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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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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의 규정이 아닌 언약의 질서 아래에서 살아가게 되는 원리를 설명했습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율법적인 생활과 언약의 특징인 성령 생활의 대비(對比)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적인 생활은 할례로 대표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할례를 받는 것은 율법 전체를 지켜야 의무를 스스로 부과하는 셈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부인하는 처신입니다( 5:1-4).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가신 목적이 우리를 율법적인 삶에서 해방시켜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6:2).

그럼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다면 어떤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까? ( 5:1). 그것은 율법 아래 갇혔던 자들을 율법의 요구와 정죄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3:23).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주시는 자유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유 방임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삶은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통제를 받습니다. , 성령님의 개별적인 인도와 권면과 격려를 받으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5:18, 25).

십자가 이전에는 성령님이 아닌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을 통제하였습니다. 율법이 그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형벌을 받는다고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성령님이 직접 성도들을 지도하시며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사랑과 믿음의 원리

 

성령님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우리를 일치시키고 그분을 닮게 하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삶이며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삶입니다( 4:19;5:22, 24). 이런 삶은 어떤 율법적인 규례를 지키는 수준에서는 이루어질 없습니다. 할례와 외적 표시나 십일조와 같은 상징적인 종교 생활에 의해서 성취될 수도 없습니다. 언약 시대의 삶이 형성되려면 율법적이고 종교적인 형태의 수준을 넘어서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나의 인격체 전부가 투신되어야  하고, 나의 속사람이 십자가의 복음에 의해 쇄신되어야 하며, 성령님의 내주로 삶이 날마다 혁신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박힌 삶의 특징입니다.

이런 삶은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5:6)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삶은 율법이 아닌 사랑의 원리에 뿌리를 성령 생활입니다. 사랑은 죄인들을 위해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늘 아버지의 지고하신 사랑을 기초로 것입니다( 2:20).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5:6) 율법의 외형이나 상징에 만족할 없습니다. 십자가 사랑의 원리는 언제나 율법의 한계를 넘어갑니다. 율법의 요구를 항상 상회하는 것이 그리스도 법의 특징이기 때문에 사랑의 원리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고도 남습니다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의 원리에 기초한 것이므로 언제나 넘치는 헌신을 희구합니다. 그래서 율법이 리를 가라고 하면 리만 주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리를 주며( 5:41),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면 도둑질을 하지 않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열심히 일해서 다른 사람을 도와줍니다( 4:28).

십일조 생활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의 일이라는 수입의 일정액을 떼어서 정기적으로 교회에 바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율법의 규정은 분의 일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바라본 목표는 분의 십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으면 분의 십을 드리지 못합니다. 사랑의 원리는 율법 조문에서 자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의 눈으로 때만 체현됩니다.  그러므로 율법 조문이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체험한 자들은 분의 일이라는 규정된 액수를 교회에 바침으로써 하나님의 것을 되돌려 드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만일 분의 일이라는 율법의 규범을 따라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십일조가 지향한 목표를 이탈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십일조 시행을 위해서는 율법적인 측면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5:14; 고전 9:21).

 

사랑의 원리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연유된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2:20) 내가 나의 대속주로 믿으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십자가 사랑을 알수록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겠다는 동기부여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로 인해 무력하기 짝이 없었을 불경한 우리를 위해 대신 돌아가셨습니다( 5:6).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그분의 진노 아래 있었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시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켰습니다( 5:8-10; 2:3; 1:20; 요일 2:2). 

 십자가 희생은 우리의 죄를 속죄할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고후 5:15).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으면 그리스도의 다함 없는 희생적인 사랑이 우리를 감동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13:10).

그럼 이러한 사랑의 원리에서 십일조 계명을 어떻게 지켜야 하겠습니까? 배로 갚아주실 것을 바라고 빚을 내어서라도 십일조를 해야 합니까? 십일조를 하면 받는다니까 시험 삼아 해보아야 할까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다는 말이 듣기 싫어 마지못해 세금 내듯 내어야 할까요? 혹은 일단 십일조를 먼저 떼어 바치고  나머지 수입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마음에 꺼림이 없어서 우선 내고 보는 것일까요? 아니면 집사나 장로가 되려면 십일조 하는 것이 전제가 되기 때문에 부득불 해야 할까요? 또는 뜻도 모르고 교회에서 하라고 하니까 해야 하는 알고 그저 순종하는 것인지요? 만일 그렇다면 그것이 십자가의 복음에 근거한 사랑의 원리로 행하는 십일조입니까? 체면이나 양심의 무마를 위해서 혹은 어떤 물질적 보상을 바라고 내는 십일조라면 아무리 매달 희생적으로 바치는 십일조라도 하나님께서 열납하시지 않으십니다.

 

십자가 사랑의 원리에는 내가 드리는 헌금에 육신의 욕심이 끼어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원리는 분의 일을 정기적으로 떼어 드렸는지를 따지기보다 분의 십을 아낌없이 바치는 것으로 기뻐합니다. 사랑의 원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되돌린 후에도 마치 아무것도 드리지 못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런던의 웨스트민스트 채플에서 사역하셨던 로이드 존스 목사님에게 어떤 성도가 와서목사님은 의사로서의 양양한 앞길을 포기하고 희생을 하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천만에요. 예수님이 저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희생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응답했습니다.

사랑의 원리는 자기 의를 기억하지 못하며 자신의 헌신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까닭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8:32). 내가 만일 측량할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조금이라도 깨닫고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면 하나님을 오직 십자가 사랑의 원리에서만 섬기게 것입니다. 십일조는 결코 율법적이거나 형식적으로 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전체가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랑에 붙잡혀서 나의 모든 것을 자원하여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진정한 십일조입니다.

