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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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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만든 떡 곧 보리 떡 이십 개와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42절)

앞의 스토리에서는 흉년 때에 들호박으로 끓인 국의 독이 밀가루로 해독되어 죽음의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는 예시임과 동시에 하나님이 세상의 갖가지 죄와 죽음의 독성을 해독시키는 분임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본 스토리의 강조점도 비슷합니다. 기근 때에 하나님이 ‘한 사람’을 통해 제공하신 보리 떡과 채소는 영적 기근의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하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예시합니다.

  1. 흉년 때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선한 일에 신실합니다.

물질이 부족할 때에는 인심이 박하기 마련입니다. 있어도 없다고 하고 주어도 극히 인색합니다. 그런데 바알 살리사라는 곳에서 어떤 사람이  양식을 가지고 길갈의 선지자 학교를 찾아 왔습니다. 양식의 품목은 보리 떡 이십 개와 자루에 담은 햇곡식입니다. 개역 성경에는 “자루에 담은 채소”(42절)라고 했는데 새번역에서처럼 ‘햇 곡식’(new grain=NIV)으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흉년 때에 한 평범한 개인이 준비한 양식이기에 매우 후한 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선물은 ‘처음 만든 떡'(42절)이기 때문에 더욱 귀합니다. 첫 수확으로 거둔 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이었습니다(레 23:9-21; 신 18:4-5). 이 선물은 엘리사 선지자의 사역을 하나님의 참된 사역으로 인정하고 감사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엘리사는 흉년임에도 불구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하는 제자들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회복을 위해 그들을 훈련하는 사역은 격려를 받아야 할 귀한 사역이었습니다. 만약 이 선물을 가져온 사람이 자신만 생각했다면 구태여 멀리 엘리사 선지자의 학교로 찾아올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원래 첫 수확에서 거둔 열매는 제사장들에게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벧엘이나 단에 있는 성소에서 섬기는 배도한 제사장들에게 바치지 않고 엘리사에게 바쳤습니다. 하나님의 참 백성은  복음을 위해 거짓과 대항하며 수고하는 사역자들을 후원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부패한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을 섬기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엘리사와 그의 제자들을 후원하는 것을 마땅한 일로 여겼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의 부패한 제사장들처럼 쉬운 밥을 먹는 사역자들이 있는가 하면, 역경 속에서 힘들게 살며 복음의 진리를 신실하게 외치는 가난한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바알 살리사의 사람들에 의해서 격려를 받고 후원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면서 실제적으로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최근에 한 여성도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부친이 시골에서 목회하셨는데 생활이 무척 쪼들렸습니다. 한 번은 모친이 쌀을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는데 딱 한 되를 사오게 하였답니다. 한 부대도 아니고 몇 킬로도 아닌 한 되였습니다. 과거에는 쌀을 되로 담아서 팔았는데 한 되만 사는 것은 가족의 하루 식량도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가난한 살림이었는데 어느 날 문 앞에 누가 쌀 한 부대와 고등어 몇 마리를 놓고 갔습니다. 그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답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은 그 일 이후로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진실한 성도들을 여기저기 숨겨 두시고 적기에 나타나게 하십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공급과 격려를 전달하는 은혜의 통로들로 쓰임을 받습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거리를 운반하는 은혜의 통로가 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복을 주의 일꾼들에게 실어 나르는 것은 매우 귀한 일에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숨겨 두신 공급자가 있습니다.

선지자 학교에 식량을 가져온 사람은 ‘바알 살리사’라는 곳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이곳은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데 아무도 그렇게 먼 곳에서 길갈까지 식량을 들고 올 줄은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숨겨 두시고 필요한 때에 적절하고 요긴하게 사용하십니다. 이 사람은 분명 하나님께서 이세벨의 박해 시기에 숨겨 두었던 7천 명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조용히 나타났다가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되어 자선을 하고 자신의 일터로 돌아갔습니다. 교회사는 이 같은 예상치 못한 하나님의 자비의 심부름꾼들로 가득합니다. 우리들도 일상사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심부름꾼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대체로 유명하지도 않고 그다지 부유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일에 더 진지하게 충성합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가 궁핍과 시련 가운데서 후한 헌금을 한 것을 특기하였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2).

 

하나님께서는 엘리사 선지자의 학교가 독 호박 사건으로 문을 닫게 되는 것을 막아 주셨고,  흉년으로 굶주리는 제자들에게 뜻하지 않던 곳으로부터 양식을 공급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숨겨 두신 ‘바알 살리사’의 사람들은 우리들의 필요를 채우기에 넉넉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내 집 문 앞에 나타나기 전에는 그들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적기에 우리들을 돕기 위해서 숨겨 두신 ‘바알 살리사’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1.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은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모든 선물은 나누어 가져야 더 큰 은혜가 됩니다. 엘리사는 예물로 들어온 첫 수확의 양식을 자기는 손도 대지 아니하고 공동체를 위해 나누라고 시종에게 지시하였습니다. 우리들이 가진 물질과 은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되도록 의도되었습니다. 누구도 자신만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혼자 움켜쥐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복은 흘러가야 합니다. 흐르지 않는 복은 고인 물처럼 이기심과 탐욕의 수렁에 빠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내 손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청지기 직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을 주실 때는 믿음의 가족들과 복음 사역을 위해서 선용할 책임을 맡기신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우리 각자의 청지기 직을 평가하실 것입니다. 그때 ‘잘하였도다’라는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나눔의 정신과 실천이 없는 자들은 평생을 소유욕에 붙잡혀 믿음의 형제자매에게 무관심하고 인색한 삶을 삽니다. 더 나쁜 것은 믿음 생활에서 멀어지고 점점 더 세속적인 물욕에 빠져 회복하기 어려운 영적 손상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요이 2:28).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1. 최선의 희생은 최대의 효과를 냅니다.

