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가 겉옷을 가지고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마른 땅 위로 건너더라”(왕하 2:8)
본 항목은 엘리야의 마지막 기적과 그의 승천 기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겉옷을 둘둘 말아 요단 강물을 치고 좌우로 갈라지게 한 후에 물이 마른 강바닥을 밟으며 엘리사와 함께 도강하였습니다. 이 모습은 모세가 지팡이를 든 손을 홍해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갈라지게 했던 사건을 연상시킵니다(출 14:16, 21). 이 기적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요단 강물이 그쳐서 백성들이 마른 땅으로 건너갔던 사건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수 3:15-17).
이제 엘리사가 엘리야의 이 놀라운 기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제 이러한 축복이 내렸습니까? 우리는 “그 두 사람이 요단 가에 서 있더니”(2:7) 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엘리사는 길갈에서부터 여리고까지 포기하지 않고 엘리야와 동행하였습니다. 그는 여리고를 거쳐 요단 강가에까지 왔습니다. 요단 강은 길갈이나 벧엘이나 여리고에서는 건널 수 없습니다. 엘리사는 이 모든 과정의 시험을 통과하고 요단 강가에 섰기 때문에 엘리야의 대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 오십 명도 그들을 따랐지만 가까이 오지 않고 방관자로서 멀찍이 멈추어 서서 구경만 할 뿐이었습니다. 투신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요단 강이 갈라질 줄을 몰랐습니다. 그가 안 것이라고는 엘리야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조만간 데리고 가신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아마 다른 선지자 수련생들도 요단 강의 기적을 체험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엘리사를 따라 나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과 신뢰의 길이 아닙니다.
그들은 엘리야 선지자가 곧 소천할 것을 알았으면서도 엘리사처럼 그를 끝까지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곧 죽을 사람인데 자신들의 헌신을 보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이 점에서 엘리사는 그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엘리야 선지자의 시종이어서만이 아니고 소천하는 엘리야의 마지막 길에서 하나님이 무엇인가 중요한 계시를 하실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개입을 기대합니다. 엘리사는 자신이 맡게 될 선지자의 과업을 위해 하늘의 계시와 능력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는 이 일이 엘리야의 소천에 즈음해서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엘리야가 분리의 지점인 요단 강을 자신의 겉옷으로 쳐서 갈라지게 한 기적은 분명 엘리야의 떠남이 임박하였다는 전조라고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사실상 요단 강을 건넌 후에는 앞에서 한 것처럼 엘리사에게 다음 행선지를 알리며 현지에 머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엘리야는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다행히도 엘리사는 여전히 그와 함께 있었습니다!
[네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엘리야는 비로소 자신의 떠남을 알리며 엘리사에게 원하는 것을 청하라고 하였습니다.
“나를 네게서 데려감을 당하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지를 구하라”(2:9).
엘리야 선지자가 언제 누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까? 요단 강 건너 편에서 구경하던 선지자 수련생들에게 이런 오퍼를 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엘리야는 그와 함께 강을 건넌 엘리사에게 말했습니다.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9절)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테스트를 받은 신실한 종에게 보답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방관만 하고 있는 때에 나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는 삶은 고독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역류의 삶은 언제나 힘들기 마련입니다. 아무도 동참하지 않고 후원하지 않는 일을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은 때때로 침체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답은 언제나 후하게 넘칩니다. 요단 강을 마른 강바닥으로 건너는 기적을 이스라엘의 대 선지자인 엘리야와 함께 체험한 것만 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축복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러한 기적은 다시 반복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요단 강을 건넜던 세대 이후로 아무도 이런 기적을 경험하지 못했는데 엘리사만 참여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축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엘리야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엘리사의 소원을 들어줄 테니 청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엘리야는 개인 자격으로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대변인으로서 엘리사의 청을 들어 주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즉각 대답하였습니다.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네게 있게 하소서”(9절).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엘리사가 엘리야보다 두 배나 더 큰 선지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의미일까요? 엘리사는 그런 야망을 가진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장자가 아버지의 임종 때에 유산을 받아 가문의 재산과 전통을 이어나가듯이, 자신을 엘리야의 사역을 전수할 자로 보고 장자의 몫인 두 배를 청한 것이었습니다(신 21:17).
