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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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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성경공부(6과)  

요 1:35-51

 

본 항목은 갈릴리 어부들이 예수님에게 관심을 두고 서로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1. 갈릴리 어부들의 주된 관심이 무엇이었습니까? (1:35-37, 41, 45).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주된 관심은 무엇입니까?

 

2. 메시아를 사모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1:35-36, 41-42, 43, 45-46) 오늘날의 전도 방법에 대해 말해 보십시오. 나는 어떤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3. 빌립과 나다나엘의 성품을 대조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아보십시오.

 

4. 베드로는 충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반석(게바, 베드로)으로 불릴 것이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1:42)

 

5.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1:50)고 하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6.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1:51)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창세기 28:13-15; 히 10:20)

 

[참고]

요한의 아들 시몬”(요 1:42).

예수님은 요한복음 1:42에서는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마태복음 16:17에서는 “바요나 시몬”이라고 하셨다. ‘바요나’는 ‘요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요한과 요나는 동일인을 가리키는가?

베드로는 아마 ‘요하난의 아들’(the son of Johanan)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히브리 형식의 이름이다. 요나는 아람어로 요하난을 줄인 약칭이다. 요한은 헬라어 형태의 이름이다.”(NIV Study Bible)

 

 

 

 해설

 

[본 항목은 1장의 절정이다. 1장은 ‘말씀’에 대한 증언으로 가득하다]

⇒ 세례 요한은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 세상에 빛으로 오셨음을 증언한다(1:1-8). 그다음 그는 이 말씀을 예수님이라고 지적하며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자기보다 먼저 계신 분이며(1:15)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한다(1:29, 36).

⇒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침례/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로부터 성령이 내려 그 위에 머무는 것을 보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증언하였다(1:29, 34, 36).

(참고. 공관복음서에는 이때 하늘의 음성이 나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아버지의 증언이 나온다. 마 3:17; 막 1:11; 눅 3:22).

⇒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증언한다(1:41)

⇒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나사렛 예수가 모세 율법과 선지자들이 기록한 분이라고 증언한다(1:45)

⇒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보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1:49)라고 고백한다.

 

▣ 요한복음 1장의 서두에서 하나님과 함께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은 누구라고 증언하는가?

말씀’은 창조주(1:3), 생명의 원천(1:4), 각 사람에게 비추는 참 빛(1:4, 7-9),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독생자(1:14, 17), 하나님의 어린 양(1:29, 36), 구약 성경이 예고한 메시아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라는 나다나엘의 고백으로 절정의  결론에 이른다.

 이로써 예수님의 신분이 여러 단계의 중첩된 증언에 의해 확명하게 밝혀졌다. 이것은 거시적인 기독론으로서 빌립보서 2장의 기독론에 버금간다(빌 2:6-11). 

 

[세례 요한과 제자들의 증언의 특색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간증은 자기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술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조연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간증자는 간증 대회에서 대상(大賞)을 받고 예수님은 참가상을 받는 정도이다.

세례 요한을 비롯하여 제자들의 증언은 모두 예수님에게 초점이 모인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가리키며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증거를 제시하였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구속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며,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분이라는 것이다.

간증은 내가 어떻게 주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를 진술하는 것이지만 초점은 그리스도의 신분과 그분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행하신 구속 행위에 모여야 한다.

 ☞ 사도바울의 간증  (행 22:1-21; 26:1-23).

 

[예수님이 처음 만난 제자들의 특징]

4명의 사람이 자기 일생 최대의 만남을 갖는다. 안드레, 빌립, 베드로,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인생이 일변하는 체험을 한다.

 

1) 안드레

그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로 소개된다. 그는 자주 이런 식으로 알려졌다(요 6:8; 눅 6:14). 그는 자기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리더격인 베드로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세례 요한의 제자가 될 정도로 영적 관심이 높았으며 메시아를 대망하던 자였다(요 1:41). 그는  직관적이고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가 곧 메시아라고 확신하였다(요 1:41).

