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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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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와 헌금 시리즈(5) 십일조의 문제점

 

어떻게 해야 십일조를 가장 잘 이행할 수 있을까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포함되도록 십일조 세칙들을 만들거나, 아니면 십일조 제도의 근본 취지를 깨달아서 그 의도에 비추어 자유의 율법으로 지키는 것입니다(약 2:12; 갈 6:2; 고전 9:21).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이야기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율법의 온전한 준수는 바리새인적인 문자적이고 규범적인 적용이 아니고 십자가의 원리에 비춘 적용이어야 합니다(살전 5:21).

 

◐ 성경적인 십일조

 

십일조는 우리나라 교회의 중요한 헌금입니다. 십일조는 수입의 십 분의 일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십일조 헌금은 다른 헌금들에 비하면 여러 면에서 장점이 많습니다.

첫째, 단순성입니다. 수입의 십분의 일이라는 점에서 헌금 액수가 분명하고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됩니다.

둘째, 정기적인 헌금입니다. 십일조는 매달 하기 하므로 교회의 정기적인 수입이 되고 액수도 매우 큰 편에 속합니다. 사실상 십일조는 교회 수입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셋째, 호소력이 큽니다. 십일조의 의미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린다는 것이므로 헌금자에게 실천을 촉구하는 신앙적 호소력이 강합니다.

넷째, 신앙 훈련에 효과적입니다. 매달 정기적으로 실행해야 하므로 좋은 습관이 길러집니다. 또한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한다는 뜻에서 헌금자에게 심적 만족감을 가져다줍니다.

 

◐ 세속적인 십일조

 

십일조는 장점들과 함께 시행 과정에서 야기되는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십일조 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말씀이 아니고 십일조 헌금과 관련된 여러 가지  잘못된 관례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 주제를 거론하기 전에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먼저 언급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에는 십일조를 꼬박꼬박 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은 생활에 쪼들리고 시급한 지출이 있더라도 참고 십일조부터 떼어서 매달 하나님께 바칩니다. 그것도 한 두 달이 아니고 해마다 거듭해서 충실히 십일조를 실천합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십일조가 하나님의 소유임을 철저히 믿습니다. 이 같은 신앙 행위는 순수하며 그 자체로도 가상한 일입니다. 그들은 십일조 헌금이 교회 운영에 큰 도움이 되고 선한 사업에 유용하게 쓰인다고 믿기에 더욱 중시합니다.

본인은 이러한 성도들에게 깊은 존경의 고개를 숙입니다. 이제 앞으로 살펴볼 본 주제에서 십일조에 결착된 문제들이 부정적으로 지적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이 글은 순수한 마음과 깨끗한 양심으로 교회에서 배운 대로 십일조를 실행하는 분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선의의 십일조 성도들을 말씀으로 도와드려 십일조의 의도와 본뜻을 더 잘 숙지하고 주께 드리도록 조언하고 격려하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여기서 십일조를 성실히 수행하는 행위를 죄악시하거나 십일조 제도 자체를 나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혹은 교회의 중요한 재정 원천을 봉쇄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본 글에서 시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비추어 십일조의 참뜻을 밝혀내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내어서 야기되는 문제

모든 교인이 다 십일조를 내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어 십일조를 하는 교인들과 안 하는 교인들 사이에 등급이 매겨집니다. 십일조 교인은 신앙이 더 좋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교회측으로부터 인정을 받습니다. 그래서 십일조가 자기 의를 드러내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눅 18:12). 십일조를 한다고 해서 반드시 신앙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십일조를 했지만 그들은 위선자들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십일조를 내는 일이 직분과 관계된 것입니다. 교회에서 집사를 비롯한 여러 직분을 맡을 때에 흔히 십일조 헌금이 전제됩니다. 십일조를 잘 내는 것이 교회를 섬기는 일에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직분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십일조 헌금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맡은 일을 잘 수행하는 것입니다. 직분자는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 한다거나 십일조 교인이라야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에 없는 말입니다. 헌금은 어디까지나 자원성에 바탕을 둬야  합니다. 헌금은 그 성격상 어떤 일에서도 조건으로 이용될 수 없습니다.

