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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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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크라렌 목사와 강해 설교

 

 

 헌책을 사보면 여기저기 줄을 긋거나 노트를 해놓은 부분들이 있다. 필자는 특별히 헌책방에 다니면서 고서(古書)들을 수집하는 사람도 아니고 기독교 고전에 속하는 명저들이 가득하게 꽂힌 장서가 있지도 않다. 단지 소수의 낡은 고서들이 있을 뿐인데 그중에서 내가 펼쳐볼 때마다 큰 감동을 받는 강해서가 있다. 이 강해서의 내용이 물론 좋기도 하지만 필자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페이지마다 연필로 밑줄을 긋고 메모한 전 소유주의 독서 흔적이다. 이 강해서의 저자는 알렉산더 맥크라렌(Alexander McLaren)목사이다. 솔직히 말해서 필자는 맥크라렌 목사에 대해 잘 알지 못했었다. 물론 나중에 이분에 대한 연구로 많은 정보를 얻게 됐지만, 실질적이고 피부에 와 닿는 정보는 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맥크라렌 강해서의 전 소유주가 적어둔 수많은 난외 메모에 의한 것이었다. 본 강해서에는 맥크라렌 목사의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가 포함되어 있는데 소유주의 이름과 연도, 그리고 ‘더 브리티시 위클리’(The British Weekly) 신문에서 따온 아래의 짤막한 인용문이 적혀 있다.

 

  Ellis Green London, 1909

  “맥크라렌 박사는 자기 시대의 설교자들 가운데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자였다.”

 

  필자가 맥크라렌 목사의 인물과 메시지에 끌리게 된 주된 동인은 엘리스 그린이라는 전 소유주의 다음과 같은 글귀들이었다.

  “나는 매일 밤 맥크라렌 목사의 설교 한 편을 읽고 잠든다. 그의 메시지는 내 영혼을 일깨워준다.”

  “나는 50년간 더 브리티쉬 위클리에 매주 실린 맥크라렌 목사의 성경공부 해설 시리즈를 모아왔다.”

  “이 말씀은 그의 가장 위대하고 독창적인 설교의 하나이다. 이 강해서에는 탁월한 설교들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이 말씀들을 통해 너무도 큰 도움을 받았다. 나는    그의 강해서를 읽고 또 읽는다.”

 

  엘리스 그린씨는 그의 메모에 의하면 여러 번 맥크라렌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 먼 여행을 했었다. 그는 맥크라렌 목사와 비록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지만 가장 행복한 애독자였다. 이 같은 애독자를 한 사람이라도 가진 저자는 또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필자에게 엘리스 그린씨는 시대와 인종과 나라가 다른 낯모를 사람이다. 그러나 이분은 자신이 읽은 한 강해서에 적어둔 노트를 통해 본인과 맥크라렌 목사를 연결해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필자가 맥크라렌 목사의 메시지를 읽을 때마다 그의 메모를 함께 읽게 됨으로써 내게 적지 않은 감동을 준다. 더구나 이제 우리나라 교회에 맥크라렌 목사를 소개할 수 있게 되었으니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의 손길은 너무도 신묘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맥크라렌 목사의 경력

 

  1826년-스코틀랜드 글라스고에서 출생

  1840년-글라스고 호프스트리트 침례교회에서 침례 받음

  1842년-침례교 신학교 입학

  1846년-잉글랜드 사우삼튼(Southampton)의 포트랜드 채플에서 목회 시작

  1856년-사촌 동생 마리온 맥크라렌과 결혼

  1858년-잉글랜드 만체스터의 유니온 채플로 목회지를 옮긴 후 1903년까지 봉직함

  1910년-소천

 

  맥크라렌 목사의 약력은 매우 간단하다. 60여 년의 긴 목회에서 섬긴 교회는 단 두 곳이었고 논쟁이나 구설수에 휘말린 적도 없었다. 그가 섬긴 두 교회들도 모두 평화로웠다. 그는 잉글랜드 침례교단의 총회장 직을 한두 번 맡은 것 이외에는 별다른 사회 활동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퍽 단순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말씀 강해라는 한 우물만을 꾸준히 파 내려간 집중적인 삶이었다.

 

  회심과 영적 영향들

 

  맥크라렌의 부친은 글라스고(Glasgow) 도시의 상인이었다. 그러나 평신도로서 설교할 만큼 성경 지식이 있었고 아들이 목회자가 되기를 바랐다. 맥크라렌은 어릴 적부터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면서 14세 때에 침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개인적인 회심의 체험에 온전히 도달할 때까지에는 흔히 그렇듯이 복합적인 영적 영향을 받았다. 그는 소년 시절에 글라스고의 한 회중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하였다. 그는 데이빗 러셀 목사의 지도를 받았는데 그의 소년 시절의 신앙을 키워준 자였다.  레셀 목사는 나중에 그의 누님과 결혼하였으며 평생의 친구로서 현명한 조언들을 맥크라렌 목사에게 제공해 주었다. 그는 러셀 목사에게 진 빚을 늘 기억하였다.

나는 러셀 목사를 통해 믿음을 갖는 것과 헌신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나의 틴에이저 시절에 그로부터 받았던 사랑에 찬 영적 지도에 대해 큰 빚을 졌다.”

 

  맥크라렌은 확실한 신앙에 이르기 전에 선택 교리 때문에 무척 고민했었다. 그러나 도드리지(Doddridge)의 ‘신앙의 진보’(Rise and Progress of Religion)라는 책을 읽고 구원에 대한 커다란 도전을 받았다.

한편, 맥크라렌에게 결정적인 회심의 계기가 된 것은 레이드 박사의 부흥 집회였다.

 “나는 나의 모든 죄를 보았다. 나는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이 이룬 대속을 의지함으로써 구원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졌다. 내 죄는 너무도 크게 부각되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평안을 찾았고 그리스도를 구주라고 믿고 용서를 받았다. 그 이후부터 나는 평안함이 날마다 내 맘속에서 깊어지고 성경 읽기와 기도를 통해 예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커다란 기쁨을 누린다.”
 맥크라렌은 글라스고 대학에 입학했으나 가족이 런던으로 이사를 하는 바람에 런던에서 침례교 신학교를 다녔다.

 

  맥크라렌과 독서

 

 목회자로서 양서의 도움을 받지 않고 대성한 사람은 없다. 맥크라렌 목사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는 평론가 토마스 카알라일(Thomas Carlyle), 시인 에머슨(Emerson), 사상가 존 러스킨(John Ruskin), 문학가 디킨스(Dickens)를 좋아했으며 브라우닝(Browning)의 시를 애송하였다. 간혹 그의 설교에도 브라우닝의 시구(詩句)가 비쳐 나온다. 그는 여행에 관한 책들도 즐겨 읽었으며 여행 중에는 어거스틴의 참회록과 조지 폭스의 일지를 가지고 다녔다.

그런데 인간의 자세에 대해서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자는 토마스 카알라일(1795-1881)이었다. 카알라일은 인간의 의무를 크게 강조한 자였다. 그는 맥크라렌 목사처럼 스코틀랜드 출생이었고 당시에 사회 평론가와 역사가로서 무시 못 할 영향력을 발휘할 때였다. 맥크라렌 목사는 목회 초기의 어려움 속에서 카알라일의 글을 읽고 많은 용기를 얻었다.

  책으로 따진다면 맥크라렌 목사에게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말할 나위 없이 성경책이었다. 스코틀랜드 인들은 어릴 적부터 독서 습관을 지니고 있다. 특히 존 녹스의 종교 개혁 이후로 교회는 온 국민이 성경을 읽도록 강조해왔다. 그래서 스코틀랜드를 ‘성경책의 나라’라고 부를 정도였다. 19세기 낭만주의 문학가며 판사였던 스코틀랜드의 월터 스콧(Walter Scott 1771-1832)의 일화는 이 나라 사람들이 성경의 가치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월터 스콧이 죽음의 병상에 누워 있을 때였다. 곁에서 시중드는 자가 무슨 책을 읽어드릴까를 물었다. 그의 서재는 필자가 같은 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여러 번 가보아서 알지만, 방대한 장서를 소장한 하나의 도서관이다. 그중에서 어떤 책을 고를 것인지는 너무도 당연한 질문이었다. 월터 스콧 경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직 한 권의 책이 있을 뿐이야”(There is only one Book).

  이 책은 물론 성경책이었다. 맥크라렌 목사도 수많은 종류의 책들을 읽었지만 그는 ‘성경책의 사람’(A man of the The Book)으로 알려졌다. 이상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필자의 경험과 관찰에 의하면 신학생들이나 사역자들의 대부분이 ‘성경책의 사람’이라기 보다는 ‘참고서의 사람’이 아닌가 한다. 성경책 자체를 읽는 시간보다는 성경에 관한 각종 주석이나 참고 자료들을 읽는 데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투여하기 때문이다. 맥크라렌 목사는 정기 간행물과 신문이 목회자 서재에 못 들어가게 하는 법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그는 신선하고 성공적인 목회의 비결은 성경책 자체를 묵상하는 간단한 일이라고 지적하였다.

 

  성경 강해자 맥크라렌

 

  맥크라렌 목사의 강해서는 아직 우리나라 교회에 별로 소개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원서를 보시는 분들은 미국 베이커(Baker) 출판사에서 맥크라렌 목사의 강해집을 전 17권으로 엮어 소개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를 커버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런 탁월한 메시지들은 번역으로 엮으면 진가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아쉽지만 여기서는 부분적이나마 성경 강해자로서의 맥크라렌 목사가 남긴 강해자의 정신과 자세 그리고 방법들에 대해 잠시 이야기하기로 한다. 맥크라렌 목사의 강해가 어떤 위력을 발휘했는지를 알려면 그에 대한 정평을 들어보면 된다.

 

  “스펄전과 무디를 제외하고는 맥크라렌의 설교처럼 많이 읽힌 메시지는 없다.” (맥크라렌 강해 전집 소개문)

 

  “영어가 쓰이는 곳마다 그의 진지하고 사려 깊은 메시지가 한 세대 이상으로 침투되었다. 그의 위치는 감정주의나 웅변술로 확보된 것이 아니고 깊은 확신에서 우러나는 진중한 강해에 의한 신령한 능력에 근거한 것이다.” (만체스터 가디언 일간지)

 

  “30년 전 본인은 맥크라렌 목사의 설교집을 읽으면서 큰 유익을 받았다. 오늘날 우리들은 헨리 뉴맨(Henry Newman)과 윌리엄 로버슨(F.W. Robertson)의 설교가 주는 매력과 영감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사상의 심오성과 논리적 전개와 인간의 심령을 울리는 호소력에 있어 맥크라렌 목사의 메시지를 능가할 강해는 없다고 생각한다.” (무어하우스 감독)

 

  “나는 맥크라렌 목사의 설교를 9년 전에 들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그의 메시지가 내 귀에 생생하게 들린다. 이상한 것은 회중이 그 당시 설교를 들을 때에 강단에 선 맥크라렌 목사에 대해서는 전혀 느낌이 없고 하나님께서 직접 회중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렸다.” (어느 농부의 아내)

 

  맥크라렌 목사는 여러 곳에서 특강 요청을 받았는데 주제가 다양했다. 예를 들면 ‘실현된 유토피아’, ‘존 밀톤의 산문’. ‘어휘, 그 약점과 위력’. ‘이그나티우스 료욜라(Ignatius Loyola)의 생애와 사역’. ‘리빙스턴의 여행’, ‘마틴 루터’, ‘존 녹스’, ‘언약파와 그들의 고난’, ‘담대성의 지혜’, 기타 교회와 정부에 관한 강연들이었다. 그의 강연은 흥미 위주로 대중의 인기를 끄는 방법을 피하였다. 그의 강연은 흠 없이 구성된 문장과 높은 수준의 사고가 결집된 내용이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이 있는 청중들에게 적극적인 공감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의 공중 메시지의 꽃은 역시 성경 강해였다.

