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무엇을 어떻게 믿는 것인가?
믿음과 순종이라는 말은 모호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치고 애매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가 많지 않은 듯합니다. 사용 빈도수가 높은 말들은 대부분 추상적입니다. 일차적인 원인은 처음부터 가르치는 사람이 성경의 용어를 바르게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차적인 원인은 오용을 막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혼란이며 원칙 없는 적용입니다. 지난 메시지에서 다룬 하나님의 증식 교훈도 하나님께서는 늘려주시는 분이니까 믿고 순종하라는 식으로 가르칠 수 있고 듣는 사람도 자기 마음대로 아무것에나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원칙적인 진리라도 구체적인 내용을 숙지하여 본래의 성경적 의미의 범위 안에서 적용해야 합니다.
엘리사는 예물로 들어온 양식을 무리에게 나누어 주라고 시종에게 지시하였습니다. 엘리사는 선지자니까 믿음이 좋아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도 무턱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분이니까 자기가 원하는 것을 거뜬히 해결하실 것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는 무엇을 믿고 빵을 무리에게 다 나누어 주라고 하였을까요? 엘리사는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을 믿었습니다. 믿음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딛 1:2)의 변치 않는 성품과 능력에 근거한 약속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자신의 능력과 재원의 분량에 한계점을 찍고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에 전적으로 투신하였습니다. 그는 양식 분배의 순종을 거부하는 시종에게 하나님의 증식 약속이 주어졌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엘리사는 또 이르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43절). 엘리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양식이 모든 제자에게 넉넉히 돌아갈 것을 믿었고, 그의 시종도 하나님의 약속이 있음을 알고 순종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44절)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여호와의 약속의 말씀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 약속을 믿고 순종했더니 역시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라는 식의 개인 소원은 아무리 ‘믿습니다’라고 큰소리로 외쳐도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 아니므로 증식의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행위는 무용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약속이 주어졌을 때만 보장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마저도 조건부입니다. 엘리사는 빵을 나주어 주면 모두 배불리 먹고도 분량이 남을 만큼 불어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이를 순종하기 전까지는 성취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오천 명을 먹이실 때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왕하 4:40, 41, 43)는 지시를 내렸습니다(막 6:41; 눅 9:16).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었으면 하나님의 지시를 순종하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않는 것을 내가 지어낸 믿음으로 억지 확신을 하면서 청구하면 낭패를 당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주어졌다는 사실을 꼬리표로 단단히 붙여 놓았습니다. 엘리사는 이 교훈을 선지자 훈련을 받는 제자들에게 실물 교재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훈련이 없이 선지자 노릇을 하면 실패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지 않은 것을 받아내려고 하거나 받을 수 있다고 장담하는 자들은 자신을 스스로 속이고 남도 기만합니다.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를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이 아닌 것에 내 믿음과 확신을 걸고 무모하게 도전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눈먼 신념이나 모험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약속을 억지 확신으로 “주실 줄로 믿습니다”라는 식의 주장을 삼가야 합니다. 믿음은 어둠 속에서 뛰는 무모하고 위험한 모험이 아니고, 말씀의 빛 속에서 뛰는 순종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확신할 수 없는 데에도 자신을 강제로 설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억지도 아니고 그런 척하는 것도 아니며 남따라 나도 덩달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확실히 믿고 확신하지 않는 것을 분위기나 심리적 조종 때문에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종교적 허세입니다. 믿음은 맹목도 아니고 추상적인 낙관도 아닙니다. 참믿음은 타락한 인간에게는 저절로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은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살후3:2)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거짓 사역자들이 심리적 유도를 하거나 인위적인 설득을 하여 마음을 현실로부터 빼앗고 거짓된 약속을 믿게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한 사람'(4:42)의 이야기
열왕기하 4장은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제자의 아내로서 과부가 된 “한 여인”(1절)이 엘리사를 찾아와서 도움을 청하였고, 수넴 지역의 “한 귀한 여인”(8절)이 엘리사를 자기 집에 모셨으며, 길갈의 선지자 학교에서 “한 사람”(39절)이 들호박을 따서 와서 국을 끓였습니다. 그리고 바알 살리사에서 “한 사람”(42절)이 보리 떡과 새 곡식을 담아서 엘리사에게 바쳤습니다. 우리는 이 ‘한 사람’의 정체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왜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까요? 한 마디로 저자의 관심이 딴 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관심은 사람에게 쏠립니다. 어떻게 생겼고 어떤 집안이며 무슨 학교를 나왔고 무슨 직업을 가졌는지를 자세히 알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문 기자도 아니고 정보원도 아니십니다. 성경의 가치관에서 보면 ‘한 사람’의 이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섭리입니다. 우리는 어떤 이름 모를 ‘한 사람’ 뒤에 서 계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이름은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유명하여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지 않는 이름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감추어 두신 이름이 아니면 무익할 뿐입니다.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유명인사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습니다.
