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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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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믿음’이라고 하면 다소 생소할 줄 압니다. 예수님의 기도라는 말은 많이 들어보았지만 ‘예수님의 믿음’이라는 말은 아마 못 들어본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도의 사람으로 압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새벽 기도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서 예수님이 날이 밝기 전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는 마가복음 1장 35절의 말씀을 자주 인용합니다. 그리고 철야 기도의 근거로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무시지 않고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음의 사람으로는 잘 언급하지 않는 듯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충만하셨다는 사실은 잘 알면서도 예수님의 믿음 충만에 대해서 별로 생각해 보지 않는지 모릅니다. 이제 마가복음 1장 15절의 마지막 강해로서 ‘예수님의 믿음’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에 대해서 우리는 한 가지 잘못된 생각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전도해보면 더러 사람들이나는 믿고 싶은데 믿어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기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실패합니다. 나의 믿음은 일정치 않습니다. 나의 믿음은 완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오기도 합니다. 때로는 믿다가도 아예 믿음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내 믿음을 강조하다 보면 나의 믿음에 의존해서 기도 응답을 받으려고 하고 내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합니다. 이것은 자칫 자기 확신과 자기 의에 빠지게 하고 영적 자만에 노출되는 위험을 초래합니다. 또한, 믿는다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효과가 없으면 실망합니다.

성경은 나의 믿음이 아닌, 예수님의 믿음을 강조합니다. 나의 믿음이 예수님의 믿음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언제라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믿음은 완전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믿음을 붙드는 것이 나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믿는 것은 내 믿음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믿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믿음’이라는 말이 성경에 과연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헬라어로 ‘믿음’은 ‘신뢰’라는 의미도 있고 ‘신실’의 뜻도 있어서 양쪽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마쉬아흐(메시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신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넘겨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신실함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갈 2:20 직역성경)

 

 

내가 이제 육체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새성경)

 

우리 말로는 ‘믿음’과 ‘신실함’을 교체해서 쓰기에는 어감이 좀 다르고 철자도 틀려서 어색합니다.  그러나 영어로는 믿음(faith)과 신실함(faithfulness)의 어원이 같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습니다. Faith라는 단어에 가득하다는 의미의 fulness를 붙이면 신실함이 됩니다.

 

  “I live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Gal 2:20, 21st Century King James Version).

 

“I live by the faithfulness of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갈 2:20,  International Standard Version)

 

종전에는 주로 by faith in Jesus Christ(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라고 번역했습니다. 개역개정판을 비롯한 전통적 번역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개역개정)

 

이 두 갈래의 해석은 문법적으로 다 가능합니다. 그럼 차이가 무엇입니까? 하나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그렇게 배웠습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사는 것은 예수님의 믿음(신실하심)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내 믿음이 아닌  예수님의 믿음을 신뢰하고 산다는 말입니다. 이 번역은 점차로 여러 학자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영역본 수십 개를 확인해 보았더니 그중에서 적어도 15개 이상이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에 의해서) 혹은 by the faithfulness of the Son of God(하나님의 아들의 신실하심에 의해서) 라고 번역했습니다.

 

The NET Bible은 신약 성경의 해당 구절들을 모두 ‘하나님의 아들의 신실하심’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 (the faithfulness of the Son of God/ Jesus Christ) )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예, 롬 3:22, 26; 갈 2:20; 3:22; 엡 3:12; 빌 3:9).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산다는 번역을 한다고 해서 종전의 입장인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의 믿음이나 신실하심을 신뢰한다고 옮기는 것이 적절하지 않음으로 단순하게 ‘그분을 믿는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낫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3장 14-15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5).

또 다음 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럼 어떤 쪽이 더 나을까요? 예수님의 믿음(신실하심)으로 산다는 번역을 따르면 실제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적용할 수 있는 유익한 점들이 있습니다.

 

첫째,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칭의 개념에 긍정적 차이가 생깁니다.

 

사람은 토라의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예슈아 마휘아흐의 신실함을 통하여 의로워지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우리가 마쉬아흐 예슈아를 믿는 것은 토라의 행위가 아니고 마쉬아흐의 신실함으로 의로워지기 위함입니다.”(갈 2:16, 직역 성경)

       

“yet we know that no one is justified by the works of the law but by the faithfulness of Jesus Christ. And we have come to believe in Christ Jesus, so that we may be justified by the faithfulness of Christ and not by the works of the law, because by the works of the law no one will be justified.” (갈 2:16, New English Translation)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그것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의롭게 되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갈 2:16, NET).

 

이것은 By faith in Christ 대신에 by the faithfulness of Jesus Christ로 번역한 대표적인 실례입니다.  또 By faith in Christ (예수를 믿음으로써) 대신에  by the faith of Jesus Christ(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라고 번역한 영역도 있습니다.

 

  “Knowing that a man is not justified by the works of the law, but by the faith of Jesus Christ, even we have believed in Jesus Christ, that we might be justified by the faith of Christ, and not by the works of the law; for by the works of the law shall no flesh be justified.” (갈 2:16, 21st century King James Version).

 

“사람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 함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갈 2:16, 21st century KJV).

 

한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이라고 번역하고 다른 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라고 번역합니다. 어느 쪽이 맞고 틀리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문법적으로는 양편 다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넓은 의미로 본다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천상적 신분과 죄없는 완전한 성품과 그분의 구속 활동 전체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믿음과 그분의 신실하심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옮기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믿음보다 예수님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보기 때문에 강조점이 나의 불완전한 믿음에서 예수님의 완전한 믿음으로 옮겨집니다.

