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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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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에피소드는 사회 밑바닥 계층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 활동에서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입증합니다(비교. 삿 16:26; 왕상 5:2-4; 5:13-14)               .

  1. 하나님께서는 큰일을 위해 종종 낮은 자들을 사용하십니다.

“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더니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만일 우리가 성읍으로 가자고 말한다면 성읍에는 굶주림이 있으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만일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면 역시 우리가 죽을 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 하고”(7:3-4)

 

엘리사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왕에게 하룻밤이 지나면 식품이 남아돌고  가격이 크게 떨어질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사마리아 도성이 포위되어  자기 자식까지 삶아 먹는 극한 상황에서 엘리사의 말은 현실에 눈을 감은 환상적 백일몽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장면이 바뀌면서 갑자기 네 명의 나병환자가 등장합니다. 나병환자들은 율법에서 부정하다고 하였고 다른 사람들이 부정을 타지 않게 하려고 자신들의 위치를 알림으로써 타인의 접근을 경계해야 했습니다”(레 13:45).

 

국가 존립의 중대 위기에서 혐오의 대상인 나병환자들이 한 명도 아니고 네 명씩 등장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너무도 뜻밖의 일입니다. 엘리사가 예고한 대로 사마리아의 성문에서 저렴한 식품이 판매되는 것과 나병환자들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사마리아 성문 어귀에는 양식이 들어오기보다 네 명의 나병환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나병환자들이었기에 자선에 의존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기근으로 날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때에 그들에게 먹을 것을 건네줄 자가 있을 리 만무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먹거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짜낸 아이디어가 차라리 아람 군에 항복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에스더 왕비의 유명한 말처럼 “죽으면 죽으리이다”(에스더 4:16)라는 각오로 아람 진영으로 향했습니다. 이들의 담대한 행동은 뜻하지 않았던 놀라운 발견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람 진으로 가려 하여 해 질 무렵에 일어나 아람 진영 끝에 이르러서 본즉 그 곳에 한 사람도 없으니”(7:5).

 

아마 아람 진영에 도착한 네 명의 나병환자들은 자기들의 눈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에 식량이 다 떨어지도록 에워싸고 있던 아람 군의 진영에 한 명의 군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진영을 그대로 두고 황급히 떠난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는 것일까요? 6절을 보십시오.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주관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7:6).

 

아람 군을 공포에 질리게 한 것은 실제로 헷 나라와 애굽 군대의 출동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귀에 대규모 외국 용병들의 진격 소리가 들리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에 아람 부대가 이스라엘을 침입했을 때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위치를 식별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엘리사의 함정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람 군의 귀에 오지도 않은 외국 군대의 돌격 소리가 들리게 함으로써 황급한 철수를 하게 하셨습니다. 이번에도 아람 군은 활이나 칼을 전혀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철수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적군들의 눈과 귀를 원하시는 대로 통제하심으로써 그들의 진영을 풍비박산이 나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무기를 믿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신체 기능을 한 순간에 마비시키거나 교란하고  전쟁 무기를 무용지물이 되게 하십니다. 아무리 신무기가 있어도 이를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이 공포에 질리면 다 버리고 도망치게 됩니다.

 

엘리사 선지자에게 24시간 이내에 기근이 끝나고 식량이 넘칠 것이라고 예고하신 것은 아무도 믿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눈과 귀를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눈과 귀가 하나님의 목적 성취를 위해 착각을 일으키게 하심으로써 넘치는 식량이 공급되게 하셨습니다. 아람군의 귀에 들린 “병거 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7:6)는 그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고 모든 물자를 고스란히 남겨 둔 채 급히 퇴각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절묘하게 모든 이벤트를 주관하시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다음 두 구절들을 살펴보십시오.

“아람 진으로 가려 하여 해 질 무렵에 일어나 아람 진영 끝에 이르러서 본즉 그 곳에 한 사람도 없으니”(7:5)

 

해 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7:7)

 

네 명의 나병환자들이 언제 일어나 아람 진영으로 갔습니까? “해 질 무렵”(5절)이었습니다. 아람 군들이 언제 일어나 도망쳤습니까? “해 질 무렵”(7절)이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이 아람 진영으로 가려고 일어났을 때는 아람 군인들이 도망을 치려고 일어난 때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한 편에서는 출발하기 시작하였고 다른 편에서는 떠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네 명의 나병환자들이 아람 진영에 왔을 때는 한 명의 적군도 남아 있지 않고 완전히 퇴각한 후였습니다. 만약 나병 환자들이 ‘해 질 무렵’이 아니고 좀 더 이른 오후에라도 출발했다면 아람 군의 손에 붙잡혔을 것입니다. 또한 아람 군이 ‘해 질 무렵’보다 좀 더 늦게 떠났더라도 분명 나병환자들이 사로잡혔을 것이고 그들을 통해 사마리아의 절박한 상황에 대한 정보가 노출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왕이 항복 직전이라는 사실을 아람 군이 알았더라면 전황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양편에서 ‘해 질 무렵’에 정확하게 떠났기에 완벽한 시나리오가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의 타이밍은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상황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눈과 귀에 불가능하게 보여도 모든 이론과 예상을 뒤엎고 말씀하신 대로 목적을 성취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주 인간들의 생각과 가치관을 넘어 활동하십니다. 나병환자들을 통해서 엘리사에게 주셨던 구출 계획이 사마리아 수도에 알려질 것을 누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병환자들은 본능적으로 방치된 장막을 다니면서 실컷 먹고 마시고 은금과 의복 등을 꺼내 감추었습니다. 만약 이들이 여기서 그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마리아의 주민들은 계속 굶어 죽었을 것이고 엘리사가 요람 왕에게 전한 구출 메시지는 성취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요람 왕은 분명 엘리사를 속였다고 해서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에 조금도 오차가 없게 하셨습니다. 아람 군인들의 마음을 공포에 질리게 하셨던 하나님은 나병환자들의 마음에 형벌의 두려움이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7:9)

 

하나님께서 나병환자들의 마음을 움직이셨기에 사마리아에 이 경이로운 좋은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이루십니다. 그런데 종종 하나님께서는 낮고 천한 자들을 사용하여 구속의 드라마에 결정적인 역할을 맡게 하십니다.

