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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라는 말은 일반적인 의미인 몸 이상의 뜻으로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가 있지만, 본 절의 육체는 타락한 인격체의 습관이나 성향을 말합니다. 육체의 소욕이라고 하면 죄를 짓고 싶은 죄악 된 욕망입니다. 육체 혹은 육은 헬라어로 싸르크스(Sarx)인데  영어로는 보통 sinful nature(NIV, Gal. 5:17) 혹은 the desires of the flesh(ESV)로 번역합니다. 그런데 어떤 의미로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본문 해석에 큰 차이가 생깁니다. 예를 들어, 육체를 죄성을 가리킨다고 보고, 죄성을 인간의 죄악 된 본성으로 간주한다면, 17절의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른다는 말은 모순입니다. 죄악 된 본성이라는 의미의 죄성은 거듭난 신자들에게는 해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죄성은 구원받기 이전의 과거의 나를 지배했던 본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죄를 섬기려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새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난 이후에도 과거의 죄성을 그대로 지닌 채 사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죄성이 있기 때문에 신자라도 죄를 짓지 않고 살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죄를 짓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죄에 오염된 상태로 태어납니다. 아담에게 속한 자는 모두 어둠의 세계에서 삽니다. 자연인은 죄악 된 본성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상태를 스스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들은 죄와 정죄와 사망의 그늘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인으로서의 아담의 후손과 초자연적으로 거듭난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는 구별해야 합니다.

 

거듭난 신자는 새로운 본성을 가졌기 때문에 타락한 본성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육적  욕심의 유혹을 받고 과거의 죄악 된 악습으로 돌아가고픈 충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 예수를 믿고 거듭난 성도의 갈등 요인입니다.

예수를 믿고 살게 되었음에도 자꾸 죄를 짓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여전히 죄를 짓는 자신을 보고 실망합니다. 교회를 다녀도 죄의 문제가 쉽게 수그러지지 않습니다. 경건하게 살다가도 기회가 오면 곧잘  넘어지고 오랜 신앙생활 후에도 어이없이 죄에 빠지는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예수를 잘 믿다가도 나 같은 사람은 교인 생활을 할 수가 없다는 패배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우리는 거듭난 후에는 악의 영역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육체의 소욕에 사로잡히는 일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이 문제를 교리적으로 설명합니다. 성령과 육체 사이에 줄다리기가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는 적대 관계입니다. 우리를 가운데 놓고 서로 자기 앞으로 당깁니다(참조. 골로새서, 교회의 장래는 어두운가? 이중수 지음 401-408쪽). 

 

 è성령은 하나님의 선한 뜻에 대한 순종과 그리스도의 고결한 성품을 따르는 쪽으로 우리를 당깁니다. 

 è육체는 도덕적 죄와 세속사상과 부패한 옛 자아의 행습을 따르도록 우리를 당깁니다. 

 

그럼 어떤 쪽이 이길까요? 내가 굴복하는 쪽이 이깁니다. 내가 육체에 머리를 굽히면 육체가 우위를 차지하고, 내가 성령에 머리를 숙이면 성령이 내 삶에서 의를 이루고 육체는 억제를 당합니다(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이것은 원리적이고 교리적인 진술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 갈등이 생기면 성경의 방법을 따라가야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영적 문제의 해결 방안을 교리적으로 제시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단순한 도덕적 권면이 아니고 교리에 바탕을 둔 교훈입니다. 물론 윤리적인 권면을 하지만, 언제나 교리가 전제된 실제적인 적용입니다. 우리가 신앙적 갈등으로 고민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교리적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을 설득시켜야 합니다.

 

▶먼저 자신이 어디에서 구원을 받았는지를 상기하십시오. 구원받기 전에 우리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습니다. 내가 도덕적으로 크게 타락한 생활은 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아담의 후손으로서 정죄를 받고 사탄의 영역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구출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의 왕국에서 삽니다. 나는 주님을 나의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나는 성경이 나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즉, 내 속에 성령과 육체의 갈등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과 육체는 서로 적대관계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은 내 속에 전쟁이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복음을 믿고 교인이 되기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심한 갈등과 유혹이 있습니다. 불신자들에게는 그런 차원의 갈등이 없습니다. 불신자는 신자처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거나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신앙적 갈등이 없습니다. 그들은 어둠의 왕국에서 살기에 비록 양심의 가책을 받을지라도, 하나님에게 죄를 지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을뿐더러 성령을 받지도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신자는 죄 중에 빠져 있으면서 마음 편하게 살 수 없습니다. 성령의 내주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내가 거룩한 삶의 문제로 투쟁과 갈등 속에서 고민하고 힘들어하면 의심을 불어넣습니다.

