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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18절).

 

마가복음 2장에서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 이후로 예수님은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심한 반대에 직면합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셨을 때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신성 모독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성 모독죄는 사형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극형을 받아야 할 자로 본 것입니다. 그다음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의 집에서  바리새인들이 정죄하는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을 때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비난하였습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다고 유대인들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다음 장면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겼다고 주장하면서 극형을 모의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에 대한 반대 항목이 일단락됩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막 3:6).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역은 처음에는 많은 무리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혔고 급기야는 그를 죽이려는 살인 공모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서부터 어두운 그림자를 내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금식은 우리나라 교회에서 흔히 행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기도원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기도원에 가는 주된 목적은 소원 성취를 위한 것인데 금식 기도를 하기 위해서 다니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냥 기도하는 것하고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금식 기도는 일반 기도보다 더 센 기도로 여깁니다. 그래서 누가 금식 기도에 들어갔다고 하면 비상한 각오를 한 것으로 압니다. 성경에서 금식 기도는 삼일 금식이 일반적입니다(참고. 에 4:16; 행 9:9). 40일 금식 기도는 예수님이 하신 금식 기도라고 해서 가장 알아줍니다. 이것이 과연 성경의 근거를 둔 것일까요?

예수님은 일생에 단 한 번 사십 일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것도 성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사십일 작정 기도라는 말을 잘 씁니다. 내가 작정해서 원하는 것을 받아내려고 하는 기도는 예수님처럼 성령의 인도를 받고 광야의 시험을 받기 위해서 금식하는 것과는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에 마치 급수가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도 업그레이드를 시켜야 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일반 기도를 업그레이드를 시키면 새벽기도가 되겠지요. 더 업그레이드를 시키면 철야 기도가 되어 한 단계 더 높아지고, 금식 기도를 하면 최신 업그레이드가 되는 셈입니다. 사람들은 금식하는 기간이 길수록 더 알아줍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시간과 방식에 있어 레벨이 있다는 것은 성경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일반 기도보다 금식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신다고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일반 기도는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다윗은 중병에 걸린 자식을 위해서 칠 일 동안 금식 기도하며 철야를 했지만, 하나님께서 아이를 데려가셨습니다(삼하 12:15~19).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택하실 때와 (눅 6:12) 겟세마네 동산에서 철야 기도를 하셨지만(눅 6:12; 22:39~46) 항상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새벽 기도를 하시거나 금식을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새벽 기도를 강조할 때 흔히 마가복음 1장35절을 근거로 댑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서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그러나 예수님은 그 당시 온 동네 환자들이 밀어닥쳐서 새벽까지 치유와 축귀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새벽녘에 밖으로 나가시지 않으면 조용한 장소에서 개인 기도를 할 틈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한두 가지 실례를 당시의 상황에 대한 고려가 없이 표준화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금식 기도는 금욕주의의 영향으로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금욕주의는 성경의 사상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금식에 대한 기록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식은 성경의 강조점이 아닙니다. 금식이라는 용어가 들어간 구절들을 찾아보십시오. 매우 적다는 데에 놀랄 것입니다. 사실상 율법에서 금식을 요구한 날은 속죄일 단 하루였습니다(레 23:26~32).

 

[그럼 왜 금식을 강조해야 합니까?]

금식을 강조할 때 흔히 여러 유익이 따른다고 덧붙입니다. 어떤 성경 사전에 보니까 금식은 의학적으로도 건강에 유익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기도가 환자들의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의학적 보고가 있다고 하니까 기도 많이 해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모든 것이 건강에 초점을 맞추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종교까지도 건강에 연결해 강조합니다. 금식 기도가 건강상의 유익이 있을지 몰라도 성경은 그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적절한 금식이나 기도가 환자의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의학적 견해가 있지만 특정 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금식을 왜 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하나님이 내 소원을 잘 들어주시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대답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로써 하나님을 설득 시켜 원하는 것을 받아낼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이방 종교의 공로 사상을 기독교 복음에 대입시킨 셈입니다. 금욕이 신에게 감동을 준다는 생각은 이교 사상입니다.

