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아만의 회심을 위해 길을 터 준 것은 이스라엘의 한 여종의 사랑이었습니다.
치유를 받은 나아만의 신앙 고백은 가상합니다(15절). 엘리사는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8절)라고 하였는데 나아만은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15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능력 있는 사역의 효과입니다. 사역자의 공로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회심자의 입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나오는 것이 참 사역의 증거입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서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나아만 장군에게 알리겠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소명을 통해서 나아만 장군이 여호와를 알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명성이나 유익을 위해서 이 일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나아만 장군의 예물을 단호히 사양한 사실에서 넉넉히 입증됩니다(16절).
그런데 나아만 장군의 고백은 따져 보면 엘리사의 사역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나아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능력을 체험하게 한 것은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가 준 간증의 덕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소녀의 간절한 소원이 성취되도록 여러 번의 위기를 넘기게 하셨습니다. 첫 번째 위기는 아람 왕의 친서를 이스라엘 왕이 시비거리로 보고 환영하지 않은 것이었고, 두 번째 위기는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는 엘리사 선지자의 치유 지시를 받고 분노하여 자리를 떠난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위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엘리사 선지자의 개입으로 극복되게 하셨고, 두 번째 위기에서는 나아만 장군의 종들이 나아만 장군의 마음을 바꾸게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한 어린 소녀의 증언은 아람 왕과 나아만 장군을 움직이게 하였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를 이방 나라에 드러나게 하는 귀한 도구가 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소녀가 처했던 상황을 다시 연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어린 소녀는 아람군이 침입했을 때 붙잡혀 갔습니다. 부모와 친척과 친구들로부터 생이별을 당하고 갑자기 이방 나라로 잡혀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소녀는 자신의 기막힌 운명을 슬퍼하며 하나님을 크게 원망할 수 있는 모든 이유가 다 있었을 텐데도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방 나라에서 여호와의 작은 불빛으로 살았습니다. 이 소녀는 자신을 부모와 친구들로부터 떼어놓은 나아만 장군에 대해서 악감이 가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원수였고 자기 가족의 원수였습니다. 자기를 납치해 온 원수의 적장이었기에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흉측한 불치병을 앓는 것은 하나님이 내리신 천벌이라고 여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녀는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슬퍼하고 나아만을 원망하며 증오하기보다는 그를 오히려 동정하였습니다. 그녀는 나아만 장군이 불치병을 한탄하며 고통받는 모습을 날마다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주인이 남편의 병으로 인해 수심과 염려에 잠긴 모습도 봤을 것입니다. 이 어린 소녀는 자신의 아픔보다도 자기 주인집에 내린 근심과 고통의 그늘이 거두어질 수 있도록 엘리사를 소개하고 치유의 소망을 심어주었습니다.
그녀는 무의식적이나마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빛나는 모범입니다. 그녀는 먼 구약시대에 살았지만 율법의 수준을 넘는 새 언약 시대의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6:43-44).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항상 모든 고통과 재앙에서 면제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환난 중에서 놀라운 섭리로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며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십니다. 요셉의 경우처럼(창 50:20)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한 어린 소녀가 이방 나라의 종으로 잡혀가는 비극 속에서 역사하여 후세대에게 커다란 격려가 되게 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복음의 수준이 얼마나 높고 깊은 것인지를 역설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닿을 수 없는 경지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아는 자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으로 알고 그분의 능력을 믿었기에 자신의 설음과 고달픔 속에서도 원수를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은 국경을 넘고 인간의 온갖 장애를 극복해 나가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진시킵니다.
