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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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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 저술가 아서 핑크 (Arthur W. Pink)

(1886-1952)

 

 생전에는 별로 인정을 못 받거나 알려지지 않다가 사후에 유명해지는 분들이 있다. 그것은 그 시대의 관심이나 가치관이 다르거나 혹은 해당 인물의 환경적 여건이 맞지 않아 빛을 못 보는 경우가 대부분인 듯하다. 그런데 교회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더러 인물들을 숨겨 놓으시기 때문에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는 수도 있다. 아서 핑크가 그러한 예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본인은 핑크 목사의 무덤을 방문하였다. 여러 해 동안 벼르던 일이라 단단히 마음먹고 길을 떠났다. 핑크 목사의 무덤은 영국에 있다. 그러나 영국에 살아도 쉽게 찾아가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본토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루이스(Lewis)라는 섬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본인은 약 일주일간의 시간을 내어 여름 휴가 겸 해서 다녀왔는데 핑크 목사에 대해서 새삼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무명의 강해 저술가

 아서 핑크 목사는 본인의 기억으로는  약 20여 년 전에 우리나라 교계에 소개된 분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Sovereignty of God)라고 번역된 책이 첫 번째로 한국 개혁주의 신행협회에서 출간되었던 것으로 안다. 그 후 여러 해가 지나서 우리나라 교회에 강해 설교가 유행하면서 아서 핑크의 강해서가 줄지어 번역되기 시작하였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훌륭한 메시지들이 졸역으로 인해 가치가 더러 감소한 것들도 있으나, 아서 핑크는 이제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한 이름이 되었다.

 그런데 그의 생전에는 그를 알아주는 자들이 극소수였고, 유명한 강단들이 그를 지나쳤으며, 성경 강해자로서의 그의 탁월성은 큰 빛을 보지 못하였다. 결국 그는 스코틀랜드의 황량한 서북부 섬에서 아무런 목회지가 없이 긴 세월 동안 가난에 허덕이며 그의 월간 강해지에 온 정신을 쏟다가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본인은 아서 핑크로부터 적지 않은 위로를 받는다. 그것은 그가 우선 어떤 교단적 배경의 후광이나 교회 체제의 편익이나 혹은 높은 학위를 소유하고서 사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 단체에도 소속되지 않았고 별다른 학적 배경이 없이 자신의 집필 사역에 끝까지 충실하면서 주님을 섬겼다. 그가 오늘날 유명하게 된 것은 그의 강해 문필 사역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번역된 그의 대부분의 강해서들은 원래부터 책으로 출판했던 것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아서 핑크 자신의 개인 인쇄물이었던 [Studies in the Scriptures]라는 이름을 붙인 월간 강해지에 실렸던 메시지들을 핑크 목사의 사후에 모아서 책으로 엮어낸 것들이다. 필자가 관련했던 양무리서원의 양무리 초장」은 격월간으로 발행한 강해지였는데 부분적으로 아서 핑크의 강해지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었다.

(참고. ‘양무리 초장’은 나중에 ‘양들의 식탁’ 월간 강해지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지금은 양들의 식탁 출판사와 웹사이트로 이어지고 있음).

 한편 본인은 아서 핑크의 강해서를 읽을 때마다 격려를 받기보다는 절망감을 느낄 때가 더 많다. 그래서 사실 그의 강해서를 읽기가 두렵고 주저되어서 그다지 많은 양을 숙독하지는 못하였다. 본인이 여러 해 전 여백의 하나님」을 집필하려고 시도했을 때였다.  아서 핑크의 「엘리야」 강해서가 있기에 한 번 읽어 보았다가 절망해 버린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잖아도 엘리야에 대해서는 대가들이 한 번씩 다룬 것이라 필자 같은 소인이 새롭게 쓰기에는 너무도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그런데 아서 핑크의 글을 읽어 보니 더 갖다 붙일 말이 없었다. 엘리야 강해서 집필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갔었다. 다행스럽게도 핑크 목사의 글을 읽는 중에 신선한 암시도 받게 되어 본문을 다시 읽고 애당초 계획했었던 「여백의 하나님」을 끝마칠 수 있었다.

