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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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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성경공부 교안(7과)  

요 2:1-12

 

▶예수님은 가나에서 첫 번째 기적을 행하셨다. 요한복음에서 기적은 표적이라는 말로 사용되었다(11절; 요 6:26; 12:37; 20:30). 표적은 겉으로 드러난 것 뒤에 깊은 영적 실체의 의미가 있음을 시사한다.

▶본 스토리는 실제적인 교훈과 신학적인 교훈으로 나눌 수 있다.

 

A. 실제적 교훈

1. 마리아는 위기 때 누구의 도움을 먼저 청했는가?(3절)

2.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예수님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라고 한 까닭은 무엇인가?(5절)

3. 하인들의 순종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7-9절)

4. 제자들이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은 무엇을 믿었다는 말일까?(11절; 요 20:30-31)

5. 본 스토리에서 예수님은 우리 삶의 위기의 현장에서 어떤 분으로 묘사되고 있는가?

 

B. 신학적 교훈

1.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4절). 예수님이 언급한 자신의 때는 어느 때를 말하는가?(요 7:30; 8:20; 12:23, 27, 비교. 요 7:39; 십자가 죽음/부활/승천=그리스도의 영광, 13:1; 17:1)

2. 유대교의 정결의식과 죄를 씻는 예수님의 정결사역을 대조해 보라. 

 

[참고]

구약에서 하나님의 축복 목록에는 넘치는 포도주가 포함되었다(시 104:15; 잠 3:10).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유대교의 공허함을 역설한다. 넘치는 포도주를 공급하시는 예수님은 유대교의 무력한 의식을 새 창조의 새 포도주로 바꾸시는 분임을 드러낸다. . 

 

                           *****

 

[해설]

 

1. 본 기적은 이 세상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분이 예수님이심을 말해 준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일어났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과 흥미를 일으키지만, 물을 술로 변하게 했다는 점에서는 다소 어리둥절해진다. 이미 잔치에 초대된 하객들은 취한 후였다(10절). 그렇다면 술에 취한 손님들에게 더 많은 술을 만들어 주는 것은 부도덕하지 않은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는 첫 번째 신령한 기적이 술의 공급이었다는 점이 그리 탐탁하지 않다. 수천 명의 굶주린 무리에게 오병이어로 넉넉한 식사를 공급했다든지 혹은 병자를 치유했다든지 아니면 호수 위를 걷는 초자연적인 기적이었다면 훨씬 나은 인상을 주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이런 아쉬움은 본문 자체가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의 포인트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는 자신들의 어떤 도덕적 기준이나 관습적 잣대로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판단할 수 없다. 사실  예수님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마 11:19)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 말은 예수님이 사회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던 무리와 함께 식탁 교제를 하셨기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가난한 자와 멸시받는 자와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이심을 깨닫지 못한 소치였다. 

  가나의 기적은 예수님이 술을 좋아하셨기 때문에 포도주를 기적으로 잔뜩 만드시고 코가 비뚤어지도록 하객들이 마시게 했다는 식으로 폄하될 수 있다. 돌항아리 한 개에 2-30 갤론이 들어갔다. 6개의 항아리였으니까 적어도 150 갤론의 엄청난 분량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도 술을 엄청나게 마셨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본문은 예수님이 포도주를 대량으로 공급하고 취하도록 마시게 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분과 그의 메시아직의 성격에 대한 사건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가나의 결혼 잔치에 가셨다(2:1-2). 그런데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지는 난처한 일이 생겼다. 사람들은 미리 계획을 세우고 준비한다. 그러나 만사가 항상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잔치 중에서도 불상사가 발생한다. 인생의 현장에는 가장 기쁘다고 생각하는 경사의 순간에 모든 행복을 앗아가는 재난이 덮칠 수 있다. 결혼식장에 신랑이나 신부가 나타나지 않거나 예식장에 불이 나기도 한다. 우리는 삶을 기계적으로 계획할 수 없다. 우리는 원하는 대로 삶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 미국의 대 투자가인 George Soros가 (08년) 금융 위기 때에 인터뷰하면서 we can’t govern ourselves. 라고 말하였다.

 

 가나의 결혼 잔치에서 잔치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포도주가 떨어졌다. 그러나 변수가 많은 우리 인생의 무대에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것이 본 스토리의 교훈이다. 실패는 성공으로 역전되고, 낙심은 낙관으로 승화되며, 부족은 풍요로 바뀐다. 낭패로 보였던 일이 신랑에게 복이 되었다. 연회장(宴會長)은 신랑이 극상품의 포도주를 나중에 내놓았다고 크게 칭찬하였다. 

본 사건은 우리 삶의 한 단면이다. 예기치 못한 불행은 우리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게 하고 실망과 두려움을 안겨 준다. 우리를 온갖 종류의 재난과 불행으로부터 구출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다.