금욕하는 것이 더 영적이고 신에게 더 가까이 가는 길이라는 생각은 고대 사회 때부터 있었습니다. 사실 교회사에서 이런 사상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나 오리겐과 같은 (Clement of Alexandria; Origen) 일부 교부들에 의해서 유입되었습니다. 원래는 개별 신자들이 사막이나 광야와 같은 조악한 지역에서 금욕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점차 교회 지도자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어 각 곳으로 퍼졌습니다. 이런 금욕 운동의 원인을 보면 교회의 부패와 관계가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박해를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선포되었습니다. 그 후로 수많은 이교도가 교회로 밀려들었습니다. 박해가 사라진 교회에는 더 이상 순교자도 나오지 않았고 목숨을 걸고 복음을 사수할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교도가 유수처럼 교회로 흘러들어오자 교회는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고 세속 사상과 타협하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교회는 국가 권력의 후원을 받으면서 점차 제도화되고 교회 지도자들은 권력층을 이루면서 부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순수성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사회를 떠나 은둔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 가까워지려는 자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살면서 기도에 전념하였습니다. 본인은  터키에서 은둔자들이 거처하던 곳들을 가보았습니다. 여기저기에  우뚝우뚝 서 있는 바위에 동굴을 파고 살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괴이한 환상들을 보았다거나 이상한 교리를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3~4세기경에 수도원 제도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제도권에 포함되지 않은 독립 수도원들도 있었지만 모두 금욕주의 배경을 안고 있었습니다. 결혼하지 않는 독신 생활이 더 영적이고 좋다는 생각에서 신부와 수녀들이 생겨났습니다. 금욕 생활에는 금식도 반드시 포함됩니다. 그래서 수도원에서는 금식이 당연시되었고 점차 금식일의 종류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초기 초대교회에는 이런 전통이 없었습니다. 개인이나 공동체적인 금욕 단지가 형성된 일도 없었습니다. 신약에서 금식은 특별한 때에 행해졌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들이 선교사를 파송할 때와 장로들을 세울 때였습니다(행 13:2~3; 14:23). 그러나 한 번도 금식을 법으로 정한 일이 없었습니다. 구약의 속죄일에 행하던 금식의 참뜻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에 의해서 성취되었고 구원이 확보되었기 때문에 신약 교인들은 금식 때처럼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즐거워해야 합니다. 구약의 속죄일은 신약의 성찬으로 대치되었습니다. 신약 교회에서는 성찬은 지키지만 속죄일을 지키면서 금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신약에서 성찬 때에 금식하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성찬 자체가 음식을 먹는 의식입니다.

 

금식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금식은 개인의 자율적인 판단에 맡겨야 합니다. 금식을 영적 삶의 필수 조건으로 내세우거나 금식의 유익을 구실로 강조해서도 안 됩니다. 물론 교회 공동체적으로 금식을 해야 할 상황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것은 압력이나 억지로 참여시킬 것이 아닙니다. 금식은 할 수 있지만 성경에서 강조한 부분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금식의 오용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금식은 언제 행하였습니까?]

♣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의 두 돌판을 받을 때 사십 주야 금식하였습니다(신 9:9)

♣ 이스라엘에서는 바벨론 침공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나라가 멸망한 일을 기억하기 위해 금식하였습니다(슥 7:1~7; 8:19). 

♣ 에스더서에 기록된 민족 말살 위기와 같은 중대한 응급 상황에서 행해졌습니다(에스더 4:16).

♣ 금식은 죽은 자를 슬퍼하는 애도와 관련된 행위입니다. 예로써, 사울 왕과 그의 아들들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했을 때 그들을 장사하면서 이레 동안 금식하였습니다(삼상 31:13; 삼하 1:12). 

♣ 국가적인 차원의 회개를 할  때도 금식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사무엘이 온 이스라엘 백성을 집합시키고 우상숭배에 대한 참회를 하게 할 때 금식하였습니다(삼상 7:6). 아합왕도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나봇을 살해한 일로 하나님의 정죄를 받았을 때 금식하며 회개하였습니다(왕상 21:27).

♣ 치유를 위해 금식하였습니다. 예로써 다윗은 밧세바 사이에서 난 아이가 중병에 걸렸을 때 금식하며 철야 기도를 했습니다(삼하 12:16~17).

♣ 하나님께 간절히 탄원할 일이 있을 때 금식하였습니다(시 109:24).

♣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조국의 수난을 생각하며 3주 동안 금식하였습니다(단 10:2~3).

 

이러한 금식들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이런 금식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 충격으로 사흘 동안 금식하였습니다(행 9:9). 그러나 이런 금식은 자율적이지 규정으로 정한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성령의 인도와 자신의 건전한 판단에 따라 행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금식기도를 만사형통의 열쇠인 듯이 떠받들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넘어서는 것이며 내가 만든 금식 교리입니다. 이런 인간적인 생각들에 붙잡히면 복음은 미신이 됩니다. 

