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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시대는 하도 교회에 대한 비판과 불신이 심해서 교회 다닌다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전도하기도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교회 가자고 하면 노골적으로 교회를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교회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교회를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이제는 교회에 대한 나쁜 이미지가 전국에 퍼져 있습니다. 여러 해 동안 교회 추문이 줄지어 뉴스에 나옵니다. 미디어가 반기독교적이라고 하기보다는 교회가 오히려 반사회적입니다. 우리나라 교회는 더 이상 자신의 부정과 부패를 부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뉴스에 오르내리는 스캔들은 주로 교회 지도자들에 관한 것입니다. 특별히  대형교회의 유명 목회자들에 대한 부패와 부도덕이 뉴스에 나오면 우리나라 교회 전체에 대한 이미지를 흐려놓습니다. 그런데 목회자 개인의 비리뿐만 아닙니다. 교회를 빙자한 사교육 프로그램까지 만들어 교회를 이익 집단으로 오용하고 극단적인 선교 단체를 형성하여 세뇌적 몰입에 빠지게 합니다.

과거에는 불신자들이 주로 일반 신자들의 그릇된 품행과 처신에 대해 비판했지만, 요즘은 기독교 자체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심각한 수준입니다. 2021년 교계 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교회의 신뢰도 평가에서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비율이 76퍼센트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아예 처음부터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려고 하는 분들이 많은 것은 전혀 이상하지도 않고 놀랍지도 않습니다.

한편, 교회가 갱신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갱신을 위해서 실제로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사실 한국 교회가 교회 갱신의 절박한 필요성을 어느 정도 심각하게 의식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일부에서 세미나도 열고 자체 정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토론을 하고 내놓는 대책이 무엇입니까? 교회 타락의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서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현상적인 것들에만 집중하고 부차적인 이슈들을 다루는 정도로 그친다면 별다른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상적인 것만 보면 처방도 피상적으로 됩니다. 근본적인 원인을 밝혀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의 근본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를 성경에 계시된 대로 바르게 알지 못하고 복음의 참뜻을 놓쳤기 때문에 교회가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대책이 무엇입니까? 자명합니다. 주 예수와 그의 복음을 다시 바르게 깨닫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2).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을 떠나면 교회는 사탄의 놀이터가 됩니다. 말로는 다 예수를 알고  십자가를 믿는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슨 열매가 있습니까? 성령의 열매보다는 육체의 일이 현저하게 드러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자신들의 문제를 바르게 깨닫고 오직 주 예수를 성경대로 배우고 그분의 성품을 닮기 위해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에도 교회는 장기간 다른 부분에 열심을 내고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피상적으로 대하였습니다.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8)고 했습니다. 교회가 성령보다 육체에 심으면 부패한 열매를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은 자연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영적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성령과 보조를 맞추어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5:24).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새번역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예수께 속한 자들은 누구일까요?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거듭난 모든 신자를 가리킨다고 보기도 하고, 혹은 예수님과 가까운 교제를 나누는 자들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양편 견해가 옳다고 봅니다. 그러나 문맥상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자신의 정욕과 탐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으며 주님과 긴밀한 교제를 가지는 신자들이라고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신자라고 해서 다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까요?’

25절에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했습니다. 5장 18절에서도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왜 ‘만일’이라고 했을까요? 신자라도 성령으로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은 if 가 아니고 since 라는 결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으로 살기 때문에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옳을까요? 양편 다 맞다고 봅니다.

 

신자는 거듭났을 때 육체에 지배되는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살지 않습니다. 25절의 성령으로 행한다는 말과 5장 16절의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은 우리말로는 차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25절의 행한다는 헬라어 단어(stoicheo)는 ‘보조를 맞춘다’ 혹은 ‘리더 뒤에 줄을 맞추어 걷는다’는 의미입니다. 16절보다(헬. peripateo) 훨씬 더 구체적입니다. Jim Packer는 Keep in step with the Spirit라는 그의 저서에서 그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25절의 행한다(walk)는 16절에서처럼 페리파테오(peripateo)가 아니다. 여기서는 문자적으로 보행자가 사지를 움직이는 것이고, 은유적으로는 사는 활동을 가리킨다. 그러나 25절의 스토이케오(stoicheo)는 줄을 서서 규칙을 지키면서 행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다른 이의 컨트롤 아래에서 사는 프로세스를 말한다.” (Keep in step with the spirit, J.I. Packer, p.11).

