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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2:9).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까요? 택함 받은 사람들만을 위해서 돌아가셨을까요? 아니면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돌아가셨을까요? 본 절에 의하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서 돌아가셨느냐는 질문은 불필요한 듯합니다. 그러나 교회사적으로 이 질문은 오랫동안 논쟁을 일으켜 왔습니다. 지금도 “모든 사람”의 의미를 놓고 해석이 양분되고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인류 전체라고 하고, 다른 편에서는 선택받은 백성만 포함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어느 쪽이 옳을까요? 이 질문은 하나님의 사랑의 범위와 구원의 확신 및 전도에서 큰 영향을 주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인류 전체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1) 만일 예수님이 선택받은 사람들만을 위해서 돌아가셨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범위가 축소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구주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선택하신 죄인들의 죄를 위해서만 예수님의 피가 흘려지게 하셨다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 3:16)는 말씀과 맞지 않습니다. ‘세상’이라는 말을 ‘택함 받은 자들’만 가리킨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 돌아가셨다거나 혹은 ‘이 세상을 위해서’ 자신을 내주셨다거나 또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음을 맛보셨다’는 구절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제한적 속죄론’(Limited atonement)의 선택교리에 비추어 설명하려면 상당한 무리가 따릅니다. '모든 사람'과 '세상' 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액면가보다 훨씬 더 줄여서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2) 요한복음 3장 16절의 하반부는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고 했습니다. 여기서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는다고 했기 때문에  ‘누구나’의 의미를 택함 받은 사람들로 제한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셨다고 보아야만 누구나 믿는 자들은 민족과 국경을 초월하여 다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성립합니다.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요 11:51~52).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일 4:14~15).

 

  만약 예수님의 속죄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세상 모든 사람의 구주가 아니시라면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는 비제한적으로 사용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롬 3:24). 모든 사람은 인류 전체의 총칭입니다. 그들이 모두 죄를 지었다는 것은 인류의 대표인 아담 안에서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도 의인이 없습니다(롬 3:10). 인간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있으며 스스로 의인의 자리에 오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구별 없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보편적 속죄라야 세상을 포함하는 선교의 당위성이 성립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딤전 2:4~7).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자신의 이방인 선교 사역을 변호하였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온 인류를 위한 대속주가 아니시라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은 모순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려면 예수님이 세상 만인을 위한 구주이심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원래 주셨던 약속에도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고 하였습니다. 그 후 하나님이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셨을 때 더 구체적으로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창 22:18)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씨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는다는 말은 아브라함의 씨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만민에게 구원받는 길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서 모든 국가에 준 구원의 약속은 선택받은 소수가 아니고 전 세계를 포함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자기 백성 구원할 자로 오셨다는 말씀은 제한적 속죄론을 지지하지 않습니까?

 

  제한적 속죄론의 증거 본문의 하나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자기 백성’이라고 했기 때문에 속죄가 제한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럼 ‘자기 백성’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이것은  전통적인 개념에서의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사용된 말이었습니다. 그럼 그리스도는 유대인들만의 구주가 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이란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십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여도 모든 유대인이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1: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은 유대인들에 한해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민족과 국가를 초월하여 누구나 주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면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나라 백성을 위해 대속주가 되셨습니다(요 11:52). 그래서 '자기 백성'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일에는 우선 순위가 있습니다. 구원은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유대인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게”(요 4:22) 하셨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복음이 먼저 유대인들에게 전해졌고 그다음부터 이방인들의 선교가 유대인 크리스천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즉, 첫 단계에서는 유대인들이 먼저 복음을 들었고 다음 단계로서 사마리아와 이방인들이 모두 선교의 대상이었습니다(행 1:8). 그래서 예수님의 오심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말씀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포함되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을 먼저 구원하신다는 뜻이고 둘째는 구원받은 유대인들을 통해서 복음이 구약 시대부터 약속된 이방인들에게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자체 내에서도 복음 전도의 대상을 모든 민족으로 삼았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고 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속죄 희생의 영역과 대상이 유대인들의 국경을 넘어 온 세상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었다면 전 세계적인 선교 명령을 내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한적 속죄론을 뒷받침하는 듯한 마태복음 1장 21절은 보다 넓은 의미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속죄 희생의 영역과 대상은 온 세상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의 하나도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인 울타리를 벗어난 세상의 구주(요 4:42; 11:52; 요일 4:14)이심을 증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 백성을 위해서 오셨습니다(요 3:16). 세상 사람 모두가 구원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라고 하였습니다. 제한 속죄를 주장하는 분들은 여기서 ‘세상’이라는 말을 만인이 아닌, 각 나라를 가리킨다고 보고 택함 받은 자들이 각국에서 구원받는다는 의미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온 세상 전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음 구절들에서도 예수님의 오심이 만인을 위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본 절에서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라는 표현에 나오는 "많은"이라는 말은 히브리식 표현으로 '모든 사람'이란 뜻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택함 받은 사람들만 위해서 오셨다면 그런 특정인들만 골라서 복음을 전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모든 사람을 향하여 구별 없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4).

