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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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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성경공부(4-B)    

요 1:19-28

4. 백성들은 어떤 목적과 기대로 요한을 따랐을까?

당시에 유대인들은 다윗 가문으로부터 오는 왕을 기다렸다. 이 왕은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당하는 모든 불의와 이방 통치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었다. 그들은 다윗 시대처럼 이스라엘이 열국을 뒤엎고 다시 한번 이스라엘 제국을 재건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런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부인하였다(20절). 그는 또한 자신이 엘리야도 ‘그 선지자’도 아니라고 부인하였다(21절).

[엘리야는 누구인가?]

유대인들은 여러 세기 동안 대 선지자인 엘리야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말 4:5) 이스라엘에 나타나리라는 것을 구약 성경을 통해 믿고 있었다(막 9:11-13). 엘리야는 죽지 않고 불마차로 승천했기 때문에 그의 몸을 찾을 수 없었다(왕하 2:1-17). 그래서 백성은 엘리야가 다시 나타난다는 말을 승천한 엘리야가 죽지 않은 몸으로 세상에 내려오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그럼 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엘리야라고 하셨을까? (막 9:11-13; 마 11:13-14).

  요한 자신은 자기가 엘리야가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누가복음 1:17절에 보면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정신과 능력으로 메시아 앞에서 달릴 것이라고 하였다. 요한은 엘리야이면서도 엘리야가 아니었다. 그는 언약 백성을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이키려고 힘썼던 구약의 엘리야 선지자의 정신과 자세로 사역했다는 의미에서 말라기 4장의 예언에 일치된 자였다. 그렇지만 문자적으로 승천했던 엘리야가 다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그 선지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은 신명기 18:15-18절에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래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같은 ‘그 선지자’가 오기를 기대하였다(요 6:14). 세례 요한은 자기가 ‘그 선지자’도 아니라고 부인하였다.

▣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실상 엘리야든 모세든 누가 오든지 상관이 없었다. 그저 그들이 바라는 종류의 혁명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가 될 수 있는 인물이면 족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세례 요한이 나타나자 그에게 자신들이 가졌던 메시아 관()에 맞는 인물이 되기를 기대하였다. 

사람들은 메시아에 대한 성경의 정확한 의미나 예언의 성취를 확인하기보다는 당장 힘들고 절박한 자신들의 상황에서 누구라도 나타나서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면 그 사람이 메시아고 모세고 엘리야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엘리야가 되든지 모세가 되든지 상광하지 않고 자기들이 바라는 메시아로 공언하고 나서기를 바랐다.

  현대판 메시아의 기대도 이런 식이다. 정치적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혹은 개인의 질병이나 불의나 손실을 막아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예수의 이름을 걸든지 하나님의 종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우든지 상관하지 않고 몰려든다.

  오늘날의 메시아들은 정직하지 않다. 그들의 목적이 참 메시아를 위한 사역이 아니고 억만장자가 되는 것과 세속적인 명성을 날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니 메시아들도 수없이 많다. 그들은 참 메시아에게 돌아가야 할 영광을 조금씩 훔쳐서 자기 명함에 열거하고 이름을 내려고 애쓰며 자신의 인기로 적은 숫자나마 붙잡고 소유하려고 한다. 이런 현상은 세상에서보다는 교회 안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일체의 타이틀을 부인하고 자신의 소명을 분명히 밝히면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게 하였다. 

[질문]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무슨 기대를 하고 그분을 따르는가?

예수님이 진리며 구주라는 사실 앞에서 다른 모든 우상을 버리고 오직 그분만을 참 하나님으로 경배하는가? (비교. 살전 1:9).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보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보는가?

우리가 1세기 당시의 메시아 관()을 가졌던 백성들과 무엇이 다른지 말해  보라.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이 엘리야나 모세가 되어 주기를 원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도 같은 기대를 하였다. 즉,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기적사와 정치적 구주가 되어 주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서 예수께로 갔는가?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를 바라고 예수께로 갔었다.

나는 무슨 요구를 들고 하나님께로 나가는가? 나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위해서 교회도 다니고 성경도 보며 기도하는가?

5. 왜 세례 요한의 스프링보드 역할이 강조되었을까?