 「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야 그래서 이런 갈등을 겪고 있어」

 그러나 나는 이렇게 반박해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났다. 그래서 성령과 육체 사이에서 갈등한다. 나는 하나님 나라 안에 들어와 있다. 내가 영적 갈등을 하는 것은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께서 절대로 정죄하시지 않는다.

 

나의 신앙생활에 갈등과 투쟁이 있으면 격려를 받을 있는 좋은 징조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그런 자는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듭났으니 이길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리며 격려하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나는 마귀의 왕국에서 구출되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럼에도 나에게 갈등이 있는 것은 내가 성령을 받았음을 방증합니다.

▶ 죄로 인한 갈등이나 신앙적 회의가 생길 때는 내 속에 계신 성령의 음성을 들을 것인지 아니면 아직도 내 속에 남아 있는 옛 삶의 성향을 따를 것인지를 먼저 교리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만약 육체의 소욕에 끌리면 나의 새로운 신분에 맞지 않음을 인정하고 즉시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소욕을 따르면,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한다는 경고의 말씀을  기억하고 크나큰 영적 손실을 미리 막아야 합니다(갈 5:21).  

 

▶ 그다음, 성경의 긍정적인 가르침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주 넘어지는 자신의 실체를 알되 성령으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으로 꾸준히 재도전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때도 육이 틈새로 끼어들고 나의 약점을 공격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방심하거나 옛 습관이 정리되지 않아서 육이 들어오는 것을 알면서도 허용합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연약하여 넘어지고 실수하기도 하지만, 육의 완전한 통제를 받거나 어둠의 왕국에 속한 자로 정죄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나는 옛사람에 속한 죄성의 통제 속에 더는 갇혀 있지 않습니다. 나는 성령에 이끌릴 때도 있고, 육체에 이끌릴 때도 있습니다. 성령도 육체도 나를 강제적으로 끌어갈 수 없습니다. 나는 불신자와는 달리 성령 안에서 선택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이 되기 이전에 나는 육체의 지배 아래 살았습니다. 나는 사탄의 왕국에 갇힌 자였습니다. 그래서 자유가 없었습니다. 나는 악에 기울어져 있었고, 악의 마수에서 풀려날 수 없어 죄를 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의 죗값을 치르고 나를 해방한 이후부터는 나의 존재 양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왔습니다. 나는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자유를 얻었습니다. 나는 사탄을 섬기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자유의 땅으로 옮겨졌습니다.

나는 타락한 본성에 따라 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새 본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하는 욕망을 일으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고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육에 이끌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위치와 신분은 근본적으로 바뀌었지만, 옛사람의 근성이 아직 우리 몸 안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과거의 습관대로 죄에 끌려가는 자신을 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새로운 신분에 비추어 볼 때  모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기면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격려가 되는 것은 주 예수를 믿는 자들은 어둠의 왕국에서 빛의 왕국으로 옮겼기 때문에 비록 실존적으로 보면, 성령과 육 사이를 오간다 할지라도 육의 전적인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내주가 있다고 해서 금방 사람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회심이 죄악 된 본성의 습성들을 하루아침에 모두 제거시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구속되지 못한 몸과 죄악 된세상에서 사는 한, 우리 안에서 성령과 육체 사이의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영적 싸움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고 그분의 음성을 따라 산다면 육체의 소욕이 우리를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완벽하게 따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육체의 소욕에 완전히 끌려다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국 시민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주 예수의 나라에서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육체의 소욕에 끌리면 우리의 영원한 구원은 변함이 없어도, 성령과의 관계는 그만큼 소원해집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으면, 내게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를 체험하게 할 자가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육체의 소욕입니까? 성령의 음성입니까? 아니면 사탄의 음성입니까? 어둠에 속했던 옛 자아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빛에 속한 새 사람의 모습입니까?

주께서 우리 모두에게 성령을 따라 행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도록 축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갈라디아서 강해(근간), 이중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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