 아서 핑크에 대해서 본인이 호감을 느끼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가 ‘읽는 강해 설교’를 썼다는 사실이다. 핑크 목사는 미국과 호주에서의 초반기 해외 목회 사역을 마친 뒤로는 강단에서 메시지를 전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성경 강해를 글로써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뜻에서 아서 핑크는 독자들을 상대로 하는 강해 메시지의 저술가였다. 필자도 전혀 비교할 처지는 아니지만, 원래는 목회지가 없었던 터라 독자를 염두에 두고서 읽는 성경 강해서를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아서 핑크는 정설 강해를 한다는 점에서도 일반 강해자들이 배울 점이 많으며, 서구인임에도 상당히 우리들의 정서에 어울리는 문체를 가진 분이어서 쉽게 친근감이 간다.

 초라함 속에 깃든 위대한 사역

 아서 핑크의 사역은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눌 수 있다. 그의 전반기 사역은 구두 사역(Oral ministry), 즉 설교자와 강사로서 활동한 것이었다. 그의 교회 사역은 주로 해외에서 이루어졌는데 첫 목회지는 미국이었으며, 12년간의 목회를 한 다음 얼마 동안 미국 전역을 다니면서 군소 집회를 인도하는 순회 강사로 활동하였다. 그 후 1925년 호주로 건너가서 약 3년 동안 목회하였고 1929년 모국인 잉글랜드로 귀국하였다.

 핑크 목사는 모국 목회를 희망했으나 유감스럽게도 당시의 잉글랜드 교회들이 그의 사역을 알아주지 않았고 더구나 교단적 배경이 없었으므로 목회지를 얻기가 쉽지 않았다. 침례교와 장로교 및 형제교회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가 있었지만, 교단 가입과 자기들의 서클 내에서만 사역할 것을 요구했으므로 핑크 목사는 다시 미국의 옛 회중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마저도 핑크 목사의 메시지에 거부감을 느끼며 그를 냉대하였다. 이로써 핑크 목사의 후반기 사역을 특징 짓는 강해 집필 사역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25년간의 해외 사역을 끝내고 1934년 본국으로 아주 귀국하고 말았다.

 한편, 핑크 목사의 강해 집필 사역이 처음으로 시작된 때는 1921년이었다. 그 당시 핑크 목사는 36세였는데 그때까지 7권의 저서들과 소책자들이 이미 출간되었다. 이때 그의 출판 동역자의 권유로 월간 강해지 <Studies in the Scriptures>가 첫선을 보였는데 그 후 30년간 계속되었고 핑크 목사의 유일한 후반기 사역이 되었다. 핑크 목사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이 월간 강해지가 책으로 출판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그의 생존 기간에는 핑크 목사의 존재는 세계 복음주의 강단에서 전혀 시선을 끌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월간 강해지의 첫해 구독자는 1천 명에 불과하였고 그가 사망할 때까지도 2, 3천 명을 넘은 적이 없었다. 더구나 핑크 목사는 고국으로 완전히 귀국한 이후부터 강단에 설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마침내 목회를 포기하고 스코틀랜드의 외진 섬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시피 하였다. 세상이 그를 알 리가 없었다.

 믿음과 인내의 열매, 월간 강해지

 본인은 아서 핑크의 저서들을 대할 때마다 몇 가지 이유에서 고개가 숙어지고 가슴이 뭉클해진다. 우선 그의 강해 집필 사역이 너무도 힘든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그의 월간 강해지는 시작된 지 1년도 못 되어 출판 동역자의 실수로 인해 중단될 뻔했었다. 다행히 어떤 젊은 부부의 도움으로 핑크 목사의 아내가 타자를 배워 간신히 원고를 찍어냈었다. 그때부터 월간 강해지는 모두 핑크 여사에 의해 타이핑이 된 후 인쇄소로 넘겨졌다. 이 월간 강해지는 핑크 목사 자신의 말대로 ‘믿음의 사역이며 사랑의 노고’였다. 다시 말해서 구독료가 없는 잡지였으므로 순전히 애독자들의 자원 후원금에 의해 운영되었다. 본 강해지는 평균 24쪽이었는데 광고나 기타 잡문들이 전혀 없었고 앞뒤로 빼곡히 적힌 본문 강해 메시지나 주제별 교리 강설이 주된 내용이었다. 물론 강해지의 글들은 약간의 기독교 고전 발췌문을 제외하고는 핑크 목사 자신이 모두 집필한 것들이었다.

