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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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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와 헌금 시리즈(3) 교회 헌금의 문제점(B)

 

헌금 독려 방법의 나쁜 실례를 가지 든다면, 그릇된 성경 인용입니다. 성경 말씀은 방대한 분량입니다. 그래서 어떤 구체적인 목적에 맞는 구절들을 여기저기 뽑아낼 있습니다. 문제는 문맥이나 본뜻을 무시한 일방적인 적용입니다. 이렇게 되면 갖다 붙이기가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같아도 사실은 의도적인 오용입니다. 고린도후서 9 6절의 인용이 전형적인 실례입니다.  

이것이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고후 9:6).

헌금과 관련해서 구절을 인용하면 어떻게 이해할까요?  헌금을 많이 낼수록  물질의 복을 많이 받는다는 뜻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헌금을 적게 내면 수익이 적고,  많이 내면 수익이 을라가는 것일까요그래서 인색하지 말고 후하게 헌금하라는 말로 이해했다면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절은 연보에 대한 내용입니다.   의미는 고린도후서 8-9장의 문맥 안에서 파악해야  합니다. 다음 다섯 가지로 나누어 살피겠습니다.

 

첫째, 문맥(고후 9:1-5)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보십시오. 한마디로 연보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린도후서 9 7절에 나와 있듯이, 미리 준비하지 않고 내는 헌금은마음에 정한 대로하는 것도 아니고인색함으로나 억지로내기 쉽습니다. 그런 헌금은즐겨내는 것도 아닙니다. “적게 심는 ”(고후 9:6) 단순히 헌금을 적게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헌금자의 내적 자세에 대한 지적입니다.

헌금액의 차이는 상대적입니다. 어떤 사람은 많이 내고, 어떤 사람은 적게 냅니다. 그러나 많이 내도 적게 내는 것일 있고, 적게 내도 많이 내는 것일 있습니다. 수입이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계획 없이 억지로 내며 즐거움 없이 인색하게 드리는 헌금은 모두 적게 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 12절은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헌금의 분량에 있지 않고 헌금자의 마음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후서 9 6절에서 말하는많이 심는 많은 양의 헌금의 액수를 가리키기보다 헌금자의 올바른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둘째, 고린도후서 9 6절의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라는 말씀은 다음 절에 나오는인색하게 드리지 말라는 말씀과 연결되어(고후 9:7) 10절의풍성하게하신다는 약속으로 전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구절들을 순전히 문자적이고 기계적으로만 인용하면 한마디로 내가 헌금해서 받는 배당액이 투자액에 비례한다는 등식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 헌금하는 일이 이윤 추구의 방편으로 전락합니다. 헌금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비록 물질의 형태를 지녔어도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표시입니다. 헌금 행위는 영적 행위입니다. 많이 내면 많이 받는다는 식의 상거래적인 헌금은 영적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예배드리면서 헌금하는 까닭도 바로 같은 헌금의 영적 성격 때문입니다.

헌금을 많이 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인색하지 말고 후하게 주라는 말씀을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헌금의 목적과 동기가 자신의 수입이 늘고  사업이 잘되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릇된 헌금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9 7절에서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덧붙였습니다. 만일 대가로 돌아오는 것이 없다면 내지 않았을 헌금이었다면 기쁨으로 드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복하여  드릴 때만 진실로즐겨 내는 ”(고후 9:6)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내는 헌금자를 사랑하시고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셋째, 고린도후서 9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9:8).

 

여기에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물론 나의 필요를 충족 시켜 주신다고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넘치는 은혜는 나에게서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은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필요도 채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넉넉하게 해주신다면 그것은 배만 채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헌금하면 하나님이 넘치게 채워 주신다고 말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이 배를 채우시는 목적이 무엇인지가 언급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전히 이기적인 헌금으로 끝나고  맙니다. 고린도후서   9 8절에서 강조되는 대목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의 의도는 언제나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하려는 것입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만난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성도들에게 넘치는 헌금을 했습니다. 그들이 헌금은 가족의 복지나 교회의 번성만을 위해 주고받는 헌금이 아니었습니다. 마게도냐 성도들이야말로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넉넉한 은혜의 목적이 어디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실천한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일이 잘되게 해달라는 자기중심적인 동기에서 헌금하지 않았습니다.  

 

넷째,  고린도후서 9 9절을 살펴보십시오.

 

기록된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고후 9:9).

