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왈드 챔버스(Oswald Chambers 1)
(1874-1917)
여러 해 전에 본인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 (My Utmost for His highest)를 번역하였다(기독교 문서선교회 출간). 당시 한국에 나와 있던 OMF 선교사의 추천과 영국의 오스왈드 챔버스 협회로부터 판권 허락을 받아 번역했었다. 나중에 본인의 책 제목까지 표절한 유사 번역본들이 나왔는데 주로 미국의 편집본을 옮긴 것이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은 365일로 편집된 헌신용 책자였는데 너무도 내용이 깊고 문장이 농축되어 번역하는데 꼬박 1년이 걸렸다. 사실 제목을 번역하느라고 사흘 동안 궁리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성서유니온 선교회에서 출간된 도널드 거스리(Donald Guthrie)의 신약 신학도 필자가 번역했는데 1년이 걸렸다. 그러나 이 책은 1천 쪽이 넘는 분량이다. 이에 비하면 챔버스의 책은 역자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 긴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 매우 두려운 책이었다.
필자는 ‘주님은 나의 최고봉’을 옮길 때 번역 자체보다는 그 말씀을 생각하느라고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챔버스의 말에는 전통적인 개념으로 생각할 수 없는 역설이 많았고 체험의 부족으로 역자가 잘 헤아릴 수 없는 영적 진리가 적지 않았다. 그의 문장은 너무도 세련되었고 시적이며 신비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심오한 철학적 단상과 같은 격언들이 영적 세계의 깊은 구석들을 조명 시켜 주었다.
영국에 살면서 필자는 꾀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고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그런데 그들은 거의 빠짐없이 오스왈드 챔버스의 글을 언급하였다. 머리 맥체인(Murray McCheyne)의 말처럼 사람들은 열적 비밀을 온전히 익히 소수의 인물들에게로 거듭하여 돌아가기 때문이다. 쳄버스의 이름은 여러 기독교 저자들의 책에서 자주 나타났고 그의 이름으로 소개되는 책들도 50여 권에 이르렀다. 그런데 필자가 미국에 와 보니 오스왈드 챔버스의 My Utmost for His Highest가 기독교 출판 광고지에 늘 등장하고 서점에 가면 챔버스의 다른 책들도 쉽게 눈에 띄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은 근 1세기 동안 기독교 고전 헌신용 책자로서 가장 많이 애독되고 있다. 이 사실 하나만 해도 챔버스가 지금까지 교회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회에는 필자가 이 책을 번역했을 당시에는 전혀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불과 43세의 나이로 소천했음에도 그가 남긴 메시지들은 그가 산 평생의 연한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독자들의 영혼에 깊은 깨달음을 전달해 준다. 그런데 오스왈드 챔버스의 생애에 대한 전기나 참고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본 서에서 인용된 글들은 주로 오스왈드 챔버스 부인이 출간한 전기인 Oswald Chambers: His life and work 와 David MaCasland가 쓴 'Abandoned to God'에서 따온 것이다. 기타 자료들은 출처를 밝히기에는 너무 단편적이어서 생략하였다.
스펄전과 챔버스 가족
오스왈드 챔버스의 양친은 모두 스펄전 목사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였다. 부친인 클라렌스 챔버스는 스코틀랜드 사람이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스펄전 목사의 집례로 침례를 받고 목회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원래 이발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스펄전이 가르치는 목회자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스펄전 목사의 안수로 침례교회 목사가 되었다.
한편 오스왈드는 스펄전 목사의 설교를 부친과 함께 듣고는 교인이 되었다. 오스왈드는 귀가하는 길에서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오늘 교회에서 저에게 기회만 주어졌더라면 저 자신을 주께 드렸을 거예요.」
부인이 이 말을 받아서 말하였다.