그는 베드로를 예수께로 데리고 갔다. 누구나 다 탁월한 리더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구나 리더가 될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할 수 있다. 예수님은 시몬을 보시고 그가 장차 큰 사역을 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1:42). 베드로는 초대교회의 기둥 같은 지도자가 되었다(갈 2:9). 만일 안드레가 없었다면 사도 베드로도 없었을 것이다.

 

 2) 빌립

그도 안드레처럼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소개하였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증언한 내용은 성경에 근거한 주장이었다(요 1:45). 그는 예수님이 모세와 선지자들이 구약에서 예고한 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분이 곧 요셉의 아들이며 나사렛 예수라고 증언하였다. 그의 말대로 과연. 예수님은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였다(비교. 눅 24:25-27).

 

 빌립은 평소에 성경 말씀을 확신하였고 성경이 말하는 메시아에 관해 관심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우리들도 성경 말씀에 근거한 확신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가? 그래야만 다른 사람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담대히 증언할 수 있다. 개인 전도는 전도자에게 성경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이다. 안드레와 빌립은 성경에 근거한 확신으로 개인 전도를 통해 다른 형제들을 예수께로 인도하였다.

  그럼 빌립은 누구의 전도를 받았는가? 그는 다른 사람의 소개를 받아 예수께로 간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직접적인 부름을 받아 제자가 되었다(1:43). 하나님은 지금도 각자를 여러 형태와 통로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게 하신다. 어떤 이는 다른 사람의 전도로, 또 어떤 이는 혼자 성경을 읽음으로써, 혹은 직접적인 성령의 인도로 예수님을 만난다.

 

3) 베드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게바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이라고 하셨다. 게바는 아람어로서 베드로인데 반석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과연 반석과 같은 성품을 가진 자인가? 복음서를 비롯하여 신약 성경에서 언급된 베드로는 충동적이고 감정적이며 용감하면서도 한순간에 겁을 먹고 마음을 바꿀 수 있는 불안정한 인물이었다.

☞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식탁 교제를 하다가 할례자들이 오자 자리를 떠나 물러났었다(갈 2:12). 그는 이 일로 인해서 바울로부터 책망을 받았다.

☞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의 제자로 지목되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다(막 14:66-72; 눅 22:54-62; 비교. 요 9:68).

 

예수께서 시몬을 보시고 이르시되…..”(1:42)

주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눈에 다 보신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들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에 머물지 않으시고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 빚어질 내일의 새로운 모습을 보신다. 베드로는 여러 약점과 심각한 실족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고(갈 2:9) 오순절 설교로 삼천 명의 회심을 일으키는 대부흥의 주역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을 위해 순교하였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1:42).

예수님은 베드로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대변하는 “시몬”이라는 이름을 대시고 그가 장차 게바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 시몬이 게바로 바뀌게 될 날이 온다는 것이었다.

 “장차 게바라 하리라”(1:42). 이것이 우리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갖게 되는 소망이다. 나는 현재 되어야 할 나의 마땅한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새 이름을 받는다. 주님은 나의 새 이름에 합당한 모습이 되게 하기 위해서 역사하신다. 우리들이 할 일은 나의 새 이름이 드러나도록 주님의 인도에 따라 순종과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이다.

 

4) 나다나엘

예수님은 빌립을 불러 그의 사역 팀이 되라고 초대하셨다(1:43-44).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가서 메시아를 발견하였다고 말하였다(1:45). 처음에 나다나엘은 회의적이었다. 그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1:46)고 하였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역 중에서 반란이 잦은 갈릴리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것은 그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나다나엘은 말씀을 묵상하는 자였다. 그럼에도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성경을 다 아는 것이 아니었다. 이사야 9:1-2에서는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예언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히 평범한 갈릴리 사람이 이렇게 진지하게 시간을 내어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였다는 것은 본받을 만한 일이다.