 

  여기서 ‘모든 사람’은 택함 받은 자들을 한정한 말이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께서 바라고 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다 받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작정된 뜻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보편적 소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딤전 2:6).

 

  만약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라고 하고서(딤전 2:4) 하나님께서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면 모든 사람이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여셔야 합니다. 그 길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므로 제한적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모든 사람”은 구원받게 될 모든 신자를 제한적으로 가리킨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대속물이 되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일 2:2).

 

  요한은 본 절에서 예수님이 "온 세상의 죄"를 위해서 화목 제물이 되셨다고 하였지 일부 사람들만을 위해서 십자가로 가셨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한 것과 일치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창조부터 세상 끝까지의 모든 인류의 죄를 포함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넘겨주셨다. 그의 희생으로 그는 온 세상의 죄를 거두어가셨다. (마틴 루터, 갈라아서 주석)

 

  그리스도가 만인을 위해서 돌아가셨다면 만인이 구원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1)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셨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이 영생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만인 구원론(Universalism)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속죄가 만인을 위한 것이라면 속죄의 효과도 속죄의 범위와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논리이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죄인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에 대해서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롬 1:18).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나훔 1:2~3).

 

  죄인들에 대한 형벌의 요구는 십자가에서 채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로서 세상 죄인들이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죄인들은 여전히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으며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있습니다(엡 4:18).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의 형벌을 대신 받았다는 것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거두어져서 십자가 대속의 희생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주어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적 형벌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희생시킨 사건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크나큰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영생은 주 예수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연합될 때에만 받습니다.

 

  2) 십자가의 대속적 형벌은 죄인들의 모든 죄가 용서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그 자체로서 죄인들에게 영생을 자동적으로 부여하지 않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갈라지게 하였습니다. 죄인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3)였으며 하나님에 대해서 적대적인 원수였습니다(롬 5:10).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게 하고 죄인들을 용서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화해와 회복의 수단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십자가가 주는 구원의 혜택을 입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보내신 대속주로 믿지 않으면 비록 예수님에 의해서 죗값이 지불되었더라도 용서의 목적이 성취된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하나님과의 화해가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 회복이 맺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화해가 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구원받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 정죄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죄를 예수님께 씌우고 대속의 희생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고후 5:21). 이로써 죄인들에게는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모든 죄가 용서되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화해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롬 5:10).

이 구원의 길을 배척한다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희생을 모독하는 일이기에 하나님의 생명에서 영원히 끊어지게 됩니다.

     

  3) 성경에는 예정 교리가 있습니다.

  예정 교리는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적으로 사랑하셔서 구원받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예정에는 강제성이 없습니다. 인간 편의 의지를 무시하고 억지로 구원받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정의 결과는 주 예수를 자원하여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주권적 섭리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이 아닌, 나를 구원하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과 하나님이 성취하기로 작정하시는 주권적인 결정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복음의 진리를 알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겔 18:23, 32).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9).

 

  반면,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은혜로 미리 작정하시고 이끌어 주셔야만 주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 6:44).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3:48).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소원(desire)과 작정된 뜻(will, decree)을 구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 만민의 구주라고 해서 만민이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위해 제공된 것이지만, 구원의 효력은 오직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만 발생합니다. 유명한 중세기 신학자인 Peter Lombard의 말은 속죄의 범위와 효과에 대한 진리를 반영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해 충분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만 유효하다. (Although the death of Christ is sufficient for all people it is efficient only for those who believe in him).