 

십일조를 내지 못해서 발생하는 문제

십일조는 일반 헌금과 달라서 하지 못하면 심한 갈등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물론 헌금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몰라도, 교회 생활에 충실하려고 애쓰는 교인들이라면 대체로 십일조 헌금에 적잖은 비중을 둡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십일조 헌금을 할 수 없는 어려운 형편 때문에 고민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갑자기 장사가 안되거나 가족 수가 늘었거나 자녀의 학비가 부족하거나 큰 병원비가 나가야 하거나 기타 실직이나 불규칙한 수입 등으로 십일조를 뗄 수 없는 경우가 생깁니다. 문제는 그 같은 경제적 쪼들림 자체보다 그로 인해 십일조를 교회에 내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심리적 번민입니다. 우선 십일조를 못 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면서 산다는 자책과 죄의식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들어갈 때 부끄럽고 헌금 바구니나 헌금통을 볼 때 떳떳하지 못하며 목사님이 강단에서 십일조 교인들을 위해 축복 기도를 올릴 때 괴롭습니다. 또 주보에 십일조 교인의 명단이 실린 것을 볼 때마다 왜 내 이름은 들어가지 못할까 하고 자책합니다. 다행히 요즘 교회에서는 과거처럼 십일조의 금액을 밝히는 경우는 드물며 명단을 주보에 싣지 않는 교회들도 늘어가는 추세입니다. 그런데 십일조를 못 내기 때문에  약속된 하나님의 복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슬퍼지기까지 합니다. 어째서 자신은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을 드렸던 어느 과부의 경우처럼, 생명을 건 헌금을 할 수 없는 것인지 자문하며 낙심합니다. 더구나 평소에 잘 내던 십일조 헌금을 사업의 실패나 실직 등으로 못 내게 되면 기가 죽고 자책감과 죄의식까지 동반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교인은 십일조를 못 하는 것이 하나님의 노여움을 받아 복을 못 받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십일조는 신자들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원인도 되고 해결사도 되는 것처럼 오해하기도 합니다. 멀쩡하던 아이가 갑자기 병이 나거나 성적이 좋던 자녀가 낙방하거나 일이 악화하면 곧잘 그 원인을 십일조에 같다 붙입니다. 십일조를 게을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이 틀어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성도의 가정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여주인이 말했습니다.

요즘 일이 자꾸 꼬여서 가만히 그 원인을 생각해 봤어요. 글쎄 깜박 잊고 지난달 십일조를 걸렀지 뭐에요. 그래서 얼른 갖다 바쳤더니 일이 금방 풀리더라고요!”

이쯤 되면 십입조는 순수성을 모두 상실한 채 돈 없이 십일조를 못 하는 성도들의 가슴을 멍들게 하고, 무지한 성도들의 손에서는 복채로 둔갑하여 어처구니없는 부작용을 일으킵니다. 그렇다면 십일조 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십일조에 대한 그릇된 가르침과 인식이 이와 같은 어리석은 생각들을 빚어낼 뿐입니다.

 

십일조를 강조하는 문제

교인들이 헌금으로 교회 재정을 책임지고 사역자들의 생계비를 맡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고전 9:3-14; 딤전 5:18). 그래서 교인들이 여유가 있음에도 교회 운영에 필요한 재정 확보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무리하게 예산을 세워 놓고 이를 성취하려고 십일조 전문 간증사나 부흥강사를 초빙하여 유치한 논리와 천박한 내용으로 십일조를 강조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더러는 목회자와의 사전 묵계나 각본에 따라 십일조 헌금을 강행시키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헌금을 많이 해도 하나님께 빚을 지우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를 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갚아 주셔야 할 하등의 책임도 의무도 없습니다. 빚진 자는 오히려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마땅히 드려야 할 십일조 헌금은 많이 바치면 더 많이 받는다는 식의 늘려 받기의 거래 행위로 취급될 수 없습니다.

