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와 헌금시리즈(11) 질의응답
◐ 십일조를 중단하면 교회 수입이 크게 줄지 않습니까?
십일조 문제는 교회의 수입과 직결된 것이므로 재정적 위험 부담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십일조 가르침을 잘못 받아들이면 십일조는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런데 십일조를 중단한 교인이 십일조에 해당하는 액수를 일반 헌금으로 내지도 않는 듯합니다. 그래서 일부 목회자들은 현행 십일조 시행이 성경적으로 상당한 모순을 안고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고치지 못합니다.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십일조를 하는 교회와 안 하는 교회의 헌금 수익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기적으로 해 오던 십일조가 중단되었을 경우에는 교회 수익이 확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첫째, 십일조 헌금자가 지금까지 십 분의 일이라는 수치에 맞추어 무슨 세금 내듯이 십일조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십일조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을 들으면 아예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만큼 교회 재정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십일조 헌금자가 십일조를 중단했기 때문에 경제적 여유가 생겼음에도 일반 헌금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십일조에 해당하는 금액을 일반헌금으로 돌리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자율적으로 교회 재정을 위해 자신이 정한 금액을 헌금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십일조가 없어지면 교회 재정에 당장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각자 인내하며 어느 정도 훈련을 거친다면 점차 정상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통적인 십일조 관습을 일반 헌금 방식으로 바꾸는 것은 처음에는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성경적인 신약 헌금 생활로 옮기는 것이므로 바람직한 일입니다. 문제는 헌금 문제 한 가지라도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바르게 따르려는 의지와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따져보면 교회는 헌금 자체의 수익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일조의 개혁으로 헌금이 더 나오고 덜 나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달았기 때문에 잘못을 시정하고 오해한 부분을 풀며 새 마음과 새 뜻으로 주님을 더욱더 잘 섬기려고 노력하는 진실한 자세가 귀하고 중요합니다.
사역자가 율법적이고 비신약적인 십일조 제도를 버리고 오직 십 분의 십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신약교회의 헌금 원칙을 가르치면 성도들은 큰 무리 없이 따라올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예산을 줄여야 하고 여러 활동들을 재조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축소나 재조정은 오히려 교회의 모습을 훨씬 더 건강하게 꾸며 주고 건전한 발전을 위해 기반을 닦아 줄 것입니다. 물론 오랫동안 굳어진 습관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늘 아버지의 공급을 바라보면서 신약적인 방법의 헌금으로 교회를 운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헌금은 꼭 본 교회에만 내어야 합니까?
원칙적으로 그렇습니다. 교회는 가시적인 형태의 조직을 가지고 전담 사역자들을 두고 운영되는 하나의 기관입니다. 그래서 사역자들의 생계비가 일차적으로 지급되어야 합니다(고전 9:4-14).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고 강론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지키는 신령한 소명을 가졌으므로 교회의 존속을 위해 운영에 필요한 재정적인 책임을 교인들이 맡아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물질을 서로 나누어 가지면서 함께 도와야 합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한편 교회의 재정적 필요가 일차적으로 충당될 수 있는 형편이라면, 각 성도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인도에 따라 다른 곳에 헌금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려면 각 성도가 우선 자기 교회의 재정 형편을 항상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재정 보고를 매달 혹은 분기별로 자주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교회 살림이 부족하면 우선적으로 교회 헌금을 먼저 돕고, 여유가 생기면 개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다른 곳에 헌금하는 일을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출애굽기 36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을 짓기 위해 자원예물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너무 많이 가져와서 쓰고도 남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성막 기능공들이 모세에게 보고했고 모세는 백성에게 예물을 더 가져오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출 36:2-7). 이것은 얼핏 보면 그리 지혜로운 처사가 아닐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집에 헌물이 쌓이면 쌓일수록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건축 헌금이 넘친다면 교회를 증축하여 더 크게 지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모세가 어떻게 했습니까? 자원예물을 중단시켰습니다. 교회도 일정 목적의 헌금액이 채워지면 그 사실을 교회 전체에 알리고 더 이상 헌금할 필요가 없음을 알려야 합니다. 교회가 쓰고도 남을 잉여헌금을 계속 받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몇 가지 이유를 든다면, 우선 돈을 쓰기 위해서 불필요한 소비성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절제 없이 낭비하거나 욕심이 생겨 부패할 위험이 높습니다. 또한 물질 과다에서 비롯되는 교만에 빠지기 쉽습니다. 지역교회의 지나친 비만은 이웃보다 자기 배를 채우는 이기적 치장에 큰 관심이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자체 운영을 위해 많은 지출이 필요한 시스템이라면 개선되어야 하고 교회가 선한 이웃이 되려면 재물의 유익이 바깥으로 항상 흘러나가야 합니다. 교회로만 재물이 쌓이는 것은 교회의 영적 건강을 위해서도 그리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땽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신 6:10-12).