가나의 혼인 잔치는 이 세상의 모습이다. 모든 것을 준비하고 손님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인다. 그런데 갑자기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발견한다. 다 준비한다고 했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긴 것이다. 인간은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 자축할 만큼 성공하는 일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성취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의 계획은 처음부터 결정적으로 하자가 있다. 인간은 내재적인 한계성의 문제를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 가나안의 혼인 잔치는 잘 진행되는 듯했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포도주가 떨어졌다. 공급 자체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다. 다함이 없는 포도주가 공급되었다. 생명수는 예수님이 공급하신다.

 

▶ 가나에서의 첫 번째 기적은 예수님의 사역을 정의해 준다. 즉,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세상에 오셨고, 그의 사역이 무엇이며,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가리킨다. 가나의 결혼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는 난감한 궁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무한대의 공급자로 드러내셨다. 인간의 제한된 자원과 예기치 못한 당황스러운 상황은 예수님의 개입으로 일시에 큰 기쁨과 넘치는 만족감을 가져왔다.

 

▶  유대교의 정결 의식은 죄를 씻길 수 없다. 예수님은 돌항아리의 물이 아닌, 자신의 십자가 보혈로써 죄를 정결케 하신다.  주 예수의 십자가를 믿는 자는 가나 잔치에 초청을 받은 하객들이 마셨던 최상의 포도주처럼 누구나 마시고 만족한다. 그리하여 다시는 목마르지 않고 성령 안에서 영생의 새 삶을 누린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5).

 

2. 하나님의 때는 우리들이 원하는 때에 맞추어질 수 없다.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지는 것은 하객들에게 큰 실례가 될 뿐 아니라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나쁜 기억으로 오르내렸다. 당시의 풍습에 의하면, 이것은 신랑과 신부의 장래에 대한 흉조로 해석되었고 준비되지 않은 잔치는 하객들로부터 소송을 당할 수도 있었다.

마리아는 포도주의 문제를 아들에게 가지고 갔다. 마리아는 누가 이 난처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지를 알았다. 곤경에 빠졌을 때 누가 자기를 도울 수 있는지를 모르는 것은 더 깊은 곤경으로 들어가게 한다. 마리아는 평소에 예수님의 지혜와 그가 가진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를 관찰했을  것이다(눅 2:49-52). 아마도 요셉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장남인 예수님의 도움에 의존했을 것이다. 그녀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기에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2:3)라고 간단히 알렸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4절)라는 다소 애매모호한 답변을 하셨다. 예수님은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마리아의 말을 듣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를 바라보신 듯하다. 그래서 아직은 자신이 포도주처럼 부어질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했을지 모른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였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며(마 1:21; 눅 2:11) 이스라엘의 영광(눅 2:32)이라는 천사들과 선지자들의 증언을 항상 마음에 새겨두고 있었을 것이다. 마리아는 또한 예수님이 최근에 세례 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았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리고 침례 때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 3:22)라는 소리가 들린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예수님에게는 이제 제자들도 생겼다. 그래서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 예수님이 자신을 드러내는 기회라고 판단했을 듯하다. 그녀는 아마도 예수님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자신이 과연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이심을 증명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메시아이심을 보여 주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예수님은 자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때에 관한 한, 마리아의 생각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지적하셨다. 예수님은 나중에 그의 형제들이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라고 했을 때도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셨다(요 7:6).

 마리아도 예수님도 그리고 그의 형제들도 모두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마리아와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의 때를 알지 못하였다. 그들이 원하는 때와 예수님이 원하시는 때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으로 예수님이 언제 자신을 메시아로 드러내야 하는지를 제시하였고,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의 뜻에 따른 때를 기다리셨다.

 

  ♣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신의 ‘때’는 구체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서 요한복음의 중요한 주제의 하나이다. 이 ‘때’는 예수님이 이루실 구원의 때를 위한 하나님의 시간표였다. 이 ‘때’는 요한복음에서 궁극적으로 십자가 수난의 때를 가리킨다. 예수님의 ‘때’는 사람들이 원하는 선풍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로서 드라마틱하게 자신을 알리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때'는 예수님의 돌아가심과 부활과 승천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때를 가리킨다(참조. 요 7:30; 8:20; 12:23, 27; 13:1; 17:1)

 

[교훈]

우리는 하나님께서 결정적으로 개입하셔서 모든 잘못된 것들을 즉시 바로잡고 우리 인생의 여러 문제를 일순에 해결해 주시기를 원한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하나님을 심판주와 공급자로 신뢰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주관하시는 구원  프로그램을 통제할 수 없다.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언제 어떤 상황에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을 명령하거나 가르칠 입장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육신적 모친이었지만 그러한 특권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진행해 나가시는 구속의 사역을 참견할 수 없었다.