 

  새번역의 로마서 3장 25절이 이 진술을 뒷받침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속죄 피의 혜택을 입을 수 있는 대상은 모든 사람이지만, 속죄 피의 효력은 택함을 받고 믿음으로 나오는 사람들에게 제한된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 보면 속죄의 피를 믿어야 하고, 하나님 편에서 보면 선택을 받아야 합니다. 이 양면은 이율배반적이므로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양편을 다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영역입니다. 십자가 대속의 보편성은 구원의 보편성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선택의 제한성도 인간의 자유를 억제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누가 구원을 받을 사람인지 미리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었으며 이를 믿으면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속죄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거저 제공되었다. 그러나 신적 선택의 신비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속죄를 제한하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죄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선포할 뿐이다. (A Dictionary of Christian Theology. P. 22)

 

  [제한적 속죄론의 단점]

  ▶ 하나님의 사랑의 범위와 대상을 축소시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다고 했는데 ‘세상’의 의미를 ‘각 나라’로 보고 각지에 산재한 택함 받은 백성으로 제한하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이 대폭 줄어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 인류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로 보내실 만큼 무한히 깊고 큰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사랑입니다(요일 4:8). 그러나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믿는다면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구원의 기회를 주신다고 보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 개인에게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하여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일일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모든 사람을 위하여 보내셨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공의에 비추어 볼 때 합당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시대를 초월하여 세상의 각 개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이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계시된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셨으며(요일 4:14)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요일 4:15) 언제 어디서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 구원의 확신을 주지 못합니다.

  제한적 속죄론에 의하면 내가 복음을 믿고서 신자가 되어야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로 가셨다는 사실이 확실하다고 말합니다.

 

  가시적인 언약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의 경우에 한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그 사람에게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마이클 호튼, 복음이란 무엇인가? 부흥과 개혁사 184쪽)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려면 그분이 나를 위해서 무슨 일을 행하셨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비신자일 경우, 예수를 믿어보려고 할 때 예수님이 과연 자기를 위해서 돌아가셨는지를 알 수 없다면 십자가를 적극적인 믿음으로 바라볼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선택된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치르셨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예수님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내가 예수를 구주로 잘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택하셨음을 확신할 수 있다면 자신의 믿음이나 성화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을 만큼 충분하고 진정한 믿음이나 거룩한 삶을 살고 있음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이나 선한 삶은 일정하지 않습니다. 속죄의 피를 이런 식으로 적용하여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고 시도하면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믿음이나 성화의 레벨은 오르락내리락하므로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죗값을 치르셨다면 나를 위해서도 그리스도는 속죄의 피를 흘렸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신뢰하면 구원의 확신은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대속주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나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 십자가로 가셨다는 것을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한적 속죄론은 오직 택함을 받은 자들만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택함 받은 백성 중에 포함되는지를 사전에 알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과연 나를 위해서도 대속의 희생을 하신 세상의 구주이신지를 알지 못하는데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불확실한 것에 자신을 던지는 일입니다. 만약 내가 불확실한 것을 믿었다면 구원의 확신도 불확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주가 되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라면 그분이 나를 위해서도 십자가 희생을 치르셨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제한적 속죄론은 구원의 확신을 미래의 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17세기 잉글랜드의 청교도였던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는 갈라디아서  2장20절에 표현된 개인적 체험으로서의 구원의 확신은 믿음의 출발이 아니고 절정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이 바울 자신을 친히 사랑하셔서 십자가로 가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갈 2:20; 롬 5:8) 이것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온갖 역경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를 위한 헌신된 삶을 사는 추진력이 되었습니다. 제한적  속죄론은 주 예수를 처음 믿을 때 자신이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구원의 진위성은 꾸준한 믿음과 거룩한 삶으로 증명되어야 하므로 정말 구원을 받았는지는 나중에 가 보아야 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정말 누구를 위하여 돌아가셨는지는 죽은 후에나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생각은 구원의 확신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제한적 속죄론은 기본적으로 내성주의 성향을 가진 교리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즉각적으로 구원의 확신을 하는 것을 주저하며 자신의 속을 항상 들여다보는 내성주의에 빠지게 합니다.

 

  제한적 속죄론자들은 먼저 회개하고 십자가를 바라보면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서 돌아가신 것을 믿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애매모호한 말입니다.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이 나를 위한 것임을 사전에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자신을 던진 후에는 알게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왜 내가 회개해야 하고 왜 십자가를 신뢰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도 못하면서 그리스도를 신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속죄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자신도 당연히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그리스도를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는 바울의 고백은 신앙생활을 오래 한 후에 고백한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자신에게 온 즉각적인 변화를 진술한 것이었지 믿고 난 후에 여러 갈등을 거치면서 점진적인 성화를 통해 확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쓴 글 중에서 가장 먼저 쓴 서신의 하나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대상임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4).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돌아가셨다면 바울 자신을 위해서도 돌아가신 것이 확실합니다. 전 세계적인 의미에서는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의미에서는 예수님이 바울을 사랑하여 바울을 위해 자신을 내주셨습니다(갈 2:20). 그러니까 바울은 한 면으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대상에 세상 모든 사람을 포함시켰고, 다른 한 면으로는 각 개인을 포함시켰습니다. “모든 사람”(고후 5:14)은 바울처럼 주님이 사랑하신 각 개인의 총계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고후 5:14)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돌아가신 사실을 전제한 결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고 모든 사람을 위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위경에 처했던 나를 구출하기 위해 누군가가 모든 것을 바치고 사랑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마음에 큰 감동을 일으키고 힘차게 살아야 하겠다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합니다. 보편적인 관점에서는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희생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갈 2:20). 이 사실은 우리가 미리 알아야 할 사항입니다. 그래야만 구주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신뢰가 생기고 그리스도를 닮는 성도의 삶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 전도의 걸림돌이 됩니다.   