 30여 년을 한 달도 빠뜨리지 않고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이런 월간 잡지가 계속됐다는 것은 아마 기독교 출판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다. 더구나 핑크 목사의 사역 기간에 미국의 경제 불황과 영국이 겪은 2차 대전의 피해를 고려한다면 더욱더 놀라운 일이다. 일례로서 1940년 7월 1일 핑크 목사의 침실이 독일 폭격기로부터 기총소사를 받았음에도 월간 강해지의 원고를 집필했으며 그의 아내는 손수 타자를 쳐서 일일이 독자들에게 발송하였다. 또한 미국에서 잡지를 냈을 적에는 빚이 늘어 강해지 간행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었다. 이쯤 되면 그들의 생활고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다. 

 핑크 목사와 그의 아내는 스코틀랜드의 서북부 섬으로 이사를 가서 여생을 마쳤는데 이곳은 바람이 많고 날씨가 암울하며 기온이 낮아 가난한 자들은 더욱 고생스러운 환경이었다. 핑크 목사는 한 고옥을 빌려 살았는데 얼마 되지 않는 월세 때문에 늘 어려워했다고 한다. 필자의 학창 시절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목회자 중에는 자녀들의 등록금을 제대로 낼 수 없거나 극도의 가난으로 밥 대신에 죽을 쑤어 먹는 분들도 적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빈곤이 거의 없어졌다고 본다. 그렇지만 일반 고소득층의 월급에 준하는 엄청난 사례비를 매월 받는 목회자들도 적지 않다. 각자가 처한 곳의 생활 수준과 교회 재정 형편에 달린 문제일는지 모른다. 하지만 흔히 하는 말처럼 세상이 공평치 못하다는 느낌이 든다. 누구는 변변치 못한 메시지를 적당히 전하면서도 풍족하게 살고, 누구는 진실과 감동으로 말씀을 전하기 위해 평생을 수고하지만, 가난에 시달리며 천시를 받는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나 같은 졸부의 푸념이다. 핑크 목사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자신의 처지를 평가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월간 강해지 25주년

 “본인이 겪는 시련과 마음의 단련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도 필요한 것들입니다. 월간 강해지의 구독자 명단은 매달 줄어들어 더 이상 발간할 명분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도 꾸준히 헌금하시는 분들이 계시고, 오늘날의 교회의 배도와 영적 퇴락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펜을 통해 주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본인은 저를 밀어줄 아무런 교회적 배경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구두 사역(Oral Ministry)으로부터 차단되었으므로 새 교우들이나 구독자들을 만나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적으로 주님만 의존하며 주께서 이 월간 강해지를 지속 시켜 주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어떤 이들은 협조적이고 어떤 이들은 무관심하며 어떤 이들은 본향으로 불려 갔습니다. 해마다 우리들의 가르침을 싫어하여 탈락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께서 새로운 분들로 채워 주십니다.

 주께서 저의 글을 도우신 것도 크나큰 은혜입니다. 지난 25년 동안 매달 4, 5편의 강해를 똑같은 독자들에게 집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동안의 월간 강해지는 7천 쪽에 달합니다. 평균 4쪽 길이의 강해가 1,700편이었고 목회 서신으로 보낸 것은 2만여 통입니다. 그런데도 질병이나 사고로 본 강해지가 지연된 적이 없었으니 어찌 이처럼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글은 핑크 목사가 그의 월간 강해지 25주년을 맞이하여 실었던 서신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거기에 보면 핑크 목사는 보통 새벽 2시까지 작업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푸념이나 하고 있었다면 그 크고 귀한 사역이 결코 계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서 핑크 목사는 20세기의 가장 빼어난 기독교 저술가의 한 사람이며 다작가로서도 손꼽힌다. 그의 책들은 여러 기독교 출판사들을 통해 전 세계에 보급되고 있으며, 그에 따른 출판사들의 수익도 엄청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본인이 느끼는 또 하나의 유감이 있다. 핑크 목사는 생전에 저작자로서 판권 수익을 얻지 못했다. 그의 생존 시에는 저서들이 몇 권 나오지도 않았고, 수요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아쉬운 것은 핑크 목사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그들의 사후에도 판권료가 지급될 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도 졸부의 푸념이다. 핑크 목사가 생각했던 혜택은 자신을 위한 물질적인 유익이 아니고, 독자들의 영적 도움이었다.