 

<왜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처음에 의심했을까?>

 

빌립이 그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말한 메시아를 만났다고 했을 때 그는 회의적이었다. 그 까닭은 장소에 대한 편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야곱에게 그의 사다리 꿈에서 큰 인상을 준 것은 장소였다. 야곱에게 이 장소는 하늘과 땅이 닿는 거룩한 곳이며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고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성역이었다. 그의 표현대로 이곳은 벧엘(하나님의 집)이었다. 벧엘은 앞으로 이스라엘의 중요한 성소의 하나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려는 것의 전부는 아니었다.

  나다나엘도 야곱과 같았다. 그는 특정 장소에 집착하였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고 인물이다. 야곱은 하늘에 닿은 사다리(혹은 계단, 층계)가 놓였던 땅에 마음이 쏠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사다리의 정체를 알려주셨다.  예수님 자신이 사다리라는 것이었다. 땅에서 하늘로 가는 액세스는 예수 그리스도, 곧 이스라엘의 메시아인 인자를 통해서 열릴 것이었다. 하나님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하늘로 가는 길을 발견한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셈이었다.

사다리가 놓였던 땅을 바라보지 말라. 사다리를 보라. 내가 사다리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아무도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나다나엘의 장점은 편견이 있어도 마음의 문을 열어 놓은 것이었다. 빌립이 ‘와서 보라’고 했을 때(1:46)  나다나엘은 예수가 나사렛 사람이라는 사실로 회의를 느꼈지만 빌립을 따라나섰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고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높은 타이틀로 불렀다. 그의 편견은 역전되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예수님에게 가장 고귀하고 정확한 신앙고백을 하였다.

 

▣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들이 편견과 무지로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상황에서 우리들이 찾는 최선의 것들을 증정하신다. 주님은 나다나엘에게 그가 찾는 메시아가 나사렛 예수이심을 깨닫고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셨다.

 

[나다나엘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ㄱ.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48절). 무화과나무는 그늘이 좋아서 묵상과 기도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럼 그는 무슨 묵상과 기도를 하였을까? 예수님이 그를 보시고 평가하신 것에 비추어 그는 야곱의 스토리를 묵상했을 것이다.

야곱은 누구인가? 그는 성격이 원래 간교하고 남을 그럴듯하게 속이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기만적인 악행으로 형의 장자권을 탈취하고 아버지를 속인 후에 가출한 나쁜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피신하던 길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고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하늘과 땅 사이를 오르내리는 층계/사닥다리를 보았다(창 28:10-15). 이것이 나다나엘이 묵상한 내용이라고 보면 본 스토리의 의미가 살아난다.

 

ㄴ.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시고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1:47).

이 평가는 분명 야곱 스토리를 배경으로 삼은 것이다. 야곱은 원래 간사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삶의 방향과 질을 바꾸신 후에 ‘이스라엘’이라고 개명해 주셨다(참조. 창 32:28, 개역 난외주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 나다나엘은 자신이 진지하게 묵상하던 야곱의 스토리에서 교훈을 받던 중이었다.

▶ 그는 야곱의 간교한 인격을 싫어하며 자신의 성품에서 그런 것이 없는지 아마 반성하던 중이었을 것이다.

▶ 그리고 기만적인 야곱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대하시고 축복하신 것을 감사하며 그러한 복을 위해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평가는 이런 것이었다.

「너는 간교한 야곱이 아니다. 너는 진짜 ‘이스라엘’이다. 너는 남을 속여서 자기 유익을 챙기려는 자가 아니고 정직하고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순종하려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자기 속을 꿰뚫어 보시며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확신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이러한 놀라운 신앙 고백을 들으시고 야곱의 사다리가 과연 그를 포함하여 다른 제자들에게 현실로 응할 것을 예언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노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1:50-51).

 주님은 우리들이 주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그분께 신앙을 고백하면 자신을 우리에게 더 많이 계시하신다(약 4:8).

 

[이 약속의 의미는 무엇인가?]

