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연못의 상황]
• 많은 환자들이 모여 치유의 기적을 바라며 속절없는 나날을 보내는 곳이었다. 베데스다 연못은 치유를 보장하지 않는다. 그래도 사람들은 미신을 믿고 기적을 바란다.
• 베데스다 연못에는 생사를 건 경쟁을 하며 서로 물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곳이다.
[중풍 병자의 상태]
• 38년 동안 중풍으로 고통을 받았다. 아무도 그를 도와줄 자가 없었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 5:7).
[예수님의 반응]
예수님은 많은 환자 중에서 단 한 사람에게 치유의 혜택을 주셨다. 그런데 그 환자는 가장 오랫동안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중환자였다. 그는 치유의 가능성이 없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죽을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다. 중풍 병자는 자기를 연못에 넣어 줄 자가 없다고 하소연하였고 예수님은 그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고 하셨다.
[중풍 병자의 반응]
그는 예수님의 일어나라는 말씀을 순종하고 38년 동안의 중풍에서 해방되었다.
[질문]
1) 베데스다 연못은 어떤 면에서 이 세상을 대변하는가? 이곳에 모인 각종 환자들의 처지를 생각해 보라.
2) 예수님은 왜 중풍 병자 한 사람만 고치셨을까?
비교.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는 모든 환자를 다 치유하셨다(마 8:16; 막 1:32-34 6:53-56).
“해가 질 때에 사람들이 온갖 병으로 앓는 사람들을 다 예수께로 데려왔다. 예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어서 고쳐주셨다”(눅 4:40).
3) 중풍은 어떤 면에서 인간의 영적 상태를 묘사하는가? 중풍의 특징은 마비이다.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마비될 수 있다.
4) 중풍 병자의 질병은 그의 죄의 결과인가? (14절).
질병은 원천적으로 타락의 한 결과이다. 그러나 모든 질병의 원인이 반드시 개인적인 죄 때문은 아니다(요 9:2-3). 예수님은 중풍 병자에게 병이 나았으니 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치유하시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치유하신 후에 죄를 그치라고 하셨다. 주님은 병든 자에게 먼저 동정과 사랑을 보이셨다.
그런데 우리는 치유 후에 다시 질병의 원인을 잊기 쉽다. 영적 회복 후에 또 다른 죄를 범할 수 있다. 죄의 과거로 돌아가지 말아야 하는 것은 새 생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교훈]
• 이 세상에는 죄의 결과를 안고 속절없는 연못 앞에서 병고침만 기대하며 사는 자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서 연못에 자기를 넣어 줄 자가 없다고 불평한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오셔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다. 주의 음성을 듣고 일어서면 희망 없는 속세의 베데스다 연못을 회복된 몸으로 떠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으로 보내신 목적은 당신 한 사람을 고통과 두려움과 죽음이 기다리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찾아내어 구원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중풍 병자를 치유하시고 그냥 사라지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그 후에 성전에서 그를 만나주셨다. 많은 사람이 모인 성전에서 예수님은 치유된 중풍 병자를 찾아내신 것이다(14절). 예수님은 한 사람을 중히 여기신다. 그리고 그 한 사람과 계속 사귀기를 원하신다.
당신은 구원을 받았는가? 베데스다를 주님의 능력과 자비로 떠났다면 이제 주님을 증거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14-15절). 구원의 목적은 거룩한 삶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참조. 엡 1:4; 2:10; 딛 2:11-14; 출 28:36).
주님으로부터 치유를 받은 자는 주님의 지속적인 말씀을 들어야 한다. 주님은 단 한 번의 치유로 모든 관계를 마치기를 원치 않으신다. 주님은 항상 나를 찾고 계신다. 주님의 양육을 받아야 건강이 유지된다. 주님은 때때로 자리를 피하시고 자신을 감추시는 듯하여도 다시 나타나신다(5:13).
• 중풍 병자가 자기를 낫게 한 사람이 ‘예수’라고 증언했을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기고 치유사역을 했다고 비난하였다. 그때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6절)라고 하셨다. 이것은 놀라운 계시가 아닐 수 없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고 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으셨기 때문이다(18절).
하나님은 우리를 한 사람씩 구원하신다. 그런데 우리 각자가 받는 구원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놀라운 구원의 진리를 계시하는 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다. 중풍 병자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한 성자 하나님이심을 깨달았을 때 너무도 놀라고 감격스러웠을 것이다(요 1:1-4, 14).
• 예수님은 최악의 환자를 택하셨다. 중풍 병자는 38년간 죄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었다. 아무리 오래된 죄인이라도 주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주님은 모든 죄인을 고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네가 낫고자 하느냐?”(5:6)는 예수님의 질문에 순종의 반응을 보여야 한다. 주님은 원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오라고 초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은 다 그에게 가서 쉼을 얻을 수 있다(마 11:28). 주님은 그에게 나아가는 자들을 절대로 물리치지 않으신다(요 6:37).
그런데 베데스다 연못에 있던 환자들은 예수님의 거저 주는 은혜로 38년 된 중풍병 환자가 일어서 걷는 것을 보고도 ‘저에게도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도 고쳐 주십시오’. ‘저도 낫기를 원합니다’라고 요청한 자가 없었다. 그랬었다면 그곳의 모든 환자들이 다 치유됐을 것이다. 그래서 ‘베데스다’는 과연 그 이름의 뜻대로 ‘자비의 집’임이 증명되었을 것이다. 중풍병 환자는 물 속에 들어간 적도 없었다. 그는 물 한 방울 묻지 않았고 단지 예수님의 일어나라는 한 마디에 순종하여 중풍병이 나왔다. 유감스럽게도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신을 맡기기를 싫어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베데스다에서 헛 된 것을 바라며 사는 삶에 너무도 익숙하다. 이 점에서 베데스다는 불신의 이 세상을 대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