「오스왈드야 넌 지금 당장 그렇게 할 수 있어.」
이렇게 하여 오스왈드 챔버스는 귀가하는 길에서 자신을 주님께 헌신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첫걸음을 떼어놓았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1874년 7월 24일 스코틀랜드의 아버딘(Aberdeen)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의 세 번째 목회지인 스코틀랜드의 퍼스(Perth)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퍼스 시는 족 녹스(John Knox)의 종교 개혁과 관계가 있는 곳이었고 테이(Tay) 강이 시내 중심으로 맑게 흐르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필자는 1970년도 초에 오스왈드 챔버스의 부친이 목회했던 퍼스 침례교회에 가서 간증한 일이 있었다. 챔버스의 가족들이 살았던 집은 테이 강변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이었고 아이들이 자유롭게 놀 수 있는 사우스 인치(South Inch)로 알려진 공원까지 걸어서 약 10분 정도였다. 그리고 주위에 넓고 미려한 언덕들이 있어서 아이들의 활동에는 이상적인 환경이었다.
오스왈드는 어릴 적부터 예능 과목에 뛰어난 소질이 있었다. 그는 그림, 노래, 문학, 언어에 비상한 관심이 있었고 교회에서 오르간과 피아노 반주를 하였다. 그래서 그는 미술 대학에 입학하기를 원했으나 부친의 반대로 한동안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친의 반대 이유는 종교적인 면에서는 누드를 그려야 한다는 것이었고, 실제적인 면에서는 예술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지만 밥벌이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스왈드는 예술은 사치가 아니고 꼭 필요한 것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로서 고달픈 인생살이를 견디게 해준다고 주장하였다. 오스왈드는 마침내 부친의 허락을 받고 런던의 왕립 예술대학(The Royal College of Art)에 입학하였다. 그는 예술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하고 졸업 후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대학 예술과에 다시 등록하였다. 에딘버러는 그 당시 수많은 예술인들이 모여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던 곳이었다. 그런데 오스왈드가 런던에서 에딘버러로 옮겨 오는 일은 그에게 두 가지 면에서 커다란 사건이었다. 하나는 그가 사랑하는 고국으로 (*스코틀랜드 인들은 같은 영국이라도 남쪽의 잉글랜드를 자기 나라로 생각하지 않는다.) 돌아오는 감격이었고, 다른 하나는 런던에서 사귄 여자 친구를 두고 떠나는 일이었다. 그는 6년간의 런던 생활을 청산하고 에딘버러를 향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스코틀랜드여 만세! 내 영혼이 얼마나 너를 그리워하였는가! 너를 생각할 적마다 내 가슴은 뛰어오른다. 나의 사랑하는 아름다운 스코틀랜드여! 오, 스코틀랜드여, 나는 곧 너의 언덕들과 계곡과 숲속에 있게 될 것이다. 너는 내게 영원한 산들의 견고함과 너의 폭풍에 견디는 전나무의 힘과 너의 산수(山水)의 아름다움을 내게 안겨 줄 것이다. 그리고 너는 불루벨(Bluebell, 종 모양의 작고 파란 야생화)의 부드러움과 너의 고아한 긍지의 신실함을 내게 전해줄 것이다.”
오스왈드는 고국에 대한 기대와 기쁨에 차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첫사랑과 헤어지는 슬픔도 자리 잡고 있었다. 챔버스의 가족은 오스왈드가 15세였을 때 스코틀랜드의 퍼시 시를 떠나 런던으로 옮겨 살았다. 부친의 사역지가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오스왈드는 런던에 온 지 1년 만에 자기가 다니던 교회에서 크리시(Chrissie)라는 어느 상인의 딸과 첫사랑에 빠졌다. 오스왈드가 청년회 모임 때에 피아노를 치고 크리시가 악보를 넘겨 주면서 둘 사이에 사랑이 싹트게 된 것이었다. 이 둘은 함께 옥외 전도도 다녔고 순진하고 진실한 사귐을 가졌다. 크리시는 당시 15세였고 오스왈드는 16세였다. 오스왈드는 에딘버러에 온 이후에도 크리시와 자주 서신 연락을 하면서 오랫동안 교제하였다.