  1. 가장 천한 사람들도 구원의 드라마에서 영웅으로 등장합니다.

나병환자에 대한 율법의 규정을 보면 매우 가혹한 듯합니다(레 13:45-46).

 

나병 자체가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병은 당시에 가장 혐오스러운 병이었기에 부정한 것을 예시하는 하나의 실물 교재였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언약 백성들에게 깨끗하고 부정한 것을 구별시키는 일은 다분히 인위적이지만 교육적인 차원에서 나온 아이디어였습니다. 예를 들어 비늘이 없다는 이유에서 오징어가 특별히 나쁜 음식이 아니며 돼지고기가 소고기보다 더 부정한 음식도  아닙니다. 나병 환자라고 해서 건강한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더 부정한 사람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나병은 현대 의학으로는 쉽게 고칠 수 있는 병이지만 당시에는 불치병이었습니다.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부정하다 부정하다’ 하고 외쳐야 했습니다. 나병환자는 격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혼자 지내면서 진영 밖에서 살아야했습니다.

 

이것은 율법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쳐야 했던 구약 시대의 한 임시 조치였습니다. 새 언약 시대에는 물론 이러한 정결법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고 폐기되었습니다. 지금은 나병보다 더 무서운 질병들도 있습니다. 치유할 수 없는 암들도 있고 에이즈 환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는 나병이 불치병이었고 의식적으로 부정한 병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나병에 걸리면 사회적으로 경원시되고 고립되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언약 백성의 진영에 들어올 수 없었기에 아무도 그들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무가치하고 혐오스러운 존재로 보셨을까요?

 

네 명의 나병환자들이 국가의 중대 위기에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들의 존재는 누구나 싫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귀히 여기셨습니다. 비록 그들이 성문 어귀에서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삶에 선한 계획을 세우고 계셨습니다. 본 스토리 전체에서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이스라엘의 왕을 비롯하여 장관과   신하 그리고 엘리사와 장로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정상적인 사람들입니다. 아무도 이들을 보고 피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천대와 소외를 당하는  나병환자들이 무대에 등장하면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이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던 아람 진영의 소식을 알렸습니다. 이보다 더 기쁘고 좋은 소식은 없었습니다. 죽어가는 백성에게 생명을 가져오는 희소식이었습니다. 그들의 덕분으로 사마리아의 식량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고 죽음의 문 앞에서 모두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중요하고 명예로운 일을 네 명의 나병환자에게 맡기셨을 줄을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습니까? 평소에는 없어도 좋은 사람들로 여겼던 나병환자들이 한순간에 구국 공신(功臣)이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도성을 굶주림으로부터 구출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은 이스라엘의 왕도 아니고 심지어 엘리사 선지자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영예를 무시와 고독과 천대 속에서 살아야 했던 네 명의 나병환자들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그들은 난생처음으로 대환영을 받았고 삶의 보람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에서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시 75:1; 77:14; 78:12, 32). 모세나 여호수아와 같은 인물들도 사용하시지만 나병환자들까지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일들을, 전혀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던 사람들을 통해서 어느 날 갑자기 이루시고 우리들의 편견과 잘못된 가치관을 무너뜨리십니다.

 

우리가 본 스토리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종종 생각지 않은 곳의 사람들을 사용하여 자기 백성을 구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출생 소식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이나 신학자들이 아닌 베들레헴의 가난한 목자들에게 먼저 전해졌습니다. 역사적으로 부흥의 불길이 치솟았던 곳은 세상에 잘 알려진 곳이 아니었고 부흥의 주역을 맡은 분들도 대체로 유명 목회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시당하는 보통 사람들을 사용하기를 즐기십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도 당시에 인정을 받지 못하던 평범한 여제자들을 통해서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특권과 영예를 예루살렘의 왕족들이나 성전 지도자들에게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부활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네 명의 나병환자들은 사마리아 백성을 기아선상에서 구출하는 일생 최대의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일생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최대의 호의호식을 하였고 최대의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공로가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영예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의 이름은 본 스토리에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 덕분에 왕이 살고 도성이 건짐을 받았습니다. 극도의 굶주림으로부터 백성이 구출되었습니다. 자신이 낳은 자식을 삶아 먹는 참극이 중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온 나라에 알려졌습니다. 그럼 다 되지 않았습니까? 내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것이 무슨 상관이 되겠습니까? 주의 일을 했으면 주께 감사하고 자신은 숨겨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사용하여 선한 일을 하게 하셨는데 내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섭섭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고 사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가슴 속에 담겨 있습니다. 지상에 새겨진 이름은 때가 되면 지워지지만 하늘에 기록된 이름들은 영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를 위한 우리들의 희생과 선행을 잊지 않고 갚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리라”(히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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