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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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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와 헌금 시리즈(6) 말라기 3장

 

십일조를 운운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약성경 본문은 말라기 3장10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 3:10).

 

십일조를 강조하기 위한 설교나 간증들은 거의 모두가 이 말라기 본문에 근거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본문의 말씀대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면 정말 복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저주를 받은 까닭은 온 나라가 하나님의 십일조를 도적질했기 때문이라면서 (말 3:9) 우리도 십일조를 안 내면 복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복 받는 비결은 십일조를 잘 내는 것이라는 등식이 하나의 불문율처럼 우리나라 교회에 퍼져 있습니다. 그럼 과연 말라기 3장의 말씀을 이런 식으로 대입 시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일까요?

 

◐ 말라기의 시대적 배경

우리는 십일조에 관한 말라기의 본문들을 거론하기 이전에 말라기 전체의 상황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말라기의 말씀들이 지닌 배면적 의미를 잡아내고 그 본뜻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을 패망시킨 새로운 제국인 바사(페르시아) 제국의 허락으로 제1진이 주전 538년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습니다(스 1:1-3; 대하 36:23). 이들은 바사 제국의 고레스 왕이 내린 성전 재건 칙령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제2성전을 주전 515년에 완공했습니다. 이 새 성전 건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새 성전의 건축과 관련해서 매우 고무적인 예언의 말씀들이 학개, 스가랴 등의 선지자들을 통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들에 의하면 새 성전을 통해 하나님의 갖가지 복들이 임할 것이었습니다.

학개 2장을 살펴보면 제2성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하게 되고, 이스라엘에 평강이 있으며, 열국의 세력이 꺾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학 2:5, 7, 9, 22).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도 예루살렘 성전 건축과 함께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이 풍성한 복을 누릴 것이라고 약속했고 메시아의 오심과 여호와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예고했습니다(슥 1:16-17; 2:4-5, 10, 13; 8:3-15, 23; 9:9-13, 16-17).

 

그런데 기대에 찬 새 성전이 완공되었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은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고 여러 면에서 오히려 더 나빠진 셈이었습니다. 우선 애써 지은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과 비교하면 열등했고, 지성소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없었으며(말 3:1), 유다가 차지한 영토도 평방 120km 정도에 불과했으며, 계속 강대국에 눌려 사는 속주의 신세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후 백 년이 지난 말라기 시대에도 이스라엘의 형편은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가뭄과 병충해가 심하여 흉작이 거듭되었고(말 3:10-11), 여호와 종교는 침체하여 제사장들은 부패하였고 백성은 영적 실체가 없는 형식적인 예배만 드렸습니다. 여호와 종교는 미신과 뒤섞였고 적당주의와 냉소주의가 편만했습니다. 강자는 약자를 압제하였고 언약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은 외면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백성을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말 3:5).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복의 약속들이 마치 자기들의 권리라도 되듯이 당연시하였고 하나님을 채무자로 간주하는 오만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들은 언약 백성으로서의 올바른 믿음 생활은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새 성전을 통해 주시기로 약속한 복들을 내리지 않는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성의껏 제사를 올리거나 죄를 회개하거나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빈정거렸습니다.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만군의 주 앞에서 그의 명령을 지키며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단 말인가? 이제 보니 교만한 자가 오히려 복이 있고, 악한 일을 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재앙을 면한다!’ 하는구나.” (말 3:14-15, 새번역).

 

말라기 3장 10절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십일조 헌금을 꼬박꼬박하면 하나님이 차고 넘치게 복을 부어주신다는 말씀으로 뚝 떼어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라기 3장 10절은 결코 복 받는 비결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십일조를 낸다면 말라기에서 정죄하고 있는 불경스러운 예배자의 상리적이고 타산적인 행위가 됩니다. 말라기에서 지적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를 내지 않기 때문에 복을 받지 못하니까 빼먹지 말고 꼭 바치라는 정도의 권면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들로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을 종교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에서 부각하고 십일조를 하나의 일례로써 언급했습니다.