이스라엘의 변절은 이 말씀의 경고대로 물질의 번영과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부자가 되더니, 반역자가 되었다. 먹을거리가 넉넉해지 , 실컷 먹고 나더니, 자기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기들의 반석이신 구원자를 업신여겼다” (신 32:15, 새번역).
교회사의 부패도 교회의 과다한 재물이 원인이었던 경우가 많습니다. 종교개혁은 오염된 기독교 교리의 개혁뿐만 아니라 중세교회의 재물로 인한 사치와 권력의 부패를 타파하기 위해 일어났던 정화 운동이었습니다. 현대교회도 재물로 인해 커다란 시험에 빠져 세상의 빈축을 사고 있습니다. 현대교회의 세속적 물질관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새삼 배워야 합니다. 내일의 양식이 아닌 오늘의 양식을 위한 기도는 내일에 대한 염려와 욕심을 내려놓는 기도입니다(마 6:11, 25-34). “네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눅 12:18)고 생각하며 풍성한 소출을 즐거워했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탐심에 사로잡힌 현대교회에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는 신명기적 교훈을 안고 있습니다(신 6:10-13; 32:15).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 30:8).
◐ 구제헌금이나 선교헌금도 본 교회를 통해서 해야 합니까?
성경은 성도들이 주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여러 종류의 헌금들을 교회가 모두 일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에는 각 성도의 개별적인 자선을 칭찬한 실례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선 헌금을 교회가 처리해야 하느냐, 개별 성도가 처리해야 하느냐는 문제는 분명한 구분점이 없습니다. 그래서 상황을 참작해서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교회적인 자선이 필요하고, 또 다른 경우에는 개별 성도의 손으로 자선을 행하는 것이 더 유익하고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이제 신약성경에서 언급된 실례들을 열거해 보겠습니다. 먼저 신약교회들은 교회적인 차원에서 다른 교회들을 잘 도왔습니다. 예를 들면, 마게도냐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구제헌금을 보냈습니다(고후 8:1-5). 그런데 이 경우에는 오늘날처럼 같은 교단에서 개척 교회를 돕거나 혹은 미자립 교회를 도와준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는 이방인 교회였고,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들로 구성된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민족과 국경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마게도냐 교회들은 자체 재정이 넘쳐서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넘치는 구제금을 보냈습니다(고후 8:2). 우리는 앞에서 ‘본 교회의 재정목표가 달성되었을 경우 다른 용도로 잉여헌금을 다른 곳에 전용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본 교회의 재정목표가 채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교회가 넉넉지 못해도 성령님의 인도와 우선순위에 따라 다른 교회의 교우들을 먼저 고려해야 할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게도냐 교회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힘껏 도왔으므로 바울은 그들을 칭찬하였습니다(고후 8:3-5).
예수님도 열두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실 때 자선을 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유다가 돈궤를 맡았고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었습니다(요 13:29). 이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헌금한 금전 수익을 제자들이 모아두었다가 가난한 개인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니까 교회를 통한 자선 사역에 해당합니다.
