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라는 말은 마가복음 2:10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한문으로 번역된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영어로는 ‘Son of man’입니다. 이 특별한 용어는 사복음서와 요한계시록에서 나옵니다. ‘인자’는 예수님이 공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신 독특한 타이틀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의도로 이 타이틀을 사용하시게 되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the Son of Man)라고 복음서에서 사용하신 용례는 세 가지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이 말은 단순히 예수님 자신의 인간 존재를 가리킵니다. ‘인자’라는 말은 곧 ‘나’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섬기는 자로서 오셨다는 말씀을 마가복음 10:45에서는 ‘인자’라고 하였고 누가복음에서는 그냥 ‘나’라고 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관련해서 ‘인자’라는 특별한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막 8:31; 10:330.
셋째, 다니엘의 환상과 관계해서 사용된 경우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막 13:26; 14:62; 눅 21:27; 22:69-70).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의 사역과 믿음을 옳다고 변호하실 것으로 분명 기대하였습니다.
결론: 예수님은 자신이 곧 고난을 겪고 마침내 하나님에 의해서 영광스럽게 되실 ‘인자’로 보셨음이 분명합니다.
1. 인자라는 말의 유래는 구약에서 나왔습니다.
에스겔서에는 ‘인자’라는 말이 여러 번 사용되었습니다(16:2; 23:2; 27:2; 28:2). 여기서는 인자가 사람이라는 뜻인데 에스겔 선지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를 부르셨을 때에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겔 2:1, 3)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이 그에게 메시지를 주셨을 때 “인자야 너는 두로를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으라”(겔 27:2)고 하셨습니다.
시편 8:4에서도 인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역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4). 여기서 ‘사람’과 ‘인자’가 동격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식 표현입니다.
☞ 신약성경에서도 아람어식 유사 표현이 나옵니다. 12제자 중의 바돌로매가 있습니다(마 10:3). 그의 이름은 Bartholomew(Bar-Tholomais, =son of Tholomais=돌로매의 아들)입니다. Bar는 아람어로서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마 16:17)라고 하셨습니다. 시몬 바-요나(Simon Bar-Jonah)는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입니다.
다니엘서 7:13에서는 ‘인자 같은 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계시록에서도 ‘인자 같은 이’라는 말이 쓰였는데(계 1:13; 14:14) 환상 중에 나타난 분에 대한 묘사입니다. 사람처럼 보이면서도 일반적인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차원이 매우 다른 신비한 존재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계시록 1장에서 사도 요한이 본 ‘인자 같은 이’가 곧 예수님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라는 타이틀로 사용하신 배경은 다니엘서 7장에서 나왔습니다. 매우 중요한 본문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 의미를 이해해야만 인자와 관련된 예수님의 신분과 가르침을 심도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인자 같은 이’는 다니엘이 본 심판에 대한 환상 중에서 나타납니다.
다니엘서 7장에는 네 짐승에 대한 환상이 나옵니다. 첫 번째 짐승은 바벨론 제국이고 두 번째 짐승은 바사(페르시야) 제국입니다. 세 번째 짐승은 그리스 제국이고 네 번째 짐승은 로마 제국을 상징합니다. 다니엘은 각 짐승이 차례로 무너지고 네 번째 제국에게도 하나님의 극심한 심판이 내리는 것을 환상으로 봅니다. 10절을 보면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갑자기 또 하나의 환상을 봅니다(단 7:13-14). 다니엘의 네 짐승의 환상에서는 인간의 제국들은 심판을 받고 멸망을 하지만 두 번째 환상에서는 오직 “인자 같은 이”만 보입니다.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단 7:13-14).
여기서 ‘인자”는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공적 타이틀로써 사용하신 ‘인자’는 바로 여기에 나오는 ‘인자’의 배경을 안고 있습니다. 네 짐승이 지상의 왕들과 왕국들을 대표하듯이, “인자 같은 이”는 하늘의 왕과 그의 왕국을 대표합니다.
네 짐승으로 대표되는 지상 왕권은 야수적입니다. 백성들을 억압하고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지배합니다. 반면, ‘인자 같은 이’의 왕권은 천상적이며 악한 세상 왕국들을 심판하고 죄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합니다.
네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왔다고 했습니다(단 7:3). 격랑의 바다는 혼돈과 악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지상 왕국들은 모두 인간의 야욕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을 대표하는 ‘인자 같은 이’의 원천은 하늘이며 하나님에게서 오는 분입니다.