 

다소 전문적인 설명이 됐지만, 포인트는 신자는 거듭났을 때부터 육에 속한 것을 성령의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통제 아래에서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날마다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프로세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단번에 받거나, 그냥 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에게 속했던 죄의 습성들을 매일 꾸준하게 버리는 적극적인 성령 생활을 통해서 열매가 달립니다.

그런데 왜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했을까요? 우리가 거듭났을 때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나의 죄악 된 과거의 본성이 처리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아직도 나를 따라다니며 귀찮게 하는 옛사람에 속한 죄의 행습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과 희생에 비추어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았으므로 성령의 지배와 가르침을 받으면서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 성도는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사는 자들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십자가에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원 사역의 의미를 새겨 주십니다. 십자가는 나의 죄가 용서된 곳이며, 나의 죄를 또한 못 박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내가 어떻게 새사람이 되어 주님의 자녀로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곳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꾸준해야 달립니다.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봅니다. 바울은 5장 19절에서 육체의 일은 분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 대조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열거했습니다. 왜 바울은 육체의 삶과 성령의 삶을 대조하면서 ‘육체의 일’이라는 표현과 맞추어서 ‘성령의 일’이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육체의 ‘일’은 육체의 ‘행실’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열매보다는 성령의 ‘행실’ 혹은 성령의 ‘행위’라고 해야 했을 텐데 대칭되는 표현을 피하고 ‘열매’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우리가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가 지닌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육체의 행실은 즉각적이고 자연스럽습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나쁜 생각이나 상상을 할 때 내가 나쁜 생각을 해야 하겠다고 계획하거니 힘쓰지 않습니다. 나쁜 생각은 그냥 떠오릅니다. 죄악 된 상상을 할 때도 시간이 지난 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즉각적입니다. 어떤 일에 대한 부정적 반응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화를 내거나 질투를 하는 것은 훈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화를 내거나 질투하는 것을 보지 않고도 내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이런 것을 배워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일은 그냥 나오고 드러나기 때문에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무엇인지 몰라서 율법서를 들추어 볼 필요가 없습니다. 또 육체의 행위가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라서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즉각적이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열매란 그 성격상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연계를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과나 오렌지나 감이나  고추를 그냥 즉석에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열매는 요술 방망이로 생산할 수 없습니다.

열매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는 시간이 걸립니다. 다른 하나는 꾸준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종자라도 풍성한 열매를 맺으려면 성장하는 시간이 지나야 하고 꾸준히 돌보아야 합니다. 물을 주었다가 말았다가 하면 열매를 제대로 수확하지 못합니다. 제때  물을 주고 꾸준히 살피면서 병충해도 막고 가지도 치고 거름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은 절대로 농부가 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의가 없고 게으르면 실패합니다. 평소에 친절하고 정직한 성품을 가졌다고 해서 가만히 있어도 그런 성품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왜 사랑이 식었다는 표현을 사용합니까? 사랑의 성격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엡 6:24)라고 축원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에베소 교인들이 “처음 사랑”(계 2:4)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성령과 보조를 맞추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스텝을 따라 행하지 않고, 자기들의 스텝을 따라갔기 때문에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까?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 2:4~5).

 

모든 성령의 열매는 꾸준한 돌봄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지 못하고 실패합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 6:11~12).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으면 할 일이 더 많아집니다. 어쩌면 갈등도 더 생기고 마음도 더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죄와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못된 성격을 죽여야 하고 나의 세속적인 사고방식과 생활 자체를 뜯어고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교만과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희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에는 고난이 따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는 말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정말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잘 믿어야 하고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교회만 다니면 평생을 종교 생활만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 생명을 누리지 못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새 생명의 특징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없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영생은 죽은 후에 가는 사후 천국이 아닙니다. 물론 장차 올 세상에서의 삶도 영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별도의 것이 아니고 주 예수를 믿고 난 이후부터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의 새 생명의 연장입니다.

그런데 이 영생의 삶은 열매를 통해서 체험됩니다. 열매는 예수만 믿으면 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으면 의롭다는 판정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약속된 유업을 받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야 유업을 받는다고 한 것은 천국 가는 일이 아니고 현재 이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누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성령의 열매로 열거하였습니다. 또 6장에서는 영생을 거두는 것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유업을 받거나 영생을 거두는 것은 내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나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에 해당하는 것들을 맺으면서 새 생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열매는 내가 오래 참으면서 노력만 한다고 해서 성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내가 스스로 생산해 낼 수 없습니다. 흉내는 낼지 몰라도 진품이 아니고 오래가지 않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 속에 저장된 것이 아닙니다.