 

  강해자의 자세와 목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2).

맥크라렌 목사의 강해 목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의 많은 시민이 강단에서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 발언을 해주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정치적 견해가 뚜렷했어도 목회자의 주 임무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라고 믿고 이 일에 충실하였다. 어느 목회자 세미나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려고 애써 왔다. 본인은 이 세상이 원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믿는다. 개인의 영혼에 끼치는 복음의 능력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

 

  맥크라렌 목사가 당시의 복잡한 사회 문제나 정치 문제에 휩쓸리지 않고 강단에서 오로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를 끝까지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궁극적인 필요가 십자가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한 목회자의 고백이 맥크라렌 목사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해 준다.

내 사역에 있어 최대의 목표가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한마디로 집약될 수 있다. 그것은 곧 모든 인류가 ‘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외치게 하는 것이었다.” (Robertson of Irvine)

맥크라렌 목사의 강해 목적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위해 그는 모든 것을 내던지고 에너지를 저장하였으며 오직 구원의 메시지에 마음을 집중시켰다. 십자가의 구원을 전파하는 강해 설교는 그에게는 단순한 소명의 영역을 넘어 그의 심혼을 불태우는 필생의 노역이었고 영혼의 예술이었으며 자신을 하나님께 산화시키는 산 번제였다. 그러기에 그의 설교에는 군말이나 만담이나 통속적인 예화가 없었고 한 걸음의 확정된 목표를 안고 강론하는 순후한 복음만이 울려 퍼졌다. 다음은 맥크라렌 목사가 인도하는 호주 집회에 참석했던 어느 성도의 소감이다.

 

  “이 사람은 선지자다. 당신은 그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삼키든지 아니면 도망해야 한다. 그의 메시지에는 두 가지 독특성이 있다. 하나는 극치의 단순성이고 또 하나는 꿰뚫을 듯한 진지성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그가 성경 본문을 읽거나 기도로써 회중을 인도할 때에 즉시 드러났다. 그는 복음의 말씀을 밝히 드러내려는 강렬한 욕구와 자신의 고양된 감정 때문에 문자적으로 몸을 떨었다.”

 

   강해와 묵상 훈련

 

  성경 묵상은 우리나라 교회에 강해 설교가 활발하게 소개되기 이전부터 있었다. 그러다가 근자에 와서 성경 묵상이 일반 신자나 목회자들 사이에 보편화하기 시작하였다.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같이 보인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말씀 묵상은 쉽고도 어려운 일인 듯하다. 이를 돕기 위한 전문 서적들도 요즘은 많고 강의도 흔하다. 그런데 무엇이든지 이론으로 해놓으면 퍽 어려워진다. 이론적인 설명 자체가 듣는 이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 특히 성경 강해와 관련된 성경 묵상 이론들을 읽어보면 너무 전문적이어서 말씀을 묵상하고픈 의욕이 오히려 줄어들기도 한다. 하기야 이런 주제로 논문을 쓰고 학위를 받을 정도니까 일반인들에게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상스러운 것은 실제로 설교의 대가들이 비록 강해 설교와 묵상에 대한 책을 썼다 할지라도 그들 자신이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보면 실은 단순하다는 것이다. 묵상의 세세한 방법들을 열거하고 분석하며 장단점을 따진다면 한이 없겠지만 묵상 자체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훌륭한 강해자들은 이 일에 항상 주력하였다. 맥크라렌 목사도 마찬가지였다.

말씀 묵상에 있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일에는 시간과 기다림과 은혜가 필요하다. 훌륭한 강해자들은 남달리 말씀의 조명을 받기 위해 시간을 내었고 성령님의 깨우침을 기다릴 줄 알았으며 신령한 은혜의 불가결성을 숙지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말씀 묵상은 이론이나 테크닉이나 또는 단순한 습관에 의한 규칙적인 성경읽기가 아니다. 그런 식의 성경읽기는 심령의 불꽃을 일으켜 주지 않는다. 신령한 은혜가 없으면 묵상자의 생각에 영감이 떠오르지 않고 마음에 감동이 오지 않는다.

  맥크라렌 목사는 묵상의 핵심 요소를 알았던 분이었다. 그는 60여 년에 걸친 기나긴 사역 기간에 한 번도 같은 설교를 한 적이 없었다. 그는 비록 짧은 본문일지라도 장시간의 생각과 기도로써 마음의 불꽃이 새롭게 타오를 때까지 인내하며 준비하였다. 묵상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의 두뇌는 섬광적이기 보다는 점진적이다. 인간의 사고는 시간 선상에서 짜인다. 맥크라렌이 목회자들에게 자주 인용한 구절이 있다.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막 6:31).

 

  아마 우리나라 목회자들은 대부분 그럴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안타까워할는지 모른다. 우리들의 교회 형편은 목회자가 말씀 묵상을 위해 조용한 시간을 오래 가질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교회가 작으면 작은 대로 바쁘고, 크면 큰 대로 일이 많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우리나라 목회자들 가운데에는 말씀 준비의 묵상 시간이 길 수만 있었다면 지금쯤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렀을 분들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열심히 뛰어서 교회는 커졌을지라도 강단의 말씀이 풍성해지지 못했다면 식구만 늘어나고 영적 식탁은 빈약하게 됐다고 할 수 있다. 맥크라렌 목사는 이렇게 말했었다. “대부분의 사역자는 적게 시도했다면 더 많이 성취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이 일 저 일에 분주히 뛰어다니지 않고 한 가지 일에 열중할 수 있었던 것을 존 웨슬리가 자주 사용했던 모루의 예시에 비추었다.

모루 위에 달궈진 철물의 형태를 만드는 것은 그 위에 증가하는 망치의 횟수가 아니고 내려치는 힘이다.”

망치질의 횟수가 많다고 해서 물건이 제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망치의 집중력에서 오는 파워가 없으면 저질의 물건만 남발된다. 목회자가 개인 경건의 시간을 넉넉히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분주하다면 집중이 어려울 것이고 질 좋은 말씀이 엮어질 수 없을 것은 명약관화하다. 묵상의 시간과 관련해서 맥크라렌 목사는 자신이 비교적 한산한 곳에서 목회를 시작했음을 항상 감사하였다.

 

  “나는 첫 목회를 조용하고 알려지지 않은 작은 장소에서 시작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당신들이 목회를 망치는 까닭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들은 대부분 즉각적인 출세와 안정을 원한다. 당신들은 전망 좋은 자리부터 찾고 그런 곳이 나타나면 소명의 자리라면서 눌러앉는다. 그리고 온갖 사소한 일들에 시간과 정신을 다 소진한다. 생일이다, 회의다, 특별 모임이다, 교제다, 심방이다, 세미나다 하면서 부산하게 쫓아다닌다. 그러지 말고 집에 박혀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나는 목회 초기에 전혀 세상이 모르고 알아주지도 않는 곳에서 조용히 말씀과 씨름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던 시간들을 감사한다.”

맥크라렌 목사가 여기서 언급하는 초기 목회지는 잉글런드의 사우삼튼(Southampton)에 있는 포트랜드 채플(Portland chapel)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11년간 한눈을 팔지 않고 저력을 키우며 겸손히 목회하였다.   

 

  강해와 문장 훈련

 

  맥크라렌 목사의 강해 설교를 언급하는 사람치고 그의 문학적 영향을 말하지 않는 자가 없다. 워드 박사는 만체스터에 있는 오웬스 칼리지의 학장이었고 30년간 영문과 교수로 재직한 교수였다. 그는 “맥크라렌 목사의 설교가 적어도 만체스터 도시에서 주된 문학적 영향을 끼쳤다”고 치하하였다.

지성인들은 맥크라렌이 강단의 존 러스킨(John Ruskin)이라고 불렀다. 존 러스킨은 당대의 유명한 사상가였는데 그의 문장의 정확성과 탁월한 스타일은 정상급이었다. 맥크라렌 목사는 의도적으로 언어의 정확성을 기하였다. 그는 강단에서 적합한 단어가 나오지 않으면 한동안 기다리기도 하였다. 회중은 처음에는 그가 목이 메어 말을 못 잇는 줄 알았다. 맥크라렌 목사의 메시지는 너무도 정밀한 어휘를 사용하여 마치 신문에 싣기 위해서 철저한 교정을 끝낸 글과 같았다. 그래서 맥크라렌 목사처럼 언어의 위력을 설교와 글에서 크게 과시한 강해자는 드물다는 것이 많은 사람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의 강해집을 읽으면 저술가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숙련된 문장이 자연스럽게 흐른다. 그의 메시지는 논리적이면서도 긴박감과 호소력의 무게를 담은 열정이 감돌며 전혀 예기치 않은 대목에서 갑자기 심혼을 파고드는 심오한 문장들이 아침 햇살처럼 밝게 비쳐 나온다. 당시에 유행하던 설교 스타일은 정교한 대구법이나 화려한 은유나 멋을 부리는 클라이막스로 설교자의 지식이나 교양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맥크라렌은 비전문적이며 질박한 용어를 선택하였고 단순하면서도 명료하고 힘 있는 어조로 말씀을 전개하였다.

  강해자는 자신이 성경의 진리를 깨닫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깨달은 진리를 인간의 삶 속에 접목하고 일반 회중이 알아볼 수 있도록 진리를 다듬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정리하여 쉽고 신선하며 깊이 있게 회중에게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은사는 강해자의 문장 훈련과 직결된 것이다. 맥크라렌 목사는 자신이 묵상한 말씀을 인상적이고 정확한 문장으로 표현하였고 논리와 감정과 심혈을 기울여 십자가의 복음을 일궈내었다.  