우리가 말라기의 전체적인 메시지를 파악하지 않고 3장 10절의 내용만 떼어서 보면 본 절의 의도를 오해하거나 잘못 적용하기 쉽습니다. 이제 말라기의 전체 내용을 잠시 훑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사장들의 죄악

말라기 1장 6절부터 2장 9절까지의 내용을 보십시오. 제사장들은 성전 제단에 더러운 빵을 바치면서도 아무렇게나 하면 어떠냐고 말했습니다(말 1:7, 12). 그들은 훔쳤거나 눈이 멀거나 절뚝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제물로 바치면서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1:8, 13).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고, 바치는 제물도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1:9-10). 제사장들은 율법도 사람들의 형편을 보아 가면서 편파적으로 적용했으며, 율법의 원칙보다는 편법을 쓰도록 백성을 가르쳤습니다(2:8-9).

 

백성의 죄악

말라기 2장 10절부터 16절까지의 내용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남자들은 동족의 아내들을 버리고 성전 건축을 방해했던 혼혈 이방 민족들과 잡혼을 했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귀환 유대인의 언약 공동체는 아직도 매우 허약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혼혈 결혼은 이스라엘의 정착된 존립을 위협하는 심각한 처사였습니다. 일반 백성도 서로 속이며 신의를 지키지 않았고 성전 예배를 형식적으로 무성의하게 드렸습니다.

 

사회적 죄악

말라기 3장 5절부터 18절까지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음란했고 점치는 자들이 많았으며 일꾼의 노임을 떼어먹고 힘없는 자들을 학대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성전에 십일조를 제대로 바쳤을 리 만무합니다. 그러고서도 백성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빈정거렸습니다.

 

◐ 말라기 3장 10절의 오용

 

이제 다시 말라기 3장 10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말씀의 문맥은 무엇입니까? 왜 이 구절이 말라기에 언급되어 있습니까? 단순히 십일조를 성전에 바치면 하나님이 물질의 복을 내리신다는 축복 공식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경건하지 못하고 부도덕한 이스라엘 백성의 그릇된 신앙생활을 바로잡기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까?

말라기 3장 10절은 대체로 문맥을 무시한 일방적이고 문자적인 강조와  율법적인 적용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말라기 3장 10절의 십일조 지적은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의 갖가지 죄악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이 거론될 때는 적어도 말라기에서 지적된 다른 죄악들과의 연관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일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십일조 한 가지만 특별히 소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 한 가지만 잘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실 것으로 기대하면 착각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가 십일조만 제외하고 다른 여러 일에서는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언약 공동체라면, 십일조 한 가지를 놓고 강조해도 무방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 우리들의 현실이라면, 십일조가 마치 가장 중요한 것이라도 되듯이 별스럽게 강조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말라기 3장 10절을 단순히 상거래적인 약속으로 보고서 문자적인 적용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십일조를 내면 하나님이 꼭 갚아 주시고 또한 넘치게 채워 주신다는 말을 우리는 수없이 들으면서 교회에 다닙니다. 그래서 성도 중에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십일조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성도를 칭찬해 주고 믿음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무엇인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희생을 감수하며 무리해서라도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점에서는 십일조 교인들이 훌륭한 모법입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어떻게 해서라도 수입의 십 분의 일만 좌우간 채워서 내면 하나님이  넘치게 갚아 주신다는 신념으로 무슨 월부금 내듯 한다면 그릇된 행위입니다.

 

어떤 분이 십일조를 자기 욕심대로 낸다고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가령 백만 원 수입을 원하면 십 분의 일에 해당하는 십만 원을 십일조로 내고 이백만 원 수입을 원하면 이십 만 원을 낸다는 것입니다. 없으면 빛을 내어서라도 하나님께 바쳐 보라는식의 십일조 강조를 하면서 실제로 그런 말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을 대단히 큰 믿음이 있는 것처럼 높여 주는 교회도 적지 않습니다. 미국 의 한 교인은 목사님에게서 십일조를 내면 복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십일조를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약속받은 물질의 복이 없자 자기 교회 목사님을 상대로 법정에 고소했다고 합니다.

