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사건의 초점은 기름이 많이 나와서 빚을 다 갚고 그 후부터 잘 먹고 잘살게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본 스토리의 핵심은 쓸모없는 작은 기름병과 같은 그 과부의 구차한 삶이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에 터치되었을 때 가장 부유한 영적 체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본 스토리는 결코 물질적인 풍요의 비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영적인 풍요가 어떻게 주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 본 스토리의 의도입니다. 그래서 돈이 되는 기름의 기적이 반복되었다고 하지 않고 일 회로서 그쳤다고 하였습니다. 물질적인 번영이 목적이었다면 기적이 되풀이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기름의 기적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에 대한 영적 임팩트(impact)가 어떤 것인지에 관심을 쏟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손으로 기적의 기름이 작은 기름병에서 넘치게 흘러나왔습니다. 위대한 엘리사 선지가가 와서 행한 것도 아니고, 신령한 제사장이 와서 축도를 한 것도 아닙니다. 가난한 삶으로 인해서 다 헤어지고 부르튼 이름 없는 한 과부의 거친 손에 의해 아무도 보지 못한, 아무도 들어보지 못한, 아무도 행한 적이 없는 놀라운 여호와의 은밀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가난한 과부와 고아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녀에게 또 다른 기적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또 다른 위로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으로 충분하였습니다. 그녀는 오직 자기가 의지하는 하나님 앞에서 순전한 믿음과 정직한 경건으로 아무런 위선도 꾸밈도 없이 문을 닫고 기름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하나님의 조용한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단 한 번의 기적으로 충분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녀는 나머지 평생을 어떤 어려움이 와도 과부의 고통을 크게 동정하시는 주 하나님을 신뢰하며 담대히 살 것이었습니다.
본 스토리의 과부가 문을 걸어 잠그고 작은 병의 기름을 큰 빈 통에 붓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녀는 ‘죽으면 죽으리이다’ 의 자세로 기름을 부었습니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남이 보면 정신이 나갔다고 할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한 가지 밖에 의지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두 아들의 ‘순진한 손’은 빈 그릇을 붙잡고 있었고, 여인의 ‘떨리는 손’은 작은 병의 기름을 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의 손은’ 그녀의 떨리는 손 위에 안수하셨습니다.
살아 계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생(生)과 사(死)를 걸고,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행하는 이 엄숙하고 고결한 장소에 어찌 개그맨이 필요하고 신문기자가 필요하며 온갖 엔터테인먼트의 장비와 인력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바깥에서 들어오는 그 모든 일체의 세속적이고 비영적인 것들로부터 문을 굳게 닫으라고 하셨습니다. 밖에서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수군거리든 신경을 끄고 하나님께 집중하라고 하셨습니다. 쇼를 보듯이 구경을 하겠다고 문을 두드리는 무례한 무리의 요구에 귀를 막고 문을 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에게 개그맨보다 더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있으니 기름병을 들고나와서 나와 동업을 하면 대성공을 한다는 유혹에 문을 닫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교회 집회를 엔터테인먼트로 아는 자들은 문을 닫고 기름을 부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 과부의 굳게 닫힌 방 안에서 값진 기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마도 꿈을 꾸는 듯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이후로 두 자식을 먹여 살리느라고 갖은 고생을 다 겪었습니다. 남의 빚을 갚지 못하는 약자의 입장에서 온갖 수모와 가슴에 못을 박는 몰인정한 말들을 물벼락을 뒤집어쓰듯이 고스란히 받았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죽은 남편이 그리웠을 것입니다. 그녀는 가슴에 한이 맺힌 자였습니다. 아빠가 없는 자식들을 굶겨야 하는 적도 많았을 것입니다. 어미의 마음은 밥 한 그릇을 넘치게 담아서 아이들의 밥상에 올려 줄 날을 언제나 소원했을 것입니다. 또 자신이 남편처럼 갑자기 죽기라도 한다면 이 자식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염려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식을 둔 가난한 과부로서 그녀는 한을 품고 사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닫힌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까? 아무도 돌보지 않는 냉혹한 세상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그녀의 한을 풀어 주고 계셨습니다. 땅과 바다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내 것이라고 선포하시는 하나님께서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그녀의 가난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상한 가슴에 치유의 기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한 많은 고통의 세월이 기름처럼 흘러내러 갔습니다.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시 146:4) 창조의 하나님,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시 147:9) 이스라엘의 자비하신 하나님은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시 146:3) 분이었습니다. ‘이제는 됐다’는 안도감이 드디어 그녀의 시린 가슴을 따스하게 녹이고 그녀의 죽은 남편이 그토록 경외했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온 방을 가득 채웠을 것입니다.