마리아도 당시의 다른 유대인들처럼 이스라엘의 메시아를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문맥에서 이해한 듯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시지 않을 것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자신을 바쳐야 했다. 이때는 앞으로도 몇 년의 세월이 더 흘러야 했고 그동안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주어야 했으며 제자들을 훈련해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모친을 향해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대답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자신의 구원 계획에 대해서 간여할 처지가 아님을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가족 관계를 넘어선다는 언질이었다.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부른 것도 이런 문맥에서 이해될 수 있다.

 

      마리아의 반응은 무엇이었는가?

그녀는 예수님의 대답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부언하지 않았다. 그녀는 예수님이 적어도 잔칫집의 어려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과 동정심이 있음을 믿고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2:5)고 지시했을 뿐이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것은 복된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언제 어떤 형태로 자신을 메시아로 나타내어야 한다고 우리 편에서 결정할 수 없다. 우리는 메시아의 말씀대로 행할 뿐이다. 구원의 때는 하나님이 결정하시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물론 예수님이 언제 무엇을 어떻게 행하실지를 몰랐지만 적어도 예수님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예수님은 자신의 때에 자신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실 것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할 때 명심해야 할 사항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때에 응답해 주시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뜻을 행하시는 주권적인 권위를 가지신 분이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할 때에, 예수님이 우리 자신들을 위해서 가장 좋은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한편,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기적을 행하시는 일에 신중하셨다. 육신의 모친이 부탁했어도 분명하게 그녀와의 인간관계에 선을 긋고 하나님의 일에 그녀가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막으셨다. 이것은 오늘날의 기적사들과 큰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의 기적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자들은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를 좋아하며 과장된 소문을 낸다. 예수님은 자신이 커다란 기적을 행할 테니까 잔치석에서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다들 보라고 하시지 않았다. 더구나 현대판 기적사들처럼 상업적인 동기에서 기적의 치유를 빌미로 헌금을 요구하시지도 않았다. 주님은 일생 동안 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과장된 자기선전이나 자랑을 하시지 않았다. 사실상 물이 포도주로 바뀐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은 마리아와 예수님의 제자들과 몇몇 하인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마리아가 주는 교훈]

 

▶ 가나의 결혼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를 찾는 자는 마리아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이웃 동네에서 온 한 손님이나 친척 정도로 알았을 것이다.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사람들을 시켜 다른 동네로 가서 구해 보라고 부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즉시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였다. 평소에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확신하고 그분과 가까운 사귐을 가질 때에만, 위기 앞에서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의탁할 수 있다.

 

▶ 마리아와 예수님 사이의 대화는 서로의 말을 무시한 것처럼 들린다. 예수님은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셨고, 마리아는 자신의 때가 되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상관하시지 않았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거절하는 것으로 들리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포도주를 공급하실 것으로 계속 믿은 것이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무조건 예수님의 지시를 따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그녀의 이 같은 믿음의 자세를 존중하셨다. 이런 믿음은 보상을 받는다(비교. 수로보니게 여자의 믿음. 막 7:24-30). 

 

[제자들이 주는 교훈]

 

제자들은 가나의 잔치 이후로 크게 달라졌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11절)고 하였다. 그들은 물론 전에도 예수님을 믿었다. 그럼 그들에게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그들이 예수님을 신뢰하는 레벨이 달라진 것이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따랐지만, 이제는 예수님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었다.  현장에서 보고 느끼는 체험적 지식은 그들의 확신을 굳혀 주었고 주님에 대한 신뢰와 투신을 배가시켰다. 우리의 영적 삶도 이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며 더욱더 가깝게 섬기면 주님은 자신을 더 계시해 주신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서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행하면서 그분께 눈을 돌리고, 그분을 꾸준히 신뢰하며, 그분이 시키시는 일을 행하면 우리의 삶은 예전의 수준보다 훨씬 높은 단계의 영적 진보를 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청원 기도의 한 원리를 본다. 청원 기도는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알리는 것이다. 그다음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응답하실 것이라고 신뢰하는 것이다. 주님의 응답은 흔히 우리들의 순종을 통해서 온다.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예수님의 지시를 따르라고 하였다. 하인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물이 포도주로 변하였다. 순종의 의사가 없는 청원 기도는 기적의 포도주 생산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3. 포도주의 기적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신약에서 기적은 표적, 표징, 징표, 기사 등의 여러 용어로 표현되었다. 요한은 ‘표적’이라는 말을 선호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고 믿음의 눈으로 통찰할 수 있는 더 깊은 실체를 가리킨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적 뒤에는 대부분 이와 관계된 설명이 따른다. 요한은 자신이 진술하는 예수님의 기적을 통해서 사람들이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의 깊은 의미를 깨닫기를 원했다. 예수님도 자신이 행하는 기적들을 세례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라고 하시면서 보다 깊은 의미에서의 ‘역사’(役事) 혹은 ‘일들’(요 5:36; 7:21; 10:25)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기적은 표면적인 현상을 넘어 예수님 자신이 누구시며 그의 사역의 성격과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리키는 하나의 표시판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오천 명을 기적으로 먹이시고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다. 맹인의 눈을 고치시고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으며, 나사로를 살리시고 자신을 부활이라고 하셨다. 