ㄱ. 야곱의 꿈에 나타났던 천사들은 하늘과 땅에 이어진 층계 위를 오르내렸다. 이제는 그들이 인자 위로 오르내릴 것이라고 하였다(창 28:12). ‘인자’는 예수님이다. 그는 곧 야곱의 사닥다리가 상징했던 실체이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 사이의 중보자다(Go-between, Mediator).

 하나님의 축복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내려온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 사이의 계단이며 사다리다.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요 14:6).

 예수님이 나다나엘의 사다리가 되실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볼 것이라고 하셨을 때 “너희에게 이르노니”(51절)라고 하셨다. ‘너희’라는 복수에 유의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누구에게나 하늘이 열린다.

 

ㄴ. 주님은 기만자며 나쁜 성품을 가졌던 야곱을 구출하시고 새 이름을 주셨다. 우리 각자에게 야곱과 같은 부분들이 있다. 주님은 우리들을 뒤틀린 삶에서 구출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마침내 하나님의 축복을 간절히 구하며 새 삶을 살기를 원하는 참 ‘이스라엘’이 되게 하신다. 야곱은 이스라엘의 12 지파의 조상이 되었다. 우리들도 주 예수를 메시아(그리스도)로 믿고 신뢰하면 우리를 위해 하늘이 열린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늘에 속한 새로운 질서에 속하여 천상적인 하나님 나라의 삶을 땅에서부터 살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이며 동시에 주의 천사들이 우리들을 돕기 위해 내려오는 통로이다. 땅과 하늘 사이의 장벽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거되었다. 그래서 우리들의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께 올라가고 우리들은 아무런 방해가 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히 4:14-16).

 예수님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점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성육신으로 하늘을 땅에 닿게 하셨고, 승천으로 땅의 백성을 하늘에 닿게 하셨다.

 

ㄷ.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그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고 하셨다. 나다나엘은 놀라워하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하였다. 예수님은 이 고백을 들으시고 그에게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요 1:50) 하셨다.

 무슨 의미일까? 야곱의 층계와 관련된 말씀이다. 예수님은 야곱이 꿈에서 본 하늘에 닿는 사다리를 언급하시며 자신이 곧 하늘과 땅을 있는 분임을 시사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가장 뚜렷한 기독론의 천명이다. 더 큰 일은 다음 절에서(요 1:51) 인자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으로 명시되었다.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도우미들임을 시사한다. 그들은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며 성도들이 약속된 유업을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사후에 성도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며, 마지막 날에 악인들은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지고 택하신 자들은 사방에서 모으는 일을 한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 1:14).

또 그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막 13:27; 마 13:41; 25:31; 살후 1:7).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눅 16:22).

 

 ▣ “더 큰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전반에 걸쳐 드러날 일체의 계시를 가리킨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의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러내는 모든 구원 사역도 포함한다.

 

◑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분이 의미하는 것.

그는 창조주이시다. 그는 자연을 통제하시고 병자를 치유하신다. 그는 악령들을 내쫓으시고 사탄을 이기시는 메시아이시다. 그는 단순히 나사렛 예수가 아니고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그는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 그는 구속주로서 죄인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다. 그는 성령을 주시고 그를 믿는 성도들의 삶을 돌보신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은 그의 사역 기간 동안에 여러 사건들과 가르침을 통해 계시되었다.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묵상하던 나다나엘의 중심을 보셨다. 그리고 나다나엘이 묵상했던 야곱의 사닥다리의 실체와 그것이 지닌 참뜻을 예수님 자신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 가나의 포도주 기적(요 2:11)

☞ 예수님의 축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막 1:27)

☞ 중풍병자를 일으키신 치유의 기적에 대한 찬송(막 2:11-12)

☞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을 때의 제자들의 감탄(막 4:31)

☞ 귀신 들린 사람의 구출과 증언(막 5:19-20)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막 5:19).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막 5:20).

☞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과 예수님의 변화산 변용을 목격함(막 9:1-13)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막 13: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막 14:62).

