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만 장군이 어떻게 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를 살피면 불신자로 있다가 구원을 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불신자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들어야 합니다.
나아만 장군은 자기 집의 이스라엘 여종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엘리사 선지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들은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 선지자를 만나기 위해서 실제로 찾아갔습니다. 물론 이 단계에서 나아만 장군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여종의 말이 참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좋은 자세입니다. 우리는 아무 말이나 듣고 그냥 믿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맹종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검증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선교할 때에 뵈레아라는 곳의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들었는데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행 17:11)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알아보고 믿는 것이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물론 극히 짧은 시간을 통해서도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복음의 진리는 계속해서 더 배워나가야 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더 깊은 확신에 이르기 위해 ‘성경을 상고’해야 합니다.
둘째, 나아만 장군은 “내 생각”(왕하 5:11)에 묶여 엘리사 선지자에게 실망하였습니다.
구원을 받는 과정에서 종종 예기치 못한 반대나 좌절을 겪습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입니다. 문제가 자신에게 있을 수도 있고 혹은 복음 전달자에게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보이지 않는 어둠의 세력이 뒤에서 방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경우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프라이드가 매우 강한 자였습니다. 사실상 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혼자 잘난 체하는 독불장군이 아니고 대국의 왕, 다음 가는 권력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는 결코 단순한 나병 환자의 한 사람으로 엘리사의 문전에 나타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많은 시종과 부하들을 거느리고 대단한 권위와 품위를 보이면서 이스라엘 땅을 밟은 아람국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그는 아람 왕의 친서까지 가지고 왔고 치유의 대가로 내놓을 수 있는 금은보화와 비싼 의상들을 준비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받은 대우는 무엇이었습니까? 자기를 고쳐 줄 것으로 기대했던 선지자라는 자는 문밖으로 나와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보지도 않고서 안에서 하는 말이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왕하 5:10)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너무도 황당한 처방이었습니다. 자기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이 아이 물장난치듯이 별 볼 일 없는 요단 강에 몸을 담그고 씻고 또 담그고 씻으면서 일곱 번씩 하라니…그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메섹에서 여기까지 고작 물장난하기 위해 왔단 말인가? 강물에 씻어서 나을 것이라면 다메섹에 있는 아마나와 바르발 강들이 더 낫지 않은가? 그는 크게 자존심이 상하여 “몸을 돌려 분노하여”(왕상 5:12) 떠났습니다.
그러나 엘리사 선지자가 나아만 장군을 영접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오지 않고 그에게 치유의 지시만 준 것은 교만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는 하나님의 품성을 닮고 그대로 실천한 것이었습니다(요 7:24; 롬 2:11; 밷전 1:17; 행 10:34; 골 3:25; 엡 6:9). 나아만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자기 과시가 무용하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나아만은 화려한 드라마에 나오는 것과 같은 의식과 대우를 원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늘 그의 앞에서 굽실거리며 고관 대우를 해 주는 일을 당연시하였습니다. 나아만 장군에게는 병 낫는 것보다 종교적인 격식과 의례를 갖춘 일종의 거창한 행사가 먼저 있어야 한다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나아만이 항상 받아온 그런 식의 극진한 대우를 하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방 종교의 특징입니다. 신에게는 바로 나갈 수 없으므로 여러 의식을 거쳐야 하고 복잡한 절차를 밟을수록 영험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려면 이런 이교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크리스천이 된 이후에도 재래 종교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나아만 장군처럼 절차나 의식이나 불필요한 전통에 매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간단한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하고 간단하게 구원을 받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의 간수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 16:34)라고 물었을 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조건으로 어려운 것들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30)고 하셨습니다. 복음의 본질은 분명하고 단순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한마디로 말할 수 있습니다(요 3:16; 행 2:32, 36; 롬 10:9). 그런데 우리는 어려워야 권위가 있는 것 같고 심오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우리가 어떤 어렵고 대단한 일을 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의식을 많이 행한 후에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순전히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물로 받습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한 은혜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에게 간단한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거룩하고 권위 있게 들리는 듯한 음성으로 말하지도 않았고 종교적인 화려한 의식도 없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자기 종들의 간곡한 권고를 받고 요단 강에 가서 엘리사가 시킨 간단한 지시를 따랐을 때 온몸이 나았습니다. 엘리사는 이제부터는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나아만 장군에게 어떤 종교적인 금지 사항의 수칙들을 적은 목록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그에게 “평안히 가라”(5:19)고 축복했을 뿐이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하나님을 단순히 신뢰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는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단순히 신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나아만 장군은 자신의 신분을 아랑곳하지 않고 간단하게 하나님의 메시지만 전하는 엘리사의 태도에 불만을 품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왕하 5:11).