물론 십일조의 강조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이 글도 따져보면 십일조에 대한 가르침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을 무시한 편파적이고 일방적인 적용을 하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문맥을 떠나 균형을 잃으면 오용되기 쉽습니다. 성도들과 하나님 사이에 올바른 믿음의 관계가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십일조가 강조되면 하나님을 상거래의 대상으로 보는 물질주의적 신관에 빠질 위험이 큽니다. 말라기의 주제도 이스라엘 백성의 흠 많은 제물이나 이런저런 사회적 부패 자체를 다룬다기보다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관계를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따져보면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이교적이었다기보다는 상당히 보수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십일조를 비롯하여 소홀히 한 일들이 많았을지라도 성전 예배를 형식적으로나마 지속시켰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영적 실체가 없는 예배를 드리고 사랑과 순종과 감사로 채워진 언약 백성의 마음과 자세가 없이 성전을 드나들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문맥을 이해한다면, 오늘날의 십일조 강조도 마땅히 언약 백성으로서의 영적 신분과 복음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문맥 안에서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개인의 영적 삶이나 복음에 대한 이해가 결핍한 데도 그런 중요한 문제들은 제쳐놓고 십일조를 내면 복 받는다는 식으로 강조한다면 말라기 3장 10절의 배경을 무시한 오용입니다.

십일조에 집착하는 까닭의 하나는 성경 본문에 대한 오해를 떠나서, 실리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는 돈입니다. 그런데 정기적인 헌금 중에서 가장 액수가 높은 것이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교회 재정과 밀착된 헌금입니다. 만일 십일조가 돈이 아니고 성도들의 어떤 도덕적인 문제나 교리적인 문제였다면 교회에서 그처럼 중시하며 강조했을까 싶습니다.

하나님이 구약 시대에 백성의 십일조로 성전 제도가 존속되게 하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이 새 성전을 짓고 이스라엘 땅에서 다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때 말라기 선지자뿐만 아니라 느헤미야 같은 지도자도 십일조의 의무를 지적했습니다(느 10:37-39; 13:10-12). 그렇지만 한 번도 십일조가 단독으로 강조된 적은 없었습니다. 예컨대 느헤미야 13장에서 느헤미야는 백성이 십일조의 의무를 소홀히 한 것을 꾸짖었습니다(느 13:10-13). 그러나 느헤미야 8장과 9장을 비교해 보면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가 먼저 거론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에스라를 비롯한 여러 교사가 율법의 말씀을 강론하고 그 말씀을 깨달은 백성이 깊이 회개한 것이었습니다(느 8:5-9, 18; 9:1-3).

 

율법의 준수는 성경 말씀을 먼저 깨닫고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된 이후에 지켜져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율법의 준수가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겉치레가 되거나 십일조의 경우처럼 순전히 복 받기 위한 하나의 산술적인 공식으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에스라는 느헤미야와 동시대 사람이었습니다(느 8:1-9; 12:26). 에스라는 학자이면서 제사장이었고(스 7:14) 느헤미야는 유대 총독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의 비뚤어진 신앙생활을 교정하면서 새 성전 건축에 힘썼던 선지자들이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도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성전 재건을 독려했던 선지자들이었습니다(스 5:1; 6:14). 그러니까 이들이 사역했던 당시의 사회 문제나 종교 문제가 모두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십일조 문제만을 별도로 지적하여 그것이 마치 교회의 사활 문제라도 되듯이 편파적인 강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십일조 이외에도 잡혼이나 금식이나 안식일 문제들도 언급했지만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일그러진 언약 관계의 문맥에서 교훈했습니다.

그들이 강조한 것은 언약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참모습이 어떠해야 하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십일조와 같은 율법의 규정을 상거래의 약속으로 간주하는 불경스러운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아야 했고, 하나님께 지은 갖가지 죄악들을 회개해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진실과 인애와 긍휼의 속성을 닮아 이웃을 사랑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의 모습을 드러낼 때 하나님은 그들의 성전에 머무시고 마침내 메시아를 보내셔서 온전한 구원이 성취되게 하실 것이었습니다(슥 7:9-10; 8:16-19; 9:9, 16; 말 3:17; 스 7:10; 10:1-17).