바알 살리사에서 온 농부는 자신의 최선의 예물을 엘리사에게 드렸습니다. 엘리사는 이를 모두 제자들에게 분배하라고 시종에게 분부하였습니다. 엘리사의 시종은 매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사환이 이르되 내가 어찌 이것을 백 명에게 주겠나이까”(43절). 엘리사는 사환의 부정적인 반응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언급하며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43절)고 재차 지시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시종이 순종하였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44절)고 했습니다. 우리는 본 에피소드에서도 적지 않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분량이 적어도 나누어 주고 주께서 불려 줄 것을 기대하십시오.

 

바알 살리사의 농부가 준비한 양식은 선지자 학교의 공동체를 먹이기에는 많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나 양식을 나누어 주기 시작했을 때 부족은 채워지고 오히려 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풍성히 누리려면 아낌없이 사용해야 합니다. 부요하게 되는 길은 내 손의 물질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풀어놓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유는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할 때에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불어납니다. 증식의 원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후하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바알 살리사 농부는 자신의 예물을 엘리사 앞에 놓고 갔고, 엘리사는 그 선물을 시종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시종은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습니다.

 

우리는 계산에 너무 묶여 사는지 모릅니다. 보리 떡 이십 개면 이십 명만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엘리사의 시종은 자신의 불신과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자신을 스스로 가두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능력을 갖추신 분인지를 헤아리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계산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 우리 자신의 미미한 능력에 매이면 패배를 자초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각하거나 구하는 것 이상으로 채우실 수 있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엡 3:20). 엘리사의 시종이 가졌던 문제는 보리 떡의 분량이 적어서가 아니라 그 보리 떡의 분량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는 믿음의 눈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들의 계산 방법에 묶이지 않습니다. 이십 개의 빵은 백 명을 먹이고도 남는 분량으로 늘어났습니다. 이 교훈을 가장 잘 실천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동쪽에서 많은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빌립의 믿음을 테스트하기 위해 어디서 무리를 위한 음식을 구하겠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 대답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계산에 의하면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있어도 부족하였습니다. 그도 엘리사의 시종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자였습니다. 안드레도 한 소년의 오병이어를 예수께 언급했지만, 그것이 수많은 무리의 양식이 될 수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이것은 엘리사의 시종이 보인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반응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과 보리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아서 열두 바구니에 가득 채울 수 있는 양식이 되게 하셨습니다(요 6:5-13).

 

하나님의 능력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님께 바치는 헌신의 예물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최선이 담긴 물질과 은사와 시간과 봉사와 선행을 주 앞에 내려놓으면 주님은 우리의 계산 방식이 아닌 주님의 증식 원리에 따라 놀라운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주님의 증식을 기대하고 나의 최선을 바쳐 보십시오. 여러 배의 보상을 체험할 것입니다. 바알 살리사에서 양식을 가지고 온 농부가 자신의 선물이 백 명이나 되는 무리를 배불리 먹이고도 남게 되었다는 기적의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를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최선의 희생을 하는 자가 받는 하늘의 보상입니다. 이러한 보상은 커다란 동기부여를 일으킵니다. 이 농부는 더욱 열심히 농사하며 하나님께 더 바쳐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것입니다. 그는 분명 평생을 더욱 드리는 삶으로 계속 살았을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최선의 희생은 최소의 분량에서도 최대의 효과를 냅니다.

 

(2) 작은 것의 가치가  감동을 줍니다.

 

우리는 흔히 나의 작은 것이 하나님에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싶어 움츠러듭니다. 부자거나 큰 은사가 있어야 주의 일을 도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 두 렙돈의 헌금을 했던 예루살렘의 과부는 자기가 드리는 것이 하나님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의 작은 선물을 사용하여 주는 것에 대한 중요한 교훈으로 삼으셨습니다(눅 21:1-4). 이 가르침으로 2천 년 동안 많은 성도들에게 진심과 희생으로 바치는 헌금의 참뜻이 새겨짐으로써 한 가난한 과부의 작은 선물이 증폭됐습니다. 우리가 참마음으로 희생의 선물을 주께 드리면 주님은 그 가치와 분량을 놀라운 방법으로 늘리십니다. 주님은 과부의 두 렙돈으로 언제나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일으킬 수 있는 ‘증식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바알 살리사에서부터 온 사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것을 최선껏 바치지만 당면한 필요를 채우기에는 형편없이 모자랍니다.  우리의 자원과 능력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성취하기에는 항상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물질이나 은사들을 결코 무시하거나 무용하다고 물리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증식의 주인’으로 알지 못하는 자들만이 분량과 크기를 따집니다. 우리들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행할 수 있는 최선의 희생을 주께 바치면 바알 살리사의 농부가 가져온 양식처럼, 그리고 한 소년의 오병이어처럼 기적의 양식으로 불어날 것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을 위해서 바칠 수 있는 것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에서 우리들의 자원과 재능은 우리들이 성취하려고 시도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일을 일궈내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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