그런데 그가 원한 것은 물질적인 유산이 아니고 엘리야를 통해서 강력하게 드러났던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엘리사는 자신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구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서 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이들은 ‘돈 많이 벌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청지기의 원리대로 많은 돈을 잘 감당하며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신유의 은사를 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병만 고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일을 큰 스케일로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런 은사에 따르는 여러 가지 유혹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러한 청원의 참 의미와 그에 따르는 여러 문제들을 헤아릴 수 있는 자들은 그런 은사들을 받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는 것은 복이 아니고 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제단에 불이 내리게 하고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게 하다가 다시 비를 내리게 한 능력의 선지자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그를 모르는 자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엘리사는 평소에 엘리야의 삶을 곁에서 지켜 보면서 그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를 누구보다도 더 많이 목격하고 큰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곧 세상을 떠나는 마당에서 나이 많은 엘리야가 자신의 겉옷으로 요단 강을 갈라지게 하는 것을 목격했을 때 그러한 성령의 능력이 자신의 사역에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평소부터 이런 필요를 절감하지 않았다면 갑자기 예고도 없이 묻는 말에 금방 대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왕이 된 후에 기브온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물으셨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 3:5). 솔로몬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는 분별력을 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부귀나 장수나 전쟁의 승리를 구하지 않고 백성을 다스리는 지혜를 구한 것을 보고 그가 구하지 않은 것들까지 다 주셨습니다(왕상 3:9-14). 솔로몬이 만약 평소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생각하며 이를 소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갑자기 꿈에 나타나서 원하는 것을 구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오퍼에 당황하거나 그릇된 것을 청하였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신다면 금방 나올 수 있는 대답이 무엇일까요? 내 마음에 항상 지니고 사는 소원이 무엇입니까? 그 소원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우리는 평소에 우리의 마음을 항상 채우고 있는 것들을 대답으로 내놓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였고 엘리사는 성령을 구하였습니다. 나는 무엇을 구해야 할까요?
그런데 잠시 생각해 볼 사항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이렇게 구하라고 하셨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4)는 말씀에서 격려를 받습니다. 그래서 이 약속에 의지하여 많은 것을 주께 부탁합니다. 하지만 이 약속은 아무에게나 주신 것도 아니고 무엇이든지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신다는 무조건적 보장도 아닙니다. 이 약속은 주님을 사랑하여 주의 계명을 지키면서 주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실천으로 드러내는 신자들에게 준 것이었습니다(요 13:34; 14:15). 다시 말해서 주님께 충성과 신실을 보이는 자들에게 준 약속이지 자기 욕심에 사로잡혀 세속적인 삶을 살거나 하나님의 뜻과 일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엘리사처럼 주인을 따라 신실하게 어디든지 따라가는 자들에게 주님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을 살피며 자신의 욕심으로 구하지 않는 소청들을 주님은 들어주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원하는 것을 내놓기 전에 우리들이 어느 정도로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가르침을 순복하면서 사는지를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길갈에서 주저 앉고, 벧엘에서 중단하고, 혹은 여리고에서 기권하거나, 요단 강변에 멀리 떨어져서 구경만 하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축복이 약속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 밑에서 많은 선지자 후보생들이 훈련을 받고 배웠지만 하나님께서는 단 한 명의 제자에게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엘리사는 끝까지 주인을 따르는 일에 신실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복 받는 일에는 관심이 크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는 무관심하기 쉽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내가 원하는 것을 수없이 요청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실 때까지 나의 소원을 품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무턱대고 기다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엘리사처럼 날마다 상황마다 자신의 주인을 어떤 시련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믿음과 인내로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주인은 주 예수님입니다. 주님을 날마다 신실하고 충성된 마음으로 따르도록 하십시다. 그러면 내가 원하는 것을 주님께 아뢰기 전에 주님이 먼저 나를 찾아 오셔서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