남편의 죽음은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하나님은 비극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우리들은 인생의 비극 앞에서 오열하며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비극 속에서 은혜를 준비하십니다. 과부의 남편은 남은 가족에게 많은 슬픔과 생활고를 남기고 하늘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과부의 가정에 하늘의 풍성한 은혜를 지니고 찾아오셨습니다. 이 땅의 임은 때가 되면 나를 떠납니다. 그러나 하늘의 임은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시고 다시 찾아오십니다. 은혜의 하나님이 나의 고달픈 인생의 문 안으로 들어오시면 나의 비극은 절망과 고통의 수의를 벗고 부활의 새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어둠에 잠겼던 나의 영혼이 빛으로 살아납니다. 비극의 눈물에 가려 앞이 보이지 않던 나의 슬픈 눈이 밝아집니다. 그러면 뼈저린 비극의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던 어제의 검은 커튼이 벗겨지고 비극 속에서 역사하는 주님의 섭리와 사랑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남편의 죽음까지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남편의 죽음은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극에 강하십니다. 비극은 결코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비극은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우리들의 영혼을 새롭게 하는 일을 막지 못합니다.
남편의 죽음은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죽음은 하나님의 깊은 섭리 안에서 그의 가족 전체에게 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천 년이 지난 후 인생의 동일한 비극을 맞으며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축복이 됩니다.
비극은 이 세상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도 비극은 피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
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하나님께서는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화가 변하여 복이 되게 하십니다. 본 스토리는 우리들이 겪는 삶의 어두운 사건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를 역설합니다.
엘리사를 찾아갔던 과부는 지금까지 누구도 원치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너무도 가난하였습니다. 두 아들을 데리고 남편 없이 살아온 세월은 그치지 않는 불안과 시름의 기나긴 터널이었습니다. 그녀는 절대 가난의 어둠 속에서 절대자를 찾았습니다. 절대로 가능하지 않은 약속을 받고 오직 믿음으로 기름을 따랐습니다. 그녀의 일생에서 가장 엄숙한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온몸이 떨리도록 실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찢긴 고통의 삶 위에 위로와 치유의 기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보지 못한 기적을 자기 눈으로 목도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행하지 못한 기적을 자기 손으로 행하고 있었습니다. 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오직 자기와 두 아들만이 이 놀라운 기적에 참여한 증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식들에게 무엇을 남겨주려고 합니까? 이런 신령한 체험에 동참시키십시오. 그래서 그들에게 평생에 잊지 못할 영적 체험의 유산이 되게 하십시오. 엘리사를 찾아왔던 과부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기름을 따라 부었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파열될 듯한 심장으로, 그 작은 분량의 기름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몸을 붓는 경건한 기도였으며 마음을 따라 붓는 거룩한 예배였습니다. 그녀의 일생에서 이보다 더 고절한 순간이 있었을까요? 어찌 이런 은밀한 영적 차원의 순간을 공개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엄숙한 영적 시간에 문을 활짝 열어 두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내가 붓는 기름이 차고 넘치는 것을 남들이 보아 주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내 손에 능력이 있는 것처럼 알려지기를 원합니다. 내가 잘 났고 내가 하나님의 특별한 쓰임을 받는 자라는 것을 나타내기를 좋아합니다. 조용한 방 안에서 문을 잠그고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며 나의 헌신을 실천해야 하는 시간에 나팔을 불고 동네마다 도시마다 광고합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기적은 상품이 되고 쇼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문을 걸어 잠그라고 하셨습니다. 일체의 세속적인 것들이 못 들어오도록 문을 닫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문을 열라고 하실 때까지 우리는 입을 닫고 있어야 합니다. 그 때까지는 모든 것이 비밀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비밀이 어떤 것인지를 아십니까? 하나님의 참 자녀들의 가슴에는 이런 비밀들이 쌓여 있어야 정상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들의 경건의 다락 문을 여십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들의 헌신의 골방을 공개하십니다.
때가 되면 주께서 손수 우리들의 믿음의 방 문을 여십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한이 어떻게 풀어졌는지를 공개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과부가 걸어 잠갔던 문을 여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지난 후였습니다. 아마 그 과부는 이 사실을 지상에서는 몰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녀가 지상의 삶을 마치고 더 긴밀한 하늘 밀실의 문을 잠그러 떠난 후에 비로소 그녀와 함께하셨던 지상의 밀실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성경에 자세히 기록하셨습니다. 수천 년이 지난 오늘 우리들이 그 스토리를 읽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나의 밀실의 문이 열리게 하십시오. ‘은밀한 축복’일랑 주께서 언젠가 온 세상 앞에서 펼쳐 보이실 그 날이 오기까지 가슴에 묻어 두십시오. 그리고 나만의 비밀스러운 기쁨이 되게 하십시오. 그것은 나에게 주는 하나님의 ‘은밀한 축복’의 선물입니다.
**** (코리아 위클리 Sept. 16.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