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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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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헌금을 내어야 한다고 이야기할 가장 많이 인용되는 증거 본문은 마태복음 23 23절입니다.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중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 23:23).

구절은 구약의 말라기 310절과 짝이 되어 우리나라 교회에서 십일조의 관습을 세우고 굳히는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습니다. 특히 마태복음 23 23절은 예수님 자신의 명령이기 때문에 십일조에 관한 , 가장 설득력 있는 최종적인 권위로 간주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구절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소개하면서 반론을 제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전통적 해석에 대한 반론

간단히 말하면 예수님이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지적하신 내용은 바리새인들의 그릇된 정신과 자세이지 십일조 자체를 금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명령이므로 오늘날의 신약 교회에서도 십일조를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거론된 십일조는 예수님이 신약에서 새로 제정하신 새 법이 아니고, 구약 시대에 율법으로 이미 주어졌던 옛 법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항은 십일조란 구약 시대의 성전 제도와 관련된 규례이며 이스라엘 지파에게 부여된 의무사항이라는 점입니다.

그럼 성전이 더 이상 존속하지 않는 오늘날에도 십일조를 해야 할까요? 성전이 없어졌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성전과 관련된 모든 요구 사항들이 함께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제사장도, 레위인도, 향단도, 번제단도, 소나 양과 같은 희생제물도 없습니다. 성전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전 유지를 위해 필요했던 모든 제도적 장치가 불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십일조는 무엇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습니까? 성전 유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전의 소멸과 함께 십일조라는 재정적 장치도 사라졌다고 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성전 자체가 없어졌다는 사실은 십일조를 담는 그릇이 없어진 셈입니다. 본체가 폐지되면 지체에 속하는 것들도 더 이상 존속될 수 없는 법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마태복음 23장 23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성전 제도가 폐지된 신약 교회에 십일조 제도의 시행을 명령하셨다고 간주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분명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주셨던 시점이 언제였습니까? 우리는 마태복음 23장 23절을 구속사의 시점에서 구분하지 않으면 큰 혼란을 일으킵니다. 그 까닭은 성전 제도의 폐지를 기점으로 하나님의 구속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새롭게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십일조의 경우처럼 성전 제도의 유지를 위해 필요했던 규례들을 아직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성전과 십자가의 구속 사건이 그림자와 실체와의 관계였음이 정리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이 구속사의 진행 과정에서 계속 겹치게 되는 혼선을 빚습니다. 옛것이 지나가야만 새것이 오고, 새것이 오면 옛것은 물러가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금식 문제를 놓고 주셨던 교훈이었습니다(막 2:18-22).

혼인집 손님들은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이 필요 없고,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일 수 없으며,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어 둘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 예고되었던 메시아의 구원이 성취된 이후에는 십자가의 구속을 내다보며 존속해 왔던 성전은 자기의 시대적 사명을 다했으므로 더 이상 존속 가치가 없습니다. 실체가 나타나면 상징적인 그림자는 불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십자가의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옛 그림자에 해당하는 성전의 틀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옛 언약의 규례들을 지킨다면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그것은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어 새 포도주와 부대를 다 함께 버리게 되는 격입니다. 교회에서는 성전의 여러 의식과 규례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그런 의식들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럼 왜 유독 십일조는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까? 십일조는 성전 규례와 상관이 없는 것일까요? 십일조는 성전 유지를 위해 필요한 재원이었습니다. 십일조도 성전법에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성전 의식들이 폐지되었다고 하면서 그런 의식들을 위한 재정 수단인 십일조만은 존속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은 모순입니다.

우리는 성전 폐지와 함께 성전에 관한 모든 규례나 의식들을 폐기하든지 아니면 전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성전 제도의 목표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성전이 십자가로 온전히 대치되었다는 사실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나 가타 어떤 성전 규례도 십자가의 완성된 구속 사건에 옛 언약의 꼬리표로서 매달려 있어서는 안 됩니다(골 2:13-17).  

 

십일조 제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분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마태복음 23장 23절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외형적 경건에는 세심한 신경을 쓰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실하고 의로운 삶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위선을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신약 교회들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하나님께 십일조를 철저하게 챙겨 드려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라고 명령하신 것은 신약 시대에도 십일조는 성도의 의무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성도가 십일조 문제로 담임 목사님께 질문했다고 합니다. 그 성도는 신약 시대에 구약 율법에 속했던 십일조를 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질문한 성도에게 물었습니다. ‘마태복음이 신약입니까, 구약입니까?’ 마태복음은 신약 성경의 첫 번째 복음서라는 사실은 성도라면 다 아는 일이니까 대답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마태복음 23장 23절을 인용하시면서 십일조의 의무는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예수님이 주신 명령이라고 하셨답니다.