지금도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구원이란 누구나 너무 쉽게 받는 것인데 자신들의 자존심에 걸려서 거저 받는 십자가 구원을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주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려면 빈손으로 나와야 하고 아무리 잘났다고 하여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의 구원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십자가 구원은 나의 세상 지위나 돈이나 지식이나 인물이나 배경과 같은 인간적인 자랑거리를 완전히 내려놓지 않으면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 예수를 통해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신 하나님의 의를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처럼 치유의 값을 손에 쥐고 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치유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 생각”’(왕하 5:11)을 품고 오지 말아야 합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들을 모두 버리고, 자신이 가진 것을 의존하지 말며, 자신이 알아주는 아마나와 바르발을 내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몸소 준비하신 십자가의 속죄를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로 인정하고 주 예수를 구원자로 영접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요단 강에 가서 일곱 번 씻는 일은 너무도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 의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공짜를 좋아하면서도 항상 자기가 드러나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십자가 구원은 거저 받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낮추어야 하고 겸손해야 하고 자기 것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면 화를 냅니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이러이러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실망하고 되돌아섭니다. 그들의 우상은 내려놓기에는 너무 소중하고, 그들의 악습은 포기하기에는 너무 강하며, 그들의 죄는 버리기에는 너무 아쉽습니다. 지적인 교만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커다란 장애 요인입니다.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자기들이 하나님보다 더 잘 아는 듯합니다. 그들은 나아만 장군의 반응처럼 “내 생각”(왕하 5:11)에 사로잡혀 단순한 복음의 처방에 분노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과학적 지식이나 인간적인 논리를 퍽 대단하게 생각하며 잘났다고 여깁니다. 이것은 일부 소수의 입장이 아닙니다. 주 예수를 믿는 신자들도 십자가 구원을 받기 전에는 모두 “내 생각”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아만 장군이 자기 생각에서 풀려났을 때 즉각적인 치유가 왔습니다. 구원의 길에는 걸림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의 걸림돌을 치우면 즉시 회복됩니다. 나아만은 처음에는 큰 기대를 하고 일단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실망이 되는 말을 듣고 발걸음을 되돌렸을 때 위기가 왔습니다. 그러나 그 위기는 잘못된 “내 생각”을 내려놓는 개심(改心) 때문에 극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지시에 순종했을 때 온몸이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구원의 길로 나아갔다가도 실망이 되고 기대에 못 미치는 일이 있으면 속히 그 원인을 찾고 “내 생각”을 고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호의적인 기대를 하거나 열심을 내었을 때라도 자신의 열심과 호의가 잘못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때 얼른 자기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나의 믿음과 열심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복음의 진리와 성령의 조명에 비추어 교정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믿음 생활에 발전이 있고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예비하신 축복을 온전히 받을 수 있습니다.
셋째, 회심한 자에게는 변화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나아만은 나병이 완전히 치유되었습니다. 그런데 치유의 기적은 그의 신체만이 아니고 영혼의 기적도 동반되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이 세상에 절대적인 유일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개인적인 체험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적으로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15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회심한 사람의 특징은 절대자로서의 구원의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자기 입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그는 우상 숭배자로 살다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말처럼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렀습니다(롬 10:10). 그는 치유를 받은 후에 엘리사를 다시 찾아 왔는데 더 이상 오만한 시리아의 군대 장관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엘리사 앞에서 “‘당신의 종”(삼하 5:15)이라고 하였습니다. 겸비는 회심의 가장 뚜렷한 증거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때처럼 사람을 겸비케 하는 것이 없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이번에도 예물을 가져왔지만 자기 것으로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기이한 은혜를 입고서 곧장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도 회심의 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체험한 자들은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시 116:12) 라고 말합니다. 그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는 엘리사에게 이제부터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17절)라고 헌신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는 무력한 우상 신들을 내던지고 살아계신 참 하나님을 택하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회심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의 나병은 깨끗하게 치유되었습니다. 그는 참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죄는 용서를 받았고 그의 영혼은 불의와 우상숭배의 오염으로부터 갱신되었습니다. 나에게는 나아만 장군처럼 회심한 증거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나아만에게 일어난 일을 우리에게 행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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