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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하 8:1-6

 

수넴 여자는 칠 년이라는 긴 세월을 블레셋에 가서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녀가 그곳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릅니다. 분명 힘들게 살았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과부는 자선의 대상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녀는 이스라엘 사람이었기 때문에 적국인 블레셋에서 고운 눈으로 호강을 시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수넴 여자는 이방 나라에서의 힘든 칠 년을 다 채우고 무사히 귀국하였습니다. ‘칠 년이 다하매 여인이 블레셋 사람들의 땅에서 돌아와…’(3절).

 

이것은 얼마나 아름답게 들리는 말인지 모릅니다. 수넴 여자가 그냥 돌아와서 좋은 것이 아니고 칠 년을 다 채우고 돌아왔기에 감동적입니다. 그녀는 크나큰 테스트에 합격하였습니다. 그녀의 귀향은 개선 장군의 귀국 못지않습니다. 그녀는 여러 시련과 유혹을 다 이기고 끝까지 견뎠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순종의 삶을 마치고 돌아온 수넴 여자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준비하고 계셨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동안 어린 자식과 함께 남의 나라에 가서 고생하고 돌아온 착한 수넴 여자를 위해 어떤 좋은 선물을 준비하셨겠지요. 적어도 그녀가 그 전처럼 염려 없이 다시 농사를 짓고 정상적이고 여유 있는 생활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계속 잘 섬길 수 있도록 예비하시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귀향해 보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 집과 전토를 다른 사람이 차지해버렸습니다. 「명령+순종=축복」이라는 공식이 안 맞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의 신앙은 대부분 무너져 버립니다. 아마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렸을 것입니다.

「혼자 하나님 잘 믿는다면서 다 남겨 두고 블레셋으로 떠나더니 이제 가련한 신세가 되었지 뭐예요. 한때는 떵떵거리면서 엘리사 선지자를 모시고 엄청 영적인 척하더니 이제는 들어갈 집도 없게 됐지요. 믿어도 적당히 믿어야 하는 건데. 멀쩡한 사람이 선지자로부터 무슨 계시의 말씀을 들었다면서 다른 나라로 훌쩍 떠난 사람이잖아요. 그것이 어떻게 맨정신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겠어요. 아무리 선지자가 기근을 예고했더라도 정말 믿음이 있었다면 약속의 땅을 떠나지 말았어야 하잖아요.」

「아니 칠 년 동안 통 소식도 없더니 갑자기 나타나서 내 집과 내 밭을 내놓으라고 하니 누가 내주겠어요. 극단적인 신앙은 이래서 위험하다니까요. 세상에 젊은 과부가 자식까지 데리고 블레셋까지 가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예요. 계시를 들었느니 어쩌니 하는 것은 다 핑계고 무슨 숨길 일이 있어서 이민 갔다가 이제 돌아왔는지도 몰라요. 세상에 미치지 않고서야 약속의 땅을 저버리고 이방 나라인 블레셋으로 가서 칠 년씩 살다 오는 자가 어디 있단 말이에요. 그러고서도 언약 공동체가 동족인 자기 재산을 가로챘다고 생각할 테지요. 사실 자기처럼 언약의 땅을 버리고 가는 사람의 집과 전토를 지켜줄 필요가 어디 있단 말이예요. 우리는 그동안 기근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받았는데 자기만 쏙 빠져나갔다가 이제 돌아와서 무슨 염치로 내 집 돌려 달라, 내 밭 내놓으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수넴 여인은 더 큰 시험에 직면하였습니다. 이 시험은 그녀가 기근으로 이스라엘을 떠나야 했던 시련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푸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럴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면서 모든 재산을 놓아두고 블레셋으로 피신하지  않았는가? 이제 칠 년의 기근이 끝나 귀향했는데 왜 하나님께서 내 집과 전토를 지켜주시지 않았단 말일까? 언약 공동체라는 이웃들이 나의 온 재산을 삼켰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왜 보고만 계셨을까?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럴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믿음이 더 발휘될 수 있는 또 다른 축복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수넴 여자의 전 재산이 날아간 것은 하나님이 그녀를 노숙인이 되게 하시려는 뜻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녀가 모든 것을 잃고 더 많은 것을 받게 하시려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수넴 여자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녀에게 마지막 시험을 거치게 하셨습니다. 그 시험은 순종의 결과로 재산이 다 날아가 버린 때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신뢰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놀라운 축복이 내릴 것이었습니다. 수넴 여자는 첫 시련이 왔을 때 당장 ‘내가 언제 아들 달라고 했느냐’고 항의했었습니다(왕하 4:28). 그러나 이제는 전혀 그런 식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욥처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욥 1:21)라는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1:1-4).

