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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다음 몇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첫째, 신체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골로새 지역의 성도들이 그를 대면해서 만나보지 못한 것을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골 2:1)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인간의 연약성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약한 인간으로 태어나신 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 1:14)고 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도 예수님이 “혈과 육”(히 2:14)을 지니신 인간이었다고 증언합니다(참조. 롬 1:3; 고전 10:18) 제자들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곤하여 잠들었을 때 예수님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막 14: 38)라고 하셨습니다.

  셋째, 인간의 죄악 된 측면을 가리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갈 5:13).

이런 의미의 ‘육체’는 ‘육체의 욕심’(갈 5:16; 엡 2:3), ‘육체의 소욕’(갈 5:17), ‘육체의 일’(갈 5:19)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인간의 죄악 된 습성과 성향을 시사합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롬 8:6)은 사망이며 ‘하나님과 원수’(롬 8:7)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골로새 본문에서 다루는 ‘육’(’)은 인간의 본성도 아니고, 회심 이전의 ‘나’도 아닙니다. 육은 타락의 영향권 아래 있는 우리 몸입니다. 그래서 이 몸은 아직도 죄가 활동하는 곳이기 때문에 ‘죄의 몸’(롬 6:6)이라고도 합니다. 신자들은 내 몸을 발판으로 삼고 내 몸 안에서 나를 아래로 잡아당기는 세력과 대결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육에게 전적인 조종을 받으며 지배를 받았던 과거의 아담적인 삶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 양면적인 측면을 마치 두 개의 자아가 있는 듯이 진술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고서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인해서 산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말은 모순처럼 들립니다. 그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죽은 자아는 아담 안에 속한 옛사람이고, 살아난 자아는 새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새사람은 옛사람과 같지 않습니다(갈 2:19-20). 옛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안에서 완전히 죽고 장사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로 다시 살아난 ‘나’는 전혀 새로운 존재 양식으로 거듭난 새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삶의 형태를 말하면서 바울은 “육체 가운데” 산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신자는 위치와 영역의 관점에서 보면, 죄와 사탄의 영역을 벗어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습니다(엡 2:6).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신자가 사는 곳은 이 세상입니다. 신자의 몸은 아직 구속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몸의 구속을 기다립니다(롬 8:23). 만약 현재의 몸이 새 몸으로 부활한다면, 죄가 전혀 우리 속으로 들어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몸은 아직도 땅에 속하였으며 지상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인격체 속에 ‘육’이라고 부르는 타락한 측면이 남아 있어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위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땅의 것’을 생각하도록 아래로 잡아당깁니다.

육은 나의 옛사람의 잔재와 성향입니다. 우리는 타락한 첫째 아담에게 속했던 옛사람을 장사지냈지만,  옛 자아의 악습과 함께 죄를 짓고 싶은 성향에서는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구속받지 못한 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거듭난 신자는 이 육의 통제 아래에서 이리저리 노예처럼 끌려다니지는 않습니다. 구원받은 신자는 어둠의 세력이 다시 압도적으로 주인 노릇을 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영역인 그리스도의 나라로 이전하여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듭난 이후부터는 타락한 첫째 아담에게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더는 죄와 사망과 사탄에게 지배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왕국 안에서 삽니다. 나는 죄에 죽었습니다. 내가 죄를 전혀 지을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어둠의 왕국에서 풀려났으므로 사탄과 죄의 속박에서 종살이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닿을 수 없는 부활 생명의 영역에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새사람입니다(엡 2:6). 이 새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써 모든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는 선언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는 예수님처럼 타락하지 않았고 죄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로 가려지고 덮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전혀 죄가 없는 사람들로 보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구원은 신분적으로 보면 다 이루어졌지만, 아직도 구속을 받아야 할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몸입니다. 문제는 이 몸이 연약하여서 죄에 노출되고 때때로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럼 성경은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요? 한마디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는 것입니다(3:5).

육신이 연약하므로 죄를 막을 수 없다고 넋두리하거나 핑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상기해 보십시오. 바울은 세 가지로 나누어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습니다(3:1).

