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함구령을 이해하는 한 방법은 귀신들에게 내린 함구령과 일반 치유에서 내린 함구령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예수님의 함구령의 목적이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다른 것이었을까요?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막 1:25)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막 3:11-12).
본 사건은 예수님에 대한 귀신들의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그들의 외침이 표면적으로 옳게 들릴지라도 귀신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전혀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증언은 자기들 나름의 계책을 꾸미려는 것이었습니다. 세 가지 측면에서 예수님은 귀신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귀신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밝혔지만 주목적은 예수님의 신분을 사람들이 믿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축귀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의 신분을 밝힌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고대 사회에서는 상대방의 이름을 알고 노출하면 축귀 당하는 것을 피하거나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의 그러한 자기방어를 그치라고 엄중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려 했다는 ‘메시아의 비밀’(참고. 14장 ‘왜 예수님은 자신을 숨기셨을까요?’) 이론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사실상 귀신은 이미 예수님의 신분을 큰소리로 외쳤기에 회당에 모였던 회중들이 다 들은 후였습니다. 또한 마가복음 첫 절에서부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메시아의 비밀’ 아이디어는 본 사건의 문맥에서 보면 전혀 맞지 않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잠잠하라는 명령을 받은 귀신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즉석에서 굴복하였습니다. 귀신들은 언제나 예수님 앞에서 크게 두려워하였고(막 5:7) 예수님의 축귀 명령을 대항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귀신은 초자연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귀신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럼 귀신을 복종시키는 예수님은 누구시란 말입니까? 예수님은 신적 능력을 갖추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귀신들은 자기방어를 위해 예수님의 신분을 밝혔지만 예수님의 신적 권위에 눌려 축귀를 당하고 패주했다는 것이 강조점입니다.
둘째, 귀신들의 고백은 초자연적인 지식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귀신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뒤틀린 마음으로 하나님과 복음을 대항하고 방해합니다. 그들은 신자들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못하게 오도합니다. 복음서에서 그들을 “더러운 귀신”들이라고 불렀습니다(막 1:23, 26; 3:11; 5:2, 8; 7:25; 마 12:43; 눅 4:33; 8:29). 더러운 귀신들이기에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증언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누가 더러운 귀신의 오염된 말을 진리의 증언으로 인정하겠습니까? 비록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 자체는 맞을지라도 귀신들은 예수님을 증오하는 자들이며 하나님과 구원의 복음을 항상 왜곡시키는 악령들입니다.
셋째, 귀신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외쳐도 듣는 무리에게는 예수님을 더욱 정치적인 구주로 부추기게 할 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전략이었습니다. 사탄은 귀신들을 통해 예수님의 신분을 노출함으로써 무리를 더욱 흥분 시켜 예수님을 세속적인 메시아로 받들게 하려는 계책을 꾸몄습니다. 그렇게 되면 로마 당국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소요를 일으키는 위험인물로 간주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신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고 선전하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메시아 신분을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니고,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의 복음 사역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금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바르게 알려면 귀신의 증언을 믿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증언과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합니다.
[그럼 일반 치유 기적에서 함구령을 내린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치유 기적 때에 함구령을 내린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다양하게 제시되었는데 몇 가지 이론을 소개합니다.
☞ 예수님은 유명인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를 가급적 숨기며 저자세를 취하였다. 명성을 내고 자기를 과시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방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예수님은 고난과 대속의 죽음을 통해 메시아가 되실 분이기 때문에 정복자나 혁명투사로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다. 대중의 인기가 높아지고 정치적 메시아로 알려지면 로마 당국과 이스라엘 지도층에 위협이 되어 미리 체포될 가능성이 높았다. 함구령은 이를 사전에 방지하려는 시도였다.
☞ 마가는 예수님을 항상 권위가 있는 분으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이 잡혔지 자신의 권위에 집중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알려지는 것을 피하셨다.
☞ 이스라엘 역사에서 과거에 거짓 선지자들과 자칭 메시아들이 많았다. 예수님은 자신이 입을 다물음으로써 암암리에 자신이 참 메시아이심을 사람들이 인정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선전을 하시지 않았다.