신구약의 시대 구분을 성경책의 순서에 따라 나누면 구속사적인 의미가 살아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이 마태복음에 기록되었다고 해서 신약 시대에 주신 말씀이라고 보면 옛 언약 시대와 새 언약 시대에 큰 혼선이 생깁니다. 구속사적 시대 구분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과 관련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 메시아에 대한 옛 언약 시대의 약속과 예언들이 성취되기 시작했습니다. 즉, 구약 시대에서 오랫동안 대망했던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치르심으로써 옛 언약 아래의 구약 시대가 종결되고 새 언약 시대가 출범하였습니다. 이 두 시대의 구분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드러낸 사건이 마가복음 15장 37-38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막 15:37-38).

이 사건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성소의 휘장은 차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휘장 뒤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씩 대속죄일에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갔습니다(히 9:7). 성전을 이런 식으로 만들었던 까닭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죄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차단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히 4:14; 8:1). 구약 시대의 대제사장들이 속죄의 피를 들고 지성소에 들어갔듯이,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들고 자기 백성의 구속을 위해 하늘 지성소로 들어가셨습니다(히 9:11-12).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을 “새로운 살 길”(히 10:20)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옛 언약의 제사 내용과 새 언약의 제사 내용을 대조해 보면 금방 밝혀집니다. 옛 언약 아래에서는 대제사장들이 지성소에 나아가려면 먼저 자기를 위한 속죄제부터 드리고 나서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를 올려야 했습니다(히 7:27). 그러나 새 언약 아래에서는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므로 자신의 죄를 위한 속죄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죄인들을 위해 죄 없으신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내놓으셨습니다.

옛 언약에서는 해마다 속죄제를 드려야 했는데 이것은 완전한 속죄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가리켰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육체를 정결하게”(히 9:13)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적인 면에서 보면, 죄인들이 의식적인 차원에서만 정결해지는 것이지 속사람이 깨끗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히 10:11). 구약 시대의 피의 제사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드릴 더 나은 제사를 통해 죽은 행실에서 양심을 정결하게 할 것을 내다보는 하나의 상징적 모형이었습니다(히 8:5; 9:14).

예수님은 구약의 제사 제도처럼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히 9:12)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 10:12) 자기 백성을 위한 완전한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십니다(히 9:15). 이제 신자들은 구약 시대처럼 성막 밖에서 멀리 서 있을 필요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 사역에 의지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 4:16).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자신의 몸으로 희생제물이 되셔서 자기 백성을 완전하고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습니다(히 10:18). 이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낸 사건이 예수께서 운명하셨을 때 성소 휘장이 찢어진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 휘장이 찢어진 것을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찢겨진 대속의 죽음에 비교했습니다(히 10:20).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죄인들로 하여금반복해서 드려야 했던 양이나 소의 피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고 십자가의 보혈에만 의지해서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건 하나만 보아도 성전 제도의 종결성과 그 지속의 무익성을 대변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왜 성전 제도의 지속을 위해 필요했던 십일조를 지금까지 행해야 합니까? 목적이 무엇입니까? 구약에서 율법이 성전 제도를 통하여 죄인들에게 요구했던 모든 사항은 예수님의 십일조로써 충족되고 대치되었습니다. 이를테면 성전이 지향했던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의해 달성되었는데 왜 성전 제도의 일부였던 십일조가 마치 구약 시대처럼 요구되어야 합니까? 성전 제도는 메시아가 오실 때까지만 일시적인 방편으로 존속했던 불완전한 제도였습니다(히 9:10).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히 10:11).

이처럼 옛 언약은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의 약점과 희생제물의 불완전성 때문에 경배자들의 양심이 죄의식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없었습니다(히 9:14). 그래서 새 언약인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피로써 대치되어야 했습니다(히 7:28; 9:9-12). 이것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성육신의 목적이었고 이 목적의 성취를 증명하는 것이 성소 휘장이 찢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 제도는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히 9:10)이었는데 예수님의 오심으로 완전히 개혁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일조에 대한 언급을 하셨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이직 십자가에 의한 개혁이 일어나기 이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마태복음 23장 23절을 말씀하셨을 당시에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서 있으면서 옛 언약 아래에서 주어졌던 제사 의식을 수행 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 23장 23절은 예수님이 구약 시대의 성전 제도 아래에서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엄밀하게 따진다면, 예수님의 지상 사역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도래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일면으로는 아직 십자가의 구속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므로 옛 언약이 종결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옛 언약의 요구사항이 지켜져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고 하신 까닭도 성전 제도가 십자가의 새 언약으로 완전히 대치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는 율법 아래에서 사셨습니다. 예를 들면, 마리아와 요셉이 모세의 법대로 정결 예식을 행하기 위해 아기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리고 갔고, 성전에 비둘기를 제물로 드렸으며, 할례도 받게 했습니다(눅 2:22-24).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에도 나병 환자를 고치시고 모세의 법에 따라 제사장에게 가서 치유 검진을 확인받으라고 지시하셨는데 예물을 제단에 바치는 것을 당연시하셨습니다(레 14:2; 마 5:23-24).