 

  강해와 관찰

 

  맥크라렌 목사는 인간과 자연을 유별나게 관찰한 자였다. 성경은 창조주로부터 시작한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다루는 자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통찰과 이해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맥크라렌 목사는 일찍부터 인간을 관찰하는 자였다. 책만으로는 훌륭한 강해자가 될 수 없다. 인간의 내면에 깔린 본성의 정체를 파악해야 한다. 회중이나 개별 신자를 바라보는 설교자의 시선은 진지하고 공정해야 한다. 설교자는  속 사람을 꿰뚫는 슬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에 비추어 타락된 인간의 모습을 재해석하고 긍정적인 비전을 가져야 한다. 맥크라렌은 이렇게 말하였다.

인간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라. 거기 운명의 비극들이 깔려 있다. 거기 기쁨의 희극이 있고 절망의 통곡이 있다. 인간들의 마음속에 슬픔과 소망이 끝없이 교차한다.”

  위대한 강해자들은 인생 공부의 필요성을 아는 자들이다. 그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항상 던지면서 산다. 그들은 인생살이에 대한 남다른 이해를 지닌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인간의 모든 번뇌와 아픔과 연약함이 치유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인간의 고통과 문제들을 안고 날마다 십자가로 가는 자들이다. 탁월한 강해자는 신학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이 무엇인지를 날마다 관찰하며 배워갈 때에 십자가의 복음은 더욱 빛나고 고통받는 회중의 가슴 속에는 소망이 피어오른다.

 

  맥크라렌 목사는 자연을 사랑하였다. 그는 심미적인 눈으로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바라보고 경탄하며 기뻐하였다. 그는 아름답고 장엄하며 섬세하고 신비한 자연계가 지닌 소중한 가치를 아는 자였다. 그는 여행을 즐겼는데 그때마다 묘사한 자연 경관은 일급 문학이다.

필자는 그리스도인만이 진정한 자연주의자라고 믿는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한 자연 예찬론자가 아니고 자연 뒤에 숨어 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과 호흡과 능력과 지혜와 마음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연 숭배자가 아니고 창조주 경배자다.

맥크라렌 목사는 자연을 관찰하고 얻은 소득들을 그의 설교에서 매우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의 예시였기에 그의 자연 묘사와 실물 교훈은 그 자체로서도 훌륭한 메시지였다. 자연은 그에게 캐내지 않은 예시의 보물들을 무제한으로 저장한 곳이었다. 맥크라렌 목사는 유럽의 여러 나라로 휴가를 가서 인간들이 세운 문화의 유산들을 즐기기도 했지만 그의 모국 땅인 스코틀랜드의 미려한 자연 속에서 더 많은 휴가를 보냈다. 창조주 하나님은 애초에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이라는 자연 속에서 지으시고 에덴을 인간들의 생활 환경으로 주셨다. 인간의 최선의 환경은 바벨탑의 도시 문화가 아니고 자연환경이다. 자연은 인간의 정신을 정화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준다. 자연은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초월하는 신비의 세계를 열어주고 창조주의 놀라운 솜씨를 찬양케 한다. 자연 속에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 자연은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원색적으로 접근케 한다.

 

  강해설교 준비

 

  맥크라렌 목사는 설교를 미리 준비하지 않았다. 그는 몇 달 전 혹은 몇 주 전에 설교를 준비해 두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의 모토는 “뜨겁게 달구어졌을 때 내놓아야 한다.” 는 것이었다. 그는 매주 필요한 메시지를 준비하였다. 이것은 대부분의 설교자가 당하는 고충이다. 목회를 지망하는 자들은 강단에 서기 전에 부지런히 자료를 모으고 설교 아웃드라인도 미리미리 준비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정작 강단에 서면 기껏 모아둔 설교 자료들이 그리 오래 가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밑천이 동이 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매주 설교를 적어도 한두  개는 내놓아야 하는데 일주일이 목회자들에게는 너무도 빨리 돌아온다. 그래서 매주 설교할 메시지를 그때그때 제대로 준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때가 많다. 이것이 강단 메시지의 질이 떨어지는 한 원인이다. 매주 설교 준비를 하려면 철저한 시간 관리와 정신적 집중과 상당 기간에 걸친 성경 지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맥크라렌 목사는 설교에 흔신한 자였다. 그는 설교 준비를 위해 투입되는 시간 때문에 다른 활동을 절제하였고 정기 심방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꾸준히 훈련한 지력을 사용하여 본문을 미시경으로 보듯 살폈고 장시간에 걸쳐 쌓아온 성경공부의 지식으로 말씀을 풀어나갔다.

 

  맥크라렌 목사의 대작인 ‘성경강해 전집’(Expositions of Holy Scripture)을 보면 본문들이 어떤 것은 단 한 구절인 것도 있고 또 어떤 것은 한 단원인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의 설교 전집에서는 편의상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를 책별로 편집했지만 실제로 그가 강단에서 한 설교들은 성경의 한 책을 놓고 연속 강해를 한 것은 예외에 속한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강해 전통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맥크라렌 목사는 책 전체를 차례로 정설 강해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전통이 다른 잉글랜드 회중들이 그러한 강해를 감당치 못할 것으로 보고 매주 설교 본문을 여기저기서 찾느라고 고심하였다. 그래서 한 번은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인 그의 아내가 골로새서 전체를 시험 삼아 강해해 보라고 제안하였다. 맥크라렌 목사는 아내의 제안에 따라 골로새서를 처음부터 강해해 나갔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아내는 본 서신을 다 마치기 전에 소천하였다. 많은 사람은 이 골로새서 강해가 맥크라렌 목사가 도달한 강해설교의 정상이었다고 평가한다.

 

  맥크라렌 목사의 강해 준비는 다른 훌륭한 강해자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물론 구체적인 본문 분석이나 접근 방법이나 혹은 말씀 전개와 적용 스타일은 서로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탁월하게 쓰임을 받은 강해자들은 예외 없이 개인 경건의 시간을 가졌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깊었으며 기도와 성경공부에 열중하였다. 맥크라렌 목사는 모세와 예수님의 제자들의 실례를 자주 들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계신 시내 산에 올라갔었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백성들에게 반사하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갔어도 주님과 올리브 산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이 거둔 사역의 열매는 주님과 가졌던 이 같은 경건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과 자주 교제의 시간을 갖는 자라야만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내용이 있다. 맥크라렌 목사는 설교자의 유일한 능력은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참되고 단순하고 진지하게 드러내는 데 있다”고 말하였다. 그럼 이 능력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참되고, 단순하고, 진지한 교제를 갖는 것밖에 다른 길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맥크라렌 목사는 개인 경건과 관련해서 기도를 강조한 사람이었다. 그는 청중들에게 “카펫 한 부분이 무릎에 닿아 구멍이 날 정도로 닳은 구석이 한 군데라도 있는가?” 라고 자주 물었다. 사람들은 성경 강해의 비결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필자가 알기로는 별다른 비결이 있는 것 같지 않다. 유명한 성경 강해자들은 누구나 주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고 말씀을 묵상하였으며 기도에 힘썼다. 그런 과정을 겪은 강해자들은 모두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을 전하였고 그들이 전한 메시지는 인간의 영혼을 파고들었다.

참고로 맥크라렌 목사는 1900년 1월 미국의 로체스터 신학교의 설교학 교수로부터 강해 설교의 원리에 대한 요청을 받고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1. 묵상(시편 39:3)

  참을성 있게 묵상한다è마음이 뜨거워진다è진리가 깨달아지면서 정신이 밝아진다è성령의 감동으로 말씀이 쏟아져 나온다.

  2. 전도적인 요소가 평이하고도 간곡하게 선포되어야 한다.

  3. 중심 주제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한다.

  4. 모든 사람을 경고하고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윤리적이고 교육적인 측면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첫 번째의 ‘인내의 묵상’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맥크라렌 목사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반향하는 메아리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였다. 그의 메시지에는 성경 이외의 다른 사람들의 인용문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독창적인 강해 설교를 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인내의 묵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묵상은 누구나 할는지 몰라도 마음이 뜨거워질 때까지 기다리는 자들은 어쩌면 그리 많지 않을지 모른다.

 

  로맨스

 

  맥크라렌 목사의 로맨스도 강해 설교에 대한 그의 자세처럼 꾸준하고 진실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로맨스는 보통 사람들의 경우와 두 가지 면에서 퍽 특이하다. 하나는 10세 때에 이미 상대방에게 반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촌 동생에게 장가를 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첫사랑의 사건을 이렇게 고백했다.

“10세 때에 나는 아버지와 함께 글라스고에서 버스를 타고 에딘버러의 큰 아버지 댁으로 갔다. 에딘버러의 프린쎄스 거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진 후였다. 그러나 거리에는 불빛이 있어서 에딘버러 성과 암벽의 형체가 보였다. 거리에는 멋진 모양의 가로등이 하나씩 별빛처럼 밝게 켜지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도 마음이 기뻤다. 나는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환상의 세계로 들어간 것 같았다.

나는 그날 저녁에 있었던 일을 결코 잊지 못한다. 처음으로 나는 그날 저녁 큰아버지 댁에서 사촌 동생인 마리온(Marion)을 만났다. 마리온은 짙고 반짝이는 맑은 눈으로 나를 환영하였다. 그러나 나는 너무도 수줍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이 회고담은 맥크라렌 목사가 83세 때에 들여준 것이다. 그에게는 마리온과의 첫 만남이 비록 어린 나이에 있었던 까마득한 옛일이었지만 그의 뇌리에서는 언제나 생생히 남아 있었음에 틀림없다.

  스코틀랜드 인들은 크리스마스 때마다 집안의 제일 큰 어른댁으로 모인다. 맥크라렌이 에딘버러의 큰 아버지 댁에 오면 양가의 아이들이 모여 즐거운 게임을 하였고 헤어질 때는 모두 섭섭해 하였다. 특히 맥크라렌은 핑계만 있으면 큰아버지  댁에 더 머물기를 원하였다. 마리온은 둥글고 균형 잡힌 예쁜 얼굴이었다. 갈색 눈은 맑고 부드러웠으며 성격은 온화하고 친절하였다. 어느 날 마리온은 친구와 함께 공원에 갔었다. 그녀는 공원지기에게 자기 집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장미꽃이 피어 있다고 말했다. 공원지기는 마리온을 바라보면서 “나는 네가 지금까지 보아온 꽃 중에서 가장 예쁜 장미 송이란다” 라고 말해 주었다.

맥크라렌과 마리온은 결혼할 때까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유감스럽게도 맥크라렌은 그의 사랑의 편지들을 모두 태워버렸다. 그 까닭은 그가 토마스 카알라일의 연서들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카알라일의 연서들이 더 뜨겁고 간절했던 모양이다.

여담이지만 카알라일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방세도 제때에 낼 수 없는 처지였다. 필자는 스코틀랜드에 살 때 카알라일이 셋방으로 살았던 에딘버러의 콤리 뱅크(Comely Bank)에 친척이 있어서 자주 그의 작은 연립 주택 앞을 지나다녔다. 그는 여기서 약 5분 거리에 떨어진 다른 셋방에서도 살았는데 역시 초라한 방이었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간절한 사랑의 편지를 보낼 대상이 있었고 그 내용은 맥크라렌과 같은 인물의 연서를 불태워 버리게 할 만큼 짙은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남녀의 사랑은 다른 경우에 비하면 훨씬 더 공평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가난한 자에게도 찾아오기 때문이다.