  ☞ 제자들은 빈 무덤을 보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보았다(요 20:1-9, 18-20, 2529; 21:7)

☞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하였다(행 1:9-11)

 

▣ 오순절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의 신분과 그분의 메시아 되심을 드러내고 십자가 구원의 복음 선교 활동이 활발한 곳에서 하늘과 땅이 만나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성령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죽음과 죄에 갇혀 있던 죄인들이 하늘에 속한 백성으로 거듭나는 재창조를 체험한다. 사탄의 나라가 점차 붕괴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서 강성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야곱의 사다리가 지닌 참 의미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하늘과 땅이 다시 온전히 합쳐지는 회복과 통일 속에서 드러날 것이었다. 구원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불순종과 배신으로 갈라진 하늘과 땅이 다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와 치유로 만나는 것이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이런 일들은 야곱이 본 것보다 더 큰 일들이며 나다나엘이 묵상한 내용보다 더 큰 일이다. 이러한 일들은 나다나엘과 모든 제자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계속해서 보게 될 하늘과 땅이 닿는 “더 큰 일”들이다. 당신은 이 ‘더 큰 일’들을 보고 있는가?                         

 

[땅과 하늘이 닿는 구속사적 단계]

 

구약 시대: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러 장소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다가 마침내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우고 고정된 장소에서 희생 제사를 올리며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기 때문에 땅과 하늘이 닿는 곳이었다. 백성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희생 제물을 바쳤고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죄의 용서를 받았다.

◑ 성전은 지상에 있었지만 하나님의 임재는 백성으로 하여금 하늘에 속한 용서와 축복의 선포를 받게 하였다.

◑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언약 공동체로서의 결속을 다지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영적 교제를 나눔으로써 하늘의 실체를 체험하는 곳이었다.

 

신약 시대: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임재하시고 축복하시는 방법에 혁신적인 변화가 왔다. 이 변화는 어떤 것인가?

  하늘이 열리는 변화이다. 하늘이 땅에 닿는 변화이다. 땅에 속한 것들이 하늘에 속한 것들로 변화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늘에 속한 자로서 땅으로 내려와 하나님의 영광을 비춰주고 은혜와 진리의 삶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요한은 서두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고 증언하였다. 여기서 ‘거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신다’는 뜻으로 그의 항구적인 임재를 가리킨다.

 

▣ 그러니까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에 대한 아이디어는 출애굽 당시의 광야의 장막 생활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 그리고 다시 성막이 지닌 하나님의 임재의 아이디어는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연결되고 ⇒ 또다시 예수님 자신의 성육신의 임재에 귀착됨으로써 하나님의 임재의 궁극적인 목표가 성취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임재의 실체로서 오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단번에 희생 제물로 드리시고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히 9:12). 이로써 성전이 지향하고 목표로 삼았던 모든 것을 성취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손으로 지은 성전에 상징적으로 임재하실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 설교의 중요한 요점이었다(행 7:46-50). 하나님께서는 이제  십자가의 피로써 그를 믿는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말씀이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 사셨고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하였다(요 1:14). 이 영광은 출애굽기의 마지막 말씀을 상기시킨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출 40:38).  

 

 하나님은 성막 위에 구름과 불로써 자신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시고 자기 백성을 유업의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백성은 장막 위에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모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이것은 앞으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의 영광의 실체를 온 백성에게 보여 주실 것에 대한 생생한 표지판이다.

 

  ▣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약속을 실체적으로 이루신 가시적인 실현이었다. 주의 백성은 이제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에 드러난 것을 볼 수 있었고 자기 백성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은 교회적으로 또한 개별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계속하여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날마다 은혜와 진리의 교제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성육신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tabernacled, 요 1:14). 광야 시대에 이스라엘 진영 가운데 성막을 통해 거하셨듯이, 우리 가운데 성막을 치시고 광야와 같은 거친 세상에서 우리들을 보호하시며 인도하신다.

 

 [교훈 1]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행한 것처럼,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영적 전투 준비를 하고 영적 가나안의 유업의 축복을 받기 위해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셨다(마 28:20).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우리들은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게 될 것이다(계 21:10, 16, 22). 그때에는 우리들이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온전히 거하게 될 것이다(요일 3:24; 4:16). 현재로서는 우리들의 교회와 개별 성도들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고전 3:16; 6:19; 고후 13:5).