 

둘째, 본뜻이 살아나지 않는 율법적인 십일조의 적용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십자가의 구원과 사랑의 원리가 적용되는 수준으로 이끌어 주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한 두 마디가 있습니다. 하나는 ‘온전한 십일조’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시험하라’는 말입니다. 이 두 마디는 본 절의 핵심이므로 그 뜻을 밝혀 볼 필요가 있습니다.

 

◐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라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종교적인 의식에는 퍽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제물도 바쳤고 제사장들의 지시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든 종교 행위들이 온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백성은 온전하지 못한 제물들을 바쳤고(말 1:7, 13) 제사장들은 율법을 온전하게 적용하지 않았습니다(말 2:9). 십일조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말 3:10)라는 말씀은 얼핏 보면 백성이 전혀 십일조를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도 역시 온전한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말라기 3장 8절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말 3:8).

 

만일 이 구절만 살펴본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뿐만 아니라 헌물도 전혀 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나 다른 여러 본문에서 백성이 헌물을 분명히 했음이 언급되고 있습니다(말 1:7-14; 2:13). 그래서 헌물을 했지만 온전함이 결여되었다는 점을 문제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일조도 같은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떼어먹기도 했으므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다고 했습니다(말 3:8). 떼어먹는 것은 십일조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물도 할 것을 안 하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교회에서 일반 헌금에 대해서는 도적질한다는 말을 거의 적용하지 않고 유독 십일조 헌금에만 적용합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품목을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못 박아 지적했습니다(말 3:8).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종류를 불문하고 내 것처럼 빼돌리면 도적질에 해당합니다(학 2:8; 시 50:9-12).

아무튼 말라기 3장 10절은 하지 않던 십일조를 하면 물질의 복을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말라기 전체가 외치는 메시지의 핵심은 ‘온전한 예배’에 있습니다. 그런데 온전한 예배는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에 바탕을 두어야만 가능합니다.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회중에게 온전한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교훈한 것은 그들의 삶이 언약 신앙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지 않음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모든 십일조’(the full tithe)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를 종류대로 다 바치라는 말씀이 아니고 무성의하고 믿음이 없는 십일조가 아닌 십일조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온전한 십일조는 십 분의 일 자체에 중점을 두었다기보다는 경배자의 믿음 생활의 온전함에 초점을 맞춘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 26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소산의 맏물과 십일조에 대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했습니다(신 26:3-9). 그리고 율법이 지향한 자비와 공의에 따라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며 사는 성도의 삶이 증명되어야 했습니다(신 26:10-14).

그렇다면 무엇이 온전한 십일조입니까? 자기 수입에서 정확하게 십 분의 일을 떼어내기만 하면 될까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확실하지 못하고 복음을 바르게 깨닫지도 못하며 올바른 신앙고백도 없고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지도 않으면서 수입의 일정량을 교회에 매달 바치기만 하면 그것이 온전한 십일조가 될까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런 십일조 교인들에게 넘치도록 복을 부어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진정으로 자기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실상 제물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따져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헌물을 잡수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들의 헌금을 필요로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시 50:13)라고 하셨습니다. 아모스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각종 제사와 십일조를 비웃으셨습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 4:4-5).

 

무슨 말씀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신명 나서 열심을 낼지 몰라도 하나님은 전혀 기쁘시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십일조를 삼일마다 드리는데 왜 기뻐하시지 않습니까? 자주 드리고 더 많이 드리는데 왜 싫어하십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암 4:4) 하나님께 부지런히 갖다 바치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바라본 정의와 사랑의 삶은 외면하고(암 5:7, 24) 형식적인 제사에만 열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암 5:21-23).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동일한 메시지를 주셨습니다(사 1:10-17). 하나님은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사 1:13)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무거운 짐”(사 1:14)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목표한 공의와 자비와 선행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어야 한다고 교훈하셨습니다(사 1:17). 말라기 선지자의 입을 통해 주신 말씀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말 1:10).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월급이나 기타 수입에서 십일조를 떼어 드리는 것이 전부입니까? 그것도 내면 도로 채워 주신다는 전제로 드리는 것입니까? 그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 만일 십일조 헌금을 내어도 채워 주시지 않으면 안 내겠다는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를 내고도 복을 받지 못한 까닭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보고 ‘온전한 십일조’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과연 무슨 동기에서 어떤 사람으로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고 있습니까? 내가 바치는 십일조를 하나님이 기꺼이 받으신다고 생각하십니까?