 

십자가와 성령의 원리

 

 ‘십자가의 원리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어둠의 영역에 속했던 자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정욕과 탐심을 박아야만 형식적인 교회 생활이나 율법적인 십일조로부터 단절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를 위한 대속의 선물임을 믿어야 합니다.   다음 실제로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하나님을 섬기신 방식대로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기 시작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원리는 하나의 이론이 아니고 믿음의 원리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고 십자가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알면, 매달 수입의 분의 일을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매달 분의 일을 챙겨 냈으면 안심이 되고 냈으면 죄책감을 느끼거나 양심이 불편하다면 십자가의 원리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십일조가 의미하는  대표의 원리가 가장 완전하게 적용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의 일이 대표한 전체를 드렸습니다. 십일조는 내가 가진 모든 소유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가장 귀한 소유는 자신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바쳤으므로 십일조가 상징하고 대표했던 것을 완전하게 성취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십일조입니다.

 

[성령의 원리는 새 언약에 근거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 31:31-3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과 함께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욜 2:28; 사 44:3; 겔 37:14). 이 약속은 오순절의 성령강림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새 언약의 받침대는 예수님의 피와 살입니다(눅 22:20). 예수님은 죄 없는 완전한 삶과 십자가의 대속으로 우리에게 새 언약이 되셨습니다(히 8:7).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새 언약의 약속인 성령을 받고(요 14:16; 15:26) 새 마음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고후 3:3-18).

새 언약은 율법과의 관계에서 큰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율법은 더 이상 정죄와 형벌로 나를 위협하지 않습니다(고후 3:9; 갈 3:13; 5:18). 율법은 예수님이 오신 이후부터는 새 언약 백성의 삶을 통제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물론 율법은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성품과 성도들의 삶의 방식을 알려주었지만, 새 언약 백성의 삶의 표준으로서는 미흡한 임시방편이었습니다.

그럼 무엇이 새 언약 백성의 삶의 표준입니까? 한 마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죄 없는 완전한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고 율법의 요구를 넘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절대 모델이며 표준입니다. 율법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만 유효했던 이스라엘 국가의 잠정법이었습니다(갈 3:19).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율법의 수준을 상회하는 “그리스도의 법”(갈 6:2)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 율법의 규정인 십일조 제도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율법 자체가 바라보았던 목표인 새 언약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면하는 행위입니다.  

 

[십일조는 율법 이전부터 있었지 않습니까?]

어떤 이들은 십일조는 율법이 있기 이전인 아브라함 때부터 시행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모세 율법이 신약 성도들에게 유효하지 않다고 하여도 여전히 신약 교회에 적용된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은 현대교회의 십일조와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십일조는 적군을 무찌르고 롯과 그의 권속과 재물을  되찾게 하신  승리에 대해 하나님께 드린 감사 헌물이었습니다. 그가 드린 헌물은 당시의 근동 사회의 관례처럼 전리품의 십 분의 일을 바친 것이었는데 일회로서 끝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수입에서 매달 정기적으로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제사장을 만난 사건은 일회로서 그쳤습니다(창 14장).  아브라함이 바친 일회성 감사 헌물을 우리나라 교회의 반복적이고 정기적인 십일조 시행의 정당성 근거로 삼는 것은 무리한 대입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바친 십일조는 율법이 생기기 전에 있었던 일이므로 성령의 인도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 시행하는 십일조는 성령의 인도가 아니라 구약 율법의 십일조 규례를 부분적으로 대입한 것입니다. 이것은 새 언약 교회가 따라야 할 원칙에 어긋납니다(고후 8-9장 참조).   

 

새 언약 백성은 성령의 인도를 따를 때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더 나아가 율법이 정한 수준을 능가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구체적으로 몇 가지 사항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주로 믿을 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롬 8:9; 갈 3:2).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고후 3:6)입니다.

둘째,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이 내주하십니다. 그러므로 내 속에 계신 성령님의  지시와 조명과 인도에 민감해야 합니다(갈 3:5; 5:16-18; 롬 8:1-4).

셋째,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처리하시고 더 이상 기억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렘 31:34; 히 8:12). 그리스도의 피로써 씻겨진 깨끗한 양심과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 율법의 정죄로부터 해방되고 사랑의 법으로 율법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넷째, 예수님이면 충분합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모범과 가르침만 있으면 율법이 원래 바라보았던 목표에 닿고 율법의 상한선을 넘어감으로써 주님이 가신 완전한 길을 따를 수 있습니다.

 

이제 스스로 던져 볼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기적으로 바치는 십일조는 구약 율법이 아닌,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령의 인도에 따른 것입니까? 우리는 바리새인적인 율법의 의를 따라 십일조를 바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크나큰 구원의 사랑 앞에 감사와 참회의 고개를 숙이고 율법의 잠정적 수준을 넘어가는 새 언약 백성의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은 내 삶에 대한 권리 주장을 제쳐놓고 예수님을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와 그리스도”(행 3:36)가 되게 합니다. 이 새 삶의 원리는 ‘내가 이번 달에 십 분의 일을 교회에 바쳤는가’ 하고  묻기보다 ‘내가 이번 달에도 하나님께 십 분의 십을 기꺼이 드리는 삶을 살았는가’라고 묻습니다.

우리는 십 분의 일을 함으로써 십 분의 십을 익힐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새 언약 시대에 삽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십 분의 십을 드리는 삶으로 십 분의 일이 지향했던 참뜻을 성취해야 합니다. 우리가 십 분의 일이라는 율법의 수치에 집착하면 십일조의 본뜻인 십 분의 십이라는 대 원리를 십자가의 구원에 비추어 깨닫고 실천하는 데 방해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라는 옛 언약 시대의 율법 규정을 강조하지 말고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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