그러므로 아직 예루살렘에 성전이 옛 언약에 속하는 제사 제도로서 건재했던 시기에 예수님이 십일조 이행을 명하신 것을 놓고 신약 시대의 규범처럼 간주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신약에는 십일조에 대한 구절이 네 군데 나오지만(마 23:23; 눅 11:42; 18:12; 히 7:1-10), 구약의 십일조 법이 계속된다고 말한 곳이 없습니다. 십일조는 새 언약 아래에 있는 규정이 아닙니다.

말라기 3장 10절의 말씀도 따져 보면 성전과 제사 제도가 엄연히 존속했던 옛 언약 시대의 교훈이라는 점에서는 마태복음  23장 23절의 말씀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둘 다 성전 제도의 옛 질서를 전제로 한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라기 3장 10절이나 마태복음 23장 23절을 근거로 해서 오늘날에도 옛 언약 아래에서 규정된 십일조를 내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견해는 받아질 수 없습니다. 십일조를 포함한 성전 제도의 유효기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종식되었습니다. 오순절을 기점으로 하는 신약 교회는 십 분의 일이 표준이 아니고 십 분의 십이 표준입니다. 일부가 아닌 전체를 드리는 것이 새 언약 시대의 목표입니다. 하나님께 물질만 드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몸 전체를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율법이 아닌 성령의 능력과 인도로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새 언약 백성이 따라야 할 더 높은 차원의 지표입니다.

 

◐ 십일조 시행을 위한 세 가지 이유

위에서 거론한 십일조에 대한 신구약의 성경 구절 이외에 십일조 시행을 위해 내세우는 몇 가지 이유는 다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성전에 바쳤던 십일조를 오늘날은 교회에 바친다.

구약 시대의 성전과 오늘날의 교회는 같지 않습니다. 성전은 구약시대에 특별한 목적과 기능을 지녔던 제사제도의 본체였습니다. 그래서 성전에는 제사장들과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제사장들도 없고 제물도 없습니다. 목적과 기능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교회당 건축을 하면서 성전 건축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사용하는 것은 성전과 교회를 동일시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신약적인 의미의 성전은 건물이 아니고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성전은 인간의 손으로 지을 수 있는 건축물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의 성전은 특정  장소에 지어진 건물이었지만 신약 시대의 성전은 물체적이고 장소적인 의미를 초월하는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써 구속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3:16).

구약 시대처럼 하나님이 성전이라는 특정한 장소에 상징적으로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고, 교회인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것이 신약시대의 특징입니다. 그리고 개별 성도도 성령의 내주를 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殿)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6:19).

신약시대에는 성전이라는 말이 교회에서 쓰이기는 했지만 구약에서처럼 장소적이거나 제의적인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교회’라는 말도 건물이 아닌 구속받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의 성전 유지를 위해서 필요했던 십일조 제도를 신약 교회에 그대로 도입하여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시대착오입니다. 물론 성전 사역자들을 위해 십일조가 부과되었듯이, 신약교회의 사역자들을 위해서도 교인들에게 헌금의 의무가 있습니다(고전 9:4-14; 마 10:10). 그래도 신약교회의 운영은 구약 성전의 유지를 위해 시행되었던 십일조를 그대로 가져올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보편적으로 제시된 헌금의 일반 원리에 따라 시행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여러 이방인 교회들로부터 헌금을 받았을 때 구제 헌금만을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신약교회가 성전으로 간주되지 않았다는 방증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을 비롯한 여러 지도자가 사역하던 곳이었습니다. 이곳으로 말하면 신약교회의 본거지였습니다. 그렇다면 구제헌금 이외에도 십일조 헌금을 응당 요구했을 법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십일조 헌금을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은 까닭은 신약교회의 재정이 옛 언약 아래에서 주어졌던 성전 제도의 재정 근원에 의존될 수 없음을 시사합니다.