 

  맥크라렌과 마리온은 1856년 3월에 결혼했다. 맥크라렌의 나이 30세 되던 해였다. 마리온은 맥크라렌과 사촌 간이었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이것이 불법이 아니었다. 마리온은 에딘버러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고 문학에 자질이 있었다. 그녀는 기독교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았고 가난한 자들을 무척 동정하였다.

맥크라렌 목사는 사랑하는 좋은 아내를 맞이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면서 말씀 사역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는 아내 자랑을 아끼지 않았고 가정에서 늘 기쁘고 감사하다고 말하였다. 그는 수요 저녁 예배 때에 아내가 강대상에서 잘 보이는 곳에 앉기를 원하였다. 그녀의 임재가 그에게 큰 용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요일 설교는 맥크라렌의 주일 강해 설교보다 더 나은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사랑하는 아내의 모습을 가까이 보고 느끼면서 강론한 말씀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맥크라렌 목사는 후일 이미 고인이 된 아내에 대해 칭찬하기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안내자며 교정자였다. 그녀는 나의 영감이었고 나의 상급이었다. 인간의 형성기에 받는 모든 영향 중에서 그녀가 내게 최대 최선의 영향을 주었다. 누가 본인에 대해서 말할 때 그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 삶의 가장 큰 부분을 잘라낸 것이다. ”

 

  “내일이면 결혼 30년째가 된다. 나는 그 옛날 크나큰 긍지와 기쁨으로 마리온을 내 집으로 데려왔었다. 그때부터 마리온이 본향으로 갈 때까지 우리 사이에는 구름이 낀 날이 없었다. 마리온은 사랑과 이타심으로 채워지지 않은 일이나 말을 내게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가정생활  

 

  맥크라렌 목사와 마리온 사이에는 두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남편과 아내 사이가 행복했던 관계로 자녀들에 대한 그들의 애정도 깊고 따뜻하였다. 이들은 자녀들의 학교생활에 관심이 많았고 가정에서 가족으로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를 좋아하였다. 맥크라렌은 서재 일이 끝나면 늘 가족들에게 읽을거리를 가져왔다. 이것은 영국 가정의 좋은 전통이다. 특히 일과가 끝나고 아이들을 잠재울 때 항상 부모가 책을 읽어 준다. 아동문고가 많이 발달하였고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매우 신실한 편이어서 매일 밤 자녀들에게 유익하고 재미있는 동화나 동시를 읽어 주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손님들이 와 있더라도 부모들은  양해를 얻고 아이 방으로 들어간다. 이런 책 읽어주기가 아이들의 인지 발달과 상상력, 정서, 가치관, 언어 등에 큰 유익이 된다는 것은 재언할 필요조차 없다.

맥크라렌은 음량이 풍부하였고 스코틀랜드인의 분명한 발음과 음악적인 리듬으로 책을 읽는 뛰어난 낭독술을 마스터 한 자였다. 그는 문장의 흐름에 따라 어조를 조절할 줄 알았고 파고드는 음성과 완벽한 표현으로 청중의 귀를 사로잡았다. 맥크라렌은 자녀들에게 동화 글짓기도 시키고 함께 즐겁게 게임도 벌렸다. 영국에서는 기독교 문화의 영향으로 가족 중심의 생활이 강조되었다. 그래서 가족 전체가 나이에 상관없이 같이 참여하여 즐길 수 있는 각종 놀이가 많이 발달되었다.

맥크라렌은 가족은 물론이려니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놓고 세익스피어의 희곡이나 브라우닝의 시를 낭송하였고 카알라일의 평론을 읽어 주었다. 그는 특히 러스킨의 독창성과 진지성, 문장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의 글을 황홀해하면서 멋지게 읽었다. 듣는 이들에게 커다란 즐거움을 주었을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T.V와 컴퓨터에 사로잡힌 오늘의 세대에서 자녀들에게 어릴 적부터 명저를 읽어 주고 온 가족들이 모여 가끔이나마 함께 놀이도 하고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다면 우리들의 메마른 삶이 한결 윤택해질 것이다. 

 

  한편 맥크라렌은 아내와 함께 만체스터의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던 할레의 음악 연주회에 자주 갔었다. 자리도 여러 해 동안 지정 좌석을 예약해 놓고 아내와 행복한 시간을 즐겼다. 그는 또 아내에게 ‘현대 미술’ 서적 전 5권을 사 주었고 거의 다 읽어 주었다. 아내를 위해서 단둘만의 시간을 이처럼 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들은 부부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또한 어떻게 즐기는지를 안 자들이었다. 사랑은 혼자 느끼거나 받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랑은 상호 즐김이 있을 때만 행복을 낳는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목회자의 삶에는 긴장과 갈등이 많다. 목회자는 좋은 설교를 하고 나서도 웬지 우울해지는 자들이다. 조그마한 실수에도 신경이 쓰이고 여러 사람들의 염려와 근심과 고통과 기타 복잡한 문제들을 항상 머리 위에 얹고 다닌다. 그러면서도 사람들 앞에서는 자기 문제를 풀어놓을 수 없고 괴로운 일이 있어도 안 그런 척해야 한다. 물론 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목사들 중에는 ‘척’ 씨가 많다. 교인들에게 덕이 되지 못할까 봐 안 그런 척하다 보면 자신의 스트레스는 자꾸 쌓이고 자기 이름은 ‘척 목사’로 변성된다. 그래서 목사들이 찾을 수 있는 안식처는 가정이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원만한 가정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목회자들도 적지 않다.

이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괴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척’ 목사들에게는 맥크라렌 목사와 같은 행복한 가정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맥크라렌 목사처럼 서로 잘 맞는 배우자를 만나 가정의 행복을 누리면서 오직 말씀에 전념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로 불행한 가정생활 속에서도 주의 일을 감당해 나가는 자들도 있다. 존 웨슬리도 그랬고 윌리암 케리도 그랬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지 그런 실례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고통보다는 행복을 원한다. 행복한 가정은 우리 모두의 바람이다.

 

  포트랜드 채플 사역

 

  맥크라렌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잉글런드의 사우삼튼에 있는 포트랜드 채플(Portland Chapel)에서 3개월 임시 사역을 하고 나서 정식 목회자로 청빙 되었다. 맥크라렌 목사가 부임할 때 이 교회는 빚이 있었다. 맥크라렌 목사는 빚이 갚아질 때까지 사례금 없이 봉사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교회 빚도 다 갚고 매우 알찬 교회로 성장하였다.

맥크라렌 목사는 젊었지만 꾸준히 말씀을 공부하며 설교함으로써 점차 인기가 올랐고 여기저기서 설교나 강의 청탁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는 다 거절하고 작은 시골 교회에서 목회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사우삼튼의 일반 젊은 이들을 상대로 고전어 교육을 시도했었다. 그는 헬라어 반을 만들어 40명의 등록을 받았으나 몇 주 후에는 4명만 남았다. 이후부터 맥크라렌 목사는 교회 안에서의 설교에만 전력을 기울였다.

 

  맥크라렌 목사는 매우 논리적이고 신학적이었지만 전문적이지는 않았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나 중심 주제로 삼고 일반 청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쉽고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그의 강단 매너는 보수적이었다. 그는 몸짓보다는 사상을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적합한 어휘와 완벽한 표현을 하는 일에 더 힘썼다. 맥크라렌 목사의 설교가 좋다는 소문이 점차 다른 지역에까지 퍼져 나가자 런던의 조건이 좋은 큰 교회들에서 청빙이 들어왔다. 그러나 맥크라렌 목사는 젊은 나이에 빨리 인기를 끌고 출세할 수 있는 유혹을 받기에는 훨씬 더 현명하고 성숙한 자였다. 그는 조용히 한적한 곳에 머물면서 사우삼튼의 자연을 즐겼다. 그는 길가에 핀 작은 꽃 한 송이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았고 가까운 뉴 포레스트(The New Forest) 숲에서 산책하며 묵상하는 소시민의 생활을 만족하게 여겼다. 그는 노년이 되어서도 자연과 가까이 지냈던 이때의 시절을 회상하며 감사하였다.

 

  맥크라렌 목사는 기질로는 학생이었고 성격으로는 내성적이었다. 그는 나중에 잉글랜드 침례교단의 회장직까지 맡고 활동한 사람이었지만 수줍고 조용한 성품을 지닌 자였다. 그가 자연을 평생 좋아했던 까닭의 하나도 그의 명상적이고 내성적인 성격과 잘 부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언제나 한걸음의 자세로 자기 일에 정진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노동과 휴식의 리듬을 잊은 자가 아니었다. 맥크라렌 목사는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면 성공적인 목회를 하기에는 부적당한 목회자였다. 그는 큰 회중 앞에서 설교할 때에는 괜찮았지만 개인을 대할 때에는 무척 수줍음을 탔다. 그래서 대화가 원만치 못하였고 개인 상담이 어색하였다. 또한 설교에 전적인 비중을 두었으므로 성도들을 정기 심방할 수 없었다. 그는 또 목회자의 가운을 퍽 싫어하였고 설교도 어떤 때는 15분 정도만 하고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서 강단에서 내려오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그의 짧은 설교를 듣고 회심하는 자들이 생겼고 교인 수도 점증하였다.

한편 그가 목회자로서 대성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그는 여기저기에서 들어오는 집회 초청을 선별하는 지혜가 있었고 그리 중요하지 않은 사회 활동이나 회의 등에 자신의 시간을 빼앗기지 않도록 각종 초청을 확고하게 사양하는 결단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건강을 위해 목회 초기부터 결심한 것이 있었다. 그는 머리가 베개에 닿으면 누워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는 평생토록 불면증에 걸린 적이 없었다. 오후에도 자신이 원할 때는 한두 시간 오수를 즐길 수 있었는데 이 같은 숙면은 그의 긴 사역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다.

 

  맥크라렌 목사는 포트랜드 채플에 있을 때 마리온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신혼 생활의 단꿈은 이곳에서 계속되지 못하였다. 그들은 결혼 후 약 2년 후에 만체스터의 유니온 채플(Union Chapel)로 옮기게 되었다. 이들이 포트랜드 채플을 떠날 때는 서로 목이 맸다. 그가 젊은 청년으로 부임하여 11년간 섬긴 교회였고 가정의 보금자리를 꾸몄던 곳이 포트랜드 채플이었다. 그러나 교인들도 맥크라렌 목사가 더 넓은 지경으로 나가서 주님의 사역을 확장해야 할 인물이라고 모두 인정하고 예의를 갖추어 보내 주었다.