 

◐ 나를 시험하여 보라

말라기 3장 10절 말씀이 의도하는 참뜻은 십일조의 수익을 높이려는 것도 아니고 십일조를 조건으로 하나님의 복이 오간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의 주안점은 당시의 온전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십일조의 경우를 하나의 실례로써 지적한 것일 뿐 실제 의도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생활 전반에 걸친 신뢰의 믿음을 촉구하는 일이었습니다. “나를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은 이런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라기 3장 10절이야말로 말라기에서 가장 복된 약속의 말씀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가장 슬픈 말씀입니다. 이 구절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의 한심하기 짝이 없는 영적 수준을 드러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말라기는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소개했습니다(1:6, 8-14; 2:2, 4, 12; 3:1, 7, 10-14, 17; 4:1, 3). 만군의 여호와는 천군 천사를 거느리시고 약인들을 극렬한 풀무 불로 심판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만군의 하나님은 위엄과 권세가 영원하신 분이시며 온 세상을 장중에 넣고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이 이처럼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으면 “나를 시험하여 보라”고 하셨겠습니까! 이 말씀은 복에 대한 약속이기보다는 경망스럽고 유치하며 신뢰와 순종이 없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사는 패역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한숨입니다. 이 말씀은 십일조를 잘 내면 복을 내리신다는 조건부 보장이 아니고 불신과 위선, 형식과 욕심에 사로잡힌 패륜의 자녀들을 향해 하늘 아버지가 비애를 머금고 토설하는 한탄입니다. 우리는 ‘나를 시험해 보라’는 말씀에 서려 있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들이 그렇게도 만군의 여호와가 미덥지 못하고 경외하기가 싫으면 십일조 한 가지라도 제대로 해보려무나. 그러고 나서 만군의 여호와가 과연 신실하신 언약의 하나님으로서 경배를 드릴 가치가 있는 분임을 깨달아라. 나 여호와가 너희 패역한 백성에게 시험을 당할 테니 정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면 만군의 여호와인 내가 너희들의 유치한 수준까지 내려가 주마.”

 

이런 말씀을 듣고서도 하나님을 시험해 보겠다고 나서는 자들은 악한 자녀들입니다. 이런 말씀 속에서 하늘 아버지의 비참한 심경을 읽고 회개할 수 없으면 비극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말라기 3장 10절을 빌미로 잡고 이 말씀을 십일조 헌금을 갹출하기 위한 증거 본문으로 삼거나, 물질적 보상을 바라고 상거려적인 십일조 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이 하나님의 허락된 시험이기 때문에 실제로 하나님을 십일조로 시험해 보면 큰 복이 분명 따른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순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비록 하나님이 허락하셨더라도, 우리 편에서 신뢰의 표시로 해야 할 일이 있고(사 7:11-12), 하지 말아야 할 옳은 일이 있습니다. 가령 부모가 마지못해 허락한 일을 다 해 버리는 자식이 효자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런 자식은 어버이의 마음을 읽고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착한 자녀가 아닙니다.