 

말씀은 시편 112 9절의 인용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의인은 시편 112 전체를 살펴볼 단순히 구제만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알았으며, 계명을 즐겨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직하였고 가난한 이들을 힘써 도왔으며 흉한 일을 만나도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고후 8:5) 사는 성도입니다. 그래서그의 의가 영원토록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목적은 단순히 가족이나 교회 정도의 테두리에서 안주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시편 112편의 의인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깨달아 가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바르게 사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이것이 헌금 이전의 헌신입니다. 그런데도 교회에  헌금 많이 해서 받으라는 식으로 성경을 오용하는 것은 헌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불경을 부추기는 일입니다.

 

고린도후서 9 10절을 보더라도 우리에게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는 목적이의의 열매를 더하게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의 열매모든 착한 ”(고후 9:8)이며, “모든 일에  부요”(고후 9:11)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12편의 의인처럼 넘치는 의의 열매를 맺는 성도의 삶이 있어야 터인데 그런 일에는 관심이 없고 넘치는 물질만 바라고 그나마도 상거래적인 등식을 대입 시켜 헌금을 격려한다면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후 9:6)라는 말씀을 영적 차원의 열매와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대입한 것입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후한 헌금을 하는 사람은 후하게 되돌려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의 가르침의 골자는 우리가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고후 8:5) 우리가 가진 것을 정한 대로 기쁘게 드릴 (고후 9:7)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이 채워 주시고 모든 선한 일을 하게 하시며 의의 열매를 맺도록 복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거래적인 요소나  자기 중심의 탐심이 없습니다.  

 

다섯째,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후 9:6) 말씀을 하나님께 많이 낼수록 많이 되돌아온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다음과 같은 말씀과 상반됩니다.

기록된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 8:15).

고린도후서 9 6절의 기계적인 해석에 따르면 많이 거두는 사람은 많이 심은 사람이고, 적게 거두는 사람은 적게 심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8 15절에서는 많이 심은 사람이나 적게 심은 사람이 결과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럼 많이 심어서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많이 거두려고 많이 심는 것이 아닙니까?

다시 고린도후서 8 15절을 살펴보십시오. 여기서는 고린도후서 9 6절의 파종과 수확에 대한 영적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많이 거둔 사람과 적게 거둔 사람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  “남지 아니하였고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구절의 핵심입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한마디로 많이 거둔 사람이 적게 거둔 사람에게 은혜를 끼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9 6-15절까지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넘치게 받은 사람이 착한 일을 넘치게 하여 의의 열매를 맺기 때문에(고후 9:8, 10)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원래 거두어들인 분량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평등하게 것입니다(고후 8:12-14). 사실만 보아도 헌금하는 사람은 자기 유익만을 위한 동기나 목적에서 물질의 복을 받으려고 하나님께 헌금해서는 된다는 것을 있습니다. 신자들에게는 번영에 제한이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보고서 가난한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구제헌금을 해야 한다고 권고했습니까? 까닭은 모두 비슷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고후 8:14).

 

바울은 말씀의 원리를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에서 찾았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거두었던 백성들 사이에는 거둔 양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16:18). 한편, 모세는 백성들에게 만나를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만나를 남겨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의 만나에서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 16:20)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축재를 원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물질적 축복 신앙에 현혹되어 많은 돈을 붙잡고 있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막대한 돈이 화려한 건축이나 불필요한 교회 행사에 쓰이고 있습니다. 그런 교회 사업들이 늘어날수록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됩니다. 물론 적지 않은 돈이 자선의 용도로 교회에서 지출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 교회가 선한 일과 의의 열매를 맺는 일에 얼마나 충실하며 무슨 동기와 목적에서 재물을 끌어안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필요 이상의 만나를 지니고 하루해를 넘기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까닭은 분명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해지지 않게 하고, 부유한 사람은 탐심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우리들의 욕심이나 야망을 채우기 위해서 내리지 않습니다. 내게 내리는 복은  나를 통해  이웃에게로 흘러가기 위한 것입니다. 흐르지 않는 복은 고인 물이나 광야의 만나처럼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진동합니다.

 

나누는 것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제자들의 수칙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부유한 사람으로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셨습니다(고후 8:9). 나누는 것은 단순한 구제가 아닙니다. 받는 쪽은 예수 그리스도의 후하신  은혜의 선물을 누리는 기쁨을 체험합니다. 이런 문맥에서 보면,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 14:7) 있다는 예수님의 지적은 믿음의 공동체가 나눔 공동체라는 점에서 매우 도전이 되는 말씀입니다. 있는 사람은 반드시 없는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 헌금을 많이 내면 많이 받는다고 가르치면 모두 개인주의자가 됩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생기겠습니까? 제각기 많이 내고 많이 받아 생각만 하지 가난한 이웃을 도울 마음이 앞서지 않게 됩니다. 우선 배부터 채워 두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 배가 채워진 이후에도 다른 사람들의 배고픈 사정에 민감하지 않습니다.  

