 힘쓴 자들에게는 후한 갚음의 상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각 성도에게는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어떤 소명과 약속들이 있습니다. 이 소명과 약속에 얼마나 충실하게 살았는지가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각자의 행위에 따라 판정을 받습니다(고후 5:10; 롬 14:10-12). 만일 우리들이 이러한 가르침을 명심하고 산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복지를 위해 주신 상의 동기 부여가 우리들로 하여금 훨씬 더 진지한 크리스천 삶의 자세를 지니고 살게 하는데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4. 상과 재림 소망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였습니다. 그는 디모데서에서도 재림 주제를 다룰 때에 상에 대해 언급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9).  

 

바울에게는 주의 재림이 지닌 큰 의미 중의 하나가 의로우신 재판장으로부터 의의 면류관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고난을 받았고 데살로니가 교회도 복음의 의 때문에 큰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더욱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였습니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는 모든 복음의 원수들을 심판하시고 온 세상으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며 그의 신실한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는 데살로니가 교회로 인해서 기뻐할 일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고난 중에 있는 그들이 마지막 날까지 믿음을 지키고 주님 앞에 바울의 면류관으로서 서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성령의 확신으로 주 예수를 대속주로 믿은 자들은 영원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리스도를 믿은 지 몇 달 밖에 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재림 때에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나타날 것을 믿고 기뻐하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나중에 죄를 지어 넘어지거나 선행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들의 구원이 상실될 수 있었다면 바울은 보장이 없는 면류관을 소망하며 기뻐한 셈이 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속된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서 구출된다고 믿었기 때문에(살전 1:10)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자신의 자랑스런 면류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또한 사탄이 막아서 현재로서는 사랑하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할 수 없지만 그들은 주님의 재림 때에 그의 자랑과 기쁨이 되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릴 자들임을 알고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사탄의 방해에 좌절되지 않으려면 주님의 재림 소망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사탄이 아무리 성도의 삶을 괴롭히고 장애물을 놓아도 한 번 받은 구원을 빼앗아가지 못하며 주님과의 영원한 복락의 삶에 하등의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재림 소망은 현재의 고난을 이기는 가장 큰 원동력입니다. 사실상 주의 재림이야 말로 모든 것을 참고 오직 주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살 수 있게 하는 가장 큰 동기 부여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서는 ‘마라나타!’(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를 성도들 사이의 인사말로 삼았습니다(고전 16:22). 박해를 견디며 고난의 삶을 살아야 했던 초대 교인들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기록한 계시록의 끝에 나오는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한 말에 모두 아멘으로 호응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들에게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라나타의 소망을 가지고 삽니까? 복음대로 살려고 하면 불편하고 손해 되는 일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재림 때에 받게 될 칭찬과 면류관의 약속을 바라면서 힘을 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한 삶을 위한 상의 동기 부여는 악이 넘치고 사탄이 방해하는 이 험한 세상을 담대하게 사는 데 매우 필요하고도 효과적인 방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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