사복음서 전체에서 세례 요한은 메시아에 대한 증인이며 그의 사역의 도약판으로 거듭 진술되었다. 그 까닭은 세례 요한의 소명을 메시아의 스프링보드로써 인식하지 않는 무리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공적으로 메시아가 아니라고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다. 이것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일에 방해가 되었고 실제로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실 때 오해와 혼란을 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요한이 메시아가 아니고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확실히 지적하고 요한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교훈]

우리는 한 사람이나 혹은 특정한 이론에 집착하면 보다 나은 빛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 쉽다. 누구나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이 신봉하는 것들이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서 나는 ‘칼빈주의’를 신봉한다거나 혹은 알미니안주의를 믿는다고 하면 그것이 최고라고 여기기 때문에 다른 이론들을 배척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현상은 자신이 신봉하는 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론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불완전한 점을 다른 빛을 통해서 보완하거나 채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래서 양보나 수정이 없는 것을 매우 좋은 전통처럼 여기고 모든 진리를 다 가진 듯이 처신한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태도는 교파 간의 갈등과 싸움을 일으켰고 여러 형태의 신학 운동들이 극단적인 색채를 띠고 교리 전쟁으로 번지기도 하였다. 현대 교회에서도 이런 편견과 자기 우월주의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필자는 비행기 속에서 한 그리스 정교회 신자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신자는 그리스 정교회의 특징은 전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든 것이 똑같다는 것이었다. 변화는 어떤 것이든지 위험하고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과 신학과 제도가 항상 같다고 자랑하였다. 물론 진리 자체는 변할 수 없다. 그러나 비록 진리라도 더 큰 진리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한다. 율법의 은혜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넘어가야 하는 것과 같다(1:16). 세례 요한이 전한 진리의 ‘소리’는 더 큰 빛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말씀’으로 옮겨가는 변화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도 끝까지 세례 요한을 붙들고 놓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우리에게도 놓지 않으려는 ‘세례 요한’이 있는가?

우리가 요한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면 자신이 받은 소명의 영역을 넘어가지 않고 겸비와 희생의 정신으로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요한은 모든 메시지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엄청난 인기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았다. 그는 짧은 생애를 마치면서 끝까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서의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였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신약 교회의 사도들도 세례 요한처럼 겸비한 자세를 지니면서 자신들이 차지하는 종의 역할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세례 요한의 정신과 자세를 닮은 자들이었다.

6. 요한의 세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한은 ‘세례 요한’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세례라는 의식 자체가 그의 사역의 강조점이 아니었다. 예루살렘에서 온 대표자들도 그가 베푸는 세례의 의미보다는 비공식적인 종교 행위라는 점에서 시빗거리를 찾는데 더 큰 관심이 있었다(1:25).

ㄱ. 무리는 요한의 메시지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한 그들의 확정적이고 공적이며 가시적인 투신을 요구하였다. 그는 파격적이고 권위 있는 유명한 설교자로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메시지를 듣는 자들의 헌신을 목표로 삼았다. 즉, 무리가 그가 전하는 ‘오실 이’를 대망하며 용서와 새 삶에 헌신하겠다는 것을 세례라는 형태로 드러내기를 원했다.

ㄴ. 요한의 세례는 성령 세례가 아니었다. 그의 세례는 성령을 주지 않았다(1:26, 33). 그의 물세례는 공적으로 회개를 표현하게 하는 것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공동체를 이루는데 주안점이 있었다. 따라서 요한의 사역은 앞으로 오실 주의 길을 예비하는 준비 사역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사역과 삶은 모두 요한의 패턴을 닮아야 한다. 

7. ‘소리’는 무엇인가?

요한은 자신이 단지 소리만 되기를 원하였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선포하는 소리였다. 그는 의도적으로 유대 광야라는 빈 곳으로 갔다. 단지 설교자만 되기 위해서였다. 그의 설교의 능력이 어찌나 강력했든지 수천 명이 소리인 그의 메시지를 들으려고 몰려들었다. 

소리’는 이사야 40장에 나오는 ‘외치는 자의 소리’, ‘말하는 자의 소리’(사 40:3, 6)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문맥으로 볼 때 ‘소리’는 대변자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사 40:9)라고 하였다. 요한이 자신을 ‘소리’라고 한 것은 자신이 받은 소명에 충실한 자임을 주장한 것이었다.

소리’는 자신을 비하하거나 겸손의 표현으로 사용되었다기보다는 자신이 이사야서에서 예고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요 1:6, 33)임을 내세우는 말이다.

[‘소리’와 메시지는 다른 것인가?]

. ‘소리’라고 해서 질이 떨어지거나 2급 메시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세례 요한의 겸비를 드러내는 말도 아니고, 자신의 메시지의 권위를 낮추는 말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되었듯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을 강조하고 분부대로 권위 있는 메시지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충실하게 전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동시에 ‘소리’라고 한 것은 자신의 메시지를 통해서 사람들을 메시아에게로 돌아서게 하는 일을 맡은 자라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에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 모든 사역자는 어떤 의미에서 ‘세례 요한’의 소명을 받았다. 제자직의 하나는 자신을 넘어 참스승을 따라가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무리가 따르면 자신을 높이거나 추켜세우는 유혹도 따른다. 만약 요한은 원하기만 했다면 자신에게 백성의 관심과 인기를 머물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리’의 의미를 자신의 겸손의 표시로 사용하여 자기에게 인기가 쏠리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겸손으로 위장된 자기 추구는 사람들의 눈과 귀를 속이기 쉽다. 위장된 겸손은 사기와 동의어다.