▶우리는 죽음의 영역에서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졌습니다(3:3).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3:4). 

이것이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입니다. 우리는 죄를 죽이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달라진 신분과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살다가 어디로 이주했는지를 명지해야 합니다. 자신이 과거에 속했던 나라와 현재에 소속된 새 나라 사이의 차이와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명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새 삶의 영역으로 옮겨진 자신의 새 신분에 비추어 살아야 한다는 성경의 논리적 설득을 들어야 합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했습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구원이 우리 손에 달렸다는 뜻이 아니고, 이미 받은 구원을 실생활에서 드러내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골 3:7-8).

 

우리의 과거의 영적 위치와 현재의 영적 위치를 대조하며 상기시키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크리스천의 현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것은 과거의 비참했던 형편에 비추어 볼 때 그 당위성이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에는 영적으로 어둠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따라서 아직도 어둠에 속한 사람처럼 행동하지 말고, 빛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내가 출생 때부터 가졌던 아담과의 연합은 절단되었습니다. 그래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는 말이나, 벗어 버리라는 말은 옛사람의 특성에 해당하는 죄들과 단절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은 옛사람의 흉내를 내거나 옛사람이 아직도 살아서 존재하는 것처럼 처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이 주 예수를 믿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알고 그에 따라 새 삶을 사는 자입니다(골 3:9-10).

과거의 어둠에서 해방되어 빛의 나라 속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 확실하다면, 자신의 신분에 맞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 자기모순이라는 것을 알고 삼가게 될 것입니다. 물론 알아도 유혹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새로운 신분을 거듭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와 죽음이 다스리던 사탄의 나라에서 의와 생명이 다스리는 주 예수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구출이 단순한 믿음에 의한 것이기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을 자아내게 합니다.

또한,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죄에 죽고 주님의 부활 생명을 받아 누린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면, 부활 생명을 실제로 구현하는 크리스천의 새 삶을 기뻐할 것입니다. 말할 나위 없이 거룩한 삶을 위한 가장 큰 동기부여는 우리가 받은 구원 자체입니다. 십자가가 함축하는 구원의 의미를 깨닫는다면 주님을 위해 살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받은 구원에 대한 원리적이고 논리적인 당연성에서 나온 결론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십자가의 동기부여가 주님을 섬기기 위한 충분 타당한 근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더 많은 격려가 필요한 나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자비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셔서 부가적인 동기부여를 주십니다. 그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6절). 진노는 부정적인 동기부여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을 믿으면 다 된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원칙적으로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지옥이 없다면 거룩한 삶에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을 것입니다. 또 죄에 대한 형벌이 없다면 누가 구태여 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것 같습니까? 지옥의 형벌이 무서워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그다지 영적으로 들리지 않을지 모릅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만 믿고 감사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십자가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지옥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경고도 많습니다.

만일 이런 것들이 부정적인 동기부여라서 나쁘고 불필요했다면 성경에서 아예 언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약에서 율법을 주신 목적의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형벌의 두려움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이라는 대구원을 체험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항상 자신을 출애굽의 하나님으로 상기시켰습니다(출 20:2; 시 78:12-16, 43-53).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바로의 학정을 받으면서 종노릇 하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해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출애굽의 구원이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순종하고 사랑하기에 충분한 동기부여가 돼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과연 그렇게 하였습니까?

그들에게는 출애굽 구원 이외에 추가적인 동기부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불순종하는 자들을 형벌하시며 순종하는 자들은 복을 받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약속이었습니다. 만약 이런 동기부여가 불필요하다고 본다면, 인간의 본성에 대한 매우 나이브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신약 교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보다 더 큰 동기부여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의 진노라는 부정적인 동기부여도 필요합니다. 만약 신자라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지 않는다면,  아무리 십자가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여도 죄에 대해서 크게 조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실상 많은 교인이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있다는 엄숙한 사실을 잊고 살기에 진지한 신앙생활을 잘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골로새서 강해, 이중수 지음 401-4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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