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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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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에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냐” (히 7:11).

본 항목은 모세 율법 시스템의 약점을 지적하고 옛 언약과 “더 좋은 언약”(22절)을 대조시킵니다. 율법은 “더 좋은 소망”(19절)으로 대치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다시 말해서 옛 언약 시대의 제사장들은 새 언약 시대의 주인공으로 오신 예수님의 제사장직에 의해 무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파문을 일으키는 새로운 패러다임이었습니다. 모세 율법은 유대인의 종교적 삶의 편람이었고 민족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주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율법은 거의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고 율법의 영원성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댁 제사장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통해 율법의 위치와 효력을 재조명하였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우리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를 구별하고 특별히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합니다.  

 

1. 모세 율법이 정한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은 완전하지 않았습니다(11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다른 한 제사장”(11절)은 예수님입니다. 개역개정판의 ‘반차’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 단어입니다. 계통, 반열, 서열, 실례, 혹은 순서라는 의미입니다. 저자는 만약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이 온전했다면 왜 다른 방식으로 세워진 제사장이 필요했겠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율법은 영원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저자는 이 주장을 뒤집는 셈입니다. 레위 지파에서 제사장이 나오도록 율법에서 규정했는데 다른 출처에서 나온 비(非)레위 지파의 제사장이 있다는 것은 율법의 불변성에 대한 도전입니다.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르는 다른 제사장의 존재는 레위 지파 제사장들에게 흠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사역은 불완전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제사장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서 죄의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제한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심각한 죄들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간음, 우상숭배, 불효자, 안식일 위반, 살인 등은 율법에서 용서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장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율법이 정한 제사 방식으로는 모든 죄를 처리하지 못합니다. 모세법 아래의 제사장들은 무지하거나 미혹된 자들을 너그럽게 대할 수 있었습니다(히 5:2). 그러나 고의로 죄를 범하는 자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민 15:30).   그래서 다윗이 고의로 간음과 살인을 범했을 때  모세법이 그를 도울 수 없었으므로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시 51:16)고 하였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모세법을 무시하고 상한 심령을 회개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로 곧장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새 언약을 내다본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은 최악의 죄들도 용서하는 파워가 있습니다.

 

2. 율법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때로는 율법의 규례들을 영원하다고 하였지만 당사자의 평생이나(‘종신토록’, 창 43:9; 출 21:6) 혹은 관련된 기한이 끝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유월절 규례를 영원히 기념하여 ‘대대로’ 지키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모세의 율법 시대가 끝날 때까지를 가리켰습니다(출 12:14; 12:17, 24).

☞ 성전의 등불 관리나 제사장의 예복 및 수족 정결의식에 대한 규례도 영원히 지키라고 했는데 마찬가지 의미입니다(출  27:21; 28:43; 29:9; 30:21).

☞ 안식일 준수가 영원한 언약이라고 한 것도 (출 31:16~17) 같은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율법은 잠정적인 법이었기 때문에 일정 기간 동안만 유효하도록 애초부터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레위 지파의 계통을 따르지 않은 다른 종류의 제사장이 세워진 것은 율법의 원래 의도와 한계성을 고려해 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3. 율법은 불충분합니다.

율법의 제사 의식들은 죄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터놓았지만 같은 죄인들인 레위 제사장들을 통한 간접적이고 불완전한 방식이었습니다. 여러 제사 의식들은 그 자체로서는 하나님과의 밀접한 교제와 평안을 누리기에는 불충분하였습니다.

모세법의 도덕 수준은 낮았습니다. 일부다처제를 금지하지 않았고 쉽게 이혼할 수 있었으며 주인과 여종 사이의 동침을 허락했습니다.

율법 종교는 성전과 성일과 음식 및 위생 규례 등에 집착합니다.

어떤 면에서 율법은 인간의 내면을 거의 다루지 않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 용이한 점도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도 다 지켰다고 자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한때 그렇게 생각한 듯합니다(빌 3:6). 물론 열 번째 계명을 진지하게 대한다면, 전적 좌절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로마서 7장 7~25절의 포인트입니다. 율법은 죄를 촉발시키고 갈수록 더 강력한 힘으로 죄인을 사로잡습니다. 율법에 따라 거룩해지려고 애쓸수록 실패를 거듭합니다.