이 천상적(heavenly figure) 인물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신적입니다(yet he is divine). 그는 구름을 타고 온다고 했습니다. 시내 산에서 구름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둘렀듯이, 구름은 신적 권위를 상징하고(시 104:3; 사 19:1) 직접적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주고 보호해 줍니다.
다니엘서 7:13-14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인자 같은 이는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The Ancient Days)에게로 나아갑니다.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라는 표현은 왕좌에 좌정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2)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인자 같은 이’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십니다.
3) 만민이 그를 경배합니다.
4) 이 왕국과 왕권은 지상 제국들과는 달리 영원히 멸망하지 않습니다.
[그럼 언제 ‘인자 같은 이’가 하나님의 나라의 권세를 받고 그가 옳다는 변호를 받을까요?]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서 이미 발생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아버지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다고 하셨습니다(마 28:18).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후 불과 며칠 만에 하늘 아버지의 보좌에 좌정하셨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으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 인자 같은 이에게 하나님의 왕권이 심판의 문맥에서 주어진 것은 인자가 하나님의 원수들에 대한 심판을 대행하신다는 뜻입니다. 세상 제국들은 짐승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왕권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왕국을 세워 마음대로 악행을 일삼고 하나님을 향해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은 ‘인자 같은 이’를 통해서 집행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신 것은 이러한 다니엘의 환상이 배경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이스라엘과 온 세상의 심판주가 되심을 암시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리자며 하나님의 참 백성을 대표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 왕권과 어둠에 속한 자들이 그를 박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다니엘서 7장의 인자 같은 이를 자신에게 적용한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하나님의 왕권과 권세를 주심으로써 그가 옳다는 것을 변호하고 모든 지상 왕국들과 악의 세력을 멸망시키게 하신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심판주이시기 때문에 죄를 용서하는 사면권도 있습니다. 중풍병자의 스토리에서 이 심판권이 하나님의 용서를 부여해 주는 권세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서 ‘인자’는 심판주이면서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다니엘서 7장의 ‘인자 같은 이’로 분명하게 드러내신 때는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였습니다. (막 14:60-62)
다니엘은 자신이 환상에서 본 ‘인자 같은 이’에 대해서 잘 알 수 없어 번민하였습니다(단 7:15). 그는 천사로부터 설명을 들었지만, 그 깊은 뜻은 예수님 자신의 삶에서 성취되었고 그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3. 예수님은 인자라는 말을 고난의 문맥에서도 사용하셨습니다.
☞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고(막 8:20),
☞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에게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막 10:45).
☞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관련해서 인자라는 타이틀을 계속 사용하셨습니다.
인자가 십자가 고난을 받기 위해 배신자의 손에 의해 팔린다고 하셨고(눅 22:21-22) 세 번씩이나 수난 예고를 하시면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고 이방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막 8:31; 9:31; 10:33)
[그런데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게 된다(막 8:31)는 말은 뜻밖의 진술이었습니다]
다니엘서 7장의 인자는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큰 영광으로 하나님께 나아와서 왕국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인자라고 하시면서 많은 고난을 받는다고 하셨기 때문에 앞뒤 연결이 잘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된 것일까요?
다니엘서 7장에서는 인자 같은 이가 고난을 받는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고난을 통해 심판주가 되시는 분임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부분은 다니엘서 7장의 예언이 표면으로 드러내지 않은 차원의 깊은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왕권을 받기 위해 하늘 아버지께로 나아가신 때는 그의 십자가 사건 이후였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고난을 겪으신 이후에 부활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옳다는 판정을 받으시고(vindicated) 승천하여 심판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서 7장의 본문에서는 이 점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고난받는 메시아에 대한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다니엘서 7장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권세와 영광과 왕국을 받으시는 “인자 같은 이”(단 7:13)를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 받는 인물과 연결하고 자신과 일치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서 7장의 인자는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이 당하는 고난을 통해서 영광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고난이 다니엘서 7장의 인자가 받는 영광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은 왜 인자라는 말을 자신의 타이틀로 사용하셨을까요?
예수님이 다니엘서 7장의 인자를 자신의 타이틀로 사용하신 것은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인자 같은 이”가 궁극적으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신분과 메시아의 구원이 지닌 본뜻을 드러내는 데 매우 적절했기 때문입니다.
