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중에는 상이라고 하면 거의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이 있습니다. 다음은 Bruce Wilkinson이 쓴 A Life God Rewards 라는 책을 읽고 어떤 독자가 보낸 코멘트입니다.
“나는 상보다는 경주에 초점을 두겠다. 나는 항상 영원한 이득에 대해서 생각하는 크리스천이 되기 보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마음을 쏟는 제자가 되고 싶다. 성경은 ‘상’에 대해서 많이 언급한다. 그러나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그 이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경주에 우리의 (성숙한) 마음을 집중하도록 의도하셨다. 나는 백 미터 올림픽 경기에서 상에 초점을 두는 (성숙한) 육상선수를 만나본 적이 없다. 프로의 레벨에서 상은 생각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백 미터는 9.9초 이내에 끝난다. 우리들의 삶도 하나님의 영원한 시계로 재어보면 그처럼 짧다. 경주에 집중하라. 나의 사랑과 기쁨은 주님의 ‘선물’이 아닌 주님의 임재 속에 있을 것이다.
나는 크리스마스 때에 부모님의 집에 가는데 그것은 나의 사랑을 부모님과 나누고 그들 앞에 있기 위해서이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과 만군 천사들 앞에서 당당하게 “나의 유산을 주십시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의 상을 청구하게 하라.”
이것은 상보다 경주 자체에 집중하며, 선물보다 선물을 주시는 분과 함께 있는 기쁨을 목표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은 매우 고상하고 영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상을 바라지 않는 것이 반드시 더 고상하거나 더 영적인 것은 아닙니다. “프로의 레벨에서 상은 생각에 들어오지도 않는다.”고 했지만 이것은 비현실적인 말입니다. 상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달리는 선수가 프로급이라면 그런 프로는 자기가 만든 수준의 루울 안에서 혼자 달리는 선수입니다. 혼자 만든 루울로 달리는 선수는 결코 프로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경주에는 상을 주는 것을 원칙으로 삼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내가 스스로 루울이나 표준을 세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세워주신 루울과 표준을 바라보고 달리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믿음과 인내와 근면함으로써 유업의 상을 받도록 의도하셨습니다(히 6:12).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보다 더 나은 길이 있다고 판단하거나 하나님이 주기를 기뻐하시는 약속의 상들을 제쳐놓아야 한다는 것은 게임을 주관하시는 분의 선한 의도를 무시하는 일입니다. 주께서 상을 주시려고 할 때에 “저는 그 상을 원치 않습니다. 주님을 보는 것으로 족합니다” 라고 말한다고 더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사랑과 기쁨으로 준비하신 약속의 상을 받고 감사하며 즐거워할 줄 아는 것이 주께서 원하시는 우리들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서 삽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해야 합니다. 상의 추구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을 받기 위해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고 그 약속의 성취가 있을 때까지 인내하며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적극적이고 신실한 자세를 기뻐하십니다.
주님이 주시겠다는 것을 마다하고 내 생각으로 더 나은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택하는 것은 하나님을 내 방식으로 섬기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상을 약속하신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자주 언급된 상에 대한 약속은 구체적인 것입니다. 그냥 빈 말로 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우리들이 추구하고 받아야 할 선물이며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에 반복해서 언급되었습니다.
예로써 예수님이 산상 설교에서 상을 언급하신 것이 그냥 무시해도 좋거나 아니면 무시해 버려야 하는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상을 약속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필요한 것을 왜 약속하시겠습니까? 없어도 좋을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그것을 위해 온유해야 하고 복음과 주님을 위해 박해를 참아야 한단 말입니까? (마 5:5, 11-12). 만약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은밀하게 구제하겠습니까? 드러내 놓고 구제하여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칭송을 받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께서 나의 은밀한 선행과 기도를 보시고 갚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마 6:3-4, 6).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손해를 당하여도 참고 주의 뜻대로 살도록 동기부여를 하십니다. 상은 곧 하나님이 은혜의 방편으로 사용하시는 동기부여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시고 나의 선행을 주의 뜻대로 갚아 주신다는 약속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 사람의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섭섭하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와 후한 위로를 의지하며 살게 합니다.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상이라면 그런 상을 바라고 사는 것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것은 비영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영적 생활의 건강한 측면입니다.
다음의 글은 필자가 쓴 ‘슬픔이 변하여 춤으로’라는 룻기 강해서에서 상에 대한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유업의 주제를 쉽게 파악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는 처음부터 신학적인 접근을 하기 보다 성경 본문 자체를 먼저 살피는 것입니다.
선행과 보상(룻기 2:12)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룻2:12)
1) ‘주 날개 밑’은 어떤 곳입니까?