 

▣ 구약에서 금식이  율법으로 정해진 것은 대속죄일 하루뿐입니다. 민족적 수난과 성전 파괴와 같은 국가적 재앙을 기념하는 금식일이 있었지만 슬픔의 날들이 기쁨의 때로 바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날의 금식과 다섯째 날의 금식과 일곱째 날의 금식과 열째 날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다시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주민이 올 것이라 ····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리라” (슥 8:19~22).

이 예언은 예수님의 오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행 2장). 이제 더 이상 구약 시대의 금식을 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금식을 규정하여 지키라고 명한 일이 없습니다.

 

금식 오용에 대한 성경의 경고

 

이사야 58장을 보면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 어떤 것인지 적시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금식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시지 않는다고 불평하였습니다(사 58:3).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의와 폭력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자를 억압하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지 않으면서 단지 머리를 숙이고 베옷을 입고 재를 날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금식이 되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사 58:3~7).

스가랴서에서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슥 7:5).

아무리 금식을 오래 하고 경건한 모습을 보여도 외형적이고 위선적인 의식은 무익하다는 말씀입니다. 금식한다면서 하나님의 정의를 생각하지 않고, 힘든 이웃에게 무정하며 자신의 죄악에 대해 참회하는 마음이 없다면 허식이며 위선입니다. 금식이라는 위장된 경건 뒤에 숨겨진 거짓된 삶은 하나님의 눈에는 대낮처럼 더 밝게 비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 오직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16~18).

 

위선은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속이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속이는 것은 상대방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속임수에 의해서 조롱을 당하시거나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시는 분입니다(갈 6:7; 사 1:4). 금식은 그 자체로서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이기적인 유익만을 위한 금식은 하나님의 정죄의 대상입니다. 금식이 자신의 경건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용된다면 위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식할 때 여러 가지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뒤집어쓰거나 옷을 찢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욜 2:13)라고 했습니다.

요시아 왕은 백성의 우상숭배로 인해서 재앙을 내리신다는 율법의 말씀을 듣고 금식했습니다. 그때 그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옷을 찢고 통곡했기 때문에 그의 생존 기간에는 재앙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왕하 22:19; 대하 34:27~28). 다윗이 읊은 시편 51편에서처럼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입니다(시 51:17).

 

맺는말

 

금식은 원래 경건한 사람들이 오직 하나님께만 마음을 집중하기 위해서 행했던 의식이었습니다. 금식은 회개할 때나 혹은 개인이나 공동체의 비상한 상황에 직면하여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때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금식은 신약에서 규정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며 금식을 다른 종류의 기도보다 더 우월한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금식 기간이 길다고 해서 더 경건한 것도 아니고 더 영적인 것도 아닙니다.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의 진정성을 보여드리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식을 영적 수준의 잣대로 삼거나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내는 도구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옷이 아닌 마음을 찢는 금식을 기뻐하시며 선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금식을 열납하십니다. 

 

☞ 다윗은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가 중병에 걸렸을 때 일주일 철야 금식을 하며 울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금식 기도의 올바른 자세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나의 금식 투쟁으로 받아내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순복하겠다는 각오가 서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이가 죽은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머리에 기름을 발랐습니다. 그리고 곧장 성전으로 가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갔습니다(삼하 12:15~23). 금식하며 간구한 것을 받았을 때보다 받지 못했을 때의 나의 신앙적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내 몸을 상하면서까지 금식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며 정상적인 신앙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길은 내 길이 아닌, 주의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다하여 간구하더라도 허락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겸손하게 물러설 줄 아는 것이 올바른 믿음의 자세입니다.

 

금식을 바르게 사용하면 영적 축복의 한 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사나 프로그램으로서 억지로 참여하는 금식 행위는 권장할 것이 못 됩니다. 금식은 하나님과의 거래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금식을 하면 복이 보장되니 해 보라는 식의 말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금식 문제에서 항상 위선의 위험을 경계해야 하며 성령의 분명한 인도가 없는 극단적인 금식 작정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금식 문제로 바리새인들과 충돌하셨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적인 금식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잘못된 금식 문제를 산상설교에서 언급하실 정도로 중시하셨습니다(마 6:16~18). 위선적인 바리새인의 금식은 예수님 당시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교회에 금식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이 많고 다분히 이교적인 금식 행위를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갱신되고 성도들이 바른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면 이런 그릇된 전통들에서 하루속히 벗어나야 합니다.    (마가복음 강해, 이중수 지음. 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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