자연인은 창조주와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거나 그분의 거룩한 성품을 닮으려는 욕구를 갖지 않습니다. 오직 주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들만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다 주 예수를 닮기 위해서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습니다.

원리적으로 보면, 우리가 주 예수를 대속주 하나님으로 믿었을 때 아담에게 속했던 죄의 본성이 십자가에서 제거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옛사람에 속한 그릇된 삶의 방식과 절연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새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야 하는데 그것이 곧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나의 육체의 일들을 끊임없이 못 박는 것이 성령과 주 예수의 복음을 따라 사는 새 삶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내 편에서 꾸준히 노력만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성령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우리는 선하게 되려고 작심하고 힘쓸 때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고, 성령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복종시킬 때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순종의 삶은 일회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꾸준히 반복되어야 합니다. 물을 꾸준히 주지 않으면 식물이 자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꾸준히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말씀에 복종하면서 주 예수가 누구시며 어떤 분인지를 배운다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가 교회답지 않고, 교인이 교인답지 않은 것일까요?

여기서 다시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 성경의 가르침을 그대로 잘 가르치고 배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에는 관심이 적고 자기 잘 되는 일에만 매달리는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세속적인 사상과 습성을 그대로 지니고 삽니다. 교회 생활도 거의 맹목적으로 교회에서 관습대로 행하는 일을 따라갑니다.

둘째, 자라고 열매를 맺는 일을 신앙 생활의 최우선으로 삼지 않기 때문입니다. 열매에 관심을 둔다 하여도 꾸준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늘 세상살이의 일들에 묶이거나 비복음적인 습성에 젖어 살곤 합니다. 한동안 교인의 참모습을 나타내다가도 곧 식어버립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교회에서 복음을 피상적으로 가르치고 꾸준히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달리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려면 즉각적인 만족을 약속하는 육체의 욕구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성령의 인도와 가르침에 순응하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성령께서 우리를 무엇으로 인도하시는지 살피겠습니다.

 

➢ 성경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 (히 3:7).

성경을 모르면 성령의 인도를 잘 받지 못합니다. 성령은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우리에게 알리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각자가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만이 아니고 개인적으로 반드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무턱대고 읽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그 뜻을 생각하며 정규적으로 읽는 습관을 붙여야 합니다. 성경 묵상에 도움이 되는 안내서나 매일 성경 등을 사용하시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 성령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리거나 구원의 지식이 깊어지게 하십니다. 그래서 좋은 강해 설교를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은혜의 통로로 사용해 오신 방법입니다. 그릇된 설교를 듣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 본문을 강해하지 않고 이런저런 이야기로 채우거나 소화되지 않은 내용을 여기저기서 베껴오는 차용 설교를 피하십시오. 개인의 사상이나, 누구나 알고  있는 도덕 강좌에 불과한 판에 박힌 윤리설교나, 율법적인 가르침을 배격하고 복음 자체에 집중된 설교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설교는 은혜의 수단이지만, 교회가 복음에서 식어지고 멀어지는 통로로 오용될 수 있습니다. 설교를 간절한 마음으로 듣되 베뢰아 사람들처럼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행 17:11)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교회가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지 못하고 세속화된 책임은 목회자들뿐만이 아니고 교인들에게도 있습니다. 교인들이 강단에서 하는 설교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내용도 없고 무성의한 설교를 용인하기 때문입니다.

 

➢ 성령은 환경을 통해서도 확신을 주시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 성령은 성도의 삶에서 내적 증거를 통하여 구원의 확신에 이르거나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게 하십니다. 또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있게 하시고 선한 길을 택하도록 인도하십니다.

➢ 성령은 여러 형태의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히 3:7~8).

이것은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저지함으로써 성령의 열매가 자라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칭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즉시 받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는 일은 시간이 걸리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크리스천 라이프는 순례입니다. 순례 길은 목적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는 길의 방향을 확인해 가면서 잘 찾아가야 합니다. 분별없이 남들 따라가면 엉뚱한 곁길로 들어서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령과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뛰어가라고 하시면 뛰고, 천천히 가라고 하시면 서행해야 합니다. 또 기다리라고 하시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통제를 받아야 주님의 길을 잘 따를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라고 했습니다(5:25). 이것이 개인 경건 생활의 비결이고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첩경입니다. 교회가 성령의 음성에 무관심하면 영적 생동력을 잃고 부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우리나라 교회는 부패가 많이 진행됐기 때문에 속히 막지 않으면 붕괴될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이때야말로 회개하고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믿고 주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영적 위기의 시대에도 개인 부흥과 교회 갱신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강해, 이중수 지음, 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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