 

♣ 예수님의 기적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림이기도 하다. 하나님 나라에는 병자가 없다. 환자가 다 치유되어 누구나 건강을 누리는 곳이다. 보지 못하는 자도 없고 저는 자도 없으며 굶주리는 자도 없다. 모든 것이 빵이 불어나듯이 풍성한 곳이다. 죽음이 정복된 곳이며 주님의 능력으로 만사가  새로워지고 바로잡히는 곳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기적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미리 맛보게 하는 영생의 전식이다.

♣ 예수님의 기적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실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일종의 예시이다. 주님은 침몰당하려는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을 구출하셨고, 귀신들린 자의 정신을 온전케 하셨으며,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다. 주님의 이 같은 기적은 지금도 그의 백성들 가운데에서 체험되고 있다.

 ♣ 땅에 속한 물은 하늘의 축복으로 맛있는 포도주가 되었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잔치에 대한 시식으로 부어졌다. 본 스토리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임재하실 때에 땅에 속한 것들이 하늘의 의미를 지닌 것들로 승화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악으로 갈라진 하늘과 땅이 다시 하나가 되는 새 창조의 세계를 여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기적으로 드러내신 자신의 영광이었다(2:11).

 

 

1)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를 극적으로 표출한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다. 요한은 이 기적을 진술하면서 정결 예식을 위한 돌항아리를 의도적으로 언급하였다(2:6). 돌항아리는 유대교의 정결 예식을 상징한다.

구약 율법은 여러 종류의 정결 의식을 요구하였다. 이것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얼마나 많으며 그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가기에 얼마나 부족한지를 상기시켰다. 율법주의 유대교는 여기에 더 많은 종류의 정결 의식을 첨가해 백성의 삶을 더욱더 번거롭게 하였다. 정결 예식은 율법의 다른 많은 의식처럼 진부하고 따분하였다. 그 자체로서 생명력이 없는 상징적 의식에 불과하였다.

정결 예식에 사용하는 돌항아리의 실체는 예수님이라는 것이 본 기적의 주된 포인트다. 예수님이 곧 우리들의 정결 예식이다. 예수님은 물로써 우리들의 손발을 씻게 하시지 않고 자신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기신다. 가나의 잔칫집에서는 포도주가 떨어졌다. 그러나 십자가의 피는 끝없이 흐른다. 십자가는 온 인류의 죄를 씻기고도 남음이 있다. 풍성하고 완전한 죄의 용서는 예수님이 출범시킨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다.

예수님이 빚으시는 생명의 포도주는 누구나 마시고 만족할 수 있는 최상품이었다. 이 영생의 포도주는 세상이 주지 못한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새 창조의 포도주를 주님과 함께 넘치게 마실 것이다(막 14:25).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물로 간주한 것을 그 어떤 포도주보다 더 좋은 극상품이 되게 하셨다. 단조롭고 성가신 의식을 즐거운 마음으로 다 함께 마실 수 있는 특급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율법으로 지배되던 이스라엘의 옛 언약 하에서의 삶의 방식이 끝나고 새 언약의 메시아 시대가 모든 사람에게 다가온 것을 의미한다. 이 포도주는 인류가 만든 그 어떤 포도주보다 훨씬 나은 것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최상의 질과 넘쳐흐르는 풍성함을 대변한다. 포도주가 물을 초월하듯이 예수님은 옛 언약을 초월하는 새 언약의 창시자이시다(엡 3:20).

 

  [그럼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더 나은 까닭은 무엇일까?]

 예수님은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전하게 충족시키셨다. 그래서 주님은 죄가 없는 자로서 십자가에서 유일하게 죄인들을 위해 대속적 죽음을 치를 수 있는 자격을 갖추셨다. 십자가의 희생으로 확보된 구원은 죄인들이 진부한 여러 의식과 규범들에 더 매이지 않고서 오직 믿음으로 영원한 구원의 기쁨에 들어갈 수 있게 한다.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처럼 인간의 자원이 바닥이 나면 의식과 상징에 의존하는 전통 종교는 힘을 쓰지 못한다. 정결 예식용 물은 인간의 죄를 씻어낼 수 없다. 그것은 새 언약의 주님께서 자신의 피로써 죄를 씻어 줄 때를 바라본 상징에 불과하였다.

포도주의 기적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위시하여 온 세상 인류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죄를 씻기고 죄인들이 의인의 옷을 입고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구원 사역에 대한 표적이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인류에게 제공되는 새로운 형태의 영적 생명을 상징하는 매우 실체적인 예시였다.