 이렇게 볼 때 요한복음 1:51절은 예수님이 자신의 구원 사역으로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의 완전한 성취에 대한 압축된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야곱의 사다리는 성전과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하나의 표지판이며 궁극적으로 벧엘(하나님의 집)의 실체인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하늘이 열리고 하늘과 땅이 서로 닿는 것을 보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들이 예수님 안에 거하면 마치 하나님의 집에 있는 것과 같다. 즉, 하늘 성전에 머무는 것이다. 우리들은 아직 땅에 있지만 야곱의 사다리가 상징하는 예수님의 층계를 타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셨던 말씀은 지금도 진리이며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예수님은 야곱이 꿈에서 본 사닥다리의 실체이시다. 예수님 자신이 하늘과 땅 사이의 중보자이시다(Go-between, Mediator). 하나님의 축복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내려온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 사이를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이시다.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예수님은 나다나엘 뿐만 아니고 주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중보자이시다. 예수님은 계단이시다. 땅과 하늘 사이의 장벽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모두 제거되었다.

 

예수님은 진정한 사다리다. 그에 의해서 땅과 하늘의 간격이 채워졌다. 그분 안에서 하늘의 영광이 땅으로 내려왔고 인간이 되신 하나님 안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지상의 인간이 하늘로 올려졌다.”(R.V.G. Tasker, Tydale NT Com. p.54)

 

[교훈 2]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요 1:35-37).

 

본 항목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그와 함께 있었던 또 다른 제자와  베드로와 빌립 및 나다나엘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세례 요한의 두 제자 중에서 한 사람은 안드레였고 다른 사람은 아마 요한이었을 것입니다.  이 두 제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지적하는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즉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두 제자는 평범한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흔히 그런 범인들이 깊은 믿음과 영적 통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지만 요한을 떠나 예수님께로 갈 만큼 자기 스승의 말에 순종하였고 예수님의 와서 보라는 초대에 주저 없이 응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증언하였습니다. 그럼 요한의 두 제자는 배신자였을까요? 세례 요한의 다른 제자들도 많았지만 그들은 예수를 따르지 않은 듯합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공적으로 증언한 것은 이것이 두 번째였습니다(요 1:29, 36). 그럼에도 안드레와 다른 한 제자의 전향만 언급되었습니다. 사실상 세례 요한의 다른 제자들은 오랜 기간 그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스승에게 충성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더 큰 진리 앞에서는 충성의 대상이 바뀔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은 자신보다 더 큰 빛을 소개하였고 자신은 그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끈도 풀기를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요 1:27). 그럼에도 대부분의 그의 제자들은 요한을 떠나 예수께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에는 그것은 의리가 없는 일로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의 라이벌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요한에게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서 사람들이 다 그에게로 간다고 보고하였습니다(요 3:26). 그 때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요한의 제자들은 계속 요한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요한이 투옥되었을 때에도 그를 지지하였습니다(마 11:2).

  이런 충성은 인간적으로 보면 의리가 있어 보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제자들의 충성이 예수님에게로 옮겨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드레와 다른 한 제자는 세례 요한의 뜻을 잘 헤아리고 바른 결정을 내린 자들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변심을 한 것이지만 이들은 자기 스승의 사역의 목표에 기여한 자들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도록 길을 닦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생각하고 우리들의 충성의 대상을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이해 관계나 의리나 인정 때문에 더 나아가야 할 하나님 나라의 길을 주저하거나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들의  최종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위해서 더 나아가야 할 자를 자기 밑에 붙잡아 두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스승과 제자 관계를 우리는 재정의해야 하고 재적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잠정적인 충성의 대상과 영구적인 충성의 대상을 구별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한시적인 스승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스승입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로 옮겨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는 자들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지판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아무리 훌륭하고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을지라도 우리들이 주 예수를 따르지 않으면 그들의 소명이 완취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주 예수를 따라갈수록 우리들의 길잡이 스승들은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은 그런 스승들을 칭찬하십니다. 주님은 세례 요한이 “켜서 비추이는 등불”(요 4:15)이며 여자가 낳은 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자라고 하셨습니다(마 11:11). 