율법은 형벌의 두려움 아래 죄인을 묶어둡니다. 율법은 어느 정도 이스라엘을 가나안 족속들처럼 우상 숭배와 부도덕과 불의의 범람으로 완전히 파멸되지 않도록 막아 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효능은 제한적이었고 이스라엘은 결국 우상 숭배로  이방인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율법은 레위 제사장들이나 경배자들을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세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제사장과 완전한 경배자들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자기 백성을 다시 하나님께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완전한 능력을 가진 구주(2:10)와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살 수 있는 경배자들을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소원은 모세 시스템의 제사장이나 동물 희생에 의존해서 성취될 수 없었습니다(9:9). 

 

 4. 율법은 변경되고 폐지되었습니다.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느니라” (7:12, 18~19).

제사 직분이 바뀌어졌다는 것은 율법의 변화를 가리킵니다. 옛 계명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폐지되었고 새 계명으로 대치되었습니다. 옛 계명 아래에서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성전과 레위 제사장과 동물의 희생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이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으므로 모세 시스템은 모두 폐지되었습니다.

그럼 율법은 무용지물이 되어 내버려도 된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말은 다른 것으로 대치되고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구약은 율법 제도가 사라지고 옛 언약이 새 언약으로 대치될 것을 예고해 왔습니다(렘 31:31~34; 시 40:6~7). 이것은 모세 시스템이 그 자체로서 나빠서가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복음을 예시한 그림자였지 복음의 실체는 아니었습니다. 율법과 복음은 둘 다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율법은 임시적이고 예수님은 영구적입니다. 율법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이었고 복음은 실제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실체를 선포합니다. 율법은 예언적이고 예수님은 성취적입니다. 율법은 부분적이고 불충분합니다. 제사장 직분은 변경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세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접근하는 모든 시스템이 예수 그리스도로 대치되었습니다.

 

율법은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표지판이었고 화살표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후로는 율법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이제 주의 백성은 예수님의 속죄 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직접 나아갑니다. 이것이 “더 좋은 소망”(7:19)입니다. 신약 교인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과 가까운 교제를 할 수 있고 영적으로 성숙해진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과 직접 교제해야 합니다.

율법은 크리스천 삶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완전한 수준으로 인도할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논증입니다. “더 좋은 소망’을 두고 “연약하고 무익”(7:18)한 옛 계명의 소망에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흔히 십계명은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십계명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율법의 표지판입니다. 십계명의 의는 거룩하므로 크리스천은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액면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라보았던 목표인 예수 그리스도의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해서 지켜야 합니다. 이것은 십계명의 수준을 넘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단순히 도적질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해서 수고하는 것입니다(엡 4:28). 또한 육체적으로 간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음욕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마 5:28). 이것이 십계명이 바라본 목표와 이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로 대치되었음을 확지하고 율법에 근거한 규정이나 관습을 교회나 개인 신앙생활의 지침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보다 높은 분입니다. 예수님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보다 훨씬 더 우위에 있습니다. 율법 종교는 교회당 건물을 우선시하고 장소에 집착합니다. 모임과 행사 위주의 프로그램을 강조하며 신자 생활이 조직화된 교회의 테두리 안에 갇히게 합니다. 이같은 비자율적이고 일방적인 현대교회의 모습은 신약의 교회관과 율법 폐지의 관점에서 재조명되어야 합니다.    

신약 성도는 의를 가리키는 십계명까지도 그 수준을 넘어가도록 성령의 동기부여를 받습니다. 성령은 사랑의 원리로 율법의 한계를 넘도록 인도합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행하면 율법을 지킬 뿐만 아니라 율법의 수준을 상회하며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갈 5:22~23; 6:8) . 단순히 공동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레 19:18)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합니다(마 5:43~44). 이것은 율법이 요구하지도 않은 복음의 삶입니다. 율법은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멸의 생명”(7:16)을 가지셨으므로 영생에 속하는 “더 좋은 소망”(19절)과 “더 좋은 언약의 보중”(22절)이 되십니다.

모세법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율법의 시효는 모두 지났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아닌, 예수님 아래에서 삽니다. 모세 시스템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악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법이었습니다. 크리스천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더 나아갑니다. 신자는 성령에 복종함으로써 율법의 상한선을 넘어 ‘그리스도의 법’(갈 6:2)으로 삽니다.  