 

2)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나라는 잔치와 같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벌어지는 곳이다(계 19:9). 주님의 백성은 이 악한 세상에서 죄와 어둠의 세력과 싸우면서 산다. 주님은 비극과 고통이 그치지 않는 타락한 세상에서 주님을 대망하며 사는 우리에게 함께 축제의 기쁨을 나누자고 초대하신다(참조. 마 5:6; 8:11-12; 막 2:19; 눅 22:15-18, 29-30; 사 25:6; 55:1-2).

  혼인 잔치의 주빈은 신랑이다.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 손님으로 초대되셨다. 그러나 잔치의 참 신랑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잔치의 포도주를 공급하신다. 포도주가 없는 잔치는 잔치가 아니다. 포도주가 떨어지는 잔치는 실패한 잔치이다. 그러나 주님이 베푸는 영생의 잔치에는 포도주가 넘친다. 예수님은 단조롭고 번거로운 것들을 달고 신선한 것으로 바꾸기를 좋아하신다. 예수님은 정결 의식용 물로써 맛있는 포도주를 대량으로 생산하셨다. 인간의 나라는 자원이 고갈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자원이 넘친다. 하나님의 생명은 언제나 풍성하게 임한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엡 3:20, 새번역)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차고 넘치는 풍성한 삶을 주시려고 세상에 오셨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하나님은 하늘 곳간을 여시고 복을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부으시는 분이다(말 3:10).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수많은 무리를 배불리 먹이고도 남은 양식을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차게 거두었다(마 14:20). 하나님의 나라는 잔치처럼 넘치는 양식을 먹으며 주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교제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 모든 축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하늘 영광을 내려놓고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 주님은 십자가로 가시기까지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고 죄 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의 대속을 이루셨다. 예수님의 삶의 목표는 십자가였다. 주님은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영광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희생하셨다. 주님은 죄인들을 섬기는 일생을 사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주인이시지만 가나의 잔치에서처럼 예수님은 섬기는 분으로 임하신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좋아할지 모른다. 그러나 천국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천국의 주인공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닮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섬기는 자로서 천국을 다스리신다. 천국에서는 ‘으뜸’과 ‘종’이 동의어다(막 10:44). 

당신은 천국 백성으로 살고 있는가? 주 예수의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사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믿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실제적인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받은 날로부터 영생의 삶을 누려야 한다. 그것은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험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공급하는 섬김의 일을 행하셨다. 이 일에 종들이 참여하여 섬겼다. 우리도 그래야 마땅하다.

 

[적용]

예수님이 만드신 포도주는 극상품이었다. 이 포도주는 세상이 만들 수 없다. 예수님이 만드신 포도주는 인류가 담아서 먹은 포도주와 질적으로 전혀 다른 포도주였다. 그것은 천국의 주인공이 천상의 능력으로 빚어 만드신 걸작품이었다. 잔치의 경험이 많은 연회장(宴會長)은 이 포도주를 마셔 보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천국 백성은 가만히 앉아서 평안한 마음만 누리는 자가 아니고 예수님이 만드신 달고 맛있는 생명의 포도주를 부어 주는 자들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흘러 나오는 사랑과 헌신의 포도주를 목마른 자들에게 부어 주고 있는가? 우리가 부어 주는 포도주를 마신 자들의 입에서 어떤 평가가 나오고 있는가?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가? 교회와 신자들이 부어 주는 포도주에서 악취가 나기 때문이다. 이런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포도주가 아니고 이기주의와 물질주의에서 흘러나오는 부패한 포도주다.

 

영생의 새 포도주는 어떤 것인가? 

영생의 포도주는 생명을 준다. 힘없는 자에게 능력을 주고 절망한 자에게 소망을 준다.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주며 죽은 영혼에게 부활 소식을 전한다. 이것은 탁하고 우중충한 형식적인 신앙의 폐수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맑고 투명한 복음의 생수이다. 이 생명의 포도주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다함이 없이 공급된다. 이 생명수는 예수님이 주시는 것으로서 목마른 자들은 누구나 마시고 영원히 다시 목마르지 않다(요 6:35). 이 생명의 포도주를 마시는 자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넘쳐나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이바지하는 새 삶을 산다. 그들은 다시는 오염된 물을 마시지 않고 생명이 흐르는 영생의 포도주를 마신다. 주님은 빈 항아리와 같은 구태의연한 옛 종교를 새 언약의 구원으로 바꾸어 주신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의 문제들이 다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여전히 오늘과 내일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세상에서 산다. 우리는 수시로 드나드는 갖가지 예기치 못한 재앙과 고통 속에서 힘들어한다. 그럴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마실 수 있는 기쁨과 생명의 포도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힘을 얻는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바울은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다”(딤후 4:6)고 하였다. 전제는 구약 시대에 포도주를 제물로 부어 드리는 것을 말한다(민 15:5, 7; 28:7). 우리는 주님의 일꾼들로서 생명의 포도주를 우리들의 삶을 통해 부어 드리는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붓는 포도주에는 복음의 향기가 나야 하고 주님의 사랑이 배인 단맛이 나야 한다. 맛없는 포도주나 신 포도주는 아무도 원치 않는다. 인생은 신속히 지나간다. 우리도 바울처럼 생명의 포도주를 남김없이 다 부어 주고 떠나야 할 때가 온다. 하나님의 나라는 부어 주는 삶으로 채워지는 곳이다. 당신은 전제의 제물처럼 생명의 포도주를 부어 주는 삶을 살고 있는가?