 

우리는 누구나 다 복 받기를 원합니다. 누가 고난의 세월이 좋다고 자청할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고 더 풍성히  받으려면 칠 년 기근의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수넴 여자에게 기근을 예고하시고 피난하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굶어 죽지 않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칠 년 동안 이스라엘에 기근이 있었지만; 아사자(餓死者)가 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왕이 수넴 여자의 땅에 대한 판결을 내릴 때 그동안의  그녀의 밭의 소출을 다 돌려주라고 명령한 것만 보아도 농사를 어느 정도 지어 먹을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왕하 8:6).

그럼 왜 구태여 하나님께서 수넴 여자를 이주하라고 하셨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신명기 28장의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받는 저주의 목록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가뭄 재앙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에게 내리는 기근은 하나님의 저주에 해당합니다(신 28:22-24; 시 105:16). 이것이 포인트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뭄으로 모두 굶어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형벌로 내리시는 기근이라는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수넴 여자를 하나님께서 빼어내신 것은 반드시 굶어 죽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저주의 영역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뭄 속에서도 연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 땅은 칠 년 동안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밝은 얼굴을 대하지 못하는 곳이었습니다. 수넴 여자는 칠 년 세월을 비록 블레셋이라는 이방 나라로 피신해서 고달픈 삶을 살게 되겠지만, 그 편이 오히려 복되다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저주가 내린 이스라엘 땅으로부터 피해서 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수넴 여자가 사서 고생을 하려고 블레셋으로 이주하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녀가 칠 년간 타국에서 지나는 것은 아까운 청춘을 다 날리는 어리석은 일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의 축복이 없는 땅에서 사는 것보다 차라리 이방 나라로 가서 머무는 것이 세월을 잘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수넴 여자는 하나님의 배려와 권고로 언약의 땅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한 뜻에 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기근으로 하나님의 저주 아래로 들어간 이스라엘 땅을 하나님의 은혜로운 축도를 받고 떠난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언약의 땅에서 징벌하셨지만 수넴 여자는 이방 땅에서 보호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냥 근근이라도 먹고 살 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잘 먹느냐 못 먹느냐가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의 영역에서 사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저주의 영역에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열왕기하의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이방 땅으로 피신하는 수넴 여자를, 우상숭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이스라엘 땅의 나머지 백성들과 대조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자녀들을 항상 구별하여 보호하십니다.

 

둘째, 칠 년 기근의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께서 수넴 여자로 하여금  그녀가 모든 것을 잃고 더 많은 것을 받게 하려고 이런 일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3, 4, 5절을 주목하십시오. ‘칠 년이 다하매….그때에’

‘칠 년’과 ‘그때’는 완벽한 매치입니다. 칠 년이 되어서 수넴 여자가 블레셋 땅에서 돌아왔고 또 ‘그때에’(4절) 왕이 게하시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또 게하시가 엘리사의 사역을 진술하면서 기적으로 수넴 여자의 아이를 살린 이야기를 왕에게 이야기할 ‘때에’(5절) 놀랍게도 수넴 여자가 자기 아들을 데리고 왕 앞에 나타나 집과 전토를 회복시켜 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때는 언제나 절묘하고 정확합니다.   우연의 일치 같지만 이 우연은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였습니다.

 