 

십일조를 사용하는 문제

교회로 들어오는 십일조 헌금은 과연 어디에 쓰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지만 실제로 돈을 받아 쓰는 곳은 교회입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께 드렸다가 다시 받아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십일조를 성전에 바쳤지만 제사장들을 비롯한 성전 봉사자들의 생계비에 충당되었습니다. 그런데 간혹 목사는 구약으로 치면 제사장에 해당하는 직분이기 때문에 성도들의 십일조 헌금을 임의로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어쩌다가 듣는 말이지만, 목회자의 권위 문제와도 관련되었으므로 한번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십일조 헌금을 사역자의 생계비 지출에 사용한다는 것과 목사가 제사장이기 때문에 십일조 헌금을 받아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주장은 억지 논리입니다. 목사는 목회를 하므로  교회가 사례를 하는 것이지, 제사장이기 때문에 사례비를 십일조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목사를 제사장으로 생각하면 구속사의 흐름에 커다란 혼란이 생깁니다.

신약 시대의 교회에는 제사직을 전담하는 레위 지파가 없습니다. 더구나 현대  교회에 아론의 후손들이 있지도 않습니다. 현대교회에는 구약 시대와 같이 동물 희생을 올렸던 성전도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성전 사역자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단번에 십자가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히 9:11-12; 10:10-18).

목사는 제사장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들의 제사장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히 4:14-15). 만일 목사가 회중을 위해서 기도를 올리고 예배를 인도한다는 의미에서 제사장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십일조 헌금을 받는 일과 아무 관계도 없을뿐더러 그런 식의 제사장 역할은 목사만의 기능도 아닙니다. 일반 성도들도 회중을 위한 대표 기도를 올릴 수 있고 예배를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벧전 2:9).

 

십일조를 강조할 때 구약 율법을 많이 인용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회의 십일조 헌금의 용도를 보면 구약 율법과 잘 맞지 않습니다. 구약의 십일조는 적어도 두 종류였습니다.

첫째, 매년 농사의 십 분의 일을 중앙 성소로 가져갔는데 그 용도는 레위 지파를 위한 것이었습니다(민 18:21, 31). 흥미 있는 것은 이때 바치는 십일조의 일부를 레위인과 함께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성소에서 함께 회식했습니다(신 14:22-27). 또한 레위인은 자기들이 받은 십일조의 십일조를 제사장들에게 바쳤습니다(민 18:26-29).

둘째, 십일조는 매 삼 년 끝에 그 해에 난 소출의 십일조를 거두어서 성소에 가져가지 않고 자기들이 사는 성읍에 저장했습니다. 그 용도는 레위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용이었습니다(신 26:12).

학자들에 따라 절기 십일조가 별도로 있었다고 보기고 하고 매 삼 년 십일조는 매년 십일조를 계속하면서 따로 한 것이었다고 생각하여 십일조의 종류를 세 가지로 나누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구약 시대의 율법이 요구한 십일조는 한 가지만이 아니었으며 그 용도도 레위인의 생활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의 십일조가 과연 얼마만큼 구약 시대의 십일조 제도에 충실한지 의문입니다. 비근한 예를 들어, 매 삼 년 끝에 십일조를 거두어 모두 구제용 회식으로 사용하는 교회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물론 많은 교회들이 구제 사업을 하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예산 책정에 의한 구제금이나 특별 헌금에 의한 자선이 아니고 정규적인 십일조 헌금의 독특한 용도입니다.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 14:28-29).