- 개인의 불행은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나아만은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군대장관이었고 아람 왕의 전적인 신임을 받았으며 승전 장군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5:1). 그러나 그는 불치의 나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부나 명성이나 그 어떤 능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국가나 기업체를 다스리는 능력이 있고 큰 책임을 수행하는 유능한 인물이라도 개인적인 문제를 다룰 때에는 연약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자살을 하기도 하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자들이 개인의 문제로 상담을 받아야 하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나아만은 큰 인물이었지만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심각한 개인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전쟁에서 혁혁한 전적을 세웠습니다. 그는 왕의 최대 신임을 받는 자였고 온 국민의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만 나병에 걸렸습니다. ‘그러나’는 삶의 변수입니다. 선망의 자리에 앉은 자가 갑자기 큰 수심에 잠기는 일을 당합니다. 예고 없이 닥치는 인생의 변수는 우리들의 벼개 속을 가시로 채우고 날마다 가슴 속에 암영의 그늘이 내리게 합니다. 항상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은 자들, 별다른 걱정 없이 편하게 사는 자들에게도 우환의 암운은 삽시간에 닥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한을 품고 살아야 하는 자들로 가득합니다.
영국의 마가렛 대처(Thacher) 수상을 이은 존 메이저(John Major) 수상은 인터뷰에서 자신이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했습니다. 자기 부친은 열심히 일하면서 자식들을 위해 살았는데 어느날 학교에서 받아온 자기 성적표를 보고 매우 실망하는 눈치였습니다. 아들의 장래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처럼 힘들게 살아야 할 것 같은 아들의 인생이 아버지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습니다. 존 메이저 수상은 그 때의 아버지의 말 없는 실망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부친은 그 후로도 적은 수입으로 가족을 부양하느라고 힘들게 살았습니다. 아들의 성적은 오르지 않았고 이렇다 할 장래가 없는 생활이 계속되는 가운데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아무런 기대를 심어주지 못했던 이 아들은 영국 수상이 되었습니다. 메이저 수상은 자기 부친이 아들의 다른 모습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면서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자식을 위해 고생만 하시며 힘없이 사시다가 아들의 자랑스런 모습을 보지 못하고 하직하신 아버지의 삶이 너무도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는 부친이 생존하셨다면 참으로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무척 기뻐하셨을 것이라면서 자신의 한(恨)을 풀어놓았습니다.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나름대로의 한이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뒤에도 비밀한 슬픔이 가려져 있습니다. 육체의 가시는 그림자가 깁니다. 내게 박힌 육체의 가시는 세월이 지나도 찌르는 일을 그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아픔의 구석이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에게도 삶의 한(恨)이 있었습니다. 나병 환자를 환영할 자는 없습니다. 나병은 당시에는 치유가 불가능하였고 전염성이 강하여 사람들은 접근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나아만의 이러한 고통을 종으로 잡혀간 이스라엘의 한 작은 소녀가 동정하였습니다. 자기의 한을 지닌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의 한에 동정심을 보일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일이 생깁니다. 나아만 장군은 이스라엘의 한 어린 여종이 보인 사랑의 관심으로 나병의 치유를 받았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치유를 기뻐한 자가 누구였을까요? 물론 나아만 장군 자신입니다. 또한 말할 나위 없이 나아만 장군의 아내와 가족 친지와 아람 왕을 비롯하여 온 백성이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아만 장군의 치유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확인한 이스라엘의 작은 여종처럼 더 기뻐한 자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원수를 위한 자신의 선한 기도를 응답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방 원수들을 위해서도 선을 베푸시는 분임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확신하며 추천했던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크나큰 기적을 행하신 사실이 온 세상에 알려진 것을 보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이방 나라의 종으로 살아도 힘이 솟았습니다. 그녀가 사랑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아만의 치유로 가장 기뻐한 자는 이 어린 여종이 아니고 달리 누구였겠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면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이 내립니다. 자신의 한을 품은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한을 푸는 도구가 되면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을 체험합니다. 이런 축복은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받을 수 없는 귀한 은혜입니다. 이 같은 은혜의 체험이 있을 때 우리 각자의 한(恨)은 크나큰 하늘의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침체와 슬픔의 수의는 잔치의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어두운 마음속에 새 하늘의 빛이 비치고, 잃었던 웃음이 새싹처럼 피어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나의 해묵은 한(恨)까지도 협력하여 선이 되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진리가(롬 8:28) 내 영혼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영적 감격을 체험합니다.우리 모두에게 이런 영적 체험이 풍성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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