  참 겸비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열중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의 은혜와 진리에 몰두하라. 자신으로부터 시선을 떼고 주님만 바라보며 그분에게 도취하라. 이것이 세례 요한의 모범이었다. 자기도취는 모든 종류의 제자됨의 걸림돌이다. 자신의 능력이나 인기나 야망에 도취하지 말고 예수께 도취하어 살라. 이것이 크리스천 삶의 특징이어야 한다.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사 40:9). 

8. 사람이 보낸 자와 하나님이 보낸 자의 차이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라” (요 1:23)

ㄱ. 요한복음에는 보낸 자가 누구인지를 계속해서 주장하며 밝힌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보낸 자였다(1:6).

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아들이심을 줄곧 강조하셨다. 다음 구절들을 찾아 보라.

 (요 3:17, 34; 4:34; 5:23, 24, 30, 36-38; 6:29, 39, 44, 57; 7:16, 18, 29: 8:16, 18,26, 29, 42; 9:33; 10:36; 11:42; 12:44, 45, 49; 13:20; 15:21; 16:5; 17:3, 8, 21, 23, 25).

요한복음 14장에서만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구절이 직접적인 표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간다고 하였기 때문에 원래 아버지가 보내신 분임을 알 수 있다(요 14:28).

요한복음 16장에 와서 드디어 제자들이 주님께서 하나님의 보냄을 받고 오신 분임을  고백한다(16:27, 30). 이 사실은 요한복음 17:8, 25절의 예수님의 기도에서 확인된다.

요한복음 18장에서부터는 예수님이 체포되고 심문을 받은 후에 처형되는 기사가 나온다.

18:37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위에서 태어나신 분임을 진술하셨다. ‘위에서’ 주는 하나님의 권한에 대한 언급에서 보면 예수님은 이 세상이 아닌, 위로부터의 근원과 권위를 의식하셨음을 나타낸다(19:11).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너는 어디로부터냐?’(19:9)는 빌라도의 물음에 답하지 않으셨을까? 그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임이 충분히 증거된 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0:21)고 하심으로써 보냄을 받으신 일이 부활로 확증되었다. 또한 하나님의 보내심이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보내심으로 연결된다.

▣ 궁극적인 대조는 하나님에게서 난 자와 마귀에게서 난 자다(1:13; 3:3; 8: 14, 41). 하나님께 속한 자와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 사이의 대조도 같은 맥락이다(8:47).  하나님께로부터 왔는가 아닌가가 분기점이다(9:33). 유대인들,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그가 죽어 마땅하다는 결론을 내렸다(9:16, 24; 11:50, 53, 57).

▣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요한은 단순하고 청빈한 삶을 살면서 앞으로 나타나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증인이 되는 일에만 온 정력을 부었다. 그는 유명해지려고 하는 데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종교적인 타이틀이나 종교 지도자들이 입기를 좋아하는 종교적 복장이나 기존 세력과의 친분이나 인기에 아무런 중요성을 두지 않았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여 그리스도만 내세우고 지적하는 ‘소리’로서의 역할에 전념하였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하나님의 뜻만 행하려는 사람들은 타이틀과 이익이 많은 높은 자리에만 관심이 있는 종교 관리들이나 지도자들에게는 못난 사람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자신의 소명에만 헌신하는 자들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못마땅하고 이해할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요한은 예루살렘 관리들에게는 비정상적인 눈에 거슬리는 인물이었다.

  나에게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 이런 종류의 비정상적이고 무시를 받는 측면이 있는가?

[유대인들은 누구인가?]

요한복음  1:19

ㄱ. 요한을 조사하기 위해서 대표로 왔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유대인들의 보냄을 받았는데 구체적으로는 바리새인들의 보냄을 받은 자들이었다(1:19, 24; 7:32; 9:16). 요한복음에서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무시하고 해를 끼치려는 자들을 가리킨다.

다음 구절들을 참고 하라.

 (요 7:13; 8:37, 48, 52; 9:22; 12:42; 18:20; 19:12; 20:19 비교. 7:31; 11:45=이들의 믿음은 가짜거나 깊지 않았다.)

ㄴ. 바울도 유대인들을 이 같은 의미로 사용한 적이 있었다. 

살전 2:14-15절의 유대인들은 크리스천들을 배척할 뿐만 아니라 이방 선교까지 반대하였다. 이들은  예수님을 죽였는데 바울은 이들을 과거에 선지자들을 죽였던 유대인들과 일치시켰다(살전 2:15).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오직 그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철저하게 믿었기에 십자가에 처형된 메시아와 그의 메시지는 신성모독이라고 간주하였다. 더구나 유대인과 이방인이 동일한 레벨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크게 반대하였다(살전 2: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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