헌금을 바치더라도 그것은 나눔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복을 받더라도 선한 일과 의의 열매를 맺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결코, 내가 좋은 집에 살고 많은 물질을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 공동체 속에서는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목적이나 동기에서 오가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믿음의 가족으로서 함께 누리는 하나님의 복으로 인해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고 기뻐하며 감사하면서 모든 것을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것입니다(고후 9:8-15).

헌금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무슨 목적을 가졌습니까? 바울의 가르침처럼 사랑과 기쁨과 감사와 찬양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개인의 욕심이나 교회의 야망을 위한 것입니까? 교회 헌금이나 개인의 수익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습니까?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도록 사용되고 있습니까?

 

◐ 헌금하는 사람이 그릇된 생각으로 헌금할 때

 

교회에 헌금이 많이 들어오면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고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헌금 액수가 높아도 반드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릇된 생각으로 교회에 바치는 헌금은 오히려 하나님의 노여움을 삽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많은 헌물을 바치고도 진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릇된 동기와 목적과 방법으로 내는 헌금으로 교회가 부유해지는 것은 결코 기뻐할 일이 아닙니다. 물질적 번영이 반드시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호세아나 아모스 선지자가 거듭 입증하였습니다(호 10:1; 암 4:4-5). 자의 반 타의 반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자신이 전혀 원하지 않았던 일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압력이 없었다면 구태여 행하지 않았을 일을 가리킵니다. 나의 의지와 남의 의지가 절반씩 섞였다는 뜻인데 다소 모호한 표현입니다.

헌금할 때 눈치를 보면서 결정한다든지, 남들도 하니까 나도 따라서 한다든지, 직분자이기에 부득불 헌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나의 헌금이 체면유지나 타산성에 의해 자의 반 타의 반이 되는 셈입니다. 우리는 헌금이 곧 헌신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헌신은 내 의지와 내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나의 헌신에는 타의가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내가 헌신할 때는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가령 하나님께 드릴 것을 안 바치면 벌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서 헌금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혹은 헌금을 잘해야 목사님의 인정을 받는다거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서 헌금한다면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헌금이 헌신의 한 표현이라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적당히 할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어떤 이해득실을 생각하고 크게 헌금해서도 안 되지만, 그런 헌금자를 교회에서 우대하는 것도 그쳐야   합니다.

교회에 바치는 헌금은 영적 행위이므로 거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돈을 많이 내야 장로가 되고 가난하고 적게 내면 끼지도 못한다는 말들이 교인들 사이에서 예사로이 나도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장로나 안수집사가 되면 으레 특별헌금이나 헌물을 하는 것이 우리나라 교회의 관례입니다. 직분을 받은 것을 감사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런 감사가 반드시 온 교회가 다 알도록 드러나게 표현되어야 한다면 직분과 돈의 유착 관계를 끊을 수 없게 됩니다. 직분을 받아 감사하다면 교회를 잘 섬기면 될 것이고 물질로 표현하고 싶으면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재물에는 눈치 보기, 경쟁심, 드러내기, 이해관계, 조건부 거래와 같은 육적 동기와 목적이 없어야 합니다. 재물을 바치는 사람의 마음이 불순하면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더러운 재물이 됩니다. 거룩한 소명을 받은 교회가 오염된  재물로 운영된다면, 교회는 정결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 헌금이 잘못 사용될 때

 

세상에 속한 모든 물질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신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유한 물질은 주인 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개인이나 교회의 경우에 다 같이 적용되어야 할 중요한 청지기직의 원칙입니다. 만일 교회가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에 돈을 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또한 그런 수익금으로 발생하는 잡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일들은 상상이 아니고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큰돈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는 것이 성경의 원칙입니다(고후 8:15). 교회에 잉여자본이 많아서 음성 자금으로 오용되는 일은 하도 잦아서 세상 사람도 다 압니다. 미디어에 노출된 교회의 재정 비리는 더 이상 충격적인 뉴스가 아닙니다. 물론 늘 교회 운영에 쪼들리는 교회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재물을 바르게 사용하려는 양심적인 교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 헌금을 무책임하게 사용하고 거액을 교회 건축에 쏟아붓거나 불필요한 여러 전시용  프로그램에 낭비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교회는 돈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 돈을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승화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올바른 청지기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헌금을 받더라도 재물을 축적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오히려 세상에서 들어온 돈을 다시 영적인 목적을 위해 교회 밖으로 내보내는 곳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돈을 성도들의 손을 통해 거두어들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헌금을 강요할 수 없으며 받은 헌금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책임을 져야 합니다. 교회는 돈을 소유할지라도 그 돈의 주인이 아니며 언제나 청지기로서 모든 재화의 주인이신 하늘 아버지와 계산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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