 “우리들의 유일한 목적은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신실하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해서만 이 사역이 지속될 수 있음을 증거함으로써, 교우들이 격려를 받아 우리와 함께 홀로 ‘큰 일을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토록 마음의 문을 열게 해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용된 욥기 5:9절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핑크 목사가 ‘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했을 때, 그는 당시의 월간 강해지 사역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사후에 얼마나 더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실지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작, 2, 3천 부도 나가지 않던 그의 월간 강해지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수천만 부가 팔렸다. 처음에는 미국의 Bible Truth Depot에서 주로 책으로 엮어 출판되었고, 영국에서는 The Banner of Truth Trust가 출간하면서 많은 독자에게 아서 핑크 붐을 일으켰다. 스코틀랜드의 외딴 섬에서 추위와 가난과 소외된 삶에 시달리며 소수의 독자를 상대로 집필한 그의 글들이, 아시아의 우리나라 교회에까지 소개됐다는 사실은 참으로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이한 일”(욥 5:9)이 아닐 수 없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시 107:8).

 아서 핑크의 무덤

 필자가 핑크 목사에 대해 고개가 숙어지는 또 다른 이유는, 지난번 그의 무덤을 방문했을 때 받았던 충격 때문이다. 묘지 방문은 필자의 취미 중 하나이다. 별스러운 취미일지 모르지만, 무덤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훌륭한 철학자가 된다. 무덤 앞에서 인생의 참뜻을 생각해 보지 않는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핑크 목사가 여생을 지냈던 루이스섬은 스코틀랜드 서북부 지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에는 타운도 있고 문화 시설도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지만, 원주민들이 옛적부터 자기들의 고유한 언어와 풍습을 지키며 살아온 곳이다. 그래서 핑크 목사 부부는 현지인들의 눈에는 문화가 다른 타국 사람들이었다. 핑크 목사가 이처럼 동떨어진 섬으로 이주한 까닭은 자신의 구두 사역의 문이 닫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남은 삶을 오로지 집필에 전념하기 위해 본토를 떠나 한적한 곳에 은거했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루이시섬의 해항인 스톤오웨이에서 하선한 후, 해가 저물어 일박하고 다음 날 아침 핑크 목사가 거처했던 루이스 가(街) 29번지를 찾아갔다. 집을 가보니 핑크 목사에 대한 새로운 감회가 일었다. 핑크 목사가 자주 다녔을 주변 거리를 한 번 거닐어 본 후 그의 무덤을 찾아 나섰다. 처음에는 동네 교회의 묘지일 것으로 짐작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스톤오웨이의 장례 풍습은 본토와는 달라서 매장지가 교회 마당이기보다는 주로 공동묘지라는 것이었다. 핑크 목사가 묻힌 공동묘지는 타운이 끝나는 외곽 지대에 있었다. 다소 황량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면에 바다가 보이는 꾀 널찍한 공간이었다.

 나는 무덤지기의 사무실로 곧장 들어가서 혹시 묻힌 자들의 명단이 있느냐고 물었다. 무덤지기가 누구를 찾느냐고 되묻기에 아서 핑크라는 분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어디서 왔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본시 한국인인데 영국 본토에서 사는 중이라고 했더니 알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핑크 씨의 무덤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찾아오지요. 그런데 참 우스꽝스러워요. 방문객들이 와서는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 잔디에 대고 카메라를 눌러 대거든요.”

 무덤지기는 껄껄 웃으면서 퍽 재미있어했다. 나는 각국에서 방문객이 밀려든다는 말에는 수긍도 가고 기분도 좋았지만 잔디밭 사진 운운은 무슨 말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내가 핑크 목사의 무덤을 꼭 보아야겠 다니까 그는 딱하다는 듯이 다시 말했다.