▶ 인자라는 말은 애매모호한 용어였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나"를 지칭하는 말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니엘서 7장의 ‘인자’가 받는 영광과 왕권과 심판권에 대한 거창한 의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사람들이 서서히 인자의 본뜻에 접근하도록 시도하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인자’라고는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 뜻이 모호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처음에는 일반적인 의미의 ‘주’라고 하거나(눅 9:38) 또는 ‘선생님’(랍비)이라고 불렀습니다. (막 4:38;11:21; 요 1:38; 20:16).
예수님이 왜 이런 방법을 취하셨는지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가졌던 그릇된 정치적인 메시아 관과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적대감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처음부터 자신의 신분을 적나라하게 밝혔다면 즉시 처형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인자’라는 것을 그대로 밝힌 것은 십자가를 목첩에 둔 때였습니다. 그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보인 반응을 생각해 보십시오(막 14:61-65).
[교훈]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자의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매우 조심하시면서 처신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를 통속적인 의미의 민족적이고 정치적인 대중적 메시아로 보지 않도록 ‘메시아’라는 타이틀을 피하시고 뜻이 모호한 ‘인자’라는 타이틀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무조건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고 믿고 밀고 나가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마 10:16). 예수님 자신이 그처럼 조심하셨다면 우리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인자’를 메시아의 타이틀로써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용어를 고난의 문맥에서 사용하셨을 때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요 12:34).
예수님은 ‘인자’라는 타이틀의 본뜻이 일반에게 잘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면으로는 자신을 ‘인자’라고 불러도 다니엘 7장에 나오는 “인자 같은 이’의 실체를 감출 수가 있었고, 다른 일면으로는 ‘인자’라는 타이틀에 고난받는 종의 의미를 입혀서 자신의 구속 사역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사용하신 새로운 방식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인자라는 타이틀은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숨김(concealment)과 알림(revelation)을 함께 담을 수 있는 암시적인 타이틀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고난 이후에 그를 옳다고 변호하시고 그에게 왕권과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고 그의 대적자들을 심판하게 하신다는 의미를 포함시킨 타이틀이 되게 하셨습니다(막 14:62).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예수님은 ‘인자’라는 말에 정관사를 붙여서 사용하셨습니다.(a son of man 이 아니고 the Son of man, ‘호 휘오스 투 안스로푸우’ 입니다). 개역과 새번역 본문에는 그냥 ‘인자’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막 2:10)고 되어 있습니다.
다행히 새번역에는 난외주에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나옵니다. 직역 성경에는 ‘그 인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인자라는 타이틀은 다니엘 7장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에 보통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왕권을 공유하시는 유일하신 The Son of man이라는 점이 암시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에 ‘인자’는 그냥 ‘나’ 또는 ‘유한한 인간’이라는 뜻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정체가 가려질 수 있었습니다(to conceal). 그러나 다니엘서 7장의 인자는 예수님 편에서는 그의 참 신분을 밝히기 위해서도(to reveal) 사용될 수 있는 이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인자’의 의미에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종을 입혀서 참 메시아가 받아야 할 십자가 고난을 설명해 주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이런 식으로 인자라는 타이틀을 사용하신 주된 이유는 자신의 신분과 사역의 성격을 초기에는 가급적 숨기면서 점차적으로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막 8:29)이시며 다니엘 7장의 “인자 같은 이”에 대한 예언이 자신에게서 성취되고 있음을 암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들어 '인자'(Son of Man)와 '그리스도'는 동일인임을 밝히셨습니다(막 8:29-31).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치유와 죄의 용서를 통해서 자신이 다니엘서 7장의 인자가 되심을 증명하셨지만, 이 단계에서는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이 인자가 십자가 고난을 받는다고 거듭 예고하셨지만, 그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되어 줄 것을 기대하고 추종했지만, 예수님의 인격체에 신적 권능과 메시아의 고난이 함께 아우러져 있다는 점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인자’라는 타이틀이 일면으로는 예수님의 영광된 신분을 감추고 또 다른 일면으로는 메시아의 고난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거친 훨씬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사람들에 비하면 예수님이 사용하신 ‘인자’의 의미를 훨씬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인자의 의미를 알면, 예수님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획득하시고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셔서 세상 왕국의 흥망을 주관하시고 모든 악한 세력들을 심판하실 것임을 훨씬 큰 스케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더 크게 이해하고 그분에 대한 감사와 존경과 확신을 더 갖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 모두의 영적 눈과 귀를 넓혀 주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