 

2)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

만일 수입의 십 분의 일만 교회에 바치고 하나님께 속한 것을 돌려드렸다고 생각한다면 매우 피상적인 판단입니다. 돈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십일조는 구약시대에 모든 백성이 행해야 할 의무였습니다. 이것은 세상 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가르치기 위한 상징적 교육 장치였습니다. 그래서 시간이나 재능도 하나님의 것이지만 그런 것들로부터 일일이 십일조를 떼지 않고 수입의 십 분의 일을 정해서 물질로 표현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상징과 대표의 원리를 담았기 때문에 그 자체의 행위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십일조가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하나의 상징적 행위라면, 나의 다른 소유물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에 모든 것의 십일조를 가져가는 것이 아니고, 실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소유권과 주인되심을 의식하면서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십일조가 지닌 전체적인 목적에 따라 우리의 재원과 은사를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리 정기적으로 십일조를 떼어서 교회에 낸다고 하여도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충만한 십일조입니다. 십 분의 십을 십 분의 일로 대표하여 내는 것이지만 나의 삶 전체를 바치는 것이어야 참된 십일조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고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꼬박꼬박 교회에 바치면서 자신의 삶은 여전히 세속을 따르고 있다면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십일조는 십의 십조를 드릴 때에만 참뜻이 살아납니다. 두 렙돈을 헌금궤에 넣었던 가난한 과부가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은 그녀가 십일조를 했기 때문이 아니고 십의 십조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일조는 형식적으로 할 수 있고 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의 십조는 속이거나 형식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수입의 십 분의 일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려드려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십일조가 상징하고 대표하는 전적 헌신의 삶은 상관하지 않는다면 십일조는 형식이며 위장된 경건입니다. 

 

3) 십일조는 우리나라 교회의 전통이다.

십일조는 우리나라 교회의 주된 수입원입니다. 십일조 헌금이 잘 시행되는 교회는 재정이 대체로 양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초대교회 재정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흔히 히브리서 7장 1-10절을 내세워 십일조 헌금의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의 문맥을 보면 신약교회에서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십일조가 언급되었지만 본문의 의도는 십일조 자체의 유효성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고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이 아브라함보다 높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바쳤는데 이것은 멜기세덱의 신분이 십일조를 바친 아브라함보다 높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저자는 멜기세덱의 우월성을 기본 전제로 삼은 후에 예수님의 제사장직을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에 비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멜기세덱과 같은 대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브라함이나 그의 후손인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구약 시대의 한 역사적 사건을 예수님의 위대한 제사장직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의 예시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십일조와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십일조는 신약 교회의 전통이 아니었습니다. 십일조는 신약교회에서 늘 행하던 전통이기 때문에 빠뜨릴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헌금을 거두었는데 십일조를 무슨 복 받는 비법으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죄악입니다. 십일조를 해야 복 받습니다. 허리끈을 졸라매고 빚을 내어서라도 십일조를 해보십시오. 지금 예루살렘 교회에는 예수님의 사도들이 생활비가 없어 사역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성도들도 매우 가난합니다. 그러니 구제 헌금도 하시고 특별히 십일조 헌금을 한 사람도 빠트리지 말고 하시기 바랍니다. 아까워 말고 내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말라기서에서 약속하신 대로 하늘 창고 문을 열고 복을 차고 넘치게 부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말라기 3장 10절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어떤 교회에 가서도 이런 식으로 십일조를 하라고 권유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방인 교인들은 유대인의 성전 제도와 유착된 십일조는 자기들과 무관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만일 십일조가 초대 교회의 관습이었다면 바울의 선교 활동과 관련된 말씀이나 기타 서신들에서 한 번쯤이라도 언급되었을 것입니다. 혹자는 신약교회가 십일조 시행에 대해서 침묵하는 까닭은 이미 다 알려진 교회 관습이었기 때문이라고 해명합니다. 이보다는 십일조가 옛 질서에 속한 성전 규례였기 때문에 신약 교회의 관례가 될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우리는 신약 교회의 헌금 원리가 십일조라는 율법의 규정에 근거하지 않고 새 언약의 십자가 희생과 사랑의 원리로 시행되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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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헌금론 십일조와 헌금시리즈 (5) - 십일조의 문제점 file 이중수목사 2020.09.12 1717
23 요한복음 요한복음 성경공부 (6) - 요 1:35-51 file 이중수목사 2020.09.12 356
22 헌금론 십일조와 헌금 시리즈 (4) - 자원헌금의 원리 file 이중수목사 2020.09.08 787
21 요한복음 요한복음 성경공부 (5) - 요 1:29-34 file 이중수목사 2020.09.07 268
20 헌금론 십일조와 헌금시리즈 (3) - 교회 헌금의 문제점 (B) file 이중수목사 2020.09.06 714
19 요한복음 요한복음 성경공부 (4-B) file 이중수목사 2020.09.04 164
18 요한복음 요한복음 성경공부 (4-A) file 이중수목사 2020.09.04 128
17 헌금론 십일조와 헌금 시리즈 (2) - 교회 헌금의 문제점 (A) file 이중수목사 2020.08.28 674
16 헌금론 십일조와 헌금 시리즈 (1) - 소개 file 이중수목사 2020.08.28 356
15 요한복음 요한복음 성경공부 (3) file 이중수목사 2020.08.28 333
14 요한복음 요한복음 성경공부 (2) file 이중수목사 2020.08.22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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