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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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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단순한 믿음을 보상해 주십니다.

 

나아만 장군의 집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는 자신의 단순한 믿음이 얼마나 큰 수확을 거둘 것인지를 미처 다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를 신뢰하는 단순한 믿음을 여러 배로 갚아 주십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어떻게 갚으셨을까요?

 

첫째, 아람 왕과 나아만 장군이 이스라엘에게 호의를 얻으려고 고개를 숙이게 하셨습니다.

 

아람은 당시에 걸핏하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러나 아람 왕이 직접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만 군대장관의 치유를 위하여 부탁하게 되었습니다. 침략국과 외교를 하려면 불리한 조건을 수락해야 하고 공물을 바쳐야 하는데 오히려 아람 왕이 저자세로 나왔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당시의 이스라엘 왕이었던 여호람(왕하 1:17; 3:1; 9:24)은 아람 왕의 청탁 친서를 읽고 크게 당황하며 정치적인 시비를 걸기 위한 수작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그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의 나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와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7절).

 

여호람이 자신은 비록 왕이지만 일개 인간임을 안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그는 나병과 같은 불치병은 생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에 있으므로 이런 이방 국가의 왕이 던지는 도전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번민하며 자기 옷을 찢고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이스라엘의 한 작은 소녀는 하나님의 사람이 능히 나아만의 나병을 낫게 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스라엘의 왕에게는 그런 단순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작은 한 무명의 소녀가 이방 나라에 붙잡혀서 종살이하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한 것에 비하면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을 맹세하며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국가의 왕이 보인 부정적인 반응은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만일 그가 나아만 군대장관으로부터 이스라엘로 오게 된 사연을 듣고 엘리사 선지자를 소개하여 치유를 받도록 길을 열었다면 외교적으로 얼마나 유리한 입장이 되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나아만 장군 집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의 어린 여종을 귀국시켜 달라고 쉽게 부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상 숭배에 빠졌던 여호람 왕에게는 여호와를 신뢰하는 단순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아람 왕과 나아만 군대장관과의 외교적 호기를 놓쳤습니다.

 

이방나라의 왕과 군대장관은 엘리사 선지자에 대해서 듣고 도움을 구했지만 이스라엘 왕은 자국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엘리사에게 이 문제를 의논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 대책도 없이 이것을 국가적 위기로 보고 경계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알릴 좋은 기회를 선용하지 못하고 아람 왕과 나아만 장군의 노여움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환영할 수 없습니다.

 

이때 엘리사가 개입하였습니다(8절). 그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답게 담대히 말했습니다.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8절).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이방인의 도전에 맞서는 것은 믿음의 담력입니다. 자신의 소명과 때를 알아보고 하나님의 도움을 찾는 자에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라고 초대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유명한 선지자가 아니라도 우리 각자가 받은 소명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병 환자를 보내시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병과 같은 죄에 빠진 세상 죄인들은 십자가의 피로써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주변에서 십자가의 구원으로 자신들의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할 자들을 얼마든지 만나게 하십니다. 그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십자가 구원의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명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한 어린 소녀가 보인 단순한 믿음은 적국의 군대장관으로 하여금 군사들을 동원하여 쳐들어오지 않고 이스라엘의 호의를 받기 위해 예물을 들고 오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만히 앉아서 적국이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잘 보아 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한 작은 소녀가 보인 여호와에 대한 단순한 믿음은 이스라엘의 위상이 국가적으로 올라가게 하는 긍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둘째, 나아만 군대장관이 여호와 종교로 개종하는 놀라운 사건이 생겼습니다.

 

나아만은 처음에 엘리사의 처방을 받고 화를 냈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을 만나지도 않고 사람을 보내어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지시했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자기에게 와서 정중히 맞이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상처 위에 안수하여 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는 또 요단 강물보다 자기 나라의 다메섹에 있는 강들이 훨씬 낫다고 여겼습니다. 나아만은 치유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 외형적인 종교의식을 행하고 장소도 요단 강과 같은 좁고 작은 강이 아닌 큰 강에서 행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더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12절)

 