한편, 개인 성도가 자율적인 판단과 능력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한 경우도 있는데 도르가와 고넬료가 대표적인 실례입니다. 도르가(다비다)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을 많이 했는데(행 9:36) 그녀가 병들어 죽자 하나님이 베드로를 통하여 다시 살리셨습니다(행 9:40).
백부장 고녈료는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행 10:2)한 이방인 개종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기도와 구제 활동을 기억하시고(행 10:4, 31) 베드로를 보내셔서 그의 모든 권속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하시고 성령을 내려주시고 세례도 받게 하셨습니다(행 10:33-48).
그런데 어떤 이들은 개인 성도의 구제 활동은 자기 이름을 내는 일이므로 교회를 통해서 해야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다는 명분이 선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도르가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녀가 구제품을 교회에 헌납하여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난한 자들의 “속옷과 겉옷”(행 9:39)을 만들게 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이 생색을 내기 위해서 구제를 친히 한다면 물론 그릇된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가 할 자선과 개인이 행할 자선을 구별하지도 않았고 또한 구제는 반드시 교회를 통해서 행해야 한다고 제도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릇된 동기로 따진다면 개인의 이름을 내려는 것이나 교회의 이름을 내려는 것이 모두 똑같은 속셈입니다.
성경은 개인의 구제행위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부자 청년에게 주신 자선에 관한 지시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마 19:21). 중요한 것은 누구를 통해서 구제해야 하느냐가 아닙니다. 교회는 교회대로 자신을 베풀어야 하고, 개인은 개인대로 베풀어야 할 자선이 있습니다(행 2:45; 5:1-2). 성경에서 제시된 구제의 실례들은 주체자가 개인이어야 하느냐 단체라야 하느냐에 초점이 잡혀 있지 않습니다. 구제 본문들의 관심은 하나님이 백성이 물질에 사로잡히지 않고서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과 그 같은 선행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구제는 교회를 통해서 행해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특히 소수가 아니고 많은 사람을 도와야 할 경우에는 각 성도가 힘을 합쳐서 구제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매일 구제”(행 6:1) 활동이 교회 전체가 관련된 다수 상대의 자선 사역이었습니다.
한편, 주로 개별 성도들의 재정적 후원을 받고서 운영되는 기독교 자선단체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육아원, 자선병원, 학교, 양로원, 문서 전도, 기타 구제 기관들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6.25 전쟁 이후 보육원들은 극히 최근까지 거의 미국의 개별 신자들의 월정 후원금에 의해서 운영되었습니다. 외국의 많은 초교파 선교단체들도 개인 성도들의 선교헌금으로 운영됩니다. 만일 내 교회에만 구제헌금이나 선교 헌금을 해야 한다면 이 같은 범세계적인 자선사역이나 선교사역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십일조 헌금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분들은 성도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교회의 여러 사역에 큰 지장을 초래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청지기직을 잘 이해하고 내 교회 중심의 편협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면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얼마든지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경우, 교인들이 전통적인 십일조를 하지 않았음에도 해외선교회(O.M.F)와 같은 훌륭한 선교 단체를 만들어 세계 여러 곳에서 많은 선교 사역의 열매를 거두고 있습니다. 그 같은 선교 단체들은 대부분 개인 성도의 자원 헌금에 의해 유지되어 왔습니다. 이것은 교회들이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개교회 중심으로 가르치지 않고 훨씬 더 포용적이고 세계적인 관점에서 성도들의 참여를 권장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경우에는 대부분 본 교회 중심의 헌금을 강조합니다. 물론 앞에서 언급했듯이 헌금은 원칙적으로 본 교회에 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를 위한 여러 사역이 반드시 자기 교회나 자기 교단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럼 개별 성도의 자율적인 판단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른 본 교회 이외의 헌금 방식이 격려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획일주의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회는 거의 피라미드 체제의 단선주의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급적 하나로 묶고 창구를 일원화시키는 것이 우리 삶의 한 표준 방식입니다. 