 

4. 예수님은 평범한 것을 비범한 것으로 변화시키신다.

 

돌항아리에 담았던 물은 평범한 것이었다. 그나마 식수도 아니었다. 그런데 사람이 즐겨 마실 수 있는 최상품의 포도주가 되었다. 예수님은 평범하여 아무도 특별한 시선을 주지 않는 것들을 최선의 것으로 변화시키신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인간을 창조하신 일을 생각해 보라. 인간을 흙으로 빚으시지 않았는가! 흙은 어디에나 있는 흔하고 평범한 물질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흙으로 인간을 심묘막측하게 지으셨고(시 139:14) 온갖 동물들과 새들도 창조하셨다(창 2:19). 하나님께서는 안드레, 요한,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과 같은 범상한 사람들을 불러 사도로 삼으셨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일을 행하신다. 사람들의 눈에 귀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들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요긴한 자료들로 쓰인다. 한 마리의 닭 우는 소리가 예수님을 배신한 베드로의 양심을 찔러 회개하게 하는 도구가 되었고, 까마귀들이 그릿 시냇가에 숨어 있던 엘리야 선지자에게 먹을 양식을 날라다 주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아무 가치가 없는 천한 사람들을 택하여 잘난 자들을 무색하게 하시고 약한 것들을 택하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전 1:27-28).

예수님은 평범한 물을 최고의 포도주가 되게 하셨다. 주님은 범상한 것을 비범한 것으로 변화시키신다. 주님은 죄인들을 불러 의인들이 되게 하시고 주를 영접하는 겸손한 자들을 하나님의 탁월한 자녀들이 되게 하신다. 주님이 내게 은혜를 부으시면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닌 일등품이 된다. 나는 주님 앞에서 매우 맛있는 포도주가 되어 다른 목마른 사람들에게 해갈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구원 사역의 봉사에 부름을 받았다]

하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항아리들을 물로 채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포도주를 만들 수는 없지만, 항아리를 채울 수는 있었다. 예수님은 하인들을 시켜서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놀라운 기적의 일에 참여하게 하셨다.  . 

 하나님 나라의 일은 죄인들의 참여가 없어도 하나님께서 혼자 다 하실 수 있다. 세상 창조는 하나님의 전적인 활동에 의한 것이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에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어떤 존재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도왔다는 말이 없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도 하나님께서 혼자 다 하실 수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참여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이러한 특권을 부여하기를 기뻐하신다. 우리는 주께서 기적의 포도주를 만드시도록 항아리에 물을 부어야 한다. 주님은 이 귀한 사역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그런데 주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려면 주님을 신뢰해야 한다. 주님의 명령은 때로는 우리들의 이성과 이해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하인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로 돌항아리를 채우라고 하셨다. 이 일은 그들이 늘 하는 일이었다. 전혀 어려운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앞으로 무슨 일을 행하실 것인지를 전혀 몰랐다. 그들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자 예수님은 그 물을 떠서 잔치를 주관하는 연회장(宴會長)에게 갖다주라고 하셨다. 그들은 이 명령을 받고 너무도 놀랐을 것이다. 그들이 과연 돌항아리에서 물을 퍼서 포도주를 기다리는 연회장에게 갖다주어야 한단 말인가? 그들은 매우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그들은 방금 예수님으로부터 정결 예식을 위해 사용하는 돌항아리에서 떠온 물을 축하객들이 마시도록 가지고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마리아는 앞에서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절)고 했었다. 하인들은 이제 이 명령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를 달아보는 테스트를 받았다. 어떻게 식수도 아닌 물을 포도주 대신 마시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연회장에게 이 물을 가져갔다가 포도주가 아니고 돌항아리에서 퍼온 의식용 물이라는 사실이 발각되면 어떻게 되랴? 그들은 노한 연회장이 술잔을 내던지며 그들을 호통치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을 것이다. 하객들에게 술 대신 물을 마시게 하다니 말이 되는가!

