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가 이르되…내가 만일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얼굴을 봄이 아니면 그 앞에서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왕하 3:14).
북이스라엘의 여호람에 비해서 여호사밧은 유다의 경건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불경한 여호람 왕과 손을 잡고 연합군을 형성했다가 큰 낭패를 당하였습니다. 그는 에돔 왕까지 대동하고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왔습니다. 그렇다면 그도 여호람이 엘리사 선지자로부터 받았던 질책을 받았어야 마땅하지 않았을까요?(왕하 3:13). 뜻밖에도 엘리사는 여호람 왕 앞에서 여호사밧을 올려주었습니다. 여호사밧 덕분에 여호람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목이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행위를 평가하실 때에 후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실수에 눈을 부릅뜨고 보시기 보다는 과거에 행한 우리들의 선행을 기억하십니다. 소자에게 물 한 잔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준 자가 상을 잃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마 10:42). 하나님은 우리들의 작은 선행까지도 기억하십니다.
여호사밧은 평소에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는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실수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의 뜻을 한 번도 여쭈어 보지 않고 전쟁에 가담했다가 이제 엘리사 앞에 허겁지겁 제 발로 찾아와서 살 길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사가 여호사밧을 꾸중할 수 있는 매우 적절한 기회가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여호사밧의 실수를 꼬집어 지적하지 않으시고 그를 여호람과 에돔 왕 앞에서 올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실수에 현미경을 대기 보다는 우리들의 작은 헌신과 선행에 확대경을 대고 후한 평가를 하십니다.
여호사밧은 과거에 아합 왕과 함께 아람 왕을 대항하여 전쟁을 했습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그러나 왕에게 선한 일도 있으니 이는 왕이 아세라 목상들을 이 땅에서 없애고 마음을 기울여 하나님을 찾음이니이다”(대하 19:2-3).
[교훈]
우리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런데 실수를 다시 반복합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끝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모두 실수를 되풀이하였습니다. 여호사밧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실수를 반복하여 용서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다시 실수하지 않도록 고치시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실수보다 우리들의 작은 선행들을 크게 보아 주시고 칭찬하시며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경감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후하심과 사랑의 인내를 깨달을 때 우리들은 주 앞에서 범죄하는 일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 참 지식이 구원의 길을 안내합니다.
“이스라엘 왕의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왕하 3:11).
이 신하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영에 있는 모든 고급 장교들이나 장군들보다 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엘리사가 그들의 지역에서 거처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나아만 장군을 엘리사 선지자에게 소개했던 이스라엘의 한 여종을 연상케 합니다. 이 여종은 전쟁 포로로 잡혀가서 나아만의 아내를 시중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나아만의 나병을 치유받을 수 있는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위나 배경이나 돈이 아니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영적 지식만이 다른 어떤 지식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세 왕들은 군대를 모집하고 조직하며 작전을 세웠을지라도 난경에서 헤어날 수 있는 영적 지혜가 없었습니다. 엘리사가 있는 곳을 아는 것은 단순한 정보의 차원을 넘어 세 왕과 모든 군대의 목숨이 달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가 어디 있는지 알고 찾아갈 수 있는 것은 때로는 많은 사람의 생명이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나에게는 어려움을 당했을 때 찾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나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어디를 가야 말씀을 가진 자를 만날 수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나는 난경에 처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을 알기 때문에 소개할 수 있습니까?
-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여호사밧이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있도다 하는지라’(3:12)
엘리사의 자격증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다른 모든 것이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더라면 세 왕들의 위기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문제 해결은 ‘여호와의 말씀’(16, 17절)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시는 말씀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말 이외에는 사람들에게 줄 말이 없습니다.
왜 사도들이 예수님을 떠날 수 없었습니까? 영생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요 6:68).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는 것은 필수적인 요항입니다. 목회자의 자질이 무엇입니까? 친화력, 성품, 학위, 언변, 외모, 처세, 리더십 등등입니까? 이런 것들은 다소 부족하거나 없어도 됩니다. 정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목회자를 그런 관점에서 평가하고 있습니까? 육적인 교인들은 목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별로라도 다른 자질들이 있으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자기 교회의 목사님의 말씀은 약하지만 참 사람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설교를 못하는 것은 강단에 설 자격이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말씀이 없는 자가 어떻게 말씀을 전하는 소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교회를 선택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적인 고려 사항이 되어야 함에도 많은 성도들이 다른 이유로 교회를 결정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교회 다니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 음악과 영감의 관계
엘리사는 거문고 타는 자를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는 여호람 왕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였고 방금 그에게 호된 말을 한 때였습니다. 여호람이 마땅히 들어야 할 견책이었지만 그의 심령이 진정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가 무슨 곡을 택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 시편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는 무가치한 이스라엘 왕과의 면담 때문에 속이 상하였으나 하늘의 왕 앞에 자신이 나아가기 위해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습니다. 엘리사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라는 직분과 소명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사는 거문고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영감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음악은 그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집중하게 하는 것을 도와주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은 그가 하나님과 갖는 밀착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소명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는 이 소명에 신실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을 항상 생각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늘 듣고 배웠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으려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즉시 응답하셨습니다. 만일 세 왕이 살 길을 알리는 구원의 메시지를 듣기를 고대하고 있는 절박한 때에 엘리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메시지를 받지 못했다면 얼마나 당황스럽고 무색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마음 문을 항상 열어놓고 있었습니다.
