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오늘의 식탁

본문시작


본 게시판에 등록되는 신규 게시물의 알림을 받기 원하시는 분은 아래에 이메일 주소를 적고 "이메일 구독신청" 버튼을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막14:30)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 말씀을 기억하게 된 것은 한 마리의 닭 우는 소리였습니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베드로의 가슴을 찢어지게 하고 그가 대제사장의 바깥뜰로 나가 엎드려 통곡하게 한 것은 주님의 시선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 뜰의 모닥불 앞에서 한 여종이 그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지목하자 자기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조금 후에 또 다른 사람이 그를 보고 예수님과 같은 도당이라고 하자 다시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습니다. 한 시간쯤 있다가 또 다른 사람이 그를 보고 갈릴리 사람이며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 세 번째 다그침을 받고도 예수님을 전혀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때 닭이 울었고 예수님이 베드로를 돌아보셨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눅 22:61~62).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라는 대목은 베드로의 회복을 이해하는 데 단초가 되는 부분입니다. 베드로는 닭 우는 소리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맹세까지 하면서 주님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한 후에 세 번씩 주님이 보시는 앞에서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배반은 용서받을 수 없는 배신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평생을 비겁한 배신자의 이름을 달고 다녀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가룟 유다처럼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던 대제사장의 뜨락에서 두 개의 시선에 마주쳤습니다. 하나는 대제사장의 여종의 시선이었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런데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를 바라본 여종의 시선과 예수님의 시선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여종은 베드로를 “빤히 노려보고서”(67절, 표준새번역) 예수의 제자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여종의 시선은 정죄의 차가운 눈총이었습니다. 베드로 곁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같이 베드로를 의심하며 추적의 눈길로 다그쳤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시선은 부드럽고 온정에 찬 눈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노려보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시선에는 정죄도 원망도 담겨있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베드로를 정죄의 눈총으로 바라보셨다면 그는 아마 스스로 목숨을 끊은 유다의 길을 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상황에서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까? 대제사장의 종들이 그에게 침을 뱉고 주먹으로 구타하며 누가 쳤는지 선지자 노릇을 해 보라고 야유하며 모욕하던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공회에서 정죄를 받고 곧 이방인 왕인 빌라도 앞으로 끌려가야 하는 때에 베드로의 배신을 목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타를 당한 지친 몸으로 동족으로부터 치욕적인 심문을 받으시면서도 베드로의 회복을 위해 얼굴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바라보셨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주님의 시선이 닿는 지척에 있으면서 세 번씩이나 저주와 맹세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는 과연 바라볼 가치가 있는 자입니까? 우리는 베드로에 대한 어떤 심판도 마땅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를 심판하시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도주할 수 있었지만 대제사장의 뜨락은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집요한 추궁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정말 도망칠 수 없었던 곳은 자신의 양심의 자리였습니다. 양심이 화인 맞지 않는 한,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으면 반드시 고통이 옵니다. 양심의 추적을 당하는 것은 큰 고통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고통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들의 실족과 고통의 순간을 깊은 이해와 동정의 눈길로 바라보십니다.   

베드로는 충동적이었고 나서기를 좋아했으며 실수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한때는 주님께 충성을 다했던 제자였습니다. 주님은 단편적으로 보시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거듭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주님은 고통받는 베드로의 양심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마음속 깊은 곳에 주께 대한 사랑이 있음도 보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부활 이후에 예수님의 재소명을 받았을 때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7)라고 호소했습니다.

원수들의 시선은 우리를 노려보고 부끄러운 내 모습을 손가락질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시선은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내 모습을 긍휼히 여기시고 신실했던 어제의 모습을 기억해 내십니다. 주님은 언제나 제자들과의 아름다웠던 어제를 추억하십니다. 주님은 비록 죄에 빠진 오늘의 내 모습은 수치스러워도 주님과의 첫사랑의 순정을 기억하시고 새로운 밀월여행을 꿈꾸십니다(렘 2:2).

 

예수님의 눈에 비친 베드로는 단순히 붙잡혀 죽는 것이 무서워서 자신의 주인을 배반하는 괘씸한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를 바라보신 예수님의 시야에는 이보다 훨씬 다른 차원의 영역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실족과 탈선의 현장에서 주님의 시선과 마주쳤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베드로를 보신 눈길은 정죄와 심판의 무서운 눈매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신자로서 내려갈 수 있는 최저의 밑바닥까지 떨어진 자였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베드로를 포기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죄악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베드로에게 주님의 시선은 조용히 내렸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최악의 시험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주님 자신도 최악의 순간들을 지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겪는 최악의 순간 속에서 경악할 배신의 제자에게 최선의 눈길을 보내셨습니다. 주님의 자애로운 시선은 탈선한 제자의 회복을 응시합니다. 주님은 타락한 제자의 모습을 십자가에 비추어 바라보십니다. 주님의 눈은 추락된 오늘의 내 모습에 묶이지 않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온전하게 될 거룩한 성도의 미래를 바라봅니다.

주님의 시선은 회복의 시선입니다. 베드로를 통회하게 한 것은 심판과 정죄의 시선이 아니고 용서와 사랑의 눈길이었습니다. 주님의 이 같은 구원의 시선은 죄에 빠지고 시험에 든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지금도 고요히 내리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누구입니까?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시험에 빠지면 나도 베드로처럼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기 쉽습니다. 수치스러운 베드로의 모습은 나와 다른 성도들의 삶 속에서 자주 스치고 지나갑니다. 은혜롭게도 그런 불의한 제자들에게 주님의 포기하지 않는 자비의 시선이 내립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의 시선이 양심을 파묻은 내 육신의 시선과 마주칠 때 나는 질그릇처럼 산산이 깨어지고 맙니다. 내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통곡의 회개는 주님에 대한 새로운 사랑과 감사로 이어집니다. 그리하여 통곡의 눈물 속에 소망의 빛이 투사되고 저주와 맹세로 부인했던 예수님이 진실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요 20:28)이 되십니다.

베드로는 “멀찍이”주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구원의 시선과 마주친 이후부터 주님을 ‘가까이’ 따랐습니다. 그의 최후는 절망의 자살이 아니고 소망의 순교였습니다. 우리도 어쩌면 ‘멀찍이’ 주님을 따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도 주님을 ‘가까이’ 따를 수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십자가의 사랑으로 바라보시고 치유와 회복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중보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배신을 자비의 시선으로 바라보셨던 주님은 동일한 방법으로 미욱한 우리들을   회복시키십니다. 당신은 그러한 사랑과 능력의 주님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까? 주님과 떨어져서 쬐고 있는 당신의 모닥불은 결코 두려움과 떨림을 진정시켜 주지 못합니다. 대제사장의 하녀와 하인들의 무리 속에서는 회개의 눈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당신은 지금 불편한 양심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못 잊어 ‘멀찍이’ 따라는 가지만 그분을 ‘가까이’ 쫓지는 못하는 입장이 아닙니까? 당신은 혹시 불신의 무리와 함께 세속의 모닥불 곁에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살지는 않습니까?

주님이 베드로를 어떤 눈으로 돌아보셨는지를 기억하십시오. 나의 과거나 현재가 아무리 떳떳하지 못해도 주님은 여전히 화해와 용서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하셨듯이(막 16:7; 눅 24:34) 재소명과 온전한 회복을 위해 나에게 소망의 눈길을 보내시고 나를 다시 만나주십니다. 주님은 내 영혼 깊은 곳에 드리운 주께 대한 나의 사랑을 꽃피우기 위해 용서와 은혜의 시선을 보내십니다. 당신은 주님의 그 같은 시선과 마주친 적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