한편, 오스왈드가 에딘버러에서 기숙하게 된 어느 하숙집은 한 가지 흥미로운 인연을 안고 있었다. 오스왈드가 기숙한 집의 주소는 에딘버러 리빙스톤 스트리트 17번지였다. 그런데 바로 이 집에서 조웯(J.H. Jowett)이라는 학생이 에딘버러 대학 대학원 시절에 머물렀다. 그는 나중에 영국이 낳은 세계 최대의 설교자라는 명성을 얻은 자였다. 그는 오스왈드보다 10년 위였는데 이미 설교자로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조웯은 잉글랜드 사람이었지만 에딘버러로 올라와서 공부를 더 한 까닭은 에딘버러 대학에 훌륭한 신학자들도 있었지만, 그 당시 에딘버러의 여러 유수한 교회에서 탁월한 설교자들이 목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 활약했었던 설교자들은 예를 들면, 성경 인물 강해로 유명한 알렉산더 화이트(Alexander Whyte), 찬송 시인이며 맹인 목회자였던 조지 매터슨(George Matheson),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The greatest thing in the world)의 저자인 헨리 드럼몬드(Henry Drummond)와 같은 쟁쟁한 목회자들이었다.
오스왈드는 마침 조웯이 사용했던 방에 살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조웯이 즐겨 앉았던 의자도 그대로 있었다. 오스왈드는 마치 구약의 엘리사가 엘리야의 영감을 갑절이나 자기에게 내리게 해 달라고 간청했듯이(왕하 2:9) 헨리 조웯의 영감이 자기 위에 내리기를 기도하였다. 이 기도가 실제로 응답되었는지는 알 수 없어도 오스왈드는 그의 일기에서 자주 조웯을 언급하였다.
진로의 변화
오스왈드는 에딘버러 대학에서 미술과 고고학 부문에서 특상을 받을 만큼 뛰어난 재능과 지력을 드러내었다. 그는 철학, 심리학, 논리학 등에 심취했었고 브라우닝(Browning)과 쉘리(Shelley)의 시집을 탐독하였다. 이때 오스왈드와 크리시와의 관계도 더욱더 깊어졌고 함께 미술, 음악, 시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였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오스왈드의 영적 의식도 길어지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에딘버러 뒷산인 ‘아서의 자리’(Arthur’s Seat)라는 산정에서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나는 네가 나를 위해 봉사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나는 네가 없어도 이 일을 할 수 있다.”
오스왈드는 즉시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하숙집으로 내려와 보니 더눈 신학교(Dunoon Training College)에서 입학 원서가 와 있었다. 자신이 신청하지도 않은 원서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던컨 맥그리거(Duncan MacGregor)라는 학장이 보낸 것이었다. 오스왈드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고 에딘버러 대학을 떠났다. 이리하여 오스왈드는 예술가로서의 그의 경력은 포기하고 성경 교사로서의 새 길을 걷게 되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오스왈드는 자신이 가는 길을 내다보기라도 한 듯이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잠시 묻혀 있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감추어져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불꽃허럼 타오를 것이다. 나는 나의 일을 하고 홀연히 떠날 것이다.”
이 말은 과연 그의 생애에 대한 예언적인 발언이었다. 그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설 신학교에서 하나님의 훈련을 받은 후 약 10년 정도의 집중 사역을 하다가 43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기 때문이다.
더눈(Dunoon) 신학교
오스왈드 챔버스는 더눈 신학교로 가기 위해 에딘버러 대학을 떠났다. 그는 당대의 유수한 교수들이 열강을 하던 명문 대학을 중퇴하고 전혀 이름도 없는 사설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신학교는 ‘더눈 복음 훈련 대학’(The Gospel Training College at Dunoon)이라는 이름을 걸고 시작되었다. 말이 대학이지 사실은 던컨 맥그리거라는 한 명의 목회자가 자기 교회에서 소수의 학생을 대상으로 가르치는 곳이었다. 맥그리거 목사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서 침례 교인이었다. 그는 침례교의 교단 신학교가 순전히 학적인 접근으로 효과적인 사역자 양성을 가로막고 있다는 데 불만을 품고 더눈 신학교를 시작하였다.