이런 권위주의와 획일주의 사상의 영향이 교회에도 그대로 들어와서 교회 체제가 목회자 중심으로 짜이고 교인들의 활동도 일원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둘째, 울타리 사상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집 마련’에 급급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웃집’에는 신경을 쓸 여유가 없습니다. 내 집 마련이 좀 늦추어지더라도 내 이웃을 조금씩이나마 도와가면서 살기보다는 우선 내 집이 장만 되고 나서 그때 보자는 식이니까 내 집 울타리를 넘어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작 내 집 마련이 된 이후에도 이웃집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나의 급한 사정 때문에 이웃을 못 도운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사상이 틀리기 때문입니다. 내 집이 마련되면 실내장식을 해야 하고 그 일이 끝나면 내 집을 더 늘려야 하고 그 일이 끝나면 또 다른 늘리기에 마음이 빼앗깁니다. 그러다 보면 모든 일이 자기중심이 되고 맙니다. 함께 도우면서 하나님나라를 이룩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보다 하나님이 내 집을 복 주시니까 내 집이 점점 더 커져야 한다는 논리가 지배적입니다. 이 같은 사고는 결국 성도들의 헌금이 때때로 본 교회가 아닌 다른 필요한 곳으로 흘러가는 것을 언짢게 여기고 본 교회에만 집착된 헌금 강조를 배태시킵니다.
셋째, 편협한 공동체 개념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공동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제한적인 의미로 쓰일 때가 많습니다. 즉, 교회 공동체란 주로 자기 교회의 교인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신구약의 공동체 개념에서 멀리 이탈한 사상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공동체는 열두 지파 모두를 포함했습니다. 각 지파 사이에는 울타리가 없었고 어려울 때는 함께 도왔으며 모든 지파들이 동일한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라는 공동 의식을 가졌습니다.
신약의 믿음 공동체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백성을 포함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모두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로서 새 언약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 교회들이 유대인 교회들을 기꺼이 도왔고 유대인 교회들이 이방인 교회들과 진리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롬 15:27).
이들의 공동체 개념에 비하면, 우리들의 경우는 내 교회에만 제한된 개교회주의의 폐쇄 공동체라는 느낌이 듭니다. 내 집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면 주 안에서 섬기는 다른 형제자매들이 같은 믿음의 지체들이라는 성경적인 공동체 의식이 잘 살아나지 않습니다. 그럼 이 같은 편벽한 공동체 개념을 바로잡는 길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개별 성도가 헌금 할 곳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하고 허락하면 됩니다. 이런 자유에는 매우 바람직한 유익들이 있습니다.
첫째, 이웃돕기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입니다. 본 교회 이외의 사역이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담임 목사님이 알면 싫어하실 것이라는 염려나 자기 생색을 내고 다닌다는 말을 들을까 봐 눈치 보는 일이 없어집니다. 교회는 각 성도가 이웃돕기의 선행을 깨끗한 양심으로 행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자상하신 인도에 민김해집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누구를 어떻게 도우라고 하실꺄 혹은 무슨 일을 위해 나의 도움을 기대하실까 등의 문제에 관심을 둡니다. 그래서 선교단체나 기독교 복지 사업이나 아니면 외국 노동자나 빈민들에게 관심을 두면서 그들에 대한 정보나 소식을 받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면서 도울 계획을 세우고 선행을 베풀 수 있기에 자율적이고 진보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이 같은 활동들을 돕는 좋은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가령 선교단체나 각종 복음 사역자들을 잘 선별하여 교인들에게 추천할 수 있고 게시판을 사용하여 관련 정보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정보들은 하나님께서 타 지역이나 다른 교회의 형제자매들을 통해서 어떻게 구원 활동을 펼쳐 나가시는지를 알게 해주므로 편협한 내 교회 중심의 이해관계에서 떠나 하나님을 순수한 마음으로 찬양하게 합니다. 그리고 다른 성도들의 기도 편지들을 통해서도 내 신변이나 내 교회만의 문제를 넘어 하나님께 간구하게 됩니다. 이런 훈련은 개별 성도들의 신앙 성숙을 위해 신선한 자극이 되고 자녀들에게도 실질적인 믿음 생활의 국면들을 보여주는 계기가 됩니다.