 

  유니온 채플 사역

 

  맥크라렌 목사는 1858년 4월 만체스터의 유니온 채플에서 주일 설교를 부탁받은 것을 계기로 대형 교회의 정식 목회자가 되었다. 선임 목회자는 실력 있고 존경받는 분이었다. 유니온 채플에는 지적이고 저명한 사회 인사들이 많았다. 일부에서는 맥크라렌 목사의 설교가 이들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으로 우려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는 오히려 젊은 목회자를 감싸주고 격려하였다. 이미 성숙한  교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분규와 갈등이 있으면 적응 문제로 목회자의 에너지가 소진되기 쉽다. 그러나 맥크라렌 목사는 교인들의 적극적이고 따뜻한 협조를 받으면서 대양 어획을 위해 새로운 사역의 배를 띄웠다.

  맥크라렌 목사의 명성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곳은 그가 유니온 채플로 목회지를 옮긴 이후부터였다. 그는 ‘만체스터의 맥크라렌’으로 알려졌고 그의 설교는 런던에서 발간되는 ‘더 크리스천 코먼웰스’(The Christian Common Wealth)신문에 매주 전문(全文)이 실렸다. 필자가 현재 1부 소장하고 있는 이 신문에는 ‘1897년 11월 목요일’ 자로 된 것인데 갈라디아서 6장 2절에서 5절까지의 본문과 메시지가 실려 있다. 지금으로부터 1백 년이 훨씬 넘은 빛바랜 신문에 실린 메시지지만 맥크라렌 목사의 낭랑한 음성이 들리는 듯하여 소중하게 보관 중이다. 맥크라렌 목사의 명성은 그에 대한 유명 인사들의 찬사에서 거듭 확인될 수 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그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주일 날 아침 위대한 만체스터의 설교자인 알렉산더 맥크라렌 박사의 메시지를 들었다. 그의 설교는 영혼을 뒤흔드는 거창한 말씀이었다. 그의 설교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내 속에서도 뜨겁게 점화되었다. 그는 거대한 열정을 가진 멋진 노장이다.”

 

  만체스터의 주교도 맥크라렌 목사의 강해를 극찬하였다.

  “깊은 생각과 논리적인 전개로 설득력 있게 인간의 마음을 압도하는 능력에 있어 맥크라렌 목사의 강해를 능가하는 메시지는 없다.”

 

  당시의 신학자였던 조셉 앙구스도 이렇게 말했다.

  “본인은 성경 강해를 맥크라렌 목사처럼 철저하게 해설하는 자를 만나보지 못하였다. 그는 성경의 핵심 진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들의 평화의 기초로 삼고 우리 삶의 모델로서 제시할 뿐 아니라 십자가를 우리들의 헌신의 최대 동기로 굳게 확신하고 말씀을 전한다. 그는 훌륭한 상상력과 적절하고 인상적인 언어와 온화하고 투신된 개성을 가졌다. 본인은 맥크라렌 목사가 비국교도들의 최대 모델이라고 믿고 하나님께 감사한다.”

 

  맥크라렌 목사는 영어권에서는 19세기 최대 설교자들의 한 사람으로 자타가 인정하였다. 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교단의 신학자며 설교자였던 토마스 챔머스(Thomas Chalmers 1780-1847)나 런던의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1834-1892)이나 버밍햄의 회중교회 목사였던 윌리암 데일(William Dale, 1829-1895)과 어깨를 나란히 겨룬 강해자였다. ‘설교자 중의 설교자’라고 불린 조셉 파커(Joseph Parker, 1830-1902)는 맥크라렌 목사에 대해서 이렇게 실토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어떤 사람에게서 보다도 맥크라렌 목사에게서 더 큰 고난을 겪었다. 그는 내 교회 옆에서 설교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무려 11년간이나 이분의 강해 설교 때문에 고문을 당하다가 런던으로 교회를 옮기게 됐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파커 목사답게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매우 위트 있게 표현한 고백이다. 파커 목사와 맥크라렌 목사는 공교롭게도 같은 해에 만체스터로 왔고 서로 가까운 거리에서 목회하였다. 이들은 사실상 좋은 친분을 가지고 오랫동안 교제했었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미국인 성도가 만체스터에 도착한 후 말로만 듣던 맥크라렌 목사가 설교하는 유니온 채플을 찾아왔다. 그는 모처럼의 기회였기에 제일 앞 좌석을 원하였다. 그러나 좌석 안내원이 허락지 않았다. 지정 좌석표를 가진 분들이 먼저 참석한 후에 좋은 자리를 드릴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꾸 밀려들자 조급해진 이 미국인은 팁의 위력을 생각하고 안내자의 손에 동전 몇 개를 쥐어주었다. 안내자는 깨끗이 사절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천만에요. 제가 자리를 틀림없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내 부친이 강단에 올라가시기 전에는 당신을 절대 앉힐 수 없습니다.!” 

  이 말에 그 미국인 방문자는 기겁하고 죽은 듯이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는 어쩌면 팁 때문에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영국에는 팁이 일반화되어 있지 않다. 더구나 성스러운 교회 안에서까지 미국의 상업주의가 시도됐다는 것은 매우 유감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미국인 방문자는 유명한 맥크라렌 목사도 보고 그의 아들까지 보았으니 팁 때문에 일석이조의 소득을 올린 셈이었다. 하기야 얼마나 원했으면 교회 안내원에게 좋은 자리 빼앗길까 봐 팁까지 주었겠는가! 적어도 그는 야곱이 에서의 장자권을 어떻게 해서라도 소유하기를 원했듯이 영적 가치를 아는 자였음이 분명하다.  

 

  맥크라렌 목사는 만체스터의 유니온 채플에서 45년간 사역하였다. 한 교회에서 이처럼 장기 목회를 하면서도 매주 신선하고 능력 있는 메시지를 전하고 명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범상인의 일이 아니다. 그가 유니온 채플에 온 이후 교인 수가 계속 증가하여 2천 명 수용의 새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맥크라렌 목사는 유니온 채플에 있는 동안 미국의 아메리칸 썬데이 스쿨 타임즈(American Sunday School Times)에 매주 기고를 했는데 20년간 한 주도 거르지 않았다.  

  미국의 ‘예일 강좌’(Yale Lectures)에서는 맥크라렌 목사를 강사로 초빙했으나 거절당했다. 잉글랜드 버밍햄의 카스레인 회중교회(Carr’s Lane) 목사였던 윌리암 데일(William Dale)은 맥크라렌 목사에게 개인 서신까지 써 보내면서 ‘예일 강좌’를 수락하라고 적극적으로 권고하였다. 데일 목사는 ‘예일 강좌’에 초빙된 적이 있었고 강의 내용을 출판하기도 했었다. 그는 스펄전 목사에게도 ‘예일 강좌’를 추천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맥크라렌 목사와 스펄전 목사의 사절 이유는 퍽 흥미롭다. ‘예일 강좌’는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자들만을 초청했는데 여기서 강의를 하고 나면 강사들의 유명세가 더 높아졌다. 그럼에도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에 맥크라렌 목사는 ‘예일 강좌’를 사양했다. 그는 첫째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였고 둘째 스트레스가 많아 건강에 해로울 것으로 여겼다. 반면 스펄전 목사의 거절 이유는 다소 냉소적이었다.  

  “나는 나의 대문 앞에 앉아서 내 가락에 맞추어 피리를 부오. 나는 이것으로 만족하오.” 

  역시 거장들이 하는 이야기이다. 당시의 두 거두들이 ‘예일 강좌’의 유혹을 밀쳐버린 이유는 그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다.  

 

  한편, 데일 목사는 칼빈주의 교리에 반발하여 인간의 전적 타락,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적 속죄, 영벌 등을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알미니안 주의를 신봉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신학자였고 저술가였으며 매우 능력 있는 설교자였다. 그러나 그는 맥크라렌 목사나 스펄전 목사처럼 전통신학에 속한 자가 아니었음에도 이들과 친분을 유지하였다. 신학적 진영이 다르고 견해가 틀린다고 상종을 하지 않는 것은 역시 소인들의 작태이다.  

맥크라렌 목사와 스펄전 목사도 원래는 같은 침례교 교단에 속해 있었다. 나중에 분규가 생겨 스펄전 목사와 다른 진영에 속하게 됐으나 이들은 서로 마음 상하는 말을 주고받지 않았으며 교분도 오래 지속하였다. 1875년 침례교 교단 대회 때 맥크라렌 목사는 스펄전 목사와 동석하였고 당시 최고의 연사들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인파가 넘쳤다. 맥크라렌 목사는 스펄전의 장례식 때 4차례에 걸쳐 다른 회중들을 상대로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맥크라렌 목사는 노년에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스펄전의 설교를 여러 편 읽는 중이다. 매우 큰 도움을 받으면서 감동을 느낀다. 그의 설교들에는 예수님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정열이 가득 차 있다. 이것들은 내 마음을 감화시키고 견책한다.” 

 

 

  50주년 사역 기념  

 

  1897년은 맥크라렌 목사가 70세 되던 해였고 50년의 강단 사역을 한 해였다. 만체스터 시() 당국은 맥크라렌 목사의 공헌을 기념키 위해 50주년 기념행사를 주선하였다. 그는 비국교도였음에도 영국의 최대 해자로 손꼽히는 영예를 차지하였다. 그의 동상 건립이 제안되었으나 본인의 강력한 반대로 취소되고 그 대신 초상화가 그려졌다. 이 초상화는 스코틀랜드 아카데미 회장인 조지 리드(Sir George Reid)경이 그렸는데 지금도 만체스터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기념식에는 각계의 여러 저명한 대표들이 나와서 찬사를 하였다. 잉글런드는 국교가 성공회이다. 그런데도 성공회 주교까지 와서 비국교도인 맥크라렌 목사의 공적을 칭송하였다. 종교개혁 이후에 있었던 국교도와 비국교도들 사이의 갈등과 투쟁의 역사가 있었음에도 상대방에게 빚을 졌다고 감사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 형제들의 진정한 마음가짐이다. 이 기념식에는 참석자 전원이 기립하여 맥크라렌 목사의 답사 등단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본인이 너무도 빈약하다는 사실을 잘 아는 터에 이처럼 찬사를 받는 것은 믿기 어렵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n a Kempis)의 위대한 말이 떠오릅니다.  

 

  ‘당신은 칭찬을 받는다고 해서 더 거룩하지 않다. 당신은 비난을 받는다고 해서 더 악하지도 않다. 당신은 당신 자신일 뿐이다. 하나님의 눈에서는 당신의 실제 모습보다 더 낫게 보이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본인은 여러분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것을 감사하면서도 찬송가의 가사처럼 ‘아무것도 내 손에 들고 가지 못합니다. 오로지 당신의 십자가에 매달립니다’라고 외칠 뿐입니다. 본인은 자신의 업적에 대해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본인이 가진 목표에 대해 언급하기로 합니다. 특히 젊은 형제들이 이 자리에 많기에 자신에 대한 한가지 고백을 합니다. 본인은 단 하나의 목표를 안고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 목표는 나의 모든 힘을 강단 사역에 집중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본인은 이 목표를 지금까지 지켜왔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본인은 목회자들의 성공 비결은 설교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인간의 죄는 계속됩니다. 인간의 필요도 계속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도 계속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구주 예수를 설교해야 합니다. 자신을 말씀에 집중시키십시오. 성경의 진리를 설교하십시오. 구속주 그리스도를 외치십시오. 두려워 말고 그리스도 예수를 설교하십시오.” 