보아스는 룻에게 여호와의 날개 아래에서 온전한 상을 받기를 원한다고 기원하였습니다. “주 날개 밑” 이란 안전, 소망, 도움, 휴식, 평안, 회복 등과 관련된 이미지입니다(참조. 신 32:11이하; 시 17:8; 27:5; 36:7; 57:1; 시 63:7).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새가 자기 새끼들 위에 날개를 펴는 것에 비교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속절 없는 룻이 여호와께서 날개를 펼치고 계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로 왔으니까 보호와 안전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시 17:8; 36:7; 마 23:37).
룻을 위한 보아스의 이 같은 기원은 룻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룻에게는 무엇보다도 타국에서 안전하게 사는 일이 중요하였습니다. 그녀에게는 날마다의 삶을 이어나갈 소망과 보호가 필요하였고 한 많은 고통의 세월로부터 쉼과 회복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런 필요들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들어가서 받는 은혜들이었습니다.
2) 룻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괜찮다면서 사양했습니까? 혹은 그냥 피동적으로 그러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까? 아니면 그냥 인사 치례의 말로 흘려 듣고 말았습니까? 룻은 매우 적극적으로 나왔습니다.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룻 2:13).
룻은 이어서 보아스에게 자신의 축복을 기원하는 말을 듣고 마음이 기쁘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이것은 룻이 보아스의 친절에 크게 감사하고 감격한다는 의미였습니다. 룻은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자였습니다. 룻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서 받을 수 있는 축복들을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한다”(룻 2:12)고 했을 때 룻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보답을 받고 싶어하였습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것도 아니고 타산적인 기대도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의 선행을 갚아 주신다거나 보상해 주신다고 말하면, 마치 하나님을 빚진 자로 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빚을 지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어떤 선행을 했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선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자랑할 것도 없고 보상을 청구할 권리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명령한 것을 하였다고 해서 특별히 대우를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눅 17:9). 종들은 주인에게 충성을 다한 후에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해야 합니다(눅 17:10). 제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종들로서의 의무감을 가져야 마땅합니다(눅 17:7-10). 종들은 주인이 쉴 때에도 일하는 자들입니다. 일을 다 마쳐도 주인이 별다른 칭찬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땅히 할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말미암아 무서운 죄의 속박에서 구출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원해서 섬기는 종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들에 대해서 교만해지거나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혜택을 입어야 할 권리라도 있는 듯이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무익한 종”(눅 17:10)이라고 생각하면서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스스로를 ‘무익한 종’이라고 여기면 주인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지겠습니까? 자신은 전적으로 주인의 자비와 은혜로 산다고 여길 것입니다. 룻이 보아스의 축원을 받고 즉시 보인 자세는 자신을 ‘무익한 종’으로 본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보아스를 향해 자기는 보아스의 하녀들보다도 못한 여종이라고 말하였습니다(2:13). 그리고 그녀는 주저 없이 보아스를 통해 여호와의 날개 밑에서 은혜 받기를 원한다고 자원하였습니다.
이것은 전혀 이기적인 보상의 추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급해 하는 것은 선행을 보답하시고 상 주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속성을 믿고 의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품성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지 상업적인 거래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진실로 선행을 갚아 주십니다. 하나님은 충성된 자들을 칭찬하시고 상을 주시는 분입니다(계 22:12). 하나님은 자신들을 ‘무익한 종들’로 보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며 의지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룻은 이러한 여호와의 축복을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 들어온 자가 하나님께서 기꺼이 주시려는 보답과 상을 받지 않으려는 것은 모순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한다”는 말 뒤에는 여호와가 백성의 행위에 따라 갚아 주신다는 사상이 깔려 있습니다(렘 25:14; 시 28:4; 욥 34:11; 잠 24:12). 그리고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한다”(룻 2:12)는 기도 뒤에는 룻이 시모에게 행한 선행에 대해서 여호와가 마치 빚을 진 자처럼 자신의 장부를 청산해 달라는 간구였습니다.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 2:12)는 말도 ‘임금’, 혹은 ‘품삯’을 뜻합니다(비교. 창 29:15; 31:7,41). 잠언에서도 같은 사상을 읽을 수 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잠 19:17).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채무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님을 위해서 행하는 모든 선행에 대해서 마치 자신이 빚을 진 자처럼 보시고 이를 후히 갚아 주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들과의 관계는 엄한 주인과 비굴한 노예의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 아버지를 섬기는 귀한 신분의 종들입니다. 십자가로 구속된 우리들이기에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늘 아버지를 섬깁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세상의 노예처럼 다루지 않고 사랑하는 자식으로 대하십니다. 이것이 언약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언약의 사랑에는 우리들을 위한 하나님의 부성적 배려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녀들을 칭찬하고 상을 주는 것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자녀들이 마땅히 행한 일들을 눈여겨 보시고 격려하십니다. 그것이 상이며 칭찬이며 갚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녀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측면입니다.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는 것은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려는 자식의 효성입니다. 룻은 자신을 ‘무익한 종’으로 보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복받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동일한 자세로 하나님의 은혜 입기를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의 날개 아래에서 받는 보호와 사랑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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