  예수님이 오직 택함 받은 자들만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셨다고 한다면 전도할 때 매우 난처하게 됩니다.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죄를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의 대속물로 내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당신의 주님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약의 제자들은 하나님이 세상 모든 죄인을 깊이 사랑하셔서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확신으로 선교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하늘 아버지의 선한 뜻이라고 하였습니다(요 3:17). 바울도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딤전 2:6; 롬 3:29).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서 모든 사람을 위해 대신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제한적 속죄론은 구원의 대상을 좁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속죄의 범위와 그 효력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인을 위해 십자가 구원을 제시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속죄의 보편성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모든 민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며 제자로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마 28:19)은 당위성을 잃고 혼란만 일으킬 것입니다. 예수께서 과연 누구를 위해 대신 돌아가 주셨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구에게나 십자가는 당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구원의 진리를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는 근거나 동기부여를  주지 않습니다.

 

  제한적 속죄 교리는 흔히 종교개혁자인 칼빈의 주장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보편적 속죄를 믿었습니다. 다음은 그의 설교에서 예수님이 모든 죄인을 대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셨다는 내용입니다.

  

  “Let us note what well, then, that the Son of God was not content merely to offer His flesh and blood and to subject them to death, but He willed in full measure to appear before the judgment seat of God His Father in the name and in the person of all sinners, being then ready to be condemned, inasmuch as He bore our burden.” (The Deity of Christ and other sermons by John Calvin, W.M. Eerdmans Publishing Company, P. 52).

 

  제한적 속죄 교리는 후기 칼빈주의자들이 지지하였습니다. 이들의 영향 때문에 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전도 자체를 하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편적 속죄를 믿는다면 예수님의 대속이 나를 위한 것인지 아닌지를 궁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속의 값은 이미 모든 사람을 위해서 지불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대속의 십자가로 가게 하셨다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열망하십니다. 우리는 단지 믿음의 빈손을 내밀고 우리에게 제공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롬 10:9~13).

 

  ▶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낭비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과 관련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실 자들을 미리 정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대속의 피를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택함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십자가 피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그대로 적용되어 효력을 발생한다는 주장입니다. 나머지 죄인들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 피가 한 방울도 적용되지 않음으로 결국 속죄의 피는 낭비되는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반면, 보편적 속죄는 복음을 전해도 안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십자가 보혈의 낭비를 초래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십자가 대속의 피를 설명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성경은 십자가를 믿으라고 권유하고 믿지 않을 경우의 심각한 결과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만일 예수님의 피를 배척하는 일이 없다면 이런 경고를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결코 낭비될 수 없다는 것을 내세워 속죄의 피가 오직 택함 받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한 논리입니다.

 

  우리는 불신자들 때문에 속죄 피의 능력이 제한된다고 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원칙적인 문제일 뿐이지 예수님의 속죄 피의 능력이 불신자들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예수님의 속죄 피가 낭비되었다면 이것은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또 다른 측면의 하나님의 놀라운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돌아가셨다는 말을 제한하려는 것은 인류 전체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뜻과 예수님의 속죄 피가 제공되는 보편적인 영역을 감축시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일 2:2)고 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도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고 밝혔습니다.

  이것은 보편적 속죄에 대한 가장 선명한 구절들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만인을 위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히브리서 2:6절에서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라고 했을 때의 ‘사람’은 인류 전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해 속죄 제물이 되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세상에 속해 있는 나를 위해서도 십자가 죽음을 치르셨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지불한 죗값은 아담 이후로 예수님이 오셔서 죄를 완전히 폐기하실 때까지의 모든 죄인들과 후세대까지 포함하는  속전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도 이 은혜에서 제외된 자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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