오스왈드 챔버스가 이 신학교를 가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맥그리거 학장의 고매한 인격 때문이었다. 그는 “이분이 어찌나 자기 주인을 닮았는지 성령에 의해 예수님이 다시 성육하신 것 같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리고 챔버스는 자신이 맥그리거 목사님보다 더 사랑한 사람이 없다고 고백하였다. 이 이야기는 오스왈드 챔버스가 다녔던 한 작은 신학교의 일화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신학교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새삼스러운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나라에도 요즘처럼 많은 신학교가 일찍이 없었다. 수많은 신학생과 높은 학위를 가진 신학 교수들이 즐비한 시대이다. 그런데 과연 그 많은 신학생의 미래 사역을 위해 영적이고 인격적인 영향을 주는 교수들은 얼마나 될까? 교수는 많아도 스승이 적고, 스승은 많아도 아버지는 적은 상황이 아닌가 한다(고전 4:15). 스승이면서 아버지와 같은 영향을 주는 교수 밑에서 영적 훈련을 받는 것은 훌륭한 영적 역군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크게 높여 준다. 단 한 명의 교수가 가르치는 사설 신학교에서 오스왈드 챔버스와 같은 대 인물이 나왔다는 사실은 어쩌면 예외적인 일로 여겨질는지 모른다. 그러나 온갖 시설과 높은 학적 수준을 갖춘 신학교에서 별다른 인물들을 배출하지 못한다면 무엇인가 크게 결핍된 부분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학문의 수준이나 시설 자체의 중요성보다 사람에게 있다. 사람은 사람에게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맥그리거 목사가 사망했을 때 마치 친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듯한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후일 맥그리러 목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자신과 다른 동역자들이 세운 또 다른 신학교에서 많은 하나님의 일꾼들을 길러내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더눈 신학교에서 학생으로 있을 때부터 맥그리거 목사를 돕기 위해 자신이 에딘버러 대학에서 수학했던 철학과 심리학을 강의하였다. 그는 강사료를 받지 않았지만 언제나 심혈을 기울여 열강하였고 1897-1901년 사이에는 더눈 헤랄드 일간지에 시, 음악, 자연에 관한 글들을 정기적으로 기도하였다.
챔버스와 독서
오스왈드 챔버스의 글을 읽으면 그의 문장력이 탁월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것은 그의 독서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는 전문 서적 이외에도 문학서들을 꾀 많이 읽었다. 그는 알렉산더 화이트 목사와 헨리 조웯의 강해서를 숙독하였고 제임스 데니(James Denney)의 신학서를 탐독한 반면, 발자크의 소설이나 입센의 희곡을 좋아하였다. 그는 특히 브라우닝의 시에 심취했었고 브라우닝 협회를 세울 정도였다. 챔버스 자신도 시작(詩作)에 능하였는데 60편이 넘는 그의 시들이 최근에 출간되었다. 그는 1897년 6월 23일, 런던에 있는 여자 친구 크리시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브라우닝과 쉘리의 전집을 구입하였소. 내가 어떤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 준 덕분이라오. 이 시집들은 내 보물이라오.”
챔버스는 시로써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를 사랑하였다. 그가 미국에서 집회할 때에 자기 여동생에게 쓴 편지를 보면 얼마나 책을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내 책 상자가 드디어 도착했다. 오, 나의 책들! 내 책들이 내게 얼마나 큰 의미를 주는지를 나는 다 말할 수 없다. 그것들은 조용하고 풍성하며 충성된 연인들이다. 그것들을 바라보고, 손으로 만지며, 다시 읽는 기쁨은 비할 데 없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내 책들로 인해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로 감사한다.
내가 다시 내 책들을 손에 잡게 됐을 때 나는 너무도 기뻐서 거의 울음을 터뜨릴 뻔했었다. 나는 이제 나의 사랑하는 책들을 내 눈앞에서 놓고 바라본다. 플라톤, 워즈워드, 메이어서, 브로드리, 할리버튼, 어거스틴, 브라우닝, 테니슨, 아마엘….나는 이들을 너무도 잘 안다. 나는 내가 이 책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보았으면 좋겠다. 그들의 그 잔잔하고 친숙한 눈길을!”
챔버스는 세속 문학을 성경적 진리에 잘 연결해 효과적으로 원용(援用)하는 은사가 있었다. 그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사고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고의 기반으로 넓은 독서를 권장하였다. 그는 성경만 읽는다는 어느 학생이 상담을 하자 기독교 문서 이외의 다른 책들을 약 50권이나 소개해 주며 이렇게 말하였다. “성경만 읽는 자는 대체로 성경도 인생도 알지 못한다. 성경의 장엄성은 여러 다른 종류의 책들 속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자신이 철학과 심리학을 공부한 것을 한때 낭비였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그러한 정신적 훈련이 하나님의 사역에 매우 가치 있는 일이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일기에서 늘 읽고 있는 책들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가 항상 독서를 했다는 증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