 

  맥크라렌 목사는 유니온 채플에서 이런 자세로 45년간 말씀을 전하다가 1903년 6월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였다.  

 

 

  인간 맥크라렌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대학과 글라스고 대학에서는 1877년과 1907년에 각기 맥크라렌 목사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 하였다. 이것은 커다란 영예였고 맥크라렌 목사도 기뻐하였다. 그러나 정상이 있으면 계곡도 있기 마련이다. 에딘버러 대학에서 맥크라렌 목사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 했던 1877년, 같은 해에 한 집에서 기거해왔던 착한 처남이 장기간의 투병 끝에 사망하였다. 또한  살림을 잘 도왔던 맏딸이 행복한 가족의 각가지 추억들을 남기고 출가하였다. 갑자기 가족 중에서 두 사람이 빠져나가자 집은 텅 빈 것 같았다. 맥크라렌 목사는 마치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다음 해에 그의 셋째 딸이 불과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맥크라렌 목사 부부에게 이처럼 커다란 슬픔은 없었다. 맥크라렌 목사는 이때부터 사실상 깊은 우울증에 빠져 오랜 세월 동안 고통을 받았다.  

  그는 딸을 잃은 지 2년도 못 가서 완전히 의욕을 상실하였다. 그는 유니온 채플에서 22년째의 사역을 시작하던 1880년 더 이상 설교를 할 수 없을 만큼 정신적 육체적인 피곤함에 압도되었다. 그는 자신의 강단 사역이 끝났다고 보고 사표를 낼 생각이었다. 수십 년을 말씀으로 자신을 닦아오고 수많은 회중들에게 신령한 양식을 제공해 왔던 영적 거장이 의욕 상실증과 우울의 늪에 빠져 평생의 피땀을 쏟아부었던 강단을 떠나려고 한 것은 얼른 납득이 가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여러 개의 다리로 지탱되는 인생의 의자 위에 앉아 있는 존재이다. 그리스도인은 아마 자신의 받침대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원칙적으로 옳은 말이지만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우리들의 삶은 의자의 다리처럼 가시적인 복수의 받침대를 지니고 있다. 의자 위에 앉은 자는 의자의 다리가 부러져 나갈 때 균형을 잃는다. 우리들의 삶은 가족, 직장, 친구, 기타 여러 환경적 요인들의 다리 위에 받쳐져 있다. 그러다가 다리들이 꺾이면 그때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자기의 받침대들에 의존되어 왔는지를 깨닫는다. 받침대들의 붕괴는 인간의 유약성을 노출한다. 물론 받침대의 의존 자체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인생은 그런 받침대들이 없으면 삶이 구성될 수 없는 세상에서 산다.  

  맥크라렌 목사의 경우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가정생활에서 커다란 기쁨과 행복을 느꼈던 자였다. 그에게는 안정되고 안락한 스위트홈이 자신의 거대한 강단 사역을 받쳐 주는 중요한 다리였다. 사랑하는 처남과 막내딸의 죽음, 그리고 큰 딸에 대한 그리움은 이 불가결한 다리를 꺾어놓는 일이었다. 맥크라렌 목사의 무기력과 우울증은 그 당시의 개인의 영적 상태에 근거해서 판단될 문제가 아니고 인간의 연약성에 대한 진실로서 겸손히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유니온 채플은 맥크라렌 목사의 곤고한 입장을 이해하고 무기한 휴가를 주었다. 맥크라렌 목사는 스코틀랜드의 아비모어(Avimore)라는 곳에 가서 거의 4개월을 휴양하였다. 아비모어는 현재는 스키장으로 개발되었지만 여전히 공기가 맑고 주변 경치가 수려하다. 맥크라렌 목사는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다시 유니온 채플로 돌아왔다. 그러나 일단 부러진 다리는 고쳐져도 이전만은 못한 법이다. 맥크라렌 목사는 이때부터 부목에게 설교 시간을 많이 할애해 주고 자신의 설교 스케줄을 줄였다. 그는 다시 강단에 오를 만큼 회복은 됐지만 초조감이 떠나지 않아 고통을 받았다.

  그런데 정말 가장 많은 고통을 받는 자는 맥크라렌 목사의 아내였다. 그녀는 늘 명랑하고 밝은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극히 피상적인 표정 뒤에 감추어진 참모습을 쉽게 보지 못한다. 인간의 눈은 그만큼 제한적이다. 마리온 부인은 사실상 남편의 문제 때문에 퍽 두려워하였다. 그렇지만 아무와도 이야기할 수 없었기에 남모르게 고통을 받았다. 그녀는 1884년 남편과 함께 스코틀랜드의 퍼스샤이어(Perthshire)에서 휴가를 보냈다. 그녀는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면서도 이상스러운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녀는 한 편지에서 “나는 크게 불안하다. 왜 그런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초조와 염려가 나를 삼키고 있다”고 썼다.  

따져보면 마리온 부인은 남편의 우울증과 의기소침으로 여러 해를 시달려왔었다. 그녀는 남편의 건강이 회복되지 못할 경우 그의 커다란 사명과 책임을 염려했을 것이다. 또한 남편이 의욕을 상실하고 간신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도 처절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가끔 생각해 보았을지도 모른다. 원인 모를 그녀의 불안과 초조는 자신이 죽을 경우 남편이 얼마나 힘들어 할 것인지를 상상해 본 일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가끔 놀라울 정도로 자신의 예기치 않은 죽음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마리온 부인은 휴가 후에 다시 정상적인 자기 일로 돌아갔다. 어느 날 그녀는 집회에 다녀왔다. 항상 남을 위한 봉사로 여기저기 집회에 다녀오는 것은 그녀의 일상 스케줄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집회 참석은 달랐다. 그녀의 마지막 참석이었기 때문이다. 마리온 부인은 그 후 감기로 생각된 열과 기침으로 가슴막염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몇 달 안에 사망하였다. 마리온 부인의 죽음은 아직도 침체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맥크라렌 목사에게 너무도 깊은 충격을 주었다. 그의 서신들은 아내의 죽음으로 빚어진 슬픔과 낙심 그리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주는 인간의 애환을 애달프게 묘사하였다. 인간은 비극을 당할 때 가장 인간답다. 인간의 비극은 자신의 연약성과 무력성을 절감하게 한다. 인간은 비극 속에서 자아를 발견한다. 비극은 모든 인간을 겸비하게 만든다.    

  맥크라렌 목사는 물론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한 이후에 곧 폐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20년 이상 더 사역하였고 그의 명성은 더 널리 알려졌다. 그럴지라도 그가 받은 아내로 인한 심적 아픔은 남은 삶 동안 그를 떠난 적이 없었다. 그는 외면적으로 보면 건강도 괜찮았고 평상 업무에 별다른 지장을 받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의 죽음으로 그의 마음속에 접힌 주름살은 깊은 고랑을 이루었고 아내 없이 하루해를 넘기며 홀로 살아가야 하는 고독은 견디기 힘들었다.  

 

  “곤비한 나날이 지나간다. 시계의 초침 소리는 메인 스프링이 끊어져도 한두 번 더 째깍거린다. 내가 그런 식으로 살아간다. 머지않아 내 심장의 초침소리도 완전히 멈추게 될 것이다.” 

 

  다음은 맥크라렌 목사가 부인 사망 2주년을 보내고 쓴 글이다.  

 

  “나는 그들이 나와 함께 흰 옷을 입고 살리라’는 제목으로 설교 준비를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토요일 밤이 왔을 때 나는 이 제목으로 도저히 설교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바울의 데살로니가서의 가르침을 더 분명히 깨닫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의 죽음이 하나의 생존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재연합임을 설교의 뼈대로 삼았다. 이 성도의 재연합이 내게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이 확신을 내가 굳게 가지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맥크라렌 목사는 아내의 사망 이후 해가 거듭됨에도 아내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도무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는 누구든지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그의 아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은 미완성 유고라고까지 말하였다. 맥크라렌 목사는 아내가 사망하고 나서도 장기간 강단 사역을 더 지속하였고 은퇴 이후에도 여러 해 동안 활동하였다. 그 긴 세월 동안 맥크라렌 목사는 아내에 대한 각가지 추억으로 고통을 받았다. 사랑하는 자의 죽음은 일회로서 끝난다. 그러나 남은 자는 여러 번 죽는다. 다음은 마리온 부인의 사망 4년째에 쓰인 회고문이다.  

 

  “나는 오늘 아침 아내가 세상을 떠났던 우드리(Woodlea)의 옛 집을 지났다. 그 길의 구석구석이 마리온과의 추억으로 채워져 있다. 한 번은 마리온이 도르가회에서 돌아오던 중이었다. 나는 그때 저녁 예배를 인도하려고 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마리온이 힘들게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리온은 아직도 꽤 먼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도 나를 보았을 때 마리온의 얼굴은 소녀처럼 수줍어지면서 밝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도 그때 나를 보고 반가워하며 힘을 내어 더 빨리 걸어오던 마리온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모든 지나간 추억들이 현재라고 부르는 이 순간보다 더 선명하게 내 앞에 서 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저녁 하늘을 본다. 그때 들었던 새들이 지금도 지저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 길을 눈보라 속에서 나 홀로 걷고 있다. 낯모를 사람들이 우드리의 길가에서 나를 바라본다. 이것은 쓴 잔이다.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해’라고 나는 말할 수 없는 때가 많다. 만약 이 잔을 단숨에 비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이 쓴 잔은 날마다 천천히 비워진다. 온종일 쉬지 않고 한 방울씩 떨어진다. 이 잔을 받기가 너무도 고통스럽다!” 

 

  맥크라렌 목사는 수천 명의 회중을 가진 목회자였다. 그의 세계적인 명성은 많은 친구를 생기게 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그는 늘 편지들을 받았고 그의 곁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그의 아내와 가졌던 시간을 그에게 재현시킬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오직 마리온만 생각하며 죽고 싶어 한 적이 많았다. 다음은 아내의 사후 5년째 되던 해에 쓴 글이다.  