[적용]
우리들이 사모해야 하는 것도 이 같은 하나님과의 가까운 관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며 나의 하늘 아빠라는 사실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리얼하고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으로 체험되어야 합니다. 내가 선지자가 아니라도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에게 청해서 받은 말씀이 내 심령에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자 하는 자들에게 즉시 전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우리 각자도 선지자의 소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번쩍이는 왕관을 쓴 세 명의 왕들은 아마 우리들을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자들은 우리 앞을 늘 지나다닙니다.
어떻게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이미 완성된 계시의 말씀이 성경책으로 손에 쥐어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성경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성경책이 희귀하여 읽고 싶어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성경책 뿐만 아니라 성경공부에 필요한 자료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옵니다. 이상하게도 가장 많은 자료들이 있고 가장 발전된 신학들이 있는 시대에 성경은 닫혀진 책이 되고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경에 무지합니다. 그래서 세 왕들이 내 눈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해 줄 말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들의 기도를 보십시오. 성경 말씀의 뜻을 잘 살펴 가면서 기도하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까? 평소에 하나님과의 말씀을 생각하고 성경의 사상에 젖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까? 성경과 반대되는 생각들,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 대한 이해가 없이 자신의 문제에만 몰두한 넋두리 기도들이 나오지 않는지 반성해 볼 일입니다.
-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한 고랑은 우리들이 파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모든 축복이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내 힘으로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럼 우리들의 손과 발은 가만히 두어야 한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 우리들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십자가의 은혜에 달렸음을 강조한 말입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일상 생활의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부터 구출하고 인도하기 위해 지시하는 일들은 우리들의 피땀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행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을 따르는 것은 순종과 신뢰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믿음을 행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골 1:19)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많은 축복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들은 게으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왜 우리들이 부지런해야 하고 소명에 신실해야 합니까? 주님을 신뢰하는 신실한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고 그분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세 왕들에게 개천을 많이 파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비바람이 없어도 골짜기에 물이 가득하여 식수난을 해결하고 모압도 쳐서 대승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약속은 믿음의 행위를 전제한 것이었습니다. 언제 물이 도랑에서 가득히 넘쳤습니까?
“아침이 되어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 쪽에서부터 흘러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20절).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고 믿음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침 제사를 받으셨다는 뜻이었습니다. 모압은 이스라엘의 진영을 보고 핏물로 착각하였습니다. 아마 땅이 붉어서 물빛이 붉게 보였을 것이고 거기에 햇살이 비쳐 착시 현상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에 우리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숨겨진 은혜의 측면이 있음을 예시합니다. 세 왕은 이제 물이 넘쳤기 때문에 군대와 가축들이 실컷 마시고 나서 모압을 선제 공격하면 승전할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략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압 군사들이 물의 색깔을 보고 전황을 오판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물빛이 핏물처럼 보이자 세 왕들 사이에 싸움이 나서 서로 죽인 줄 알고 그들을 급히 공격하러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마치 호랑이 굴로 들어간 셈이었습니다. 물을 충분히 마시고 에너지 공급을 받은 이스라엘 군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제발로 들어온 모압 군사들을 모두 섬멸시켰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우리들이 믿음과 신뢰로 준행하면 축복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옵니다. 그런데 그 축복은 우리들이 상상하지 못했던 엑스트라의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대패한 모압 왕은 두려워서 자기 왕위를 이을 맏아들을 성 위에서 인신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것은 이방 종교가 얼마나 잔인하며 악한 것인지를 드러내는 끔직한 행위입니다. 모압 왕은 이스라엘에게 바치던 양털은 아끼면서(왕하 3:4-5) 자기 아들은 아끼지 않고 번제로 불살랐습니다. 이방의 악신에 사로잡힌 자들은 지금도 마음과 정신과 행습에서 악마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럼 모든 인신제물은 정죄되어야 할까요? 모세 율법과 선지자들은 모두 이방 종교의 인신제물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사의 하나님도 자신의 맏아들을 십자가에 제물로 바쳤는데 이것도 악한 일이 아닐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이방인들의 인신제물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아내기 위해서 신에게 최강도의 제물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인신제물에는 다른 죄인들을 위한 속죄의 피가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도 구원하지 못합니다. 인신제물로 바쳐지는 자도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는 대속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속죄양으로 십자가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이것은 악한 일이 아니라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어둠의 세력에 붙잡혀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는 가련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무런 죄가 없는 예수님이 대속의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의 맏아들이 우리들을 위해 완전한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들의 맏아들이 제물로 바쳐질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이 지고간 대속의 십자가를 단순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을 조건 없이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십니다. 구원의 생수를 마신 자들은 죽음에서 벗어나고 어둠의 세력들을 이기며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주 예수를 믿는 순간에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이미 받은 구원이 우리들의 삶 속에서 피어나야 합니다(빌 2:12). 날마다 주님과 함께 영생의 삶을 실제로 구현하려면 일용할 생명수를 받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각자의 고랑을 파야 합니다. 믿음으로 땀을 흘리며 삽과 괭이를 쥐고 고랑을 파십시오. 날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신뢰하며 순종의 제사를 올리십시오. 그리하면 우리들이 판 고랑에 물이 넘치고 생수의 힘과 하나님의 전략으로 원수들을 쳐서 이기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