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스토리가 있다면 탕자의 비유일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어떤 면에서 우리 모두의 스토리입니다. 주 예수를 믿고 회심한 자들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본 비유 속에 나오는 탕자와 일치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들 중에서도 자신을 탕자와 일치시키기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밧세바와의 불륜한 관계를 은폐하기 위해 그녀의 남편인 우리아를 최전방에 보내 의도적으로 죽게 했던 다윗 왕은 구약의 탕자였습니다. 자신의 주를 세 번씩 부인하며 자기와 전혀 아무 관계가 없다고 거짓된 결백을 맹세헸던 베드로는 신약의 탕자였습니다. 아니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우상 숭배에 빠졌던 탕자였고 더 나아가 인류의 조상이었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길을 택했던 낙원의 탕자들이었습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집을 떠난 아들의 귀가를 날마다 기다렸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졸라 받은 탕자는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타지에서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그가 세상 열락의 강물을 따라 흘러갈 때에는 아버지의 모습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돼지나 먹는 조악한 열매로 허기를 채우는 신세로 전락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때 비로소 그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것을 작심하고 일어섰습니다. 그는 초라한 모습으로 낯 익은 고향 동네로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연로하신 부친이 아들을 먼저 알아보고 달려 나와 그를 반갑게 맞았습니다. 탕자는 자신이 하나님과 아버지께 큰 죄를 지었으니 종의 한 사람으로라도 삼아 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더욱 놀란 것은 아버지는 탕자를 꾸짖지 않고 큰 잔치를 열어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탕자는 잃었던 자식으로서 되찾은 귀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였습니다. 날마다 문 앞에서 아들의 귀가를 애타게 기다렸던 아버지의 마음은 되찾은 아들로 인해 기쁨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나 탕자는 자신의 죄를 알기에 감히 아버지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그를 껴안고 입맞추며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최상의 옷을 입히며 고급 신발을 신겼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이 때처럼 깊이 느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또한 이 때처럼 자신의 잘못을 통감한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죄에 비해서 하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크나큰 사랑을 체험한 자들은 자신의 가슴에서 언제나 흘러나오는 심곡의 고백이 있습니다.
나의 귀향지
다리 지나 초정(草庭) 위에
당신이 서 있건만
강물로 흐를 젠
보이지 않더이다
연연한 세월이
저 멀리
흘러간 후에야
푸른 강변 당신 곁에
나 또한 섰더이다.
잔한(殘恨)의 고통 없이
만날 수 없던 당신,
절상(折傷)의 자국들이
아직도 아프거늘
묵묵히 가꾸어 온
치유의 초정(草庭)에서
예처럼 살포시 내미시는
당신의 손
강물은 흐르고
세월은 지나도
당신은
영원한 나의 심곡(心曲)
나의 귀향지입니다.
(이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