 

  “모든 것이 현실 같지가 않고 그림자 같다. 나는 책을 읽고, 읽고 또 읽는다. 그래도 아내의 얼굴이 나와 책 페이지 사이에 계속 나타난다. 나는 쓰고, 쓰고 또 쓴다. 나는 자신에게 ‘쓰는 일에 몰두하겠다’라고 다짐한다. 그러나 곧 중단하고 다시 아내를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간밤에 나는 아내 꿈을 꾸었다. 나는 좀체 꿈을 꾸지 않기에 이것은 커다란 복이다. 나는 꿈에서 아내도 보았고 그녀의 음성도 들었다. 잠을 깼을 때 정말 내가 아내와 함께 있었던 것 같았다. 잠들기 전에 아내의 꿈이라도 꾸었으면 했는데 내 소원이 정말 응답되었다. 나는 나의 마지막 잠이 속히 오기를 바란다. 이런 소원은 나쁜 것일까?” 

 

  사람들은 맥크라렌 목사가 상처(喪妻)한 지 5년씩이나 지났고 사역에 분주했기 때문에 아내로 인해서 그처럼 큰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공적 인물로서의 모습과 사적 개인으로서의 모습에는 커다란 간격이 있는 경우가 많다. 영적 거인인 맥크라렌 목사가 강단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해하는 모습은 근엄하고 담대하며 진지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서재에 걸린 아내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인간 맥크라렌의 모습은 그지없이 슬프고 나약한 것이었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 자신을 속이지 못한다. 인간은 홀로 있을 때 비극의 실체를 체험한다. 맥크라렌 목사는 1889년 9월 호주 집회를 앞두고 이렇게 썼다.  

 

  “짐을 싸고 이것저것을 준비하는 일이 다 공허할 뿐이다. 나는 서재에서 벽에 걸린 마리온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과거를 되새기고 있다. 이것이 진짜 나의 삶이다. 내가 부산스럽게 여행 준비를 하는 일은 다 허구이다.” 

 

  다음은 맥크라렌 목사가 이 글을 쓴 지 10년 세월이 지난 1899년에 쓴 글이다. 아내가 사망한 지 15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지난밤 엄청난 규모의 회중이 모였다. 복도에까지 꽉 들어차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나의 메시지는 젊은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런 주제로 43종류의 설교를 하였다. 마리온은 이 중에서 26개만 들었다. 마리온이 죽었던 84년 12월 이후로 세월이 흐르는 것이 끔찍하게 느껴진다. 우리들의 결혼은 하나의 짧은 삽입구에 지나지 않았나 보다. 영원이 시작되면 더욱더 그러할 테지. 하지만 이것이 나의 생애이다. 내가 이렇게 지쳐서 끌려가는 세월이 진짜 같지가 않다.” 

 

  맥크라렌 목사의 이 같은 안타까운 실토는 사랑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사랑은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만든다. 그러나 상호적인 사랑은 깊을수록 불행의 씨앗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행복이 불행으로 갑자기 뒤바뀌는 가장 큰 급변의 순간은 인간의 죽음이다. 사랑하는 자의 죽음 앞에서 남은 자는 오열한다. 홀로 가는 여생의 길에서 남은 자는 슬픔의 계곡을 지난다. 미운 자와의 헤어짐은 마음을 편하게 하는 데 사랑하는 자와의 이별은 괴로움을 안겨준다. 사랑이 나빠서가 아니고 사랑을 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약점 때문이다. 사랑은 영원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영원하지 못한 사랑은 이루어진 사랑이 아니다. 영원성이 없는 사랑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사랑은 영원을 요구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인간들은 유한한 세상에서 영원에 속한 사랑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기에 진실로 참되고 깊은 사랑을 하는 자들은 죽음의 불가피성 앞에서 모두 불행해진다. 맥크라렌 목사가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늘 가슴을 앓았던 일도 따져보면 유한한 세상에서 무한한 세계에 속한 사랑을 했기 때문이다.  

 

  맥크라렌 목사는 결혼기념일이 다가오면 아내의 생각 때문에 더욱더 깊은 고독과 침체에 빠졌다. 다음은 아내와의 사별 11년이 지난 때에 쓴 글이다.  

 

  “나는 온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 마리온과 결혼했던 ‘그날’은 언제나 되살아난다. 욥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고 말하였다. 나도 욥처럼 진심으로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생은 얼마나 짧은 것인가. 지금 이 지상의 삶이 얼마나 빨리 끝나겠는가. 마리온이 죽은 지 11년이 지났다. 내가 앞으로 11년을 더 살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이다. 나의 생각을 일에 집중시키기가 너무도 힘겹다.” 

 

  맥크라렌 목사의 이러한 고백에도 불구하고 외부적으로는 거의 상처(喪妻)의 흔적들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정기적으로 매주 탁월한 설교들을 계속 전달하였고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감당해 나갔다. 그래도 맥크라렌 목사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자들의 눈에는 여기저기에서 그의 상흔들을 엿볼 수 있었다. 맥크라렌 목사의 얼굴에 깊게 팬 주름의 고랑과 낭랑한 목소리에 스며든 애상적 어조와 부드러움에 찬 성숙한 그의 가르침은 단련의 세월 속에서 그가 받았던 아픔들을 공명(共鳴))하고 있었다. 

  우리들이 만약 맥크라렌 목사가 아내의 죽음에 관해 쓴 글들만 읽는다면 자칫 하나의 넋두리로 볼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맥크라렌 목사가 인간적인 사랑에 붙잡혀 헤어나지 못했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럴 때 흔히 믿음이 적었느니 아내가 우상이었느니, 그다지 큰 인물이 아니었다는 등등의 갖가지 평을 갖다 붙이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에는 맥크라렌 목사는 하나님의 사랑이 지닌 영원성을 믿었던 자였다. 그래서 그는 아내와의 유한한 사랑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 속에서 재연합의 기회를 얻게 될 것으로 보았다. 그가 비록 아내에 대한 연민으로 죽을 때까지 괴로워했지만 그는 또한 죽을 때까지 주님의 사역에 헌신하였다. 이것이 맥크라렌 목사의 위대한 점이다.

  그는 아내의 죽음으로 침체하였지만 하나님을 저버린 적이 없었다. 그는 아내를 잃고 슬퍼했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였다. 그는 심신이 지쳤지만 주님이 맡기신 일에 사력을 다하였다. 그는 아내의 죽음으로 자신을 힘들게는 했어도 다른 사람에게 슬픈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그는 아내의 사망 이후에 여러 번 사표를 시도했지만 유혹을 밀치고 꾸준히 더 많은 일을 감당하였다. 극한 슬픔과 고독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분을 위해 끝까지 소명을 이행하는 자들은 믿음의 투사들이다. 그들은 인간의 불행을 딛고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불행이 무엇인지를 아는 우리에게 위로와 영감이 된다.  

 

  개인 프로파일  

 

  맥크라렌 목사는 근엄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운 인상을 준다. 그러나 보기와는 달리 개인적으로 대하면 다소 수줍기는 하여도 엄숙하지는 않았다. 그는 상대방의 이야기에 크게 웃기도 하고 은혜로운 유머 감각도 있었다. 한편 그는 명상적이고 조용한 성품을 가진 자였다. 그는 무척이나 자연을 사랑하였고 자연 속에서 쉬면서 은둔 휴가를 보내기를 좋아하였다.  

맥크라렌 목사는 목회자의 정장을 싫어하였다. 그는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 구분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의 옷차림은 소박하였다. 한 번은 휴가 중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어느 교회에서 저녁 설교를 청탁받고 회중석에 앉아 있었다. 교회의 장로가 점잖은 복장을 한 어떤 사람을 목사님으로 짐작하고 강단에 올라가 주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맥크라렌 목사는 평범한 옷차림을 하고 그분 곁에 앉아 있었다.  

  또 한 번은 맥크라렌 목사가 스코틀랜드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어떤 허름한 간이 막사에서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다. 이 사진이 사진관 창문에 전시되었다. 그런데 만체스터와 리버풀에서 올라온 관광객들이 이 사진 인물이 맥크라렌 목사임을 알아보았다. 사진사는 “그 목사님이 그렇게 유명하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필름을 보관해 두었을 텐데”라고 아쉬워하였다. 복사해서 사진을 많이 팔 수 있었을 것이라는 장삿속이었다. 그 사진사는 그분이 전혀 그렇게 유명한 목사님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술회하였다.  

 

  사람마다 버릇이 있다. 버릇은 여러 번 거듭되면서 몸에 굳은 생활 습성이므로 고치기가 어렵다. 그래서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도 있다. 맥크라렌 목사에게도 한두 가지 묘한 버릇이 있었다. 그는 어릴 때 공부를 잘하려고 애썼다. 그는 다락에 올라가서 옛 군복, 헬멧, 칼 등을 책상 옆에 걸어 놓고 공부하였다. 그의 모친은 청교도적이어서 엄격하였지만 자기 아들의 이상한 버릇이 공부에 도움이 된다고 하자 말리지 않았다.  

맥크라렌 목사에게는 설교자가 된 이후에 또 한 가지 별스런 버릇이 생겼다. 그는 슬리퍼를 신고서는 설교 준비를 할 수 없었다. 꼭 단단한 외출용 장화를 신고서야 설교를 준비하였다. 이 버릇은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설교란 기도와 묵상만 하면 준비될 수 있다고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맥크라렌 목사와 같은 영적인 분이 장화를 신지 않고서는 설교가 작성될 수 없었다는 것은 인간의 작은 습성이 우리들의 영적 활동에 끼치는 무시 못 할 영향을 예시해 준다.  

 

  흡연도 반복에 의해 굳어지는 하나의 습관이다. 현대인들은 흡연을 매우 나쁜 습관으로 간주한다. 특히 흡연이 건강에 끼치는 악영향 때문에 현대사회는 흡연을 억제하려고 힘쓴다. 흡연은 우리나라의 경우 교인들이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안다. 그 이유는 건강보다는 음주처럼 흡연도 세속인들의 나쁜 습성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습관들은 시대나 문화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평가된다. 더구나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금하지 않은 것들은 나쁘거나 좋은 것으로 단정적인 구분을 짓기 어렵다. 아무튼 맥크라렌 목사는 흡연가였다. 그는 파이프  담배를 피웠는데 점차 절제하며 줄이기는 했어도 완전히 끊지는 않았다. 그는 사람들과 대화 중에도 파이프를 자연스럽게 피웠다. 흡연으로 말한다면 성경 번역가였던 제이 비 필립스(J.B. Phillips)도 체인 스모커였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도 흡연가였다. 그러나 어느 날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와 담배를 피우자 한 성도가 이를 보고 놀라며 지적하였다. 그 이후로 로이드 존스 목사는 담배를 끊었다고 한다. 연약한 형제의 실족을 배려한 일이었을 것이다.

  본인도 처음에 스코틀랜드의 어느 장로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교제실로 들어갔다가 매우 놀란 적이 있었다. 교제실에서 흡연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라는 자는 필자밖에 없었다. 잉글런드의 회중교회 목사며 신학자였던 윌리암 데일(William Dale) 목사도 흡연가였다. 그는 머리를 짧게 깎고 턱수염과 구레나룻은 길게 길렀다. 어떤 이들은 그의 모습이 세속적으로 보인다면서 신문에 기고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흡연을 놓고 시비를 거는 자는 없었다.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일반적인 습관이었기 때문이다.  