 

 

[교훈3]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요 1:38).

우리들이 주님에게로 나아가면 돌이켜 보시고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계신 곳에 함께 머물며 배우고 섬기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와서 보라”고 하셨습니다(39절). 주님을 알고 배우기를 원하는 자들을 주님은 거절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그를 잡으러 온 로마 병정들과 성전 경비병들에게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요 18:4)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무덤 곁에서 울고 있던 마리아에게도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요 20:15). 이 질문은 매우 시사적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찾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찾습니다. 자기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을 찾습니다’ 라고 하지 ‘나를 찾습니다’ 하고 수소문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의 두 제자는 무엇을 찾고 있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내가 찾는 것은 나에게 중요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중요하거나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찾는 것은 나에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날마다 무엇을 찾아다닙니다. 돈을 비롯하여 직장, 결혼, 주택, 명예, 건강 등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필요하고 중요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것들이 우리 인생의 참 목적과 의미를 주는데 얼마나 기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영구적인 가치를 지닌 것을 찾아야 하고 궁극적인 의미를 주는 것을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메시아를 찾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은 이 세상과 나를 구원할 메시아를 찾기 전에는 아무것에도 영구적인 만족을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찾아야 할 궁극적인 실체입니다. 주님은 메시아를 찾는 자들에게 자신을 공개하십니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다 와서 마시라고 초대하십니다.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39절). 그날 두 제자가 주님과 가졌을 대화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이 주님의 초대를 받아들였을 때 자신들의 일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안드레는 그의 형인 시몬을 찾아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41절)고 증언하였습니다.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자들은 입을 다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계시거나 숨어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거처를 알려 주시고  원하는 자는 그와 함께 머물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던 안드레와 다른 한 사람은(40절) 그들이 찾던 구주 예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날은 그들의 생애의 최고의 날이었습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무엇을 찾으면서 삽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비록 내 손에 들어와도 나를 영원히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은 나의 죄를 씻을 수 없으며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우리가 찾는 것을 준비해 놓고 ‘와서 보라’고 청하십니다. 그래서 그의 초대에 응하여 가 보면 주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이 우리를 먼저 찾으십니다. 잃어버린 양은 스스로 자신이 찾고 있는 것을 찾지 못합니다. 길 잃은 양은 목자가 찾아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세상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당신은 ‘와서 보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응한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고 있습니까? 당신은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당신을 위해 무슨 일을 행하셨으며 또한 앞으로 당신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진리와 보살핌을 받으면서 그분을 왕으로 모시고 살 때에만 진정으로 당신이 추구하는 행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깊은 통찰의 눈으로 보셨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시선은 베드로의 과거를 보셨고 현재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어떤 사람이 될 것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보시고 장차 게바로 불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게바는 반석이라는 의미입니다.   당시의 베드로는 반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충동적이었고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새 이름을 주십니다. 새 이름은 새 출발을 의미합니다. 새 이름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신들의 운명이 주님의 은혜로 변화될 것을 의미합니다. .   

하나님의 축복은 개명(改名)과 함께 옵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되었고, 사래는 사라가 되었으며,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조상들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과연 반석으로 다른 형제들에게 힘이 되었고 초대교회의 기둥이 되었으며 반석 같은 믿음으로 주님을 끝까지 섬기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새 이름을 주시고 그 이름에 합당한 자들로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우리들이 주님과 함께 계속 머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녀들이 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당신은 ‘와서 보라’는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였습니까? 주님과 함께 머물면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찾습니다. 주님은 자기와 머무는 자들에게 자신이 야곱이 꿈에서 본 하늘에 닿는 사다리의 실체라고 알려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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