☞ 무리가 예수님의 기적으로 흥분하여 당장 만사가 다 해결될 것처럼 들뜨고 무분별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함구령을 내리셨다.
이런 제안들이 기적 치유의 함구령을 이해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장 염려하신 것의 하나는 메시아에 대한 백성의 잘못된 기대와 오해였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오병이어 사건으로 예수님을 억지로 붙들어 왕으로 세우려고 시도하였습니다(요 6:14-15). 그때 예수님은 산으로 피신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기적사로 간주하였고 당시에 유행하던 잘못된 메시아관에 따라 예수님이 유대 독립을 위한 정치적 혁명가가 되어 줄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렇게 알려지는 것이 복음 사역에 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인기를 끌려고 애쓰지도 않으셨고 유명세를 타고 출세할 계획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무리는 예수님의 신분과 소명을 오해하고 걷잡을 수 없는 세속적 메시아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수천수만 명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잘못된 신호를 보내면 곧 폭동이 일어나고 반로마주의의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광분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 혁명 대열에 설 어떤 결정적인 시점이 올 것이라고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민중 소요는 정치적인 불안감을 자극하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촉각을 곤두세우게 할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사역이 관권의 개입으로, 때아닌 중단을 당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막 14:1). 그래서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 때처럼 많은 무리가 모일 때마다 흩어 보내시고 한적한 곳으로 피하시거나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이런 일은 예수님의 사역 초두부터 있었습니다.
◐ 세례 요한이 잡혔을 때 자신의 신변 보호를 위해 유대 땅에서 갈릴리로 철수하셨습니다(막 1:14; 요 4:1-4, 43),
◐ 헤롯과 종교 지도자들의 위협을 느끼셨을 때 이방인 지역인 시돈 땅으로 피신하셨습니다(막 6:14-16; 7:24, 31. 비교. 눅 13:31).
◐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유대 지역에서 활동하시지 않고 갈릴리에서 사역하셨습니다(요 7:1).
그렇지만 정치적 위험이 낮은 상황에서는 함구령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함구령 대신에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밝히셨습니다(요 4:25-26). 이방인 지역에서도 함구령은 불필요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을 정치적인 위험인물로 간주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알려진다고 해서 예수님이 체포될 확률도 낮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돼지를 기르는 이방인 지역인 거라사에서 귀신 들린 사람을 축귀하신 후에 함구령을 내리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큰일을 알리라고 명하셨습니다(막 5:19-20).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알리기를 원치 않아서 함구령을 내렸다는 ‘메시아의 비밀’ 이론과 맞지 않습니다.
한편, 함구령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말 못 하는 귀신에게는 함구령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귀신에 붙잡혀 말도 못 하고 듣지도 못 하는 아이만 고치시고 귀신에게는 다시는 들어가지 말라고만 명하셨습니다(막 9:25). 말 못하는 귀신에게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명령은 난센스였을 것입니다.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신 때처럼 이미 많은 사람이 운집하여 예수님의 사역 현장을 체험한 경우에도 함구령이 없었습니다. 벌써 누구나 다 아는 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혈루증 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이 둘러싼 곳에서 공적으로 예수님의 능력에 의해 혈루증 환자가 치유된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치유의 근원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막 5:25-34).
한 중풍병자의 경우, 입추의 여지가 없이 밀려온 사람들 때문에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지붕을 뚫고 병자를 달아내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인자가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막 2:10). 서기관들은 속으로 하나님 이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고 생각했습니다(막 2:6-7).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당시의 일반인이 들었을 때는 애매모호한 타이틀이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을 때 인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영광과 권세를 받기 위해 하늘 구름을 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분임을 밝혔습니다(막 14:61-62; 단 7:13-14).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일으키심으로써 예수님의 사죄권이 하나님께서 인증하시는 일임을 증명하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없었다면 중풍병자의 치유를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를 용서할 권세가 있다면 그분은 하나님과 같은 신적인 존재입니다. 본 사건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숨기신 것이 아니고 자신의 신적 신분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때 누구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시지 않았습니다(막 2:1-12).