 

 

  강단 공포증 

 

 맥크라렌 목사는 강단을 거의 60년간 올라갔던 대설교자였다. 강단은 그의 삶의 터전이었다. 그는 강단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강단에서 그는 성경을 강해하면서 인생의 보람과 기쁨을 찾았다. 그래서 우리들 생각에는 맥크라렌 목사가 가장 쉽고 익숙하게 기쁨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곳은 교회 강단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정반대였다. 그는 평생을 설교를 하고 살았지만 ‘강단 공포증’에서 헤어나지 못하였다. 어떻게 보면 ‘강단 공포증’은 무능한 설교자들이 걸리는 당연한 두려움처럼 보인다. 자신들의 미비 된 준비와 능력 없는 강해와 여러 부족함이 떠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맥크라렌 목사처럼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하며 귀히 쓰임을 받는 강해자가 왜 강단 공포증에 걸렸을까?  

  필자에게 많은 영적 은혜를 끼친 분 중에 자주 생각나는 목사님이 한 분 계신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알렌 레드파스( Alan Redpath)라는 분이었다. 이분도 연로한 나이가 될 때까지 사역하셨다. 한 번은 필자가 여쭈어본 질문이 있었다. “목사님, 이렇게 오랜 세월을 말씀 강해에 헌신하셨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목사님 대답은 “매우 떨린다”는 것이었다. 레드파스 목사님은 노년에 이를수록 정말 성자와 같았다. 너무도 부드럽고 인자하며 매우 겸비하였다. 이분은 한 때는 성격이 과격하여 강단에서 소리를 지르기도 하셨다. 남의 비판을 받으면 당장 역습을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 저런 일 겪으며 말씀으로 세상을 순회하면서 늙어갔다.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한 마디로 ‘은혜’의 얼굴이었다. 그의 메시지는 젊었을 때나 늙었을 때나 매일반으로 훌륭하였다. 메시지의 질은 자신의 영적 성숙에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 듯하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죄 중에 빠진 자에게도 일시적이나마 영감을 주셔서 얼마든지 감동에 찬 메시지를 전하게 하실 수 있다. 발람의 예언이 그 한 실례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 23:2,3)고 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위선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선자들을 통해서도 신령한 진리의 말씀을 강론케 하셨다는 것은 너무도 역설적인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예수님이 지적하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했지만 오만한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같은 말씀을 전하여도 매우 겸비하다. 그 까닭은 자신의 죄에 대한 의식이 위선자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경건하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말하면 거룩한 삶을 산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거룩성과 십자가의 희생을 생각하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항상 통감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레드파스 목사님은 실제로 강단에서 메시지를 전하시기 전에 매우 불안해하며 몸을 추스르려고 애쓰는 모습이 맨눈으로 보였다. 그는 말씀을 전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떨고 있었다.  

 

  맥크라렌 목사는 강단 공포증 때문에 시간이 됐는데도 준비실에서 나오지 못한 때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문제를 잘 아는 집사 한 분이 강단문을 가리키며 “저기가 길이니 그리로 가십시오”라고 단호하게 야단을 치듯이 설득을 시켜야 했다.  

맥크라렌 목사는 주일 예배가 자신에게는 항상 ‘재앙’이라고 불렀다. 그는 설교에 피땀을 쏟았지만, 자신에게 아무것도 희생되지 않은 것을 주님께 바친다는 자책감에 차 있었다. 그는 기념비적인 설교를 하고서도 세상은 온통 그를 높이는데 자신은 커다란 침체에 빠졌다.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라고 통절히 외쳤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렇게 고백하였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전 2:3).  

  맥크라렌 목사는 은퇴 후에도 가끔 유니온 채플에서 예배 인도를 부탁받았다. 그러나 강단 공포증이 떠나지 않았고 그때마다 신경쇠약이 되어 의사가 허락지 않았다. 그는 설교 대신 성경 본문 봉독을 했는데 그 자체가 하나의 설교처럼 들렸다고 한다. 아무튼 위대한 영적 거장이며 대 설교자였던 사람이 강단을 그처럼 무서워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임재와 복음의 진리 앞에서 죄인이 느끼는 참 경건의 깊은 뜻이 무엇인지를 되씹어 보게 한다.  

다소 문맥이 다르기는 하지만 과거에 미국 텔레비전에서 빌리 그래이엄이 인터뷰 중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천국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어떤 질문을 제일 먼저 던지시렵니까?” 

 

  빌리 그래이엄은 조금도 주저 없이 대답하였다.  

  “주님 왜 저를 택하셨습니까? 전도사가 된 것은 제쳐두고서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게 하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왜 저를 택하셨습니까?” 

  인터뷰 질문자가 다시 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하나님께 하시려고 합니까?” 

  빌리 그래이엄 목사의 대답은 간단하였다.  

  “왜냐하면, 제가 아무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대답을 들은 다른 대담자가 인터뷰가 끝나고 장면이 바뀐 후에 한마디 언급하였다.  

  “우리는 모두 그분이 합당한 자격이 있다고 보는데 본인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군요.”  

 

  강단에 올라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 대한 무익성과 죄악 됨을 통절히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오직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만이 용서받을 것이 없는 의인의 자세로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저술가 맥크라렌  

 

  맥크라렌 목사의 저술은 주로 강해서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여행 후에 ‘이탈리아에서 보낸 휴가’라는 제목으로 1853년에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출판사의 요청으로 인쇄되었는데 맥크라렌 목사의 유명한 ‘Expositions of Scriputure’ 시리즈 이외의 유일한 비종교 저작이다.  

맥크라렌 목사의 설교는 원래 유니온 채플 교회의 회중용으로 배분되었다. 그러나 점점 수요가 늘어나서 단행본으로 인쇄되면서 나중에 32권으로 불어났다. 현재는 미국의 베이커(Baker) 출판사에서 17권으로 묶어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가 강해한 막대한 분량인데 골로새서와 빌레몬서가 헌신용 강해서로서 손꼽힌다. 맥크라렌 목사의 명성은 이 강해 시리즈를 통해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그의 주일 설교는 두 개의 신문에 실렸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경공부용 원고가 미국의 썬데이스쿨 타임스에 매주 20년간 게재되었다. 그는 철저하게 체계적이었고 설교마다 장소, 일시, 본문 그리고 아우트라인을 적어 보관하였다. 그의 설교는 간단한 메모로 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속기사가 받아 써서 보존된 경우도 있다.  

  한편 골로새서와 시편은 설교 전에 출판용으로 미리 집필되기도 하였다. 아무튼 맥크라렌 목사의 강해 시리즈가 본격적으로 집필된 것은 1903년 유니온 채플 교회를 사임한 이후부터였다. 그는 이미 설교한 본문들의 아우트라인만 놓고 내용을 넣기도 하고 완전히 새로 쓰기도 하였다. 혹은 새 설교들을 첨가하기도 하면서 사망 직전까지 집필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일생의 노고가 맺힌 역작이 기독교 강단의 대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맥크라렌 목사의 강해서와 관련된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어두운 겨울 아침 맥크라렌 목사는 연로한 몸으로 아직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를 곁에서 돌보던 사람이 시력이 감퇴한 맥크라렌 목사에게 어느 분의 말씀을 읽어드렸다. 그랬더니 다 듣고 난 후 맥크라렌 목사가 말하였다. “누구의 말씀인지 모르지만 퍽 지혜로운 사람이군.” 글을 읽어 준 사람이 말하였다. “이 말씀의 저자는 알렉산더 맥크라렌입니다.!” 

 

 

  주님 곁으로  

 

 1909년 맥크라렌 목사는 83세의 고령이었다. 건강이 악화하여 소년 시절부터 제2의 고향으로 여기던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로 이사를 하였다. 그는 에딘버러에서 지상의 생을 마칠 계획이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크레이그 과우원(Craig Gowan) 지역의 카 브리찌(Carr Bridge)에 가서 4개월의 휴가를 보냈다. 그곳에서 그는 오래전에 몇 줄의 노트만 적어서 전했던 빌립보서의 옛 설교 본문을 놓고 대필자를 통해 마지막 강해서를 집필하였다. 그후 자주 다니던 산보 지역들을 둘러보며 마지막 작별의 눈길을 보낸 후 에딘버러에 귀가하였다. 그가 살게 된 가옥은(4 Whitehouse Terrace, Edinburgh) 남향 집이었고 브레이드 언덕(Braid HIlls)들이 보였다. 그는 이곳에서 그의 마지막 생애를 약 6개월 정도 보내게 될 것이었다. 1909년 10월 중순 맥크라렌 목사는 스코틀랜드 침례교 교단 총회에 참석하여 축도하였다. 그의 기도는 깊은 감동을 일으키는 경건의 기원이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공적 예배의 인도였다.  

 

  맥크라렌 목사는 더 이상 자유롭게 기거할 수 있는 기력이 없었다. 그는 친구와 친지들이 하나 둘씩 모두 세상을 떠났다면서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힘없이 말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무척 고적(孤寂)하다고 실토하였다. 다음은 맥크라렌 목사가 죽음을 앞두고 한 말씀이다.    

 

  “나는 마치 우리들이 파선된 배의 선원들처럼 뒤집힌 배의 용골에 매달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더 견디지 못하고 물속에 가라앉는 것을 바라보는 듯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는 우리들의 손이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이상 붙잡고 매달릴 수 없을 때 가라앉지 않고 솟아오를 것이다. 다른 선원들이 하나씩 떠날 때마다 우리들의 차례가 그만큼 더 가까이 다가온다. 우리들이 가까이 갈수록 문이 조금씩 더 열린다. 그리고 그 문 속에서 비쳐 나오는 밝은 광채를 보게 된다. 그러므로 생명의 주님 곁으로 더 가까이 나아가자 그리하면 생명으로 들어가는 준비를 하게 될 것이다.” 

 

  맥크라렌 목사는 1910년 5월 5일 밝은 광채의 하늘 문을 지나 주님 곁으로 갔다. 유니온 채플 교회에서 그의 영결 예배가 있었고 그의 시신은 재가 되어 그의 아내와 딸이 먼저 묻힌 부루크랜드 묘지(Brooklands Cemetery)에 합장되었다. 그가 딸과 아내를 먼저 묻고 썼던 묘비명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과 소망 속에서”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맥크라렌 목사의 이름도 먼저 부름을 받은 가족들의 이름 밑에 새겨졌다. 그렇지만 그의 이름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손에 새겨져 있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사 59:16).

 

  그의 이름이 적힌 묘석은 벌써 희미해졌지만 영원하신 하나님의 손에 새겨진 그의 이름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맥크라렌 목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평강과 소망 속에서” 소천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생명의 주님 곁으로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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