참경건은 자신을 드러내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이 알려지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바알 살리사에서 온 사람은 자신의 선행을 알리기 위해서 명함을 놓고 가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선물에 자기 이름과 주소를 기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와 돌보심을 드러내는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본 장 전체에서 소개되는 ‘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귀한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엘리사는 그들이 헌물을 많이 했다고 광고를 하지도 않았고 주의 사역을 크게 도왔다고 표창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의 저자는 이들의 이름은 숨기고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그 의도는 우리들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고 그분의 돌보심과 크신 능력을 의존하게 하며 그분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사람의 이름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높이는 일에 쏠려야 합니다. 참경건은 하나님께서 숨기신 자들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챙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 것에서 전적인 기쁨과 만족을 얻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숙지하였고 자신의 소명에 충실함으로써 메시아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게 하였습니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신을 보라고 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명성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소명을 받은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의 이름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아로부터 시선을 돌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엘리사는 ‘바알 살리사’의 사람을 붙잡아 두고 제자들에게 소개를 하거나 그의 이름을 광고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교훈입니다. 우리들은 누가 우리에게 선을 행하면 감사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무명으로 선을 행하려는 자들의 뜻을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땅히 행할 일을 했다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이 훤히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전도 여행에서 돌아와서 귀신들도 항복하였다고 보고하며 기뻐하는 것을 보시고 오히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갑자기 유명해졌습니다. 그 누구도 제압할 수 없는 귀신들을 주의 이름으로 항복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단한 존재가 되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찬물을 끼얹듯이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라”(눅 10:20)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또 그 결과가 어떤 것이든지 진정으로 우리의 기쁨과 격려가 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에게 호감을 사는 제도나 관습을 정해 놓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것은 우리 방식이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바알 살리사’에서 온 무명의 농부가 주의 이름으로 선행을 하고 돌아간 후에도 무명의 이름으로 남겨진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의 이름은 성경에 적혀 있지 않지만, 하늘 기록에는 영원히 남아서 언젠가는 다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때가 오면 온 우주 앞에서 주님의 칭찬과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자신에게 시선을 모으려고 하지 말고 은밀한 선행을 보시고 마음에 담아 두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모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자신에게서 우리들의 가치와 기쁨을 발견하고 그분을 찬양하는 일에서 전적인 보람을 느끼지 않으면 나 자신이 드러나고 싶은 유혹에 이끌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와 세상에서 알려지고 자기 마음도 뿌듯해질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나 그런 일을 부추기며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자들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자들에게는 하늘에서 받을 상이 없다는 주님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입니다(마 6:1-8).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많은 숨겨진 이름들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관련된 ‘한 사람’의 이야기들은 지금도 하늘 책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하늘의 별처럼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구나 볼 수 있도록 빛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산 자들의 명성은 바람에 날리는 재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자기 이름을 숨기는 자들의 겸비와 경건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진행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성도들에게 후히 갚아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스토리 텔러(story-teller)이십니다. 우리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스토리가 되기 위해서 날마다 지어져 가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영예와 그분의 복음을 위해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일이 이름 모를 ‘한 사람’의 이야기로 엮어집니다. 그리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내려올 때 이름 없던 그 ‘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스토리로 들려질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의 숨겨진 희생과 선행을 주님 자신의 스토리로 만드시고 갱신된 온 세상 앞에서 들려주시는 경이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감추어진 스토리가 하나님의 공개된 스토리로 알려질 될 때까지 꾸준히 선을 행하십시오. 그때가 되기 전에 하나님의 원고를 사람의 손으로 편집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최고의 스토리 텔러이십니다.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 자신의 지혜와 뜻대로 진행되게 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스토리를 불리거나 각색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미리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스토리를 개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스토리를 내밀한 부분까지 세밀하게 평가하시도록 방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을 위해 도울 일이 있다면 우리들의 선행과 충성과 신실의 삶을 자료로 공급해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의 스토리들을 편집하여 ‘한 사람’의 이야기가 되도록 겸비와 충성으로 주를 섬기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story-teller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스토리를 자신의 스토리로 훌륭하게 엮으시도록 인간적인 지혜나 편법이나 그릇된 관습이나 이기적인 동기로 간섭하지 마십시오. 미리 상을 받는 일을 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고가 완성될 때까지 믿음과 인내로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의 원고를 내가 미리 책으로 엮고 광고를 하거나 사람들 앞에서 나팔을 불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모든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스토리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까? 하늘의 story-teller 가 즐겁게 사용할 수 있는 이야기로 자신의 삶을 엮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스토리를 기록하시면서 날마다 안타까워하시고 불편해 하시지는 않을까요? 혹은 주를 위해 사는 삶이 너무 힘들다고 느끼지는 않습니까? 오늘날의 교회 현실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은 의인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도 남습니다. 의로운 롯의 심령으로 사는 일이 때때로 낙심과 좌절을 불러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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