 

 우리가 화급한 문제로 예수께 나아가면 때때로 말도 되지 않는 명령을 하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포도주가 필요하다고 청하는데 물을 떠서 주라고 하신다! 이런 말씀을 받을 수 있는가? 하인들은 돌항아리의 물을 포도주로 믿을 수 있는 아무런 근거가 없었다. 예수님은 항아리 위에 안수하시지도 않았다. 주님은 물항아리를 만지시지도 않았다. 물이 포도주가 되라고 명하시지도 않았다.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고 선포하시지도 않았다. 예수님은 단지 그들에게 돌항아리에 채운 물을 갖다주라고 지시하셨을 뿐이었다. 너무 하시지 않은가?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즉시 순종하였다. 그들은 불평도 질문도 주저함도 없었다. 그들은 하객들에게 물 포도주를 부지런히 갖다 날랐다!

 “갖다주라 하시매 갖다주었더니”(8절). 여기서 ‘갖다 주었더니’ 라는 말에 주목하라. 얼마나 큰 순종의 행위인가? 이런 순종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들은 너무도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였다. 우리는 하인들에게서 크게 배울 점이 있다. 우리에게 그들과 같은 순종이 있는지 자문해 보라. 그들은 연회장이 그들이 갖다준 물을 마실 때부터 다 마신 후에 입을 뗄 때까지 긴장과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하였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연회장은 술잔을 내던지며 호통을 치지 않았다. 그는 신랑을 불러 포도주를 극찬하였다. 하인들은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하인들은 손님들도 돌항아리의 물을 마시며 최고의 포도주라고 극찬하는 것을 들으면서 또 한 번 머리를 내저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자기들도 물맛을 보고 너무도 좋은 포도주라고 다시 한번 고개를 내저었을 것이다. 그들이 손님들로부터 포도주에 대한 격찬을 계속 들으면서 즐겁게 항아리 물을 퍼 나르는 장면을 연상해 보라. 마치 자기들이 기적을 행한다는 착각을 할 정도로 신이 났을 것이다.

 

 주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일은 주님에 대한 큰 신뢰를 요구한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하면 큰 기쁨이 온다. 이런 기쁨은 주님이 주시는 영생을 즐기는 최상의 체험이다. 주님은 항상 하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사셨기에 이런 영생의 기쁨이 충만하셨다.

  본 기적은 영생의 새 포도주가 실제로 어떻게 체험되는지를 훌륭하게 예시한다. 우리는 평상의 일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하게 행해야 한다. 창조는 예수님이 행하신다. 우리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물항아리를 채울 수 있다. 새 포도주의 비결은 예수님을 순종하는 것이다.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2:8)고 하신 말씀을 따랐을 때 새 포도주가 생겼다! 잔치를 주관하던 연회장은 이 훌륭한 포도주에 놀랐고(2:9-10) 모든 사람이 함께 기쁨으로 마실 수 있었다. 

 

[교훈]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맛있는 포도주를 즐기려면 어떤 일을 행해야 한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예수님이 우리들의 절박한 상황을 해결하실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무슨 지시를 하시든지 그대로 따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물항아리를 채우라. 예수님이 우리들의 빈 항아리들에서 영생의 포도주가 흐르게 하실 수 있음을 믿으라. 

빈 항아리를 채우는 일 자체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예수님만이 영생의 ‘새 포도주’를 창조하신다. 오직 주님만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은혜로운 창조 사역에 동참하여 함께 즐기기를 원하신다. 자식은 아버지의 일을 돕고 아버지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다. 이것은 우리들의 물항아리를 채우는 순종에서 체험된다. 

 

5. 예수님은 왜 가나에서 첫 번째 기적을 행하셨는가?

 

예수님은 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을까?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께 이렇게 말씀한 적이 있었다.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요 7:3-4).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이 갈릴리에 묻혀 사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아마 우리들도 그들의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세상에 크게 알려지기를 원한다. 세상일은 알려져야 일이 되기 때문이다. 선전하고 광고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알려져야 인기도 올라가고 상품도 팔린다. 만약 우리들이 기적으로 첫 번째 데뷔를 시작한다면 어떤 곳을 고르겠는가? 분명 많은 사람이 기적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장소를 택할 것이다. 드라마틱한 데뷔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장소와 때를 전략적으로 물색할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광고 전문가가 아니라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만약 예수님이 당시의 종교 수도였던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들과 많은 무리 앞에서 첫 기적을 행하셨다면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금방 추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그는 대중의 눈에 띄지 않고 매우 조용하게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질적으로 다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기대와 계획에 따라 세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지혜나 전략과 반대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갈릴리의 한 소촌에서 첫 번째 기적을 행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명성이나 인기를 고려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관심은 일반 평민들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는 데 있었다. 주님은 결혼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져서 난감해하는 신랑의 안타까운 사정을 깊이 동정하셨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보면 매우 비전문적인 사고방식이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은 극히 짧은 시간에 백성 전체의 지지를 받고 이스라엘 나라의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며 다윗의 왕조를 재건해야 한다. 그런데 극히 작은 시골 마을로 가서 기적을 행한들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이것은 자원과 시간의 낭비가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은 전문적인 전략가도 아니시고 광고학의 대가도 아니시다. 하나님은 그 모든 프로페셔널의 지식과 경험과 노-하우를 초월하신다. 하나님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 예수님이 참석하셨다고 꾸짖거나 어리석은 일이라고 실망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서 온 산을 헤매는 목자의 심정을 가지신 예수님의 동정과 사랑의 사역을 기뻐하셨다.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바른길이었다.