 “글쎄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그냥 돌아가시지요. 잔디 사진을 찍어서 무엇합니까? 원, 참…”

 내가 그래도 이해를 못 하니까 무덤지기는 평이한 말로 핑크 씨의 묘지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영국의 묘는 우리 식과 달라서 모두 평토장이다. 그래서 묘비가 없으면 맨땅이나 다름없다. 그 넓은 공동묘지에서 흔적도 없는 핑크 목사의 묘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 나는 망연할 따름이었다. 보기에 딱했던지 무덤지기는 그래도 어디쯤인지는 확실히 안다면서 데리고 가주었다. 가보니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다른 묘지들 사이에 약간의 빈터가 있을 뿐이었는데 핑크 목사와 그의 아내가 묻혀 있다는 것이었다. 핑크 여사 역시 남편의 유지를 따라 자기를 위해서도 아무런 비석을 남기지 않았다. 나는 일종의 허탈감에 빠져 잠시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야속한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먼 길을 찾아왔는데 비문 하나 남기지 않는다니…원래 거창한 비석이나 기념탑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서 핑크라는 이름이 새겨진 묘비는 당연히 세워져 있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나는 너무도 아쉽고 섭섭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그가 묻혔다는 땅바닥의 잔디를 향해 사진을 찍는 우스꽝스러운 촌극을 벌이고 있었다. 무덤지기가 그것 보라는 듯이 웃기 시작하는 통에 카메라를 멈추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갑자기 묻히신 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핑크 목사는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았던 분이었다. 그는 생전에 자서전적인 성경의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그가 남긴 글은 모두 하나님의 복음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의 자신에 관한 한, 이름조차도 남기기를 원치 않았다. 아서 핑크라는 이름이 박힌 묘석을 보지 못해 서운했던 내 마음속에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셨던 한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

 지상의 묘지에 새겨진 석문은 세월이 흐르면 모두 마모된다.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가기 때문이다(고전 7:31). 그러나 하늘 생명책에 기록된 성도들의 이름은 영구히 지워지지 않는다(계 20:12).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단 12:30.

 핑크 목사가 묻힌 공동묘지를 떠나면서 필자는 1946년 12월호 강해지에 실렸던 25주년 특별 서신(Semi-Jubilee Letter)의 서두와 결언의 말씀들을 생각해 보았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사무엘은 그들의 승리를 기념하지 위해 승리의 전정터에 돌을 세우고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삼상 7:12)는 뜻에서 에벤에셀이라 불렀습니다”

 핑크 목사의 에벤에셀은 무엇이었을까? 그에게는 따로 세워진 묘석이 없다. 그러나 그의 글들이 승리의 기념석이며 그의 에벤에셀이었다. 그의 글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한 승리의 증거이다. 나는 또 그가 발간한 월간 강해지의 가치를 인정하고 힘껏 후원했었던 구독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그들 역시 이름을 남기지 않았지만, 사무엘을 따라 최후까지 분전(奮戰)했던 이스라엘의 용사들처럼 모두 성전(聖戰)에 참여한 무명 용사들이었다. 그들의 성금과 애독이 있었기에 오늘날 전 세계의 복음주의 교인들이 아서 핑크의 귀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여담이지만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도 병환으로 누워 있을 때 그의 침상 머리맡에는 성경책과 아서 핑크의 월간 강해지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다음은 앞에서 언급한 핑크 목사의 25주년 특별 서신의 결언이다.

 “주께서 월간 강해지 사역을 계속 허락하신다면 우리는 한 해가 끝날 때마다 새로운 에벤에셀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이 세상을 떠날 때도 우리들은 계속해서 주님의 인도를 받으며 영원하신 그의 팔에 의지하면서 무한히 영광스러운 우리들의 왕을 바라볼 장소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어린 양이….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라고 외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종들을 묻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묻히지 않는다. 그 구원의 말씀이 온전한 결실을 할 때에는 “티끌 가운데서 자는”(단 12:2) 많은 숨겨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깨어나 영원한 불멸의 새 생명을 받게 될 것이다. 아서 핑크의 무덤은 비문 하나 없는 평토장이지만, 비문 없는 무덤치고는 가장 유명한 그리스도인의 무덤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이름 없이 묻히고자 했지만, 오히려 더 유명하게 되었으니, 자기를 숨기는 자가 받는 의외의 보상인지 모른다.

(이 글은 필자가 1997년에  출판한 ‘하나님의 사람들’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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