십자가 처형이 임박한 때부터는 함구령이 불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의 메시아로서 곧 처형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참조. 요 16:25, 29). 예수님이 여리고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실 때 바디매오라는 맹인 거지가 예수님에게 불쌍히 여겨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때 그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소리쳤지만 예수님이 그의 입을 막지 않으셨습니다(막 10:46-52). 많은 무리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다윗의 나라’가 곧 세워지는 것으로 알고 환호했을 때 조용히 하라고 금하지 않았습니다(막 11:10).
[숨김과 드러냄의 패턴이 갖는 의미]
이제 우리가 살핀 대로 예수님의 함구령은 일률적으로 모든 기적에 다 대입시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신 때도 있었고 드러내신 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숨김’과 ‘드러냄’의 패턴이 상황에 따라 바뀌다가 점차 ‘숨김’의 패턴은 사라지고 ‘드러냄’의 패턴으로 조점이 잡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이 임박한 때부터는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숨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단순하게 보면 숨은 의도를 놓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숨기셨지만 완전히 숨기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드러내셨지만 완전하게 드러내신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답답하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처음부터 자신의 신분을 분명하게 밝혔으면 좋지 않았을까요? 사람들이 질문해도 직접적인 대답을 하시기보다는 간접적이거나 아리송한 답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혼란과 의심과 오해가 더 조장되었다는 인상을 줍니다.
세례 요한은 감옥에 있으면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묻게 하였습니다(마 11:3).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예수님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요 10:24)라고 재촉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서로 엇갈리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요 7:12).
예수님은 자신의 소명 성취를 위한 사역이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는 자신을 숨겼고, 자신의 신분에 대한 오해가 일어날 때도 이를 막기 위해 피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별도로 자신의 가르침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막 4:33). 예수님은 한마디로 자신의 정체를 무리에게 조심 없이 알릴 수 없었습니다. 많은 오해와 불필요한 소문이 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편으로는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가져올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불붙이지 말아야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오직 질병 치유와 생활고 해결만을 위해 몰려드는 무리로부터 자신은 통속적 개념의 기적사가 아님을 알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하는 무리로부터 떠나셨고 이적사가 되어 모든 민생고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그를 따르는 자들을 피해 다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숨김’은 ‘드러냄’을 전제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을 수 있는 만큼은 여러 방법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기적이나 말씀으로 자신의 신분과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절대다수가 예수님을 오해하였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인내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말씀과 기적과 예수님 자신의 인격으로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숨김’과 ‘드러냄’은 예수님의 생전에는 혼란과 의심과 오해 속에서 계속되지 않으면 안 되는 성격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신분과 복음 사역의 의미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신적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을 때만 깨달아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메시아의 비밀’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처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2)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신뢰하고 따랐던 제자들은 그렇지 못했던 자들에 비해 예수님으로부터 더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요 16:25, 29-33). 그럼에도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여전히 오해하고 세속적 메시아관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밝게 깨닫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였습니다.
맺는말
우리는 당시의 제자들에 비하면 예수님의 신분과 행위를 훨씬 더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신약 성경이 있고 성령의 내주를 받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쩌면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을 아직도 많이 닮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나의 개인적인 문제 해결사 정도로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때의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의 메시아입니까? 예수님은 무리가 그를 단순한 기적사나 경제 문제 해결사나 치유사나 혹은 정치적 혁명가로 앞세우려고 했을 때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니신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세상 나라가 아닌,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세우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새 백성이 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속적이고 통속적인 메시아관을 버리도록 우리 곁을 자주 떠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면 구원의 목적이 아닌 것들을 놓고 주여 주여 하거나 예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 속에서 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 이후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신 새 언약 시대에 삽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 당시의 무리처럼, 예수님을 세속적 메시아로 대하고 따른다면 주님은 지금도 자신을 숨기십니다. 나는 예수님을 어떤 메시아로 알고 따르는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