 

우리들은 교회가 어떻게 알려지기를 원하는가? 사람이 많은 곳에서 명성이 높아지기를 원하지 않는가? 우리들은 누구를 섬기기를 원하는가? 현재 당장 도움이 필요한 자들인가 아니면 유명해지기 위해서 혹은 편안하고 여유 있게 살기 위해서 전략적으로 목이 좋은 장소를 골라 사역하려고 하는가? 세상에서 주님보다 더 할 일이 많고 시간이 짧은 자는 없었다. 그럼에도 주님은 황금 같은 시간과 기적을 가난하고 천대받는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이 모이는 가나의 혼인 잔치를 위해 사용하셨다. 돈 많고 유명한 사람들을 상대로 사역하는 것이 반드시 큰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의 종들은 왕들과 VIP 앞에서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태여 대도시나 큰 교회나 잘난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봉사하지 않아도 참으로 경이롭고 가치 있는 일을 사람들의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이루어내실 수 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때가 되면 예루살렘으로 갈는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출세하고 명성을 얻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이 아니고 하늘 아버지께서 원래부터 계획하셨던 갈보리로 가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셨다. 그 길은 명성의 길이 아니고 고난의 길이었다. 궁극적으로 죄인들을 구속하는 메시아의 희생이 바쳐지는 곳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주님이 행하시고 걸어가신 길을 따라 우리를 인도하신다. 세상 길을 따라 주님을 크게 섬기려고 하기보다 주님의 길을 따라 하나님을 겸비하게 섬기라. 가나의 마을에서 잔치 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서 섬겨야 할 곳은 예루살렘이 아니고 한 작은 가나의 혼인 잔치이다. 그곳에서 주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돌항아리에 물을 붓게 하시려고 우리를 기다리신다. 가나로 가면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다. 그리고 생명의 포도주를 목마른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기쁨을 한껏 누리며 가나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찬양하게 된다. 그리고 제자들처럼 그분을 더욱 신뢰하게 될 것이다.

 

6. 더 큰 일을 보리라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만나셨을 때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요 1:50)고 하셨다. 그리고 곧 이어서 더 큰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부연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요 1:51).

예수님은 야곱이 꿈에서 본 하늘에 닿는 사다리를 언급하시며 자신이 곧 하늘과 땅을 잇는 분임을 시사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가장 뚜렷한 기독론의 천명이다.

예수님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가 되게 하셨을 때 자신을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야곱의 사다리로 계시하신 셈이었다. 예수님은 절급한 문제들로 고통받는 땅에 속한 자들에게 하늘의 휘장을 벗기시고 구원의 능력이 내려오고 있음을 보여 주셨다. 그 순간은 하나님의 천사들이 야곱의 사다리에서처럼, 인자 위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때였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가나에서의 기적은  ‘더 큰 일’(1:50)이 제자들에게 목격된 첫 번째 케이스였다. 예수님의 기적은 하늘에 속한 것과 땅에 속한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합일되는 사건이다. 하늘과 땅은 원래 하나의 세상이었다.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조상들과 함께 사셨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땅은 하늘과 분리되고 하나님의 임재는 더 이상 땅에 머물 수 없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 세계를 영원히 떠나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자기 아들을 구속주로 세상에 보내시기로 계획하셨다. 먼저 아브라함을 불러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하시고 그의 후손들이 성전 제도를 통해 구원의 날을 바라보게 하셨다. 이스라엘의 성전은 하나님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하신다는 상징이었다. 성전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었다. 성전은 하늘에 닿는 야곱의 사다리가 놓인 곳이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고 경배하는 곳이었다. 그 후 하나님의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육신으로 오셨다(갈 4:4). 따라서 하나님의 상징적 거처로서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로 대치되었다.

십자가에서 하늘의 천사들은 예수님 위에 오르락내리락하였다. 십자가는 땅과 하늘이 다시 연합되는 길을 여는 결정적인 가교였다. 십자가는 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대속주로 내어 주고 만백성이 죄의 용서와 영생을 받게 하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목첩에 두시고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 12:23)라고 하셨다(비교. 요 12:27; 13:1; 16:32; 17:1).

예수님은 부활과 승천을 거쳐 재림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때 하늘은 땅에 닿고, 땅은 하늘에 연결되어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될 것이다. 이때는 하늘과 땅이 입 맞추는 때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라는 주기도문의 간구가 성취되는 때이다. 가나의 혼인 잔치는 이때에 있을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대한 하나의 작은 화살표이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시 85: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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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요한복음 성경공부 (18) 요 5: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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