칠 년이 있었기에 게하시가 왕을 보러 왕궁으로 들어간 ‘그때’가 있게 된 것입니다. 칠 년을 마치고 수넴 여자가 귀국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녀의 마음과 발길을 인도하여 왕궁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 시점이 게하시가 왕에게 자기 아들을 살린 이야기를 하던 때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렇다면 칠 년의 기근이 공연히 임의로 정해진 기간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수넴 여자가 칠 년을 채우지 못하고 돌아왔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같은 섭리의 때를 우리의 불신과 오래 참지 못함으로 얼마나 놓치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너무도 다를 때가 많습니다. 수넴 여자는 자신의 집과 전토가 하나님의 손안에서 안전할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순종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잘 처리해 주실 것으로 봅니다. 우리는 블레셋 땅으로 가면서 매우 담대한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단순한 믿음은 좋지만 깊이가 없으면 나중에 당황하게 됩니다. 수넴 여자는 순종 이후에 커다란 손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넋두리하거나 불평을 하지 않고 곧장 여호람 왕에게로 가서 호소하였습니다. 여호람 왕은 억울한 자의 탄원을 잘 들어주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수넴 여자가 그 왕을 찾아간 것은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집과 전토가 상실되게 하심으로써 복을 내리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수넴 여자의 집이 날아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수넴 여자를 그녀의 집이 아닌,   이스라엘의 왕궁에서 만나기로 섭리하셨습니다. 수넴 여자가 찾아간 여호람 왕 뒤에는 왕 중의 왕이신 여호와가 좌정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과 게하시 뒤에서 그들의 모든 스켜줄과 대화를  통제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수넴 여자에게 초점이 맞추어진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만난 적이 있습니까? 이런 체험은 우리의 영혼에 불을 붙이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강화합니다. 이런 체험은 믿음 생활에 활기를 불어넣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배가시킵니다. 만약 그런 체험이 교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없다면 그 원인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칠 년의 순종이 없고 그것이 주는 영적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에게 칠 년에 해당하는 믿음의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럴 때 이를 밀어내지 말고 순순히 받아들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마침내 곱절의 복을 받게 됩니다.

 

수넴 여자는 순종 이후에 자신이 가진 것을 다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잃어버리는 것은 여러 배로 늘려서 회수됩니다. 여호람 왕은 수넴 여자로부터 그녀의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났다는 게하시의 말을 확인하고는 큰 감동을 받고 그녀의 모든 재산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가 고향을 떠난 이후부터 현재까지 밭의 소출을 다 돌려받게 하였습니다(6절). 그녀는 농사지은 자에게 품삯을 준 것도 아니었지만, 손 하나 대지 않고 밭의 소출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았습니다. 기근을 미리 알려 주시고 피할 길을 주신 하나님은 기근 후의 위기에서도 구출하십니다.

 

수넴 여자의 이웃들은 그녀가 혼자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한답시고 적국인 블레셋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홈레스(homeless)가 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녀의 전 재산이 왕의 특명으로 회복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을 것입니다. 주를 위해서 낮아진 자들은 주님이 높여주십니다(약 4:10)

우리는 칠 년의 기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칠 년의 기근이 없으면 하나님을 왕궁에서 만나지 못합니다. 칠 년의 순종이 없다면 나의 잃은 것들을 환원시키며, 나를 크게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선언을 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자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크신 능력으로 쉬지 않고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불통의 과정을 통해서 형통에 이르게 하십니다. ‘순종=축복’이라는 등식은 ‘순종⇒ 불통⇒ 형통’ 이라는 새로운 등식으로 수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수넴 여자의 믿음 생활에서 많은 격려를 받을 수 있습니다. 수넴 여자가 잃은 것은 모두 곱절의 축복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녀는 죽은 아들을 살려서 돌려받았습니다. 죽지 않고 그냥 사는 것보다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비교가 되지 않는 축복입니다. 그녀는 집과 전토를 다 잃었습니다. 그러나 왕명으로 다시 회수되었고 밭의 소출까지 덤으로 받았습니다.

 

잃었다가 다시 찾으면 원래의 가치가 여러 배로 높아지는 법입니다. 수넴 여자는 무엇을 더 받았습니까? 더 귀하게 된 아들을 갖게 되었고, 더 귀하게 된 집과, 더 귀하게 된 전토를 돌려받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넴 여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예전보다 훨씬 더 높고 더 깊은 차원의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를 위해 잃으면 다시 여러 배로 늘려서 얻습니다. 주를 위해 순종한 대가는 언제나 넘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복음과 주님의 나라를 위해 다 잃게 하시고 더 넘치게 얹어서 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다 잃으면 주님은 영원하고 썩지 않을 새 생명의 삶으로 갚아 주십니다. 수넴 여자는 자신의 것을 다 잃고도 예수님의 풍성한 생명을 구약 시대에 체험한 성도였습니다. 그녀의 체험은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모범과 도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더 분명한 가르침이 있기에 더 많이 잃고 더 많이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넘치는 생명은 그를 언제나 신뢰하고 따르는 성도들에게 부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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