 

결국 우리들은 구약 율법이 명시한 십일조의 규례를 문자적으로 따르고 있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들이 구약의 십일조 제도를 현대교회에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현대사회는 경제 구조적인 면에서 구약 시대와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단순히 일 년 소출의 십 분의 일을 떼어서 바쳤던 농경사회에 비하면 오늘날의 경제 구조는 대단히 복잡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십일조 규례를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애매한 문제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십일조 책정이 세금공제 이전이냐, 이후냐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세금 제도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왕권 제도를 도입하면서 십일조가 부분적으로나마 일종의 세금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삼상 8:14-17) 그 당시에는 국가 권력과 종교의 구분이 없던 신정 시대였습니다. 그럴지라도 십일조가 지상 왕권의 유지를 위해 쓰이는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구한 것 자체가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반대였기 때문입니다(삼상 8:7).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의 국가 형태가 신정 체제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신다고 보고 세금 공제 이전에 십일조를 내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속 정권의 세금 제도를 인정하시기 때문입니다(롬 13:1-7). 그래서 교회는 대체로 십일조와 세금 문제가 나오면 주로 액수가 높이 매겨지는 쪽으로 표를 던집니다. 무슨 확실한 기준이라기보다 교회에 더 많이 바치는 것이 좋지 않으냐는 뜻에서 세금 공제 이전을 권장하는 편입니다.

 

부수입도 십일조와 관련되면 까다로워집니다. 가령 현찰이 아닌 양복 한 벌이 들어왔다고 칩시다. 그럼 양복의 팔 한쪽을 찢어서 드려야 합니까? 돈으로 환산한다 해도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선물한 사람에게 얼마짜리냐고 물어보거나 현 시세를 별도로 알아보아야 할 텐데 이렇게 되면 매우 거추장스러울 것입니다. 어쩌면 선물은 수입으로 따질 필요가 없다고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선물인지 뇌물인지 부수입인지 분간하기 애매한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결국 양심에 맡기고 신앙에 맡긴다는 말로 넘어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아니면 부수입은 십일조에서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면 되는 것일까요? 그러면 부수입이 정규 수입보다 더 많은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는 십일조를 떼어야 할까요? 기준이 무엇입니까?

십일조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이 같은 제반 문제들에 대한 분명한 원칙이 없으면 퍽 난감해집니다. 학생이 부모님에게서 등록금을 받았다고 해서 이것을 수입으로 보고 십일조를 했다가 학비가 모자라서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학생이 하숙비를 받아서 십일조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학생이 부모에게서 받은 하숙비도 십일조의 대상입니까? 용돈이나 기타 선물금은 어떻습니까?

구약 시대의 십일조는 가족 단위였습니다. 그러나 이 원칙을 현대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가정구조나 개인의 수입 형태가 너무도 다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약의 십일조 제도를 가장 잘 이행할 수 있을까요? 십일조 제도의 근본 취지를 깨달아서 그 의도에 비추어 십일조의 율례들을 자유와 사랑의 율법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나중에 더 자세히 다루게 될 것입니다.

 

십일조를 내는 장소

십일조를 어느 곳에 내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교회에 바치라고 할 것입니다. 더러 십일조의 사용처를 교회가 아닌 다른 자선 단체나 가난한 교회에 내면 안 되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러면 안 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숭실대학교에 다니는 대학생이 성균관대학에 등록금을 내면 됩니까?”

이런 식의 논리는 우습기도 하고,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가 등록금의 성격과는 거리가 멀지만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내어야 한다는 것은 원칙적인 면에서 옳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언제나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면 율법이 되고 억지가 됩니다.

어느 성도가 서울에서 교회 생활하다가 해외 파견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십일조를 어느 곳에 내어야 하는지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모교회에서는 당연히 서울의 모교회로  송금해야 한다고 조르고, 해외 근무지의 교회에서는 현재 다니는 교회에 내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교회 목사님 말씀은 현재 외국에서 다니는 교회는 잠시 머무는 정거장 교회이니 주일 헌금은 그곳에다 내고, 십일조만큼은 모교회에 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해외 근무 기간에 다니는 교회는 학교로 치면 청강생으로 다니는 격이니까 청강료에 해당하는 헌금만 하면 된다고 했답니다. 이쯤 되면 십일조 헌금은 잿밥이 됩니다. 제사보다 잿밥에 관심이 더 있으니까 그런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 만무합니다.

십일조 시행에 따른 여러 가지 모순되고 무리한 일들은 근본적인 고찰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관련된 성경 본문들을 다음 장에서 구체적으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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