셋째, 직접적인 구제는 수혜자의 사정을 훨씬 더 정확하게 파악하게 합니다. 또한 당사자와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개인적인 교제가 용이합니다. 물론 모르게 할 수도 있으나 알리게 될 경우 불신자에게는 복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증거할 수 있고, 신자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더욱 친근하게 전해줄 수 있습니다.
넷째, 내 집 울타리 안에서 자체 프로그램에만 묶여 있으면 세계적이고 비제한적인 하나님의 구원 활동과 세계적인 교회의 필요성을 개인적으로 실감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개교회에서 선교사들도 돕고 기타 기독교 사역을 교회적인 차원에서 후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별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직접 참여하고 후원하면 더욱더 그런 사역과 사역자들에게 큰 관심이 생깁니다.
다섯째, 개별 성도의 직접 구제나 자선은 교회의 짐을 덜어 줍니다(딤전 5:16).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음의 가족과 이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개교회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각 성도가 교회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들을 자기 삶의 현장에서 발견하고 직접 도우면 결국 교회의 짐을 덜어주는 셈입니다.
이제 참고로 두 가지 실례를 들겠습니다. 영국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곳에 자그마한 교회가 있어 본인이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 측에서 본인이 한국에서 왔다니까 본인의 사역을 주일학교에서 소개해 달라고 했습니다. 당시 본인은 어느 외원 선교단체에서 총무로 봉사했는데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각장애인 부모를 가진 자녀들의 형편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함께 듣던 주일할교 학생들의 학부모들이 자녀들을 보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즉시 돕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 시내의 어느 시각장애인 부모를 가진 초등학교 학생을 돕기로 하고 5세부터 8세 사이의 주일학교 아동들이 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이들은 매 주일 만날 때마다 동전들을 모아두었다가 매달 본인에게 가져와 송금을 부탁했습니다. 후원을 받게 된 서울의 아이는 자신의 생활 이야기를 적은 편지를 정기적으로 보내왔고 영국의 주일학교 후원회 회원들도 자기들의 이야기를 적어 보냈습니다.
그들은 인종과 국경의 장벽을 넘어 서로를 위해 기도했고 가슴과 가슴이 닿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 일은 서울의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삼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 경우는 주일학교 아이들로 구성된 구제 활동이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공식적인 교회 프로그램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프로그램을 소개해 주고 주일학교 아이들이 스스로 능동적인 참여를 하게 함으로써 어릴 적부터 내 교회나 내 나라만의 제한된 시야를 벗어나게 한 일이었습니다. 이들이 우리들보다 훨씬 더 온전한 성경적인 공동체 개념을 알고서 실천했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또 다른 실례는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알게 된 일입니다. 어느 날 기도회 모임이 있다고 해서 친구를 따라 나셨습니다. 매우 훌륭한 석조 가옥에서 각국의 크리스천들이 자유롭게 만나고 있었습니다. 본인은 곁에 앉은 사람에게 책꽂이에 책이 많은데 좀 빌려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집의 것은 누구나 다 빌려 쓸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알고 보니 집주인이 없는 집이었습니다. 원래 이 집은 어느 독실한 의사의 주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주인은 은퇴 후에 에딘버러가 각국의 그리스도인이 많이 드나드는 도시임을 감안하고 기도처와 성경 공부를 할 수 있는 장소로 자기 집을 모든 가구와 함께 기증하였습니다. 이분은 자식들도 있었지만 집을 물려주지 않고 각 나라의 성도들을 위해 무상으로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노령의 이 의사는 자기 교회의 한 성도가 경영하는 간이 숙소(B&B)에서 머물다가 소천하였습니다.
본인이 이 의사를 방문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는 침대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의 작은 방에서 기거하며 각국에서 보내온 기도 편지들을 보며 중보기도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이 의사 할아버지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 숙소 여주인이 무료로 극진히 돌보았다고 합니다. 성경적인 공동체 개념을 지니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