 

그리스도의 믿음’ 혹은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우리가 믿는다고 보면 격려가 되는 측면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하고 충만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끝까지 신실하게 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완전하고 흠이 없는 대속주가 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신 것은 우리의 믿음이 완전해서가 아니고 예수님의 믿음이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죄인들을 사탄의 권세에서 풀어주시고 모든 죄를 용서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한순간도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의심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완전한 믿음의 삶을 신뢰하는 자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믿음과 신실하심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십니다(막16:16).

 

둘째, 내 믿음이 아닌 예수님의 믿음에 의존하면 안전합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믿음을 신뢰하면 내 믿음이 약할 때 큰 위로가 됩니다. 내가 신실하지 못할 때 나의 믿음에 의존할 수 없습니다. 나의 믿음은 불완전하고 약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지 못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신실하게 따라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신실하심에 호소하면 용서와 회복을 받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주님의 신실하심을 상기시켰습니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그분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그분은 자기를 부인할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딤후 2:13, 표준새번역).

“If we are faithless, he remains faithful- for he cannot deny himself.” (1Tim. 2:13, ESV).

 

예수님의 신실하심이 나를 포기하지 않고 붙들어 주십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내 믿음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믿음으로 서 있습니다. 나의 믿음은 항상 부족하고 일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의 원천이시기 때문에(히 12:2)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여러 말씀을 듣다가 용서에 대한 교훈을 받았을 때 더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용서하라” (눅 17:4).

이 말씀을 듣고 사도들은 주님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눅 17:5)라고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도 진지한 것이라면 뽕나무 뿌리가 뽑혀서 바다에 심어지는 불가능한 일도 행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눅 17:6). 이 말씀을 대개 믿음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질이 중요하다는 뜻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양도 있고 질도 있습니다. 바울은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고 했습니다. 작은 믿음도 있고(마 6:30; 8:26; 14:31) 연약한 믿음도 있습니다(롬 14:1). 예수님의 옷 가를 만졌던 혈루증 여인과 같은 진지한 믿음도 있고(막 5:25-29) 자기 집까지 오시지 말고 오직 말씀만 하셔서 병든 종을 낫게 해 달라고 청했던 백부장처럼 큰 믿음도 있습니다(눅 7:9).

변화산 사건 이후에 귀신 들린 어린 아들을 제자들이 고치지 못했을 때 그 아버지가 예수님까지 의심하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때 그 아버지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 9:23-24)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능력을 신뢰하기 힘들고 그분의 가르침을 도무지 따를 수 없다고 생각될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님께 믿음을 더 달라고 간청하며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마다 믿음으로 충만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넘치는 큰 믿음에 우리의 작은 믿음을 매달아야 합니다. 참믿음은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생기지 않습니다.  좋은 믿음은 예수님의 신실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그분의 믿음에 우리의 작은 믿음의 닻을 내리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지금도 하늘에서 온전한 믿음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완전한 믿음으로 중보하시므로 언제나 응답을 받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지금도 그렇게 하늘 아버지 앞에서 기도하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됩니까!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해 완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중보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비록 세 번씩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후에도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완전한 믿음이 응답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믿음을 지켜주시는 믿음의 근원이십니다.

 

이제 요단 강을 건넜던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에 대해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요단 강을 건너는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될 것을 다 믿었습니다. 그래서 요단 강이 갈라질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수 3:10. 13). 그런데 백성이 누구의 믿음에 의존하여 강을 건넜습니까? 그들은 넘치는 강물을 보고 두려워했지만, 여호수아의 믿음에 의존해서 강을 건넜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여호수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신뢰하는 원리를 시사합니다.

 

우리는 요단 강을 만나면 당황하고 두려워합니다. 상황이 절박하면 평소에 있다고 생각한 믿음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요단 강의 위기 앞에서 자신의 믿음이란 얼마나 믿을 수 없고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새삼 깨닫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넘치는 요단 강물을 보고 자신의 믿음으로 능히 도강할 수 있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백성은 ‘여호수아의 믿음’에 의지하여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여호수아를 헬라어로 바꾸면 ‘예슈아’가 됩니다. 영어로는 Jesus이고 우리말로는 ‘예수’입니다. 여호수아는 예수님을 대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요단 강을 건넜듯이, 우리도 하늘의 여호수아이신 예수님의 온전한 믿음을 신뢰하고 그분을 따르면 우리의 요단 강을 능히 건널 수 있습니다.

우리를 어떤 곤경에서도 구출할 수 있는 능력의 손은 예수님의 막강한 믿음의 손입니다. 예수님의 전능한 믿음의 손을 신뢰하는 것이 나의 믿음입니다. 나의 믿음은 아무리 작아도 예수님의 완전한 믿음에 연결되었을 때 산 믿음이 되고 강한 믿음이 되며 참믿음이 됩니다.

 

 

맺는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성령을 기름 붓듯 하셨습니다(행 10:38). 예수님은 성령을 한량 없이 받으셨으므로 완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요 3:34). 신자들에게도 성령과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믿음에는 분량의 한도가 있습니다(롬 12: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 스스로 흠 없고 완전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구원하는 믿음은 예수님의 완전한 믿음에 의존하여 복음의 기본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일치하고 사랑과 순종에 실패하지 않는 예수님의 완전무결한 믿음을 신뢰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강해, 이중수 지음, 출판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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