 

[율법의 실체]

율법은 연약하고 무력합니다(18절). 율법은 아무것도 완전하게 하지 못합니다(19절).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28절). 율법은 변경되고 폐지되었습니다(12, 18절). 이것이 7장 후반부에서 저자가 지적하는 율법의 실체입니다.

율법은 용서를 받고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힘이 거의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사람들을 악행에서 어느 정도 억제시키는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형벌의 두려움을 통해서 통제되었지만 율법의 제재력은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율법은 죄를 확신시켜서 회개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죄인에게 죄를 확신케 하는 것은 성령의 역할입니다(요 16:8; 행 2:36~41). 흔히 개역 성경에서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었다고 번역했기 때문에(갈 3:24) 율법의 역할을 오해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메시아가 오실 때까지’(until Christ came) 율법이 우리들의 가정교사 역할을 했다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직역성경, 표준새번역, ESV, NIV 참조).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율법이 아니고 성령입니다. 율법이 만약 죄를 확신시키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이 있었다면 율법에 정통했던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은 모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잘 알면서도 죄 없는 예수님을 정죄하고 죽였습니다. 바울도 회심하기 이전에 크리스천들을 박해했는데 그는 유대교의 거장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서(행 22:3)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6)고 고백했습니다.

 

율법은 죄인을 의롭게 하지도 못하고 영생을 주지도 않습니다. 율법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자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7:19). 율법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삶을 어느 정도 통제하고 악을 견제하도록 의도된 것이었지만, 그 역할도 인간의 죄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롬 7:11). 율법은 희생 제물을 바치는 자들의 경미한 죄를 용서하고 의식상의 부정을 씻기며 피부병 등의 질병으로부터 치유되는 소망을 갖게 했지만 경배자를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로 세울 수 있는 ‘더 좋은 소망’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신약 성도들은 하늘의 대제사장이신 주 예수의 속죄 피와 중보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갑니다(4:14~16). 우리는 교회당 건물이나 옛 계명에 속한 규례나 안식일이나 십일조 등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골 2:16). 그런 방식의 예배 시스템은 율법의 폐지와 함께 끝났습니다. “이런 것은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일 뿐이요, 그 실체는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골 2:17, 표준새번역).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하게 못합니다.”(히 7:16). 하나님의 맹세로 영원하고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완전한 자로 세웁니다(7:28). 이제 우리는 “더 좋은 언약”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성령 안에서 자유와 기쁨 속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럼 옛 언약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크리스천들에게는 옛 언약은 법적으로 끝났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폐기했다는 말은(7:18) 완전히 무용지물이 됐기 때문에 쓰레기 통에 내버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율법의 폐기는 다른 더 좋은 것으로 대치되고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율법이 가리킨 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율법은 자신의 역할을 마친 셈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율법이 아닌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예수님 아래 있으면 율법의 요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충족됩니다. 더 높은 수준의 법으로 살면 낮은 수준의 법은 구태여 지키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신약 성도들이 모세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해서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외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모범과 가르침을 따라 성령으로 행하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를 넘어서게 됩니다. 이것이 신약 성도들이 율법을 적용하는 방식입니다.  

신자는 사랑의 원리로 움직이는 “그리스도의 법”(갈 6:2)으로 삽니다. 새 언약의 축복은 성령께서 이웃 사랑에 대한 “최고의 법”(the royal law, 약 2:8)을 우리에게 적용시킬 때 순종하여 받습니다. 로열 법은 모세의 규례가 아닙니다. 십계명도 아닙니다. 그 이상입니다. 크리스천은 성령 안에서 행함으로써 모세법을 성취하고 그것이 요구하는 수준을 초월합니다.최고의 법’은 곧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랑의 법으로서 믿음과 생명과 자유의 길로 인도합니다(롬 3:27; 8:2; 약 2:11). 모세 율법은 무거운 멍에며 속박입니다(행 15:10). 항상 율법의 조문에 묶여 전전긍긍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과 용서에 바탕한 양심의 자유를 줍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로열 법은 율법의 영역과 수준을 넘어가고 율법이 줄 수 없었던 귀한 자유를 주므로 ‘더 좋은 언약’입니다.

 (히브리서 강해, 이중수 지음, 출판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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