모세의 이혼 증서나(막 10:2-9) 이스라엘에 허락된 왕권 제도가 모두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아니었듯이(삼상 8:4-9, 호 13:10-11) 십일조의 축복 문제를 놓고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말씀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철없는 자식들의 특징은 부모가 마음 아파하며 허락해 주는 것들을 무슨 권리나 되듯이 냉큼 받아 챙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속히 장성한 자가 되어 부모의 뜻을 알아차리고 어린아이 때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고전 13:11).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사실상 큰 죄악입니다. 죄악 된 인간들이 거룩하고 참되신 만군의 여호와를 시험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한 일들을 모두 그릇된 처사로 기록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물 때문에 모세를 원망했고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를 시험해 보았습니다(출 17:3, 7). 시편 95편 8-9절에서도 동일한 사건이 지적되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너희가 맛사에서 시험한 것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신 6:16; 출 17:6-7)고 교훈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으로부터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유혹을 받았을 때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마 4:7).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교회에서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한다면 얼마나 잘못된 일이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광야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이 되고 맙니다.

 

그들이 그들의 탐욕대로 음식을 구하여 그들의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보라 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니 시내가 넘쳤으나 그가 능히 떡도 주시며 자기 백성을 위하여 고기도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시 78:18-20).

 

하나님이 이런 시험을 받으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듣고 노하셨다고 했습니다(시 78:21). 왜 심히 언짢으셨습니까?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시 78:22). 그런데 노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는 대로 만나와 고기를 실컷 주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시 78:23-31). 하나님을 시험해 보고 먹을 것을 넘치게 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왜 하나님이 광야에서 “그들의 날들을 헛되이 보내게”(시 78:33) 하셨습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들 욕심대로 받으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못 받으면 신뢰할 수 없다는 식이었기에 징계를 받아 마땅하였습니다. 십일조를 내고도 기대한 복을 소욕대로 못 받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믿음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설혹 원하는 대로 받아서 본인은 좋아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섭섭해하십니다.

하나님이 차고 넘치게 주셨다고 해서 반드시 복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십일조를 냈더니 복을 받더라고 말하며 계속 같은 생각과 자세로 십일조를 낸다면 광야 백성처럼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시 78:41)하는 셈이 됩니다.

왜 우리를 양 떼처럼 돌보아 주시며 기르시는 선한 목자를 시험해야 합니까? (시 80:1). 욕심을 부리고 하나님의 방법과 뜻대로 살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리며 그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시 106:13-15).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해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과연 그들은 요구한 것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배가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메말랐습니다. 영혼이 파리한데 배가 아무리 부른들 무슨 유익입니까? 우리가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할 때 원하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육신의 복입니까, 아니면 영혼의 복입니까?

말라기 3장 10절을 복 공식으로 사용하면 정말 큰 시험에 빠집니다. 사실이지,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신뢰와 본심을 달아 보는 시험대였습니다.

다시 맛사의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맛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의심하며 만일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신다면 물을 내어 마시게 해보라고 시험했습니다. 이때 모세는 백성을 향해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출 17:2)고 한탄했습니다. 그런데 시편 81편 7절에서는 하나님이 오히려 “므리바(맛사) 물 가에서 너를 시험하셨도다’ 라고 지적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시험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시험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말라기 3장 10절에서 “나를 시험하여 보라”는 말씀 속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때는 하나님이 또한 나를 시험하는 때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시험할 때마다 나는 나의 적은 믿음과 나의 기다리지 못함과 나의 악한 생각들을 그대로 노출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시험할 때마다, 나는 내게 어떤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보상이 없으면 하나님께 신실할 수 없는 존재임을 스스로 입증합니다.   

 

하나님은 지존하시고 거룩하신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그들의 죄를 대신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과 지옥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시고 율법의 모든 정죄로부터 풀려나게 하신 구속주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서 힘써 길러가시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이분은 우리의 찬양과 신뢰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들의 형편이 어려운 지경에 빠졌더라도 구원의 하나님을 시험대에 올려놓을 수 없습니다. 진정 누가 누구를 시험해야 합니까? 죄 많고 허물 많은 불완전한 인간이 온전하신 하나님을 시험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해야 마땅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히 3:17). 하나님이 나를 시험해 보라고 하셨다고 해서 정말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좋은 믿음도 아니고 착한 자녀의 태도도 아닙니다. 우리는 말라기 3장 10절의 구차한 인용 없이도 ‘온전한 십일조’의 본뜻을 깨달아서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을 온전히 되돌려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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