세상은 아마나와 바르발을 치유책으로 제시합니다. 세상에는 요단 강에 가서 몸을 씻는 것보다 더 낫다고 주장하는 옵션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나병과 같은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강에서 몸을 담그지 않으면 치유될 수 없습니다. 더 크고 깨끗한 물이 문제가 아닙니다. 요단 강이 맑지 못하고 넓지 못해도, 문제가 되는 것은 강의 질이 아니고 질병 자체의 치유를 위해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병은 죽음에 이르는 죄의 병입니다. 세상의 아마나와 바르발로서는 이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나아만 장군은 “내 생각”(11절)에 따라 처방과 치유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르고 여호와의 방법도 인간의 방법과 다릅니다(사 55:8). 나아만은 여호와의 생각이 자기 생각보다 높고 옳다는 것을 아직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중요한 일일수록 여러 절차나 성대한 의식이 없으면 신뢰를 하지 않고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의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에서는 진리의 말씀이 없으므로 사람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는 외형적인 의식과 절차를 넣어 권위를 입히고 인위적인 신앙을 일으키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자체로서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말씀 하나로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경배할 때에 복음의 내용을 담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식적인 절차를 밟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용이지 형식 자체의 틀이 아닙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난 이유의 하나도 초대 교회의 단순한 예배에서 점차 화려한 예배와 사치한 교회당과 교권 중심으로 교회가 발전하면서 교리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의식과 외장 위주의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축복을 받게 한다는 거짓된 가르침으로 성도들의 많은 헌금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인 막대한 헌금의 오용이 도덕적 타락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은 현대 교회에 경종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 70년대 이후로 우리나라 교회는 교회당 건축에 많은 에너지와 재물을 쏟았습니다. 교회당 건축을 성전 건축이라는 미명으로 교인들의 재정적 희생을 요구하였고 목회자의 위상과 교회의 외형적 치장에 우선권을 두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집단적 이기주의와 축복 신앙의 온상이 되었고 기독교의 하나님을 우상 종교의 저급한 신들의 수준으로 격하시켰습니다. 물론 교회에서 설교도 하고 성경공부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전체적인 교회 분위기는 복음의 진리와 원칙에 복종하는 삶과는 거리가 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교회 현상을 진단해 보십시오. 종교적 편의주의와 소비자 중심의 상리적 경영 프로그램이 주종을 이루는 성공주의의 세속적 가치관이 활개를 치는 무대로 전락하지 않았습니까? 단순하고 순수한 복음 신앙은 강단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흥미 본위의 구사력으로 세상 지식을 과시하며 개인의 처세를 성도들의 삶의 방식으로 제시하는 메시지들이 인기의 열풍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면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복음의 진리가 지닌 강력한 능력이 내 영혼에 파고드는 감격이 있습니까? 주 예수를 위해 더욱 힘써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하겠다는 새로운 각오가 생깁니까? 성경을 새롭게 읽고 구원의 진리를 더욱 깊이 깨달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자성과 헌신의 마음이 일어납니까?  어떤 성도가 고백하는 말이 교회당에 들어갈 때는 살아서 들어가는데 나올 때는 시체가 되어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어디 한두 교인의 고백이겠습니까?

 

나아만은 마병과 금은 보물과 값비싼 옷들과 여러 종을 거느리고 자신의 높은 신분을 과시하며 엘리사의 집으로 갔습니다(9절). 그러나 엘리사는 문전에도 나가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허리를 굽히고 나아만 군대 장관을 영접하지 않은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무례한 것이 아니고 구원의 복음이 지닌 참모습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나아만의 높은 신분이나 많은 예물에 달린 것도 아니고 갖가지 형식의 의식에 달린 것도 아님을 나아만은 알아야 했습니다. 나아만은 자신이 고국에서 늘 받던 식의 극진한 대우를 이스라엘의 선지자에게서도 받을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그는 엘리사가 그의 방문을 영광으로 여기면서 당연히 받을 축복이라도 되듯이 종교적인 격식과 의례를 갖춘 일종의 치유 행사를 거행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엘리사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그의 집 앞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아만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한 믿음이었습니다. 단순한 믿음은 겸손한 믿음입니다. 자신의 모든 겉치레를 벗어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가 말하는 대로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담그기만 하면 치유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단순한 믿음입니다. 단순한 믿음은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나아만의 종들은 영적 분별력에서 나아만보다 나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존심이 상한 나아만 장군에게 엘리사의 말대로 행하라고 간청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대체로 단순합니다. 그리고 지시하는 내용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잘 이해할 수 없고 어려워야 권위가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 말에 문자를 쓴다는 표현이 있지 않습니까? 공연히 어렵게 하여 권위를 세우려고 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흔히 심오하다는 것은 어렵고 복잡한 것들을 가리킵니다. 쉽고 단순하면 별것이 아니라고 무시합니다. 그래서 나아만처럼 “내 생각에는” 하고 불만스러워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합니다. 우리는 단순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믿지 못하는 까닭은 복잡하고 어려워서가 아니라 단순한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어려운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구원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매우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번거로운 의식에 참여할 필요도 없고 어려운 공부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학 박사 학위를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믿음이 더 좋거나 신앙생활을 더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돈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신분이 좋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속주며 내가 죄인으로서 마땅히 죽어야 할 십자가에 대신 가셔서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그분이 나를 위해 완전한 믿음으로 흠 없는 삶을 대신 사셨고 나를 위해 부활하셨음을 믿으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가 됩니다. 이것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나아만은 자기 종들의 말에 설득이 되어 요단 강에 가서 몸을 담그고 나병으로부터 깨끗해졌습니다. 단순한 믿음은 곧 구원입니다. 나아만이 어떻게 이런 은혜를 받았습니까? 단순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의 나병 치유는 영적 나병을 앓는 